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회의 갈라짐: 성경 해석을 둘러싼 갈등
가장 중요한 핵심은 결국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교회가 갈라진 것입니다. 대표적인 문제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쟁점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었던 예수가 신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었는지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성경 해석 차이
그 당시 츠빙글리의 성경 해석에 따르면, 성경에 바이올린을 켜도 된다고 명시된 구절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는 바이올린을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에 명확한 규정이 없으므로 음악을 해도 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교회에서는 음악이 발전했으나, 츠빙글리의 교회에서는 교회 음악이 줄어들었습니다.
교회 좌석의 경제적 변천
그 당시, 감리교를 포함한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는 교회 회중석을 돈을 주고 임대하는 시스템을 운영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좌석을 돈으로 구매해야 했고, 비싼 좌석은 경매로 판매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 맨 뒷자리에 앉거나 발코니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후에 자유 감리교회와 프리 메디스트 교회 등 새로운 교회들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세기 교회의 분열과 마르시온, 몬타누스의 교리
교회의 분열은 여러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2세기, 마르시온과 몬타누스라는 인물들은 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이들은 각기 다른 성경 해석과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르시온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을 서로 다르다고 보고, 구약을 제외한 일부 신약 성경만을 인정했습니다. 몬타누스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금욕적인 삶을 살며 종말론을 주장했으나, 결국 교회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3세기 로마 박해와 교회의 갈등
3세기 중반, 로마의 박해로 인해 일부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황제에게 술을 따르는 등의 배교행위를 했습니다. 박해가 끝난 후, 이들 배교자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일지 여부를 놓고 교회 내에서 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고백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결국 신앙을 지킨 자들의 권리가 인정되었으나, 성직자들의 엄격한 심사를 요구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4세기 신학 갈등과 니케아 공의회
4세기, 교회 내에서 가장 큰 신학적 논쟁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를 둘러싼 것이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와 성부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 반면,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을 지지하여 성부와 성자 동일성을 교리로 확립했습니다.
5세기 에베소 공의회와 마리아의 어머니론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사람의 어머니로 불러야 하는지를 두고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주장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마리아가 인간을 낳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입장이 채택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 개혁
14세기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각국은 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예배를 자국어로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존 위클리프와 같은 인물들이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는 후에 종교 개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시작: 마르틴 루터와 츠빙글리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제부 문제로 교황청을 비판하며 9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의 권위와 면제부 판매의 부패를 비판하며, 교회의 교리와 권위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유럽 전역에 퍼졌고, 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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