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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Gospel

제자들의 삶(막11:1-10)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을 보내시며 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점을 두셨던 사역 중 하나가 바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중 더욱 헌신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그렇게 선후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5-26의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제자들이 하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별명을 그리스도인으로 붙여주었습니다.

맨날 예수 예수 하고 다니는 사람한테 예수쟁이라고 별명을 붙인 것과 같은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제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요,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를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첫 번째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이고 두 번째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 이고 세 번째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가라! 행하라! 전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이 세 가지를 잘 기억하고 행하면 됩니다.

 

먼저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2절의 앞부분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점점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타야 할 나귀 새끼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나귀 새끼를 구하기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는데, 맞은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이 맞은편 마을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제자들이 있었던 마을 근처의 어느 마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두 명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며 보내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렇게 가라고 말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저 멀리 아프리카 땅 같은 곳으로 가라고 하시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멀리 보내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맞은편 마을, 즉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로 보내셨다고 생각하시나요?

굳이 먼 곳을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까운 곳을 생각해보세요.

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우리가 있는 그 자리로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직장, 학교, 지역사회 등 우리가 지금 몸 담고 있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곳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교회에서 성직을 담당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봉사 등에 참여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고,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 세상에 나가 일하는 것을 세속적인 일, 거룩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속을 분리하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잘못된 인식을 철저하게 부수고 바꾼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마틴루터가 처음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너희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인데 이방인들도 모두 포함이 됩니다.

즉 혈통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교황, 사제, 목사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이렇게 너무나도 명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왜 그 당시의 사람들은 몰랐을까요?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예배 때에 불가타라고 불리는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만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국어로 성경을 절대 번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배 시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기는 듣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성경에 대해서 무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열심히 했던 사역 중의 하나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성경에 담긴 진리, 즉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이 세상에 선포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장로교의 뿌리가 되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직업소명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며 거룩한 일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역시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그곳,

가정에서 가족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교제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 직장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며 동료들을 도와주는 것, 교회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 지역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여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 등의 일이 전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그곳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맞은편 마을, 우리에게 가까운 곳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2절의 뒷부분입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 편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풀어 끌고 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인기도 많고 영향력도 많은 분이신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 말고 좀 더 좋은 것을 타고 들어가시면 안되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도 체면이 있지, 우리 선생님이 겨우 이 조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면 우리가 도대체 뭐가 되겠나? 좀 더 좋은 것을 타시면 안될까?’

 

물론 상상 속의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 그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스가랴 99절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다른 더 좋은 것 말고 딱 나귀 새끼가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뭔가 큰 일을 해야 예수님이 영광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멋지고 좋은 말 같은 것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찬양과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높아지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우리의 착각입니다.

딱 나귀 새끼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큰 일, 위대한 일을 할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충성할 때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내 뜻과 내 생각, 내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귀 새끼가 아니라 크고 멋진 말을 끌고 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이 겸손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완전히 다른 이상한 장면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 내 욕심 다 내려놓고 작은 것 하나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하라!”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되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6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맞은편 마을로 가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르신 그대로 말합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대로 하도록 허락해줍니다.

 

정말 너무나도 아름답고 군더더기가 하나 없는 멋진 장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전달하면 됩니다.

다른 이야기를 많이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왕의 명령이나 편지를 전달할 때에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져간 사람이 그것을 받는 사람을 만나서 그 내용을 그대로 읽어주지요.

이 사람을 사자, 혹은 메신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혹시나 듣는 사람들이 그 편지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읽어주든지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줍니다.

가장 훌륭한 사자는 최대한 다른 이야기를 가감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를 잘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보세요.

다른 말을 많이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달만 했습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바로 그 나귀 새끼를 보내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설명을 잘 해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많이 되지요.

설명을 잘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가감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때에 그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최근에 구입한 제품 중에서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제품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그 제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주지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거 써봐. 진짜 좋아

 

이 한마디면 끝납니다.

왜요? 이 말 안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진정성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장해제가 되어버립니다.

 

혹시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옛날에 케이팝 스타라는 프로그램을 잘 봤는데요, 요즘 나오는 프로그램들은 잘 안봅니다.

그런데 거기서 심사위원들이 감동하고, 높은 순위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봤더니 기교가 화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기교가 화려하지 않아도, 마치 노래를 자기 이야기처럼 감정을 실어서 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심사위원들도 심사를 하지 않고 노래 감상을 하게 되더라구요.

 

예수님의 제자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화려한 언변보다는 진정성 있는 말 한마디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을 위해 지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준비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진정성이 담긴 메시지.

예수님 믿어봐. 진짜 좋아

이 한마디면 끝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습니다. 당신은 사자를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자를 풀어놓기만 하십시오. 사자가 스스로를 변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이 변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쓸데 없이 다른 말을 가감하지 마시고 그냥 그대로 풀어 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며 그 능력의 말씀이 사람들의 골수와 심령을 쪼개어 사람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먼저 진정으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됩니다.

 

,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내가 말한 대로 행하여 나귀 새끼를 풀어와라!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전하여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여라!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행했더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7-10절의 말씀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뒤로 몰려들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찬양하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했을 때에 그렇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에 가고,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작은 것에 순종하여 나귀 새끼를 데려오고, 그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다!라고 말을 전하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이 시키는대로만 했을 뿐인데 결과는 주님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 조금이라도 제자들의 생각이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제자들이 취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자들이 나귀 새끼가 아니라 말을 준비해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면 분명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내가 나귀 새끼가 아니라 말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렇게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거야! 다 내 덕분이야!”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외에 다른 설명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을 잘 설득해서 나귀 새끼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면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내가 사람들에게 설명을 잘해서 나귀 새끼를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 거야. 다 내 덕분이야.”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만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가고! 행하고! 전하고! 다 좋은데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고민이 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너는 지금 어디로 가서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전해라!’라고 항상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죠.

당장 오늘 내가 우리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성경에 기록해놓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도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저는 사도바울의 방법을 따라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소개해드릴께요. 도움이 되실꺼에요.

 

사도바울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에게 매 순간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마음의 소원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로마서 1519-2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일단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위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직까지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음의 소원 안에서 매우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이 딱히 뭐라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복음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해도 됩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마음의 소원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의 소원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성령께서는 알아서 그 길을 막으시고 다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66-10절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바울 일행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의 터키 땅인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역시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드로아라는 곳에 갔는데 거기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일행은 마게도냐로 건너갔고 비로소 유럽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소원대로 복음 전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을 때에는 그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여러분, 만약 내 삶에 뭔가 걱정과 고민이 있어서 기도를 하는데 도저히 하나님이 뜻을 잘 모르겠다 싶으면 내 마음이 더 가는 쪽으로 자유롭게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 길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막힌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또 다른 길로 가면 됩비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보내신 삶의 자리에서, 작은 것에도 순종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진실되게 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의 소원을 따라 자유롭게 행하되,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을 때에는 또다시 그 인도하심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평생에 예쑤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