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안 타이스 글로싸이스 톤 안드로폰 랄로 카이 톤 앙겔론 아가펜 데 메 에코 게고나 칼코스 에콘 에 큄발론 알랄라존
개역개정,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새번역,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우리말성경,1 내가 만일 사람의 언어와 천사들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을 뿐입니다.
가톨릭성경,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어NIV,1 If I speak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have not love, I am only a resounding gong or a clanging cymbal.
영어NASB,1 If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do not have love, I have become a noisy gong or a clanging cymbal.
영어MSG,1 If I speak with human eloquence and angelic ecstasy but don't love, I'm nothing but the creaking of a rusty gate.
영어NRSV,1 If I speak in the tongues of mortals and of angels, but do not have love, I am a noisy gong or a clanging cymbal.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αν ταις γλωσσαις των ανθρωπων λαλω και των αγγελων αγαπην δε μη εχω γεγονα χαλκος ηχων η κυμβαλον αλαλαζον
라틴어Vulgate,1 si linguis hominum loquar et angelorum caritatem autem non habeam factus sum velut aes sonans aut cymbalum tinniens
히브리어Modern,1 אם בלשנות אנשים ומלאכים אדבר ואין בי האהבה הייתי כנחשת המה או כצלצל תרועה׃
성 경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1-3은 은사(* )의 목적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이 존재의 의의(意義)를 가지지 못한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은사(恩賜)를 오용(誤用)하며 사랑은 없이 그것들 자체를 중대시하며 자랑하였다. 여기 본문에 있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것은 그때 초대 교회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은사였다(Grosheide, De Openbaring God In Het Nieuwe Testament, p.186). 그들이 그 은사를 사랑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4장 참조.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경계한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이 말씀엔, 사랑이 없이 그런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1) 심령과 인격을 결여(缺如)한 도구와 같다는 의미도 있다. 인격적(人格的)인 것은, 사랑을 예상할 수 없는 쓸쓸한 세계에도 사랑을 건설한다. 인격은 미움을 미움으로 갚는 기계적 법칙에 예종(隸從)하지 않고 미움을 사랑으로 대하는 좋은 역리적 행동(逆理的行動)도 취한다. 현대는 기계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인간의 생활이 점점 기계화되고 마는 것은 유감이다. 인간은 기계를 초월하여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발달하나 사랑은 식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심령상 뜨거움이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에 말한 대로 기계에 반대되는 요소 곧, 인격이라는 것이 자연적 인격(自然的人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으로 거듭나 진정한 사랑을 가진 인격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랑을 소유한 인격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 (2) 아무 의미 없는 소리라는 뜻도 있으니 고,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맹목적(盲目的)인 것이란 뜻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은사르르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사랑을 가지고서야 그 의의(意義)를 성립시킨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남을 위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줄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를 위하여 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기도 한다. 그 행하는 일이 선한 일이지마는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자 자신은 진정한 유익을 보지 못한다.
카이 에안 에코 프로페테이안 카이 에이도 타 뮈스테리아 판타 카이 파산 텐 그노신 카이 에안 에코 파산 텐 피스틴 호스테 오레 메디스타나이 아가펜 데 메 에코 우덴 에이미
개역개정,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새번역,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말성경,2 내가 만일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톨릭성경,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어NIV,2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영어NASB,2 And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know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ll faith, so as to remove mountains, but do not have love, I am nothing.
영어MSG,2 If I speak God's Word with power, revealing all his mysteries and making everything plain as day, and if I have faith that says to a mountain, "Jump," and it jumps, but I don't love, I'm nothing.
영어NRSV,2 And if I have prophetic powers,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ll faith, so as to remove mountains, but do not have love, I am no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εαν εχω προφητειαν και ειδω τα μυστηρια παντα και πασαν την γνωσιν και εαν εχω πασαν την πιστιν ωστε ορη μεθιστανειν αγαπην δε μη εχω ουθεν ειμι
라틴어Vulgate,2 et si habuero prophetiam et noverim mysteria omnia et omnem scientiam et habuero omnem fidem ita ut montes transferam caritatem autem non habuero nihil sum
히브리어Modern,2 וכי תהיה לי נבואה ואדע כל הסודות וכל הדעת וכי תהיה לי כל האמונה עד כי אעתיק הרים ואין בי האהבה הייתי כאין׃
칸 프소미소 판타 타 휘파르콘타 무 카이 에안 파라도 토 소마 무 히나 카우케소마이 아가펜 데 메 에코 우덴 오펠루마이
개역개정,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새번역,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가 내 몸을 불사르기 위하여'
우리말성경,3 내가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어NIV,3 If I give all I possess to the poor and surrender my body to the flames, but have not love, I gain nothing.
