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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Gospel

믿음의 비밀(행16:25-34)

 

우리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교회에서 열심히 배우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믿음이란 무엇이며,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두란노 출판사에서 출판한 비전성경사전에 보니까 이렇게 믿음에 대해서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믿음이란 신앙, 확신, 신뢰, 의뢰함을 의미하며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꾸는 태도를 말한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진리를 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신뢰, 사랑, 그리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반응한다.”

 

정리를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노라 말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노라 말하면서 예수님 말고 다른 것, 사람이나 돈이나 권력 등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 역시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분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믿음이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두 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첫 번째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실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주십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결과로 죽음, 즉 사망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는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는 법을 어기지 않고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

여러분, 우리가 법을 어기지도 않고 잘 살아가는데 왜 죄인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 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왜 죽을까요?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몸이 노화되거나, 우리 몸이 이길 수 없는 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가 나면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근본적인 영적 원인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왔고 그 죄의 값이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변명할 여지 없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진 죄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가운데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신적 존재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인간들이요, 옛날부터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진시황제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현대판 불로초는 과학과 의학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즈음에는 과학과 의학기술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세상을 꿈꾸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죽음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노력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죽음의 문제는 단순히 우리 육체의 건강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이며 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32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이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죄의 값을 치루면 됩니다.

, 우리가 죽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면 죄의 값이 지불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인생도 끝나버리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다른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대속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면 그것도 내가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소나 양이나 염소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물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존재로, 흠이 없는 존재가 하나님께 단번에 제물로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인간 이상의 존재로 흠이 없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예수님께 다 맡기고 예수님만 믿을 때에 우리는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과 의학 기술이 발달해도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어려운 상황과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어려운 상황과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이 나옵니다.

 

먼저는 바울과 실라이지요.

이 두 사람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어떻게 하시지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어려움에서 구원해내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하자 큰 지진을 일으키셔서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십니다.

구원을 해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또 이 일 때문에 큰 어려움에 닥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입니다.

자다가 큰 지진이 일어나서 깼는데, 보니까 옥문들이 열려있고 죄수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이 간수가 얼마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없고, 그 이후의 일이 걱정이 되었던지, 바로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 간수에게 바울이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자결하지 말아라.

그리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당연히 죄와 죽음에서의 구원도 의미하지만, 지금 간수가 직면한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의 구원도 포함합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요 내가 지금 당장에 직면한 삶의 어려운 문제들도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십니다. 그 문제에서 나를 구원해주시는 것이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니, 어려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요.

왜냐하면 예수님 말고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대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고 기진해 있는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셨습니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병을 낫게 해주시고

귀신들린 사람이 있으면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먹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삶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그 문제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어디로부터 구원해주시는가?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각종 미신, 그리고 헛되고 의미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에는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감을 주는 수많은 미신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시대에서도 사람들은 점을 봅니다.

혹시라도 점괘에서 별로 안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결혼을 하려고 했다가 파혼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일이 더 있습니다.

이사를 자주 해본 분들은 아시는 내용일텐데요,

손 없는 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손은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는 귀신입니다.

이 귀신들이 활동하지 않는 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손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손 없는 날에 사람들이 많이 이사를 하려고 하지요.

이 날에 이사를 하면 다른 날보다 훨씬 비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날에 이사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정말 아이러니하지요.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이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굳이 믿는 것은 아닌데 무시하기에는 그냥 괜히 찜찜하니까 따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겠지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효를 다한다는 의미에서 제사를 준비하고 드리는 그 마음은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그 제사상에 조상의 영혼이 찾아와서 식사를 하시는가?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이 우리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부모를 공경하고 잘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굳이 제사상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조상들의 기일에 그분들이 남기신 아름다운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며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미신적인 것들, 헛되고 의미없고 잘못된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정말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결혼을 하기 위해 점을 안봐도 되고, 손이 있는 날이든 없는 날이든 상관 없이 가격이 더 저렴할 때에 이사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사상을 차리는 수고 대신 살아계신 어른들을 더 잘 섬기고 더 좋은 것을 대접해드리면 됩니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 삶입니까?

이 자유가 여러분들에게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되, 첫째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과 문제들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각종 미신과 헛되고 의미없는 것들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케 됩니다. 

