이유 reason
‘까닭' 혹은 '내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개역성경에 '이유'로 번역되어 있는 원어상의 단어 '로고스'는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선포(address)를 의미하는데, 이 말은 때로 '셈' 또는 '계산'을 의미하며, 특별하고 전문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핍박자를 향하여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를 제시하고 있는 본문(벧전3:13-22)에서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 말고, 다만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 (공동번역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익 gain
'이가 됨, 유익하고 도움이 됨'을 뜻한다. 이 단어는 원어상으로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서,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비록 욥이 흠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아무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욥22:3). 이 단어가 주로 부정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개인적 이득이 삶의 주요한 동기가 되어 의무, 정직을 저버리고 타인의 권리를 억누르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 단어의 또 다른 용례는 '고리대금'을 의미한다(레25:37). 지혜 문학, 특히 전도서에서는 땅의 유익함 혹은 한 나라에서의 왕의 소중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전5:9). 잠언은 수고가 게으름보다 유익하다고 지적하고 있다(잠14:23). 한편, 이 단어는 땅의 소산, 즉 곡식과 열매 형태를 모두 포함한 농작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잠언에서는 이 의미를 확장시켜 '결과'를 뜻하는 말로 쓰였던 바, 잠언 3:14의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에서 이 말은 '지혜의 산물' 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이익' 이란 말이 사용된 특별한 용례는 사도행전 16:19에서 발견되어지며, 그때의 의미는 '돈벌이' 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으면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딤전6:5-6).
이임 Iim
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정 중에 머물렀던 곳으로(민33:45), 이예아바림과 같은 곳이다(44절).
2. 에돔 경계에 근접해 있던 유다 남부의 성읍이다(수15:29). 현재의 브엘세바와 헤브론 사이에 위치한 '데이르 엘 가위' 로 추정된다.
이자 usury
변리와 이식 등과 같은 의미이다(사24:2).
이적 miracle
경이적인 사건 혹은 놀라움을 자아내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적을 가리키는 중요한 성경의 단어로는 타우마' (기사), '뒤나미스' (능력), '오트'(표적), '세메이온' (표적) 등이 있다. 참고적으로 개역성경에서는 '표적'을 쓸 때 난외주에 적힌 대로'이적' (마12:39:24:24; 요6:26;20;30;행4:16과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하고 단독으로 쓰기도 하며(살후2:9;계13:14)또 '이적' 을 쓰면서 난외주에 '표적'을 적기도 하였다(눅23:8;계12:1;15:1;19:20).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이적' 이란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원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일상적인 사건이며, 보는 자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인격의 존재를 가정하게 하는 사건이고, 사건 자체보다 훨씬 더 폭넓은 역사를 증거해 주는(표적이 되는) 사건이다.
I. 이적의 의미 규정. 이적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이적은 섭리의 작용과 구분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해돋이의 황홀한 광경이나, 나무 한그루, 풀잎 하나도 '이적' 처럼 말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건들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일상적인 섭리의 작용으로 여긴다. 불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사건들의 초자연적 원인을 부정한다. 이와 달리 성경에서 이적으로 규정된 사건들의 경우 신앙의 반대자들도 일어난 사건의 초자연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을 때,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은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었으며”(행4:14),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16절).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행한 이적을 보고 이방인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행14:11)고 소리 질렀다. 바울은 또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증언하면서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행26:26)고 말하였다.
2. 이적은 불신자에게 '표적' 혹은 증거 능력이 되지 못하는 기도의 응답과 구분되어야 한다. 주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을 볼 수 있지만 증거의 '표적'이 없는 사건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이 구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제단 위에 불이 내리기를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바알의 제사장들에게 믿게 할 만한 '표적' 있는 이적으로 응답해 주셨다(왕상 18:17-46).
3. 하나님의 이적은 또한 주술 행위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주술로 기적을 행하는 자는 기적을 일으키는 주문을 스스로 소유하며, 초자연적 능력은 주술 행위자에 의해 조종된다(참고, 출7:11;8:7). 이와 달리 하나님의 이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며, 이적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자에 불과하다.
4. 하나님의 이적은 사탄이나 귀신의 이적과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감람산 강론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고 경고하셨다. 바울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과시할 악한 자의 도래에 관해 예고하고 있다(살후2:9. 참고, 계 13:14;16:14;19:20).
5. 이적은 또한 단순히 신기한 일들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자연에는 경이로운 일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일들은 신기함을 말해줄 뿐이다. 진정한 이적은 항상 교훈을 가르치는 '표적'이다. 하나님의 모든 이적은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계시하는 통합된 체계의 한 부분이다.
Ⅱ. 이적의 시기 구분. 성경에 기록된 대다수의 이적들이 행해진 시기는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1. 출애굽의 이적들이 첫 시기에 해당한다. 불타는 숲, 애굽의 10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 강을 건너는 사이에 이루어진 수많은 이적들, 여리고 성의 멸망, 기브온 전투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적의 첫 시기는 정신적 대좌절의 시기였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잊고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이들을 구출하시고 시내 산에서 한 민족으로 융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후의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출애굽의 이적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한 전형으로 되돌아보게 되었다.
