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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Gospel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23-11:1)

 

고린도교회는 참으로 문제가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가 많았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서로 분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너보다 잘났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너희들은 하나도 똑똑하지 않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너희가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부르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6-29절까지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너희를 선택하신 이유는 너희가 지혜롭지 않고 능하지 않고 문벌이 좋지 않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자신들이 그렇기 때문에 선택받은 줄도 모르고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싸우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 이야기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우리가 똑똑하거나 지혜롭거나 선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혜롭지 않고 능하지 않고 문벌이 좋지 않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죠.

그래서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잘나가고 성공하고 강할 때에는 예수님을 믿기 참 어렵습니다.

믿을 필요가 없지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러다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그때서야 신앙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의 기자도 7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고린도교회의 교인들도 잘난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지금은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진짜 서로 잘나서 싸운다면 괜찮아요.

그럴수도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요, 실상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별로 잘난 것이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먼저 음행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남자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죠.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사람을 가만히 놔뒀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을 당장 쫓아내라고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이런 것은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세상 법정에 송사를 하였습니다.

이것도 얼마나 말이 안되는 상황입니까!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긴 한데 얼마 전에 우리나라 정치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정당이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사법부에 판단을 맡겼습니다.

그런데요, 원래는 사법부에서 정당에 대한 문제를 잘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말하면 정당이나 국회위원들은 입법 기관이잖아요.

,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에게 판단을 받겠다는 것은 스스로의 체면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교회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로 이 세상에 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 세상의 법정보다 더욱 수준이 높아야지요!

그런데 그런 교회가 세상 법정에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체면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인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책망을 합니다.

차라리 상대방에게 속는 것이 낫다!고 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부분도 질문을 합니다.

결혼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런 문제도 고린도교회는 잘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금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금방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결혼을 하면 서로에게 매이는 것이 있으니까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안하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이 금방이 아니라면 당연히 결혼을 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믿음의 자녀들을 많이 낳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한 문제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될까요? 안될까요?

먹으나 안먹으나 상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먹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실족하거나 시험에 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당시 고린도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이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매우 심한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에서 유명했던 신전은 고린도 광장 남쪽, 아크로고린도라는 언덕에 우뚝 솟은 아프로디테 신전입니다. 고린도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 575m 높이의 암반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신전에는 당시 무려 1,000여 명의 여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사 의식의 일환으로 온갖 음란한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음행에 빠져 이 신전을 찾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렸는지, 그 제물들이 신전 안에서 다 소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아도는 제물을 시장에 내다 팔았지요.

 

그러니까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이 시장에 장보러 가면 많은 고기가 이미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였습니다.

그러면 장을 봐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5-26절 말씀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일단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사서 먹으라는 것이죠.

내가 먹는 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모르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다! 생각하고 먹으면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상황이 있습니다.

불신자 중에 누군가가 우리를 집에 초대하는 거에요.

그 사람이 음식을 해서 대접을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이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입니까? 아닙니까?’ 라고 묻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냥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다! 생각하면서 먹으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같이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 그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데...’라고 하면서 뭔가 시험에 드는 것처럼 보이면 그 사람을 위해서 그것을 먹지 말하는 것입니다.

27-28절 말씀입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바울은 왜 이렇게 줏대가 없나?

그냥 항상 먹든지, 아니면 항상 안먹든지, 그렇게 이야기하면 쉬운데 왜 헷갈리게 어떤 때는 먹으라 그러고 어떤 때는 먹지 말라고 하는가?

상황에 따라 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드시죠?

 

왜 사도바울은 이렇게 줏대 없어 보이는 듯한 행동을 할까요?

그 이유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일은 본질적인 일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황과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일은 무엇인가?

31-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3-24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라!”

,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삶을 사셨던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은 평생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사셨고 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본질적인 일은 항상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본질적인 부분이 변하지 않는다면 비본질적인 부분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또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시장에서 파는 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지 아닌지 묻지 말고 먹어도 됩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그것을 파는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를 초청한 불신자의 집에 가서 묻지 말고 먹어도 됩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나를 초청한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신자의 유익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유익이 다를 때입니다.

, 불신자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 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그로 인해 시험에 들 때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누구의 유익을 구해야 할까요?

불신자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는 형제 자매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를 향한 전도와 선교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 방법이 다른 믿는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불신자가 아니라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이 고린도교회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적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본질적 사명 안에서 비본질적인 부분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시되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유롭게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뻐하실 것이며 우리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