영어NASB,3 And if I give all my possessions to feed the poor, and if I deliver my body to be burned, but do not have love, it profits me nothing.
영어MSG,3 If I give everything I own to the poor and even go to the stake to be burned as a martyr, but I don't love, I've gotten nowhere. So, no matter what I say, what I believe, and what I do, I'm bankrupt without love.
영어NRSV,3 If I give away all my possessions, and if I hand over my body so that I may boast, but do not have love, I gain no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αν ψωμισω παντα τα υπαρχοντα μου και εαν παραδω το σωμα μου ινα καυθησωμαι αγαπην δε μη εχω ουδεν ωφελουμαι
라틴어Vulgate,3 et si distribuero in cibos pauperum omnes facultates meas et si tradidero corpus meum ut ardeam caritatem autem non habuero nihil mihi prodest
히브리어Modern,3 ואם אחלק את כל הוני ואם אתן את גופי לשרפה ואין בי האהבה כל זאת לא תועילני׃
헤 아가페 마크로뒤메이 크레스튜에타이 헤 아가페 우 젤로이 헤 아가페 우 페르페류에타이 우 퓌시우타이
개역개정,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새번역,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성경,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가톨릭성경,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영어NIV,4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영어NASB,4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and is not jealous; love does not brag and is not arrogant,
영어MSG,4 Love never gives up. Love cares more for others than for self. Love doesn't want what it doesn't have. Love doesn't strut, Doesn't have a swelled head,
영어NRSV,4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love is not envious or boastful or arrogant
헬라어신약Stephanos,4 η αγαπη μακροθυμει χρηστευεται η αγαπη ου ζηλοι η αγαπη ου περπερευεται ου φυσιουται
라틴어Vulgate,4 caritas patiens est benigna est caritas non aemulatur non agit perperam non inflatur
히브리어Modern,4 האהבה מארכת אף ועשה חסד האהבה לא תקנא האהבה לא תתפאר ולא תתרומם׃
성 경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이 두가지 덕행은, 공격(攻擊)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여도 보복(報復)하지 않음이다. "오래 참고"란 헬라 원어(* )는 화를 내는 데서 멀리함을 이름이니, 곧, 격동성(激動性)있는 감정을 피함이다. 그리고 "온유"란 말(* )은 친절을 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이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1)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여기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된다. 그뿐 아니라. (2)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때문에 참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함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망(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 성립시켰다. 세상을 이기신 그는 장차 두번째 오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된다. 약 5:7,8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계시니라"고 하였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여기 기록된 세 가지 말씀도 서로 연락(連絡)있는 한 뭉치이다. 이 셋은, (1)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경쟁(競爭)하는 심리로 범하는 죄를 범치 않음이고, (2) 명예주의(名譽主義)를 가짖지 않음이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는 것은 옳으나(빌 2:3), 나보다 우월하다고 섭섭히 여김은 투기이다. 의(義)와 선이 결핍(缺乏)한 이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한 의(義)와 선을 남이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것은 기쁜일이지 섭섭한 일은 아니다. 남에게 있는 의(義)와 선도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救贖運動) 곧, 사랑에서 생겼을 것이니,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움직임이다. 그것들을 보는 나로서는 기뻐할 것밖에 없다. 그 뿐 아니라 기독자는 자기 개인 문제(自己個人問題)의 해결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대한다. 그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인(獨立人)이니 자타 비교(自他比較) 혹은 경쟁의 의식(意識)부터 가지지 않는다. 기독자인 "나"의 구원 문제 기타 문제 해결이 "나" 자신의 진실한 믿음으로 관계된 그리스도의 힘에만 달렸고, 다른 사람들이 잘 한 일에 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남의 잘한 일에 의뢰(依賴)할 것도 없거니와 간섭할 것도 없다. 투기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죄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는 독립인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기독자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요일 4:9-11). 이와 같이 주님을 영접한 그는 주로써 자랑하나니,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갈 6:4).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다 함은, 자기는 죄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주님으로만 광영(光榮)으로 여김을 이름이다. (1) 이와같은 자랑은 주님만 자랑거리로 아는 심리인 것이니 만큼 그것은 믿음이다. "교만치 아니하며". "교만"은 스스로 높아진 심리이다. 사라이 일단 스스로 높아지면 낮아지는 처세를 못한다. 그가 겸손을 힘씀도 실상은 높아지기 위한 심리로 그리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처음부터 높아지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 아들이 적신(赤身)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낮아지심이니, 이와같은 속죄의 사랑을 받은 기독자로서는 교만할 수 없다. 이렇게 낮아진, 사랑의 소유자가 어찌 교만하랴? 죄는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 예수님은 그것을 씻는 이가 되신 셈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낮아진 처지에서 실현된 사랑인가?
