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ODWILL CHURCH/Gospel

혼잡하게 되다(창 11:1-9)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노아 시대 때에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역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요, 인류는 또다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바벨탑 사건이죠.

 

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처음에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고 말이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참 의사소통을 하기에 편했겠죠.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조금씩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2-4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기의 시날두 강 사이라는 뜻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충적토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평지를 의미합니다.

매우 비옥해서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좋은 곳에서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어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탑을 건설하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것이 그들이 탑을 건설하는 목적이었습니다.

, “우리가 하늘까지 높아지고 우리의 이름을 널리 알리자! 그리고 우리가 흩어지지 말고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자!” 뭐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이러한 이유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옛 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죠.

그래서 옛날의 왕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정복을 많이 하든지 아니면 엄청난 건축을 하든지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요 이러한 가치관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벨탑과 같이 우리의 성공이라는 탑을 쌓아서 하늘까지 높아지고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의 힘과 권력을 키워가는 것!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곳에 모여서 흩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게 흩어져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의 모든 천지만물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잘 관리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존재 목적에 대한 고민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많이 하고 그것을 귀하게 책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이라는 책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은 영국 의회의 요청에 따라 영국 런던에 있는 유서 깊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64371일부터 1649222일까지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총회는 약 56개월에 걸쳐 1,163회 이상의 정규 모임을 가졌는데 회의는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나 2시까지 열렸으며, 오후에는 위원회별로 모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대표들은 총 151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121명은 당시 영국 전역의 각 군의 대표 두 사람과 각 대학의 대표 한 사람으로 구성된 영국 전역의 가장 뛰어난 목회자 겸 신학자들이었으며, 30명은 평신도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신학자들로 10명은 상원의원, 20명은 하원의원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내용들을 정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입니다. 성경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죠.

대교리문답은 주로 성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소교리문답은 주로 초신자들이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교리책의 가장 첫 번째 나오는 질문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입니다.

,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러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바벨탑을 만든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가 성공해서 우리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는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요약한 이 대소교리문답에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영광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는 뜻이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어떤 사람이 남들보다 더 탁월하게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대할 때에 느끼는 무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존재가 가지고 있는 탁월한 존재감이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곧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존재감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며 자신의 이름을 내기에 바쁜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끔은 제가 집 안에서가 아니라 집 밖에서 저희 딸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쪽에서 가고 있는데 저희 딸이 저쪽에서 오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저희 딸이 막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달려온 저희 딸을 꼭 안아주죠.

그 순간 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합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은 기분이 들죠.

 

물론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딸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를 아빠로 알아보고 달려오는 것.

저희 딸이 저에게 어떤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이것 하나 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세상의 유혹과 잘못된 정보들 속에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이것 만으로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이 하신 일들을 찬양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먼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면 이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 역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을 누리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그저 그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전혀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8절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한 곳에 모여 있지 말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해라! 그리고 곳곳에 흩어져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잘 다스려라! 라고 명령을 하신 것이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들의 생각대로 흩어짐을 면하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 하나님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과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가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흩어지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양육을 잘 받아서 결국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곳에 가서 무너진 예배의 제단을 회복해야 합니다.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곳에 가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그러한 우리의 사명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는지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5-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직접 확인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이 사람들이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습니다.

심판을 하신 것이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신중하게 심판을 내리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거나 벌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이 뭔가 너무하신다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하나님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절대로 우리 사람들처럼 한 순간의 감정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확인하고 참으시고 확인하고 인내하시다가 결국 마지막에 심판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늘에서만 보셔도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모르시겠습니까? 충분히 다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또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한 번 더 확인을 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을 하시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늘에서만 그 땅을 보시고 심판을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들린 부르짖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하셨죠.

 

물론 하나님께서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셔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한 번 더 확인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노아의 홍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기분이 나쁘셔서 홧김에 심판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더 이상 놔두실 수 없으셔서 참고 인내하시다가 마지막에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의 홍수를 대할 때에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사람들을 이렇게 심판하여 죽일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의 죄악이 심했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들을 죽이시기까지 하실까!” 이런 관점으로 봐야하는 것이죠.

그래서 노아의 홍수는 그냥 빗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을 베푸시는 중에도 7절에 보시면 특별한 표현이 나옵니다.

, 우리가 내려가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시면서 우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단수가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했을까요?

바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창세기 126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죠?

한 분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니 한 분이면 한 분이고 세 분이면 세 분이지 한 분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우리의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우리의 언어로 가능한 표현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위격으로 계십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십니다.

완전히 서로 구별된 다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점점 헷갈리기 시작하죠?

 

다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본질이 완전히 동일하십니다. 지혜와 거룩함과 능력과 속성이 완전히 동일하시죠.

그렇다면 이 세 위격의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시는 일이 조금 다릅니다.

성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십니다. 성자는 선택한 백성을 위해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러한 구속의 은혜가 실제로 택한 자에게 일어나도록 적용을 하십니다.

이렇게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시는 일에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사역을 하시는 세 위격이 어떻게 한 분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내용을 가지고 초대 교부들이 평생을 씨름하다가 발견한 개념이 바로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상호내주혹은 상호침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구별된 위격이시지만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내주하시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내주하시는 방식으로 완전히 통일되고 연합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정리를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은 본질이 완전히 동일하시지만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시는 사역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서로 상호간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완전히 연합된, 일체이신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존재적 신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셔야 할까라는 것이죠.

세 위격이 하시는 사역이 다르기 때문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냥 한 분 하나님이 다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한 위격의 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적용하시는 사역을 다 하시면 되잖아요?

왜 굳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셔서 우리를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셨을까요?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도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지요.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와를 만드셔서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셨죠.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도 교제를 하도록 하셨고 만물과도 교제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관계적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잘 산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돕고 배려하며 함께 잘 살아야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벨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사실인 것을 확인하시고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바벨이라고 하셨습니다.

 

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서 이 바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혼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면 우리는 결국 여러 가지 혼란에 빠져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죠.

성경에는 오늘 본문의 바벨탑 사건 이전에도 몇 가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세월이 흘러 이 두 자녀가 장성하였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동일하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인을 꾸짖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4:6-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지금 마음에 악을 품고 있기 때문에 분하여 하고 안색이 변하고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죄가 지금 문에 엎드려 너를 원하고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인에게 충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인과 아벨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가인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형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동생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 라멕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라멕은 가인의 후손인데요, 어느 날 자신의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라멕이 했던 말입니다.

 

창세기 4:24절의 말씀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이 가인에게 벌을 내릴 때에 가인이 이에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가인을 보호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약속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라멕이 자기 멋대로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약속을 가지고 와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는 벌이 칠 배도 아니고 칠십칠 배나 임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라멕이라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은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기 싫으니까 이와 같이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멕이 이렇게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이유는 라멕의 마음 속에도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혼란한 정체성을 가지고 제 멋대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이번에는 아예 집단적으로 매우 혼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창세기 61-2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실 때의 배경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본능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육체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육체 덩어리, 정욕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노아의 홍수를 통해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 시대가 옳고 그름을 전혀 판단하지 못하는,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가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8-31절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결국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멋대로 어지럽고 혼란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내 삶이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만약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상이 될 것이며 강한 자가 곧 법이 될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님이 집에 없으면 잠시잠깐 자유를 누리며 행복한 것 같지만 이내 그 집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죠.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은 혼란케 되고 어지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금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정욕의 노예가 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지 못한 채 어지럽고 혼란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심으로,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