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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Gospel

사랑하다(요한복음 13:1)

 

 

우리 기독교에서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이요 우리 기독교가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모든 율법은 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설명해주는 주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종류를 네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 혈육간의 사랑인 스토르게, 친구간의 우정과 같은 사랑인 필리아.

보통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지요.

 

그런데요, 사실 이러한 사랑이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서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의 원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의 원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혈육 간의 사랑의 원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의 원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관계에서의 사랑의 원형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모든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유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먼저 남녀간의 관계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남녀관계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아내로 비유하고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음행이라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성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에 비유합니다.

이 남녀 간의 사랑의 원형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혈육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혈육 간의 사랑의 원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친구 간의 사랑의 원형도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아가페 안에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의 원형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의 사랑이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어떤 사랑이 더 수준이 높고 어떤 사랑이 더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떤 관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헌신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히 오해하기 쉬운 사랑이 바로 남녀 간의 사랑, , 우리가 흔히 에로스라고 부르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남녀 간의 사랑이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저급한 사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 역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사랑이지요.

결코 수준이 낮거나 저급한 사랑이 아닙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 부모와 자식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지요.

그리고 그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는 열매가 남녀의 사이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

이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남녀 간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요, 이 남녀 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매우 중요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탄이 알까요, 모를까요?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다른 관계에서의 사랑도 많이 공격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공격하는 것이 바로 남녀 간의 관계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공격으로 이 사랑이 변질되고 왜곡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질된 남녀 간의 사랑을 보고 저급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요, 어디 남녀 간의 사랑만 그렇습니까?

부모 자식 간의 혈육적인 사랑, 친구들과의 사랑도 변질되고 왜곡되면 다 추하고 저급해 보이는 것이죠.

이렇게 사탄은 특별히 이 남녀 간의 관계와 사랑을 맹렬하게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씨와 통치권의 사명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제가 보니까 이 사탄의 공격이 꽤나 성공을 거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천생연분으로 시작했다가 평생웬수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성경공부반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눔을 하다가 한 분이 최근 남편과 사소한 일로 조금 다퉈서 사이가 좋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분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똑같이 하는 말씀이 아니, 사이가 좋은 집이 있어요?”

그러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남편들에 대한 대 성토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로 남편을 대표해서 사과를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남녀 간의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그게 내가 뭐 나쁘거나 못나서 그런게 아니에요.

사탄의 공격이 그만큼 강력하고 맹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 간의 혈육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친구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모든 관계를 공격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이간질 시키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깨어있어야 하구요 그럴수록 더욱 서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이렇게 사랑, 사랑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일단,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절대로 알 수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특별히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보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네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첫째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관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계속해서 관찰하게 되지요.

밥은 먹었는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지금 이 시간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등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해집니다.

이것이 사랑이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당연히 가지고 계십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

최소한 우리가 가진 이 성경의 두께만큼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 66권이구요 장으로 따지면 1,189, 절로 따지면 31,102절로 되어 있습니다.

꽤나 두껍지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관심으로 따지자면 지금의 성경보다 훨씬 더 두꺼워져야 하지만 또 성경이 너무 두꺼워지면 사람들이 아예 쳐다도 보지 않을까봐 이 정도만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왜 이렇게 두껍냐고 불평불만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역대하 169절 앞부분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께서는 늘 이 세상을 두루 감찰하고 계십니다. 살펴보고 계시지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계속해서 살피시다가 그들을 위해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니까요.

 

마태복음 18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온 땅을 두루 살펴보실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는 영으로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시지요.

혹시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싶으면 천사를 통해 바로 하나님께 보고가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가만히 두시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십니다. 사랑하시니까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특별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며 기진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그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만히 계셔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굳이 차도 없는데 수고스럽게 사람들을 찾아 다니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필요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감히 예수님을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의 병자처럼 몸이 너무 안 좋으면 예수님을 감히 만나러 올 수가 없습니다. 또 성격이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이면 안그래도 예수님이 바쁘신데 혹시라도 내가 가서 피해가 될까봐 감히 예수님을 찾아갈 엄두를 못내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꼭꼭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끝까지 믿어주는게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믿다가도 배신을 당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고 더 이상 믿기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자신이 고난 당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옆에 있다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강하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베드로가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말을 하지요.

 

참 베드로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자기가 버리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또 굳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자기 의가 강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정작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붙잡히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나마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라고 캐묻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이나 부인하는데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을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지요.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베드로는 이 사건 후에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자신 있게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다시금 예전의 삶의 자리인 물고기를 낚는 어부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예수님이 또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친히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면목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전 같았으면 당연하지요! 제가 그 어떤 사람들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터인데 지금의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잖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소심하게 주님.. 다 알고 계시잖아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죠.

그런데 또 예수님이 한 번 물어보시는게 아니라 세 번이나 물어보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혹시나 예수님이 내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못듣지 않으셨을까? 모르지 않으실까? 라는 기대감이 있었을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 번이나 물어보니까 베드로가 깨닫게 됩니다.

! 예수님이 내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다 알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세 번째 예수님이 질문을 하시니까 베드로가 근심하며 대답을 합니다.

주님... 다 아시잖아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한 자신을 예수님이 책망하실 줄 알았습니다.

버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다시 믿어주시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겨주십니다.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거라

 

이 예수님의 믿음이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힘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이 우리의 그러한 단점과 연약함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런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다 아시고도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이것이 사랑이지요.

 

오늘 본문의 말씀 요한복음 13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도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믿어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사랑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끝까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무책임한 것은 함께 하다가 중간에 나는 모르겠다고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제자들과 늘 함께하시며 모든 것을 책임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하며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끝까지 함께하며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모든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며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은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여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지요?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내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착각을 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뭔가 높은 자리를 한 자리씩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가끔 자기들끼리 누가 더 큰지에 대해서 변론을 하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기 자식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높은 자리 하나씩 챙겨달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사실 주의 좌편에, 우편에 앉는 것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의 자리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2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날을 준비하며 고난의 일주일을 보내시는데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기 위해 한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데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씻기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섬기는 마음으로 낮아져서 선생님이신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고 다른 사람들의 발도 씻겨 주고 해야 하는데 아마 지금은 서로 누가 높은가? 하는 보이지 않는 자존심 대결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어주십니다.

 

이 얼마나 민망한 상황입니까!

자기들끼리 서로 누가 크냐?라는 자존심 대결을 하다가 정작 절대 해서는 안되는 분이신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오셨습니다.

가장 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다 주셨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섬기고 희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본을 보이셨기에 우리도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은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볼 뿐 아니라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끝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며 내가 먼저 상대방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회사 사람들이, 형제들이, 부모님이, 남편이나 아내가, 자녀들이 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못마땅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이 세상에는 힘들고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요, 성경을 보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으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사랑을 배워 하나님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사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나라는 끝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평생의 삶을 통하여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