우크 아스케모네이 우 제테이 타 헤아우테스 우 파릌쉬네타이 우 로기제타이 토 카콘
개역개정,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새번역,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말성경,5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가톨릭성경,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영어NIV,5 It is not rude, it is not self-seeking, it is not easily angered,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영어NASB,5 does not act unbecomingly; it does not seek its own, is not provoked, does not take into account a wrong suffered,
영어MSG,5 Doesn't force itself on others, Isn't always "me first," Doesn't fly off the handle, Doesn't keep score of the sins of others,
영어NRSV,5 or rude. It does not insist on its own way; it is not irritable or resentful;
헬라어신약Stephanos,5 ουκ ασχημονει ου ζητει τα εαυτης ου παροξυνεται ου λογιζεται το κακον
라틴어Vulgate,5 non est ambitiosa non quaerit quae sua sunt non inritatur non cogitat malum
히브리어Modern,5 לא תעשה דבר תפלה ולא תבקש את אשר לה ולא תתמרמר ולא תחשב הרעה׃
성 경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가지 말씀도 역시 서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 )은 합당치 안헥 행함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줄을 알아야 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6).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 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 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행 20:35).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 두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기는 또 한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롬 5:10). 리차드.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건져주었다.
우 카이레이 에피 테 아디키아 슁카이레이 데 테 알레데이아
개역개정,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새번역,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말성경,6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가톨릭성경,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영어NIV,6 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but rejoices with the truth.
영어NASB,6 does not rejoice in unrighteousness, but rejoices with the truth;
영어MSG,6 Doesn't revel when others grovel, Takes pleasure in the flowering of truth,
영어NRSV,6 it does not rejoice in wrongdoing, but rejoices in the truth.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υ χαιρει επι τη αδικια συγχαιρει δε τη αληθεια
라틴어Vulgate,6 non gaudet super iniquitatem congaudet autem veritati
히브리어Modern,6 לא תשמח בעולה כי שמחתה עם האמת׃
성 경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1)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사 53:4-6) 신자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3)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바로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 속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한다. 이 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할바(복음 진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진리"는 여기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골 1:5;엡 1:13;갈 5:7;살후 3:13,14;요 1:17).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人格化)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다.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1) 그것은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하여도 유익하다. 그러나 (2)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 된다.
판타 스테게이 판타 피스튜에이 판타 엘피제이 판타 휘포메네이
개역개정,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새번역,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우리말성경,7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가톨릭성경,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영어NIV,7 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erseveres.
영어NASB,7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영어MSG,7 Puts up with anything, Trusts God always, Always looks for the best, Never looks back, But keeps going to the end.