2. 이적의 첫 시기 다음인 사사시대에는 오랫동안 이적이 쇠퇴하였으며, 그 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경건한 신앙이 부흥되긴 했으나 이 모든 시기 동안 행해진 이적은 매우 드물었다. 하나님은 이적을 그의 증거의 방법으로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후 우상숭배적 타협과 '포용적'종교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여호와와 바일의 이름이 연결되었으며,남유다의 선한 왕 여호사밧조차도 우상을 숭배한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어울렸다(왕상 22:1-50), 그리하여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이적의 두번째 시기를 마련하셨다. 위력적인 '표적들'과 은혜의 역사로 하나님은 그의 순수한 예배를 회복하고 확고히 하셨다. 요나의 이적과 이사야 시대의주목할 만한 두 이적은 다니엘이 경험한 두서너 가지특별한 이적과 함께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엘리야와 엘리사 시절의 이적의 시기에서 그리스도와사도들의 시대까지 이적은 다시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하나님은 예언자들과 바벨론 포로생활, 그리고 그외의 다른 방식으로도 역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영성 생활을 위한 계시는 말라기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표적' 있는 이적 없이도 유지되었다.
3. 기록된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적의 세번째시기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활동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대는 어떤 면으로는 영성이 가장 쇠퇴한 시대였다.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이름을잊어버렸으며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바알의 이름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의와위선에 흠뻑 빠질 정도로 신성화된 예배 체계를 우상화시켜 놓았다. 이들은 율법을 열심히 읽었으나 이들의 눈과 마음에는 완악한 검은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들은 ‘종교적임'을 자만한 나머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나님은 바로 이 같은 세계에그 아들을 보내셨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행하신40번 가량의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행하셨다' (요20:30)고 한 요한의 말은 복음서 저자가그리스도가 행하셨던 훨씬 더 많은 이적들 가운데 선택적으로 기록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스도 승천 후 사도들의 사역은 오순절의 '방언'의 이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언의 이적은교회 조직이 잘 정비될 때까지, 그리고 아마도 신약 책들이 완전히 유포될 때까지 재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 다른 이적들도 많이 있었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전해주고 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3-4).
III. 이적의 목적. 이적의 목적은 계시와 교화에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그리스도는 이적을 행하는 목적을 여러 번밝히셨다. 그는 이적행함을 굉장한 구경거리로 보는사람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마12:39)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는 막연한 호기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부활의 예표로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다. 그리스도의 이적은 그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5:36),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그 본질적 가치 때문에 수용하기를 더 바라셨으나 그의 이적을 보고 믿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하셨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7-38).
IV. 현대와 이적.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고대 교회에서 몬타누스파는 이적과 예언은 영속되는 은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이적은 획일적 규칙성을 갖고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하셨다(눅4:25-27).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이적은 이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방언은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고전14:22)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집회에서 방언을 말할 때에는 두 사람이나 많아야세 사람이 차례로 해야 하며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것"(14:27-28)을 명한다. 이와 함께 그는 통역할 수 없는 방언을 개인적으로 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14:25). 바울의 이 규칙들이 현대 교회에서 그대로 지켜진다면 오순절의 방언의 이적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그 진정성이 보다 잘 입증될 것이며,엉터리 '이적' 은 제거될 것이다.
한편, 성경 역사와 성경 시대 이후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이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경시대에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상대하실 때 은혜의 이적을 제외하고는 오랜 기간 동안 이적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현대에는 표적을 보이는 이적을 행하실 수 없다거나 행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신약시대 이후 이적을 통한 역사를 그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그는 은혜의 이적, 성령의 증거, 기도 응답, 무엇보다 성경이 이 시대의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알게 하는 주요한 원천이 되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충분히 믿는 건강한 정신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 '이적' 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는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외국어를 습득하려 할 것이다. 건강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은 양식과 거처와 의약품을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으로 알고 이용하면서 건강과 위생의 일상적 원리들을 지키려 할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도 성령의 확신케 하시는 역사와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고치는 이적으로 군중을 모아 복음을 듣게 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며 기도의 놀라운 응답을 체험하면서 '표적 또는 능력’ 과 무관하게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할 것이다.
V. 기독교와 이적. 이적은 기독교에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육체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안에 머물고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가련한 인생으로 남을 것이다. 은혜의 이적이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독교 복음은 가련한 사기극이 될 것이다.
VI. 합리성과 이적. 이적의 합리적 성격이 데이비드 흄과 그의 실증주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어 왔다. 이적은 흄이 가정했던 것같이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적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이성적인 행위이다. 이적은 변덕스럽거나 기이한 사건이 아니라 계시와 구속의 우주적 프로그램의 합리적 국민이다.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행위에는 손을 올리는 사람의 행동 이상으로 큰 논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녀나 이웃에게 적절한 몸짓으로 의사 표시를 하듯이 하나님은 '표적' 이나 그가 원하시는 다른 수단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우리를 위한 그의 계획을 밝히신다.
기독교는 '초자연적' 신앙이지만,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은 편의적 분류에 불과하다. 성경 저자들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거나 홍해를 갈라지게 하거나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는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기독교 유신론은 일관되게 이적을 인정해왔는데, 이는 실험실의 과학자가 자연법칙이 이성적이며 목적을 가진 사람의 작용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믿듯이 그 이적을 증거하고 증명해내는 데 있어서 합리적인 사고를 사용하고 과학적인 입장을 취한다. <참조>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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