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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Gospel

요 12:37-50 /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라

 

 

1. 도입

 

성경에는 4가지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죠.

그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공통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개의 복음서는 주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즉, 예수님의 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장정을 통해 복음서를 읽으셔서 알겠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뭔가 신적인 모습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죠.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 즉,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뒷부분을 보시면

 

44-5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본론

 

자,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과 능력을 사람들이 다 경험을 하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오늘 본문 37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엄청나게 많은 표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능력과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서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까요? 

그랬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벌써 다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놀라운 기적을 계속해서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런 능력과 기적으로 사람들이 변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걸로 샤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가 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언제 완전히 변화가 되어 새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는 기적을 경험했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여 감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어서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자기를 끝까지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베드로는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된 것이죠. 

 

여러분, 이와 같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놀라운 표적이나 기적이 나타났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을 때입니다. 

따라서 오늘 하루도 능력이나 기적보다 먼저 사랑을 추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38-41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38-4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만 본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한테 믿지 못한다고 책망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을 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매우 나빴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회개할 시간과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상태가 나빠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패턴은 매우 비슷합니다.

처음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통해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는 구원해주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고 회개하면 구원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를 합니다. 

 

자, 이런 싸이클이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죄악에 대하여 계속해서 무뎌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그 병이 심각하지 않으면 그냥 약 먹고 쉬면 낫습니다.

그런데 그 병이 너무 심각하면 수술을 해야합니다. 

그래야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병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너무 심해져서 그냥 약 먹는 정도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라는 수술 칼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수술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전과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멀게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술을 통해서 진정으로 회복을 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자,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을 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매우 나쁘다는 이야기죠. 

 

왜요?

그 이유가 43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경쓰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것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을 더욱 신경쓰며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사울 왕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겸손한 마음으로 왕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나니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울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좋은 양과 소를 남겨서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탄로나자 사무엘에게 그래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여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죠. 

이렇게 사울은 한번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니까 더 이상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은 어떠했을까요?

다윗은 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신경썼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에 몇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을 갈 때에, 어떤 부하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언약궤를 도로 가져다 놓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혹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신경썼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3. 결론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인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할 것인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말씀에 잇대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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