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원래 사도바울은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바울 일행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게 되죠.
처음에는 빌립보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후 데살로니가로 가게 됩니다.
여기 데살로니가에 가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죠.
이것이 바울이 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머뭅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증거를 합니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머물게 된 것이죠.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됩니다.
4절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이렇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요, 안타깝게도 바울 일행에게 핍박이 일어나 데살로니가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잠시 잠깐 복음을 듣고 곧 담당 목회자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이들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짧은 기간 복음을 전해들었지만 굳건하게 믿음 생활을 합니다.
이들을 향해서 바울이 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후서인데요, 이 편지들을 읽어보면 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를 보시면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굉장히 칭찬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고 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너희 믿음의 소문이 이미 각처에 널리 퍼졌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금 하고 있는대로 더욱 열심히 행해라!”
이렇게 바울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뒷부분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그게 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혼란을 가져다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쓰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혹시 누군가 너희들에게 가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도 쉽게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대적하는 자다.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울 것이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즉, 우리가 흔히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고 게으르거나 무질서하게 행하지 말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해라! 라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야기를 하자면, 짧은 기간 동안 사도바울이 사역을 했기 때문에 약간의 부족함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은 매우 좋았다! 라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어떻게 세 안식일 동안만 있었는데도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울의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서 전도를 잘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이 다음으로 전도하러 갔던 베뢰아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10-12절까지 말씀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바울이 전도를 잘해서가 아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어 놓으신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뢰아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만을 변화시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까지도 완전히 변화시키셨습니다.
자, 초대교회 때에 왜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시면요
오늘 본문 7절입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더이다 하니”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자신들의 왕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왕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핍박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당시에 굉장히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했다가는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당장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고백 때문에 로마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박해와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로마서 10장 10절의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그냥 이 전도지의 내용을 따라 읽기만 하면 입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들리십니까?
글쎄요... 최소한 초대교회 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며 “가이사가 나의 왕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다!”라고 시인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복음을 전하고 함께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그렇고 베뢰아 사람들도 그렇고 이렇게 마음과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셨고 성령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사도행전이라고도 부르지만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을 뿐입니다.
믿음이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죠.
따라서 사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있는가?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지금의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 지역으로 왔고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이러한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지혜와 지식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탁월성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민감성입니다.
즉, 우리는 매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될 수 있습니다.
내 뜻과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고 싶은데 때로는 그 뜻을 잘 모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라!’처럼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시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취업 준비를 하다가 A라는 회사와 B라는 회사에 모두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A회사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B라는 회사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디 회사로 가라!’라고 말씀을 해주시면 참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명확하게 뭔가를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디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네, 그럴 때는 아무 곳이나 선택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전도여행도 그랬습니다.
저는 예전에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매순간 어디로 가라고 지시를 하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아시아 지역을 가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갈 때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지시하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사도바울이 자유롭게 자신의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15:20-21절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를 가든지 크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목표가 확실하다면 어디를 가든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하나님의 은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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