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지역 최대의 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였고, 철학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서 세계 7대 유물에 속하는 아데미의 신전과 극장이 있었습니다.
즉,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성지라고 할 수 있지요.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말미에 이 에베소에 잠깐 머물렀다가 3차 전도여행 때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 혹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다가 나중에는 두란노 서원에서 약 2년 동안 말씀을 전하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지, 바울 때문에 에베소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사도행전 19장 23절부터 보시면 이 바울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에베소에 일어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자꾸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진짜 신이 아니고 가짜 신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아데미 신을 섬기고 있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기분이 나쁜 거죠.
그러다보니 이 아데미 여신 때문에 먹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엄청난 위협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은으로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만들어 판매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자꾸 아데미 신이 가짜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장사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선동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팔아서 그동안 풍족한 생활을 했는데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장사가 안될 뿐만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를 당하고 위엄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바울을 가만히 놔둬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막 분노하며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즉,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바울은 먼저 이 사람들을 피해 숨었는데 대신에 바울과 같이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연극장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 본문 32절의 말씀입니다.
32절입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사람들이 그 곳에 모이기는 모였는데 왜 모였는지도 모르고 모여 있다는 말이죠.
말 그대로 이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군중심리에 의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꽤나 감정적인데, 아마 이 에베소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 분위기였는데 33절에 보시면 갑자기 유대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33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왜 갑자기 유대인들 이야기가 나올까요? 연극장에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이 유대인들이 지금 상황을 보니까 아데미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자신들도 아데미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유대인인 자신들도 뭔가 해를 당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명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34절에서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34절입니다.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이미 이 에베소 사람들은 알렉산더가 유대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도 아데미를 섬기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쳤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에베소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아데미를 믿고 있는가?입니다.
왜 믿을까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그들의 생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가 자신들에게 풍요를 주는 여신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관광 산업으로, 우상 판매 사업으로 경제적인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이 아데미 신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데미가 진짜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도 그대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우리의 생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생업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33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때에 다른 것은 결과적으로 따라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진짜 목적, 진짜 이유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우리의 선조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을 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동물제사가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동물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서 죄의 값을 치루면 내가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동물 제사는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완벽한 제사와 제물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제물이 되셔서 완벽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동물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새로운 살 길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의 진리가 되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죠?
국어사전적 의미로 진리란 참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을 올바르고 참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리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 곧 진리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잘 듣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보고 닮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진리이며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참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진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으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아도, 내 생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내 생업에 도움이 되고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데미를 믿는 에베소 사람들의 신앙과 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잘못된 것이죠.
계속해서 35-36절 말씀입니다.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에베소를 관할하는 서기장이 등장해서 이 에베소라는 도시가 아데미와 제우스를 잘 섬기는 신전지기 도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너희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계속 할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 경솔히 행하지 말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7-41절 말씀입니다.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이 불법으로 집회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불법 집회를 하게 되면 우리가 로마에 의해서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에 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진짜 잘못을 했다면 정식으로 고소 고발을 해라! 그러면 재판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까 법에 따라서 합법적으로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식으로 불법 집회를 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자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로마에 의해서 처벌을 당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합니다.
매우 지혜로운 서기장이죠.
이렇게 해서 에베소에서의 사건은 마무리가 잘 됩니다.
지금 에베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적 열심 때문에 법을 어기는 등 매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때로는 잘못된 신앙적 열심 때문에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비이성적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이성적일까요? 비이성적일까요?
헷갈리죠?
우리 기독교 신앙은 절대로 비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이성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매우 이성적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성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이성적인 것입니다. 즉,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죠.
간단하게 하나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이것은 이성적인 행위일까요?
아닙니다. 초이성적인 행위인 것이죠.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초이성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 중심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초이성적인 종교이지 비이성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이성적으로가 아니라 초이성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생업에 도움이 되거나 이익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 기독교는 비이성적인 종교가 아니라 초이성적인 종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성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 이성을 초월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GOODWILL CHURCH > Gosp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여정(창 12:1-9) (1) | 2021.09.25 |
---|---|
혼잡하게 되다(창 11:1-9) (0) | 2021.09.01 |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행 17:1-15) (1) | 2021.08.20 |
두루 퍼지는 말씀(행 13:44-52) (0) | 2021.08.06 |
기쁨이 되는 삶(행 8:4-25) (0) | 2021.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