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계속해서 사도행전 13장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3장에서 1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비시디아라는 지방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도시나 사람의 이름 앞에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이 있죠. 왜냐하면 비슷한 이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죠.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말입니다.
자, 바울 일행은 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주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다른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먼저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곳인 회당을 찾아갑니다.
일단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늘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복음을 전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율법과 예언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보통 이렇게 회당을 찾아가서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역시 바울은 먼저 회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도 한번 더 말씀을 전해달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바울 일행이 다음 안식일에 다시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지방에 바울 일행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44절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더라! 즉 비시디아 안디옥에 살고 있었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자 모였다는 것이죠.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세력이 생긴 것이죠.
45절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어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아마도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수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한 명의 신성모독자요 이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으로부터 한 주 전 안식일 날,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 내용을 수용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모든 사람이 우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모든 사람이 우리를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분명히 그 가운데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묵묵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도바울도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아니, 예수님도 싫어하고 미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욕심이겠죠?
아무튼 이렇게 사도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주 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모이니까 이 유대인들이 더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바울이 말한 것을 본격적으로 반박하고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46-4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원래는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하는데 너희가 스스로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후회하지 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다! 이런 뜻이죠.
자, 여기서 우리가 먼저 좀 살펴봐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제일 먼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주셨죠.
여기서도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제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는 조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이 아니라 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까요? 물론 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을까요?
그들만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 47절의 말씀과 같이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출애굽기 19장 6절의 말씀과 같이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뭐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중간다리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해주는 것이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죄로 인해서 끊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중재해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나라적으로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사명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사명은 하나님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 죄로 인해서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순종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겠죠.
그러면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이 복을 받는 것을 보고 있다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너희처럼 그렇게 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느냐?’ 그러면 그 때에 이스라엘이 ‘너희들도 우리처럼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섬겨라.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라. 그러면 너희도 우리들처럼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전도가 되고 다른 나라들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런 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진짜로 일어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과 솔로몬 때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통치 초기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방 나라의 수많은 왕들이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을 묻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이 다른 이야기 하지말고 ‘너희도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겨라.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라. 그러면 너희도 우리처럼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며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여기서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방나라의 공주들과 정략적 결혼을 하게 되고 그들이 믿고 있던 우상들을 전부 다 이스라엘로 가져오게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에 관한 법을 신명기 17장에서 주시면서 왕은 자신을 위해 은금이나 병마나 여자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기 자신부터 그 말씀을 어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은금과 병마와 여자를 많이 둡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을 엄청나게 어렵게 만듭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솔로몬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렇게 타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빛이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에 대해서 상기를 시켜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유대인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방의 빛이 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버렸으니 나는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이었고 오늘날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과 은혜를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기 커녕 다른 사람을 만나기에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바울처럼 전도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전도나 선교를 한다고 하면 어딘가로 멀리 떠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학을 배울 때에도 유명한 신학자들의 선교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선교란 비기독교 세계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복음전파이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문화의 경계를 넘는 것이며, 또한 사람들을 권하여 예수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여 그의 교회의 책임적인 회원이 되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전도와 사회정의를 위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선교에 대한 정의이죠.
그런데 저는 이런 정의들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선교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잘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이신데요, 그 분에게 선교가 무엇입니까?라고 여쭤봤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선교란 버티기다”
아무리 힘들고 외롭고 지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어느새 열매가 맺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생각을 해봤더니 우리에게는 선교지가 새로운 곳이고 특별한 곳이지만 선교사님들에게는 선교지가 특별한 곳이 아닌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특별한 일 없이 매일 가족들을 만나고 직장 동료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교사님들이 그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버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의 삶은 더욱 단조로워졌습니다.
정말 새로울 것이 없는 매일매일의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늘 만나는 가족들과 사람들을 똑같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러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매일 매일을 순종함으로 살아내는 것, 오늘 하루도 말씀 안에서 우리의 삶을 버텨내는 것.
그것이 지금의 시대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잘 버텨냄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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