영어NRSV,7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7 παντα στεγει παντα πιστευει παντα ελπιζει παντα υπομενει
라틴어Vulgate,7 omnia suffert omnia credit omnia sperat omnia sustinet
히브리어Modern,7 את כל תשא את כל תאמין את כל תקוה ואת כל תסבל׃
성 경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1) 기독신자와 모든 것. 여기 "모든"이란 말이 네번 나온다.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 "만물이 다 너희(신자들)의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신자들)의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3:21,22). 그러면 속죄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사람, 곧, 기독 신자는 무엇이든지 결국은 자기에게 복될줄 아는 것인 만큼, 그는 그 모든 일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한 번은 어떤 배가 파선되어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고 한사람만 남았다. 그가 바다물 위로 표류(漂流)하다가 필경 한 무인도(無人島)에 상륙하여 조그마한 초막(草幕)을 지어 가지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먹을 것을 잡으려고 섬에 돌아다니던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이 불붙어 버렸다. 그러나 불붙는 연기 때문에 멀리서 다른 배가 그 연기를 신호(信號)로 알고 와서 그 외로운 사람을 건져 주었다. 끄레스 삭스(Grace Saxe) 부인은 외국 선교사로 가기를 작정하고, 타고갈 기선을 정하고 떠날 시간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 부인은, 자기 부친이 병들었기 때문에 정한 날자대로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후에 알려진 대로 그 타려던 배가 가다가 파선 당하여 승객(乘客)은 모두 다 죽었다. (2) 저렇게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 기독자는 모든 역경과 고난에 대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르다. 기독자는 평안한 일들에 있어서도 인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키지만, 모든 역경과 고난 그자체도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 약 1:2-4참조. 기독자가 역경과 고난을 잘 이기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상급이 오는 것을 믿는다(약 1:12). 그는, 자기를 위하여 독생자의 보혈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든지 실패하지 않을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그는 어디까지든지 참으며, 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견딘다. 그의 이 생활은 비상(非常)한 일, 곧, 큰 희생이나 순교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만 지향(指向)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의 이 생활은, 여기 "모든 것"이란 말이 보여줌과 같이(고전 13:7), 일상 생활(日常生活)에 실시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 이와 같은 승리 생활을 하면, 비상한 희생이나 순교의 승리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독자가 일상 생활에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비상한 생활이나 순교의 때가 와도 그 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Lenski). 일상 생활의 모든 어려움에 있어서, 기독자인 나는 참나니, 그 참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쁜 맛 있는 일이고, 키니네 교갑을 씹지 않고 그냥 통으로 삼켜 넘김과 같은 지혜있는 일이다. 또 나는 믿나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여 주신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로서는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복이 될줄로 믿는다. 나는 바라본다. 그 이유는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뻐하면서까지 이약속을 바라본다(벧전 1:3,4). 나는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견디라고 명령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인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 나에게 유익이 될줄을 아시는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무거운 짐이 아니고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헤 아가페 우데포테 핖테이 에이테 데 프로페테이아이 카타르게데손타이 에이테 글로싸이 파우손타이 에이테 그노시스 카타르게데세타이
개역개정,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새번역,8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 ㉡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
우리말성경,8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영어NIV,8 Love never fails. But where there are prophecies, they will cease; where there are tongues, they will be stilled; where there is knowledge, it will pass away.
영어NASB,8 Love never fails; but if there are gifts of prophecy, they will be done away; if there are tongues, they will cease; if there is knowledge, it will be done away.
영어MSG,8 Love never dies. Inspired speech will be over some day; praying in tongues will end; understanding will reach its limit.
영어NRSV,8 Love never ends. But as for prophecies, they will come to an end; as for tongues, they will cease; as for knowledge, it will come to an end.
헬라어신약Stephanos,8 η αγαπη ουδεποτε εκπιπτει ειτε δε προφητειαι καταργηθησονται ειτε γλωσσαι παυσονται ειτε γνωσις καταργη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8 caritas numquam excidit sive prophetiae evacuabuntur sive linguae cessabunt sive scientia destruetur
히브리어Modern,8 האהבה לא תבל לעולם אך הנבואות הנה תבטלנה והלשנות תכלינה והדעת תבטל׃
성 경 [고전13:8]
사랑은 언제가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여기 이 말씀은, (1)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과 (2) 예언, 방언, 지식등(知識等)은 내세에 이르러서는 폐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친다.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할때에, 사랑이 이 세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캄캄한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그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다(요일 4:10). 이 속죄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그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 이 사랑을 체현(體現)한다(골 1:24). 사랑은 수고이다(살전 1: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은 아니다. 대속적 고난은 하나님 아들께서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을 위하여 사람들이 당해야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기독자는 벌써 천국(天國)을 그 심령 속에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의 생활을 힘쓸수록 그는 더욱 천국 맛을 보게 된다.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 3:10,11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다. 또 요일 4:16-18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에크 메루스 가르 기노스코멘 카이 에크 메루스 프로페튜오멘
개역개정,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새번역,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우리말성경,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가톨릭성경,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영어NIV,9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영어NASB,9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영어MSG,9 We know only a portion of the truth, and what we say about God is always incomplete.
