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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하사야 / 하사엘 / 하살갓다 / 하살마웻 / 하살수사

하사야 Hazaiah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한 유다 백성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아세야의 증조부로, 유다 지파에 속하였다(느11:5).

하사엘 Hazael

시리아(아람)의강력한 왕으로서,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의 통치 기간동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이스라엘의 채찍이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를 완전히 근절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3명 중의 한 사람인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도록 위탁받았다(왕상19:15-17), 후에 하사엘은 벤하닷 2세의 사자로서 엘리사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 그가 왕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압제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엘리사의 그 예언은 그가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함으로(왕하8:7-15) 속히 이루어졌다. 그는 길르앗-라에서 여호람에대항하여 싸웠으며(왕하8:28-29;9:14-15), 자주 예후를공격하였고 요단 동편에서 아르논 골짜기 남쪽까지침략하였다(왕하10:32-33), 그는 여호아하스 통치 때에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여호아하스가하나님께 간구하매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셨다(왕하13:3). 열왕기하 12:17-18은 아마도 무역통로를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사엘이 팔레스타인 서쪽을침입하였음을 알려준다. 가드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치려고 발길을 돌렸을 때 유다 왕 요아스가 성전 기물과 왕궁에 있는 금을 모두 하사엘에게 주자 곧 떠나갔다.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 3세가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세 번이나 패하자 시리아의 영향력은약화되었다(왕하13:24-25).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주요 압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하사엘에 대한 기억은 오래 지속되어서 반세기 후에 아모스는, 다메섹과 하사엘에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다(암1:4). 하사엘의 이름은 B. C. 841년부터 살만에셀 3세의 적대자로서 앗수르의 설형문자 비문에도 나온다. 한 본문 글에 의하면앗수르인들은 하사엘을 '찬탈자' 로만이 아니라 '하찮은 사람의 아들' son of nobody), 그의 조상이 '비열한행위의 희생자' 라는 것도 알았다. 하사엘은 B. C. 841년 전에 왕이 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요람 군대가 B. C. 842년에 길르앗 라못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엉거(Unger)에 의해 제시된 B. C. 843년은 너무 이른 연대이다. 살만에셀 3세와 하사엘은 B. C. 837년에 다시 싸웠다. 그 이후 아닫니라리(Adad-nirari) 3세가 B. C. 805-802년에 늙어가는하사엘에게 항복하라고 위협할 때까지 30년 동안 두왕국의 충돌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는다. 하사엘은B. C. 814/813-798년경 사이에 통치한 자로, 열왕기하13:22에는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하살갓다 Hazar-gaddah

유다 지파에게 주어졌던 유다 남부에 위치한 한 성읍으로(수15:27), 시므온 지파와 접경지에 위치해 있다.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하살마웻 Hazarmaveth

셈의 후손인 욕단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창10:26;대상1:20)으로, 아라비아 남부의 하드라마우트 왕국의 옛지명과 동일시 되는 이름이다. 하살마윗의 후손이 이룬이 지역은 샤브와에 수도를 둔 도시국가의 중심지였으며, 향료 무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살수사 Hazar-susah

유다 남서쪽에 위치한 이 성읍은 원래 유다 지파에게주어진 성읍이었으나, 후에 시므온 지파에게 주어진곳으로(수19:5) ‘하살수심' 으로 불리기도 한다(대상4:31). 말의 촌락(village of horses)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이곳은 ‘병거성’, 또는‘마병의 성’과 같은(왕상9:19) 군사 시설이나 아니면말과 관련된 상업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위치는 대체로 와디 파라의 동쪽 평지에 있는 '스발랏 아부 수세인' 일 것으로 보인다. <참조> 하살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