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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때 / 때때로 / 때리다

때(time)

때를 가리키는 성경 단어들 그 자체로는 성경적 때의 개념들에 관한 성찰의 확고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 때를 가리키는 성경의 단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으로부터 성경적 때의 개념들을 모아보는 길밖에 없다.

1. 때와 절기. 히브리인들은 시간의 경과를 헤아리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때'와 '절기'로 번역되는 단어들의 대부분의 맥락들은 정해진 때, 적당한 때, 어떤 사건이나 행동의 기회에 대한 관심을 시시한다.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는 히브리어 '에트'(참고. 전3:1이하)이며 '제만'이란 단어도 에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모에드'는 '정하다'는 뜻을 지닌 어근에서 온 단어로 초승달(예. 시104:19)과 같은 자연적 시기나 정해진 절기(예. 민9:2)에 사용된다. 특히 이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그가 주신 기회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예. 신11:14;시145:15;사49:8;렘18:23). 신약에서 헬라어 '카이로스'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흔히 나타난다(참고. 눅19:44;행17:26;딛1:3;벧전1:11).

이렇듯 성경은 시간의 추상적 연속이 아닌, 하나님이 역사의 일정 순간에 부여하신 내용을 강조한다. 이 시간관은 고대 세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순환적 시간관과 대조되는 '직선적' 시간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사태는 그냥 진행되는 것이나 처음 시작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시간관을 '직선적'이라 한다고 해서 시간과 역사가 불가피한 사건들의 예기 속에서 계속 흘러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세계에 그의 목적들을 진척시키는 '때'를 강조한다. <참조> 여호와의 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때'를 정하신다. 아들조차도 그의 사역 초기에는 완성의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였다(막13:32;행1:7). 하나님의 주권은 개별 인생의 때에까지도 확대된다(시31:5). 다니엘서에 나오는 아람어 '이단'은 연대기적인 일정한 기간을 가리키며(예. 단2:9;3:15), 흔히 일년을 가리키기도 한다(예. 단4:16;7:25, 물론 이런 해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여기서도 강조된다(단2:21). 

'크로노스'라는 단어는 세속 헬라어에서와 같이 신약에서도 때로는 단순한 시간의 경과를 가리키기도한다(예. 눅20:9;행14:28). 문맥에 따라 크로노스는 '지체', '머무르거나 기다리는 시간'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예. 행18:20,23). 계 10:6에 '크로노스'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 경우에도 시간이라 해석하기보다 '지체'(delay)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시간이라 해석할 경우, 현세대가 끝나면 시간도 끝난다는 의미가 된다. 한글개역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2. 영원. 히브리어 '아드'와 '올람'은 사람의 한평생에 해당하거나(참고. 삼상1:22,28) 산이 한없음과 같은(참고. 창49:26) 오래고 요원한 시간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들은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이 없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시90:2). 이 시간의 무제약성은 또한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에도 해당되며, 그 백성을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무궁하시다(참고. 렘31:3;32:40;호2:19). 하나님은 어떤 고정된 기한에 제약받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적인 강한 복수형(예. 시145:13;단9:24)이 사용되거나 이중 형식(예. 시132:14)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약의 '아이온' 용법도 이와 비슷하다. '아이온'이란 단어는 평생의 시간(고전8:13)이나 과거(눅1:70)나 미래(막11:14)의 요원한 시간에 사용될 수 있다. '아이온'이란 단어는 '세세토록'(갈1:5), '영영하며'(히1:8)라는 뜻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하나님은 또한 '만세 전에'(고전2:7) 지혜를 미리 정하신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구약과 신약의 이런 용법들은 우리 말의 '영원한, 영원'의 용법에 상응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간과 영원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의 아이온의 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시간적 의미 이외에도 '신적인', '불후의'란 의미를 함께 풍긴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히브리어 '올람'이 '세상'의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어 금세(이 세상)와 내세(오는 세상)로 표현되기도 한다(예. 막10:30). 

3. 두 시대. 신약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적인 것으로 정해진 한 때를 지적한다. 예수의 설교의 제 일성은 "때가 찼다"(막1:15)는 것이었다. 예수의 삶과 사업은 하나님의 목적들의 결정적 시기를 나타낸다(엡1:10). 이 때는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장악해야 할(엡5:16;골4:5) 대기회이다(고후6:2). 예수의 초기 사역 시기에 그의 죽음과 부활의 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참고. 마26:18;요7:6). 미래에 대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차이는 결정적인 때가 과거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유대교인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을 찾는다. 그리스도인은 결정적 순간이 과거에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완성을 더욱 예민하게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때(말세)는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행2:17;히1:2;벧전1:20;요일2:18). 

신약은 현세(금세)와 내세에 대한 당시의 유대인의 시간 구분을 크게 수정한다. '현세'(이 세상)와 '내세'(오는 세상) 사이의 전환점이 여전히 미래에 있으나(막10:30;엡1:21;딛2:12-13)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미 결정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완성이 선취된 일면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이 선취의 표시이며, 이것은 오는 세상의 권능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엡1:14;히6:4-6. 참고. 롬8:18-23;갈1:4). 이에 따라 요한은 지금 우리가 영생을 지닌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한다(예. 요3:36).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의해 완전하게 들어가게 될 생명을 '지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요11:23-25). 바울이 고전10:11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이 두 시대의 '중첩'(overlapping)일 가능성이 있다.

4. 시간과 영원. 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성경의 강력한 시간 언어는 철학에서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으로 표현될 하나님의 존재의 측면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해 왔다. 이와 다른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관련되기 때문에 무시간적 존재(timeless being)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추상화시키게 되고 따라서 세상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게 될 위험이 따른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행동하시는 기독교의 신관을 견지하려면 우리는 '이승'의 시간의 세계와 '저승'의 영원의 세계를 대립시키는 플라톤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성경의 언어를 고수하여야 한다. 신약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현재'와 '미래'의 단순 대립을 선취의 교리(doctrine of anticipation)로 초월하고 있다. 철학적 논의의 결과가 어떠하든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난 '만세의 왕'(딤전1:17. 참고. 벧후3:8)이시라는 것이다. 

 

때때로(day by day)

'가끔', '이따금'이란 뜻으로, 역대하 24:11과 이사야 27:3에 쓰여졌다. 

 

때리다(beat)

사람이나 짐승, 물건 등을 손이나 손에 쥔 것으로 후려서 치거나 매질하는 것을 말한다(민22:27;신25:2;느13:25;막12:5;눅22:63;행16:37). 때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도와 가르침, 훈련을 목적으로 때리는 경우도 있다(눅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