영어NRSV,9 For we know only in part, and we prophesy only in part;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κ μερους γαρ γινωσκομεν και εκ μερους προφητευομεν
라틴어Vulgate,9 ex parte enim cognoscimus et ex parte prophetamus
히브리어Modern,9 כי קצת הוא שידענו וקצת הוא שנבאנו׃
성 경 [고전13:9,10]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 나라의 지식이 부분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 밝힌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1)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니,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형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죄는 곧, 어두움이다.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별 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 이해(全的理解)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하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진다. 그는 하늘 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 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쓴다. (2)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거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를 지도하시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지식으로 인하여 유해 무익(有害無益)한 반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별세할 날자를 알고 살기가 좋을까? 차라리 그 날자를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은 때문에 가리워져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하였으니(딤전 6:16),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어떤 방면은 지금 땅위의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병아리가 바깥 세상의 공기에 견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 껍질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바깥 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 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3)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고전 13:13), 신자로서는 땅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호탄 데 엘데 토 텔레이온 토 에크 메루스 카타르게데세타이
개역개정,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새번역,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우리말성경,10 그러나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영어NIV,10 but when perfection comes, the imperfect disappears.
영어NASB,10 but when the perfect comes, the partial will be done away.
영어MSG,10 But when the Complete arrives, our incompletes will be canceled.
영어NRSV,10 but when the complete comes, the partial will come to an en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ταν δε ελθη το τελειον τοτε το εκ μερους καταργη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0 cum autem venerit quod perfectum est evacuabitur quod ex parte est
히브리어Modern,10 וכבוא התמים אז עבור תעבר הקצת׃
호테 에멘 네피오스 엘랄룬 호스 네피오스 에프로눈 호스 네피오스 엘로기조멘 호스 네피오스 호테 게고나 아네르 카테르게카 타 투 네피우
개역개정,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새번역,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우리말성경,11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같이 말하고 어린아이같이 이해하고 어린아이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돼서는 어린아이의 일들을 버렸습니다.
가톨릭성경,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영어NIV,11 When I was a child, I talked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childish ways behind me.
영어NASB,11 When I was a child, I used to speak as a child, think as a child, reason as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did away with childish things.
영어MSG,11 When I was an infant at my mother's breast, I gurgled and cooed like any infant. When I grew up, I left those infant ways for good.
영어NRSV,11 When I was a child, I spoke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n adult, I put an end to childish way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τε ημην νηπιος ως νηπιος ελαλουν ως νηπιος εφρονουν ως νηπιος ελογιζομην οτε δε γεγονα ανηρ κατηργηκα τα του νηπιου
라틴어Vulgate,11 cum essem parvulus loquebar ut parvulus sapiebam ut parvulus cogitabam ut parvulus quando factus sum vir evacuavi quae erant parvuli
히브리어Modern,11 כאשר הייתי עולל כעולל דברתי כעולל הגיתי כעולל חשבתי וכאשר הייתי לאיש הסירתי דברי העולל׃
성 경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이 귀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 어떤 것임을 밝혀 준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 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된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 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 (1) 그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2)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뿐이다. 계시록 4-5장에만도 하나님의 "보좌"란 말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저렇게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요컨데 어린아이는 그 현재(現在) 그 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다. 그들도 신령한 것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다.
블레포멘 가르 아르티 디 에솦트루 엔 아이니그마티 토테 데 프로소폰 프로스 프로소폰 아르티 기노스코 에크 메루스 토테 데 에피그노소마이 카도스 카이 에페그노스덴
개역개정,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새번역,12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2 지금은 우리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12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영어NASB,12 For now we see in a mirror dim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I shall know fully just as I also have been fully known.