 

, 다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크게 두 가지를 받게 된다고 했는데 첫 번째가 지금까지 살펴본 구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무엇인가?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합니다.

왜일까요?

왜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더 중요하지요?

율법이 나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의로우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을 지키라는 말이지 율법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 그렇다면 왜 성경은 율법보다 믿음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율법조항 자체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율법의 조항이 있습니다.

그 율법 조항 자체가 우리에게 살인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줄까요?

간음하지 말라!’라는 율법의 조항이 있습니다.

그 율법의 조항 자체가 우리에게 간음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줄까요?

만약에 율법 조항 자체가 우리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준다면 너무나도 쉽습니다.

최대한 많은 율법의 조항을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될까요?

 

아무리 많은 율법의 조항을 만들어도 우리의 죄인 된 습성은 그 법을 뛰어넘는 편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법을 피해서 죄를 저지르지요.

그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법을 만들면 또 그것을 피하는 편법을 만듭니다.

이와 같이 율법 조항 그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죄인지는 깨닫게 해주지만 그 죄를 짓지 않게 해주는 능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우리는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84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율법의 조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나옵니다.

 

,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우리에게 임하시는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입니다.

갈라디아서 3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의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지요.

그렇게 성령을 따르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교회에 할례파 사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은데, 너희들은 그것을 알고 있느냐? 사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은 정식 사도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가 할례도 안받은 것 같은데 사실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렇다면 이 할례파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할례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가?

이 사람들은 율법을 정말 잘 지키고 율법을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사람들은 그저 할례받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할례로 대표되는 눈에 잘 보이는 율법들만 지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비판합니다.

갈라디아서 613절의 말씀입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할례와 같은 법만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율법 강조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자랑할 만한 것만 지키고 있는 위선자들이지요.

사도바울은 이에 반박하며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신앙을 가졌던 때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는 율법의 요구들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은 구원의 과정, 즉 칭의의 과정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칭의 뿐 아니라 성화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율법의 요구들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첫째로는 구원을 받게 되고 둘째로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칭의를 받을 뿐 아니라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부인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잘못된 정체성을 버리고 바른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정체성이죠.

그래서 잘되면 전부 내 덕분이고 안되면 조상 탓, 남 탓,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삼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는 삶을 살아가게 되지요.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정체성이며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자기부인이 잘 안되면 어떻게 될까요?

자꾸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게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뭐가 좀 잘 된다고 하면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꾸 자신을 높이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므리바에서 혈기를 부렸던 모세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을 하고 광야생활을 할 때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힘든 상황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잘 해왔습니다.

그런데 므리바라는 곳에서 물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이상한 일을 합니다.

민수기 2010-11절의 말씀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이야기를 하며, 마치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높아지려고 했으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모세 자신이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호되게 책망을 들었던 바리새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못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데요,

누가복음 1811-12절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말의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라 입니다.

내가 행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나서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간음을 행하지 않은 것이 자기가 잘나서일까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자기가 훌륭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다 하나님께서 그런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우리가 가로챌 수 있습니다.

뭔가 좀 잘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요.

가정에서 일이 잘 풀리고 자식들이 좀 잘 되면 내가 능력이 많고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에서도 일이 좀 잘 풀리면 내가 잘해서, 내가 능력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회자나 직분자가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그 교회가 부흥하거나 부서가 부흥을 하면 자신이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 고백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여러분,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내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셨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주인의 손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바른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우리가 무익한 종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여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역시도 잘못된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무익한데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기업의 논리로 따지면, 무익하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논리로 따지면, 무익해도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서 성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부모님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음식을 할 때에 옆에서 도와주겠다든지, 설거지를 도와주겠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사실 아이들이 와서 도와준다고 하면 도움이 될까요?

어느 정도 장성한 아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어린 아이들은 사실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오히려 일이 더 늘어나지요.

김밥을 싸는데 옆구리가 터져있고 재료들이 다 가출하고 난리도 아닙니다.

뒷수습을 할 것이 더 많지요.

 

그런데 그렇게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무익해도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게 하나님께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뭔가 하나님께 큰 도움이 돼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돕겠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으면 됩니다.

 

때로는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무익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존재를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무익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치있고 존귀한 존재,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삼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꾸 나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무익한 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