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7:54-8:3
우리에게 주신 사명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7장의 앞부분의 내용을 보시면 스데반이 매우 긴 내용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여 쭉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자 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죠?
일단 마음이 찔립니다. 왜요?
자신들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회개를 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그대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죽입니다.
참 안타까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스데반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뽑을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아시지요? 무려 몇 천명의 사람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훌륭한 스데반 집사님을 이렇게도 빨리 하나님 곁으로 데리고 가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이야기가 나오죠. 당장 사도행전만 보더라도 스데반 외에 베드로와 바울 등의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스데반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이 온갖 다른 언어들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하죠. 그러자 예루살렘에 모였던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놀랍게 여겨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때에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지요.
그러자 사람들이 스데반이 설교를 했을 때와 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날에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등록한 사람의 숫자가 무려 3,000명이나 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도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했고, 베드로도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똑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는데 그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는데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베드로가 스데반보다 더 훌륭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더 훌륭하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조금 더 오랜 시간 동안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할 사명을 주신 것이고, 스데반에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순교하여 그 영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끼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까요? 바로 우리가 바울이라고 부르는 사울입니다. 이 사람이 스데반이 순교를 할 때에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다 목격을 했고, 이렇게 스데반이 죽임 당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이 나중에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바울을 통하여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죠. 허무한 것 같았던 스데반의 순교가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사명을, 스데반에게는 스데반의 사명을, 바울에게는 바울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거나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베드로의 삶이 스데반의 삶보다 더 좋아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스데반 모두 다 똑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 사명을 다한 삶을 산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들 중에서도 규모가 큰 교회를 섬기는 분이 계시고 규모가 작은 교회를 섬기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더 큰 규모의 교회를 섬기는 분이 더 능력이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모두 다 훌륭하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그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중에 이런 목사님이 계십니다. 원래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잘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계셨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도록 하셨죠.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에서는 신학을 하기가 어려워서 뉴질랜드라는 곳까지 가셨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신학도 하고 목회자로 살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가져간 돈도 거의 다 쓰고 사역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하나님께서 돈도 없는 그 목사님께 어떤 땅을 보여주시면서 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 생활비를 할 돈도 없는데 그런 땅을 살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방법이 생겨서 그 땅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땅을 샀는데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그 땅값이 엄청나게 뛰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땅을 판 돈으로 뉴질랜드에 있는 큰 빌딩 두 개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빌딩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 빌딩 안에 선교단체들이 들어와서 마음껏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월세도 안 받고 관리비도 안 받고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그 곳에는 중국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매년 영어학원이 적자가 나는데도 그 학원을 계속해서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영어학원 선생님들을 모두 목회자나 선교사님로 뽑아서 선교적인 마인드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고 계십니다.
참 대단하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땅 값이 많이 오를 땅을 보여 주실 때까지 열심히 기도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사명을 받은 사람도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또 제가 아는 분 중에 이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호주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살다가 강원도 홍천까지 가신 분이십니다. 어떤 선교단체를 담당하게 되셔서 선교단체를 위한 센터를 마련하기 위해 홍천의 아주 조용한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그 마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그 마을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해서 이 목사님께서 처음 반상회에 갔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목사인 줄을 알고 “이 동네에서 교회 하지 말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절대 하지 마라!”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알겠습니다. 저도 그런 거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살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말로 안하고 삶으로 보여주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열심히 마을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집집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찾아가서 도와주었습니다. 농사가 바쁠 때에는 찾아다니면서 농사일을 도와주고 집에 전구가 나가면 전구를 갈아주고 기계가 고장나면 기계를 고쳐주고. 이렇게 열심히 마을 사람들을 섬기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이 목사님의 진심을 알고 몇 년 후에는 반장을 시켜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더 당당하게 마을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또 더 열심히 마을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다보니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아니 우리 마을에도 교회가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교회 하나 지읍시다”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해요.
비록 이 목사님께 큰 빌딩은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후원해주는 후원금을 가지고 매일매일 부족하지 않게 사역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누가 더 훌륭한 분이실까요? 두 분 모두 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다른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며 살아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가 말씀드린 이 두 분의 삶을 우리가 똑같이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들, 혹은 다른 사람들과 나의 삶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이 우리 얼굴 만큼이나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 다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업에 성공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지 못한 것 같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은 다 공부도 잘하고 취업도 잘하고 결혼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자녀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낙심하게 되죠. 그리고 내가 뭔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내 인생이 더 잘 되었다,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어떤 사람의 간증집회라도 다녀오게 된다면 마음이 더 어려워지죠.
그럴 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스데반과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사명을 주시고 그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각자 다 다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는 결코 실패나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뒷 부분에 나오는 8장 1-3절의 내용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내용이 무엇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입니다.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으로 시작된 교회라는 공동체는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흩어져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즉,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였죠?
실로 엄청난 교회였습니다. 일단 교회의 성도들의 숫자가 엄청 많았습니다. 몇 천명이나 되었죠. 그리고 그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무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 즉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섬기는 집사님들은 스데반, 빌립과 같은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진짜 어마어마한 교회죠.
자, 이렇게 숫자도 많고 목회자들도 훌륭하고 교회 직분자들도 훌륭한 교회. 우리 같으면 떠나고 싶겠습니까? 저 같아도 떠나기 싫을 것 같아요.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평생 그 교회에 머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훌륭한 교회가 핍박을 당하여 흩어지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먼저 교회가 모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원어 자체도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인데 밖으로 불러 모으다 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모이게 된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죠.
그러면 교회가 그렇게 모여만 있으면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께 모여서 함께 은혜와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눈 후에는 땅끝까지 흩어져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진리와 생명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굉장히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도 굉장히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모여야 하는데 모이는 것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다시 모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흩어져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핍박과 어려움으로 인해 모이지 못할 때에 교회는 흩어져야 합니다. 각자 자신의 가정과 직장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각 부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와 생명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주로 봉사를 하고 섬겼다면 이제는 교회 밖에서 봉사를 하고 섬겨야 합니다. 나의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섬기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이 코로나 시기에 우리가 교회로서 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며,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주신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흩어져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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