영어MSG,12 We don't yet see things clearly. We're squinting in a fog, peering through a mist. But it won't be long before the weather clears and the sun shines bright! We'll see it all then, see it all as clearly as God sees us, knowing him directly just as he knows us!
영어NRSV,12 For now we see in a mirror, dimly, but then we wi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only in part; then I will know fully, even as I have been fully known.
헬라어신약Stephanos,12 βλεπομεν γαρ αρτι δι εσοπτρου εν αινιγματι τοτε δε προσωπον προς προσωπον αρτι γινωσκω εκ μερους τοτε δε επιγνωσομαι καθως και επεγνωσθην
라틴어Vulgate,12 videmus nunc per speculum in enigmate tunc autem facie ad faciem nunc cognosco ex parte tunc autem cognoscam sicut et cognitus sum
히브리어Modern,12 כי כעת מביטים אנחנו במראה ובחידות ואז פנים אל פנים כעת יודע אני קצתו ואז כאשר נודעתי אדע אף אני׃
성 경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옛날의 거울은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나타냈다.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고도 또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약 1:23,24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못과 같다. 더러운 못에는 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림에 있어서 셀바리우스(Cervurius)란 짐승과 같이 건망증이 있다. 셀바리우스는, 무엇을 먹다가도 머리를 뒤로 돌이키면 자기 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물을 찾기 위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벧전 2:2). 그 이유는, 그는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독자는 캄캄한 때에 더욱 빛을 사모하여야 될 자이다. 잎속에 감추인 꽃을 더욱 보고 싶어함과 같은 심리(心理)로, 그는 희미한 중에 가리운 내세를 사모하여 들어가고자 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된다. 요일 3:2,3에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고후 3:18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다. 조금 맛만 보고 전체는 소유되어지지 않는 그 심리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리일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좁은 창문을 통하여 바깥 세계를 내다볼 때에 그 마음이 얼마나 바깥 세계를 사모하게 될까? 진실한 성도들은 모두 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9,10 절의 해석 참조.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하여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세에 우리의 아는 것이 부분적인 것이지만 믿기에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바울이 "부분적으로 아는것"의 가치(價値)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주석가 슐라테르(A.Schlatt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현세에 우리가 아는 바를 바울이 무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그것이 멸절된다는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Was wir jetzt erkennen, heisst Paulus nicht und unnutz; es erfallt aber der Verganglichkeit, weil es nie etwas ganzes und vollendetes ist.-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1909, Zweiter Band p.117).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이런 부분적인 진리 지식에 의하여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하는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예화를 하나 들면, 이태리사람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같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아침 여덟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던 중 8월 17일엔 선원들이 콜롬부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월 7일에 철물(鐵物)에 붙였던 작대기 한 개와 판자조각 한개와 또 나뭇가지를 물에서 건졌다. 그것이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다. 과연 그 날 밤 11시에 콜롬부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하였다. 그 때에는 전에 콜럼버스의 발 밑에 엎드리어 자복하며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다 흙에 입맞추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Encyclopaedia Britanica VI, 742-743).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곧 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고 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못 가질 수는 없다.
뉘니 데 메네이 피스티스 엘피스 아가페 타 트리아 타우타 메이존 데 투톤 헤 아가페
개역개정,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새번역,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우리말성경,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인데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가톨릭성경,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영어NIV,13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영어NASB,13 But now abide faith, hope, lov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영어MSG,13 But for right now, until that completeness, we have three things to do to lead us toward that consummation: Trust steadily in God, hope unswervingly, love extravagantly. And the best of the three is love.
영어NRSV,13 And now faith, hope, and love abide, these three; and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νυνι δε μενει πιστις ελπις αγαπη τα τρια ταυτα μειζων δε τουτων η αγαπη
라틴어Vulgate,13 nunc autem manet fides spes caritas tria haec maior autem his est caritas
히브리어Modern,13 ועתה שלש אלה תעמדנה האמונה והתקוה והאהבה והגדולה בהן היא האהבה׃
성 경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곧, (1) 소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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