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비(Maccabees)
마카비는 유대의 영웅이었던 마따디아의 아들 유다의 별명이었으나(마카비1서 2:4) 그의 가족과 그의 집단에까지도 이 이름이 적용되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분명치 않으나 현대에 와서 일반적으로 '쇠망치'나 '뿌리 뽑는 자'(eradicator)로 해석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의 성은 하스몬(Hasmon)이었으며, 이에 따라 랍비 문헌에는 '하스몬가'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
1. 마카비 반란. 팔레스타인은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물려받은 셀류커스 왕가와 프톨레미 왕가의 권력투쟁을 위한 무대가 되었다. 그 결과 유다에는 친수리아파와 친애굽파가 생겼으며, 이 두 집단 간의 암투가 유대 국내 정치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고 '자유주의적' 유대인들 가운데는 헬라 세계의 관습과 표준들을 따르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이같은 국내 정치의 갈등은 수리아의 간섭을 불러들였다. 셀류커스 왕가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최고의 뇌물을 약속한 무자격한 메넬라오스란 위인에게 대제사장직을 팔았으며, B.C.168년 그의 지명이 관철되지 않자 안티오쿠스는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후 곧 안티오쿠스는 전대미문의 가혹한 종교 탄압을 자행하였다.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렸다(참조. 단11:31-33). 예루살렘 성전에 올림피아 제우스 신의 제의가 도입되었으며(마카비2서6:2) 율법을 사랑하는 유대인들은 야수적 탄압을 받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에 굴복하였으나 영웅적인 구통을 감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마카미1서1:60이하;2:29이하;마카비2서6:18이하). 안티오쿠스는 '율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마카비1서2:42) 경건한 유대인들(Hasidim)의 조용한 반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다 극적인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30km가량 떨어진 모데인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데인에서 나이 많은 마따디아는 이교 제단에 제사를 드리러 왔던 유대인과 이를 감독하러 왔떤 왕의 사신까지 죽이고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리하여 마카비 반란은 시작되었다.
2. 유다 마카비. 유다 산악은 게릴라전을 전개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과 함세한 많은 하시딤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배교자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이교 제단을 파괴하고 율법을 시행하는 정도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셋째 아들 유다가 지도자가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다는 기드온과 같은 유능한 지도자였다. 유다가 지휘하는 군대는 사기충천하였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수리아 군대와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파르티아와 대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탓에 그를 대신한 리시아는 유다와 강화를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드디어 B.C.164년에 가증스러운 포고령을 철회하였다. 유다는 환호 속에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하나님 예배를 회복시켰다(마카비1서4장). 하누카 축제, 또는 수전절(요10:22)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마카비의 성공은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사는 도성들이 소수 민족으로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격렬한 박해를 불러 일으켰다. 유다는 "오늘 우리 동포를 위해 싸우라"(마카비1서5:32)고 외치며 그의 형제 요나단과 함께 싸워 요단 동쪽 지역의 원정에 성공을 거두고 유대인들을 구출하였으며 시몬도 갈릴리 지역 원정에서도 승전하였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자(B.C.164/3) 유다는 셀류커스 왕가가 종주국임을 상징하던 예루살렘의 수리아 성채 아크라(Akra)를 빼앗으려다 함정에 빠져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수리아내의 정치적 격변으로 수리아 군대는 현상유지 선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데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리아에서는 데메드리오 1세가 왕위에 올라 친수리아파인 알키무스(Alcimus)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많은 하시딤들은 아론의 후손인 이 인물을 지지하려 했으나 그의 무법적 행동을 보고 유다는 변절자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대규모 수리아 군대를 불러들이게 되었다. 수리아 군대는 아다사(Adasa) 전투에서 패했으나 이후 곧 엘라사(Elasa) 전투에서 유대 군대를 격파했고 B.C.161년 이 전투에서 유다는 목숨을 잃었다.
3. 요나단. 다섯 형제 중 막내인 요나단이 유다를 이어 마카비 집단을 이끌게 되었다. 오랫 동안 그는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리아 제국 내에서 파벌싸움이 그치지 않아 그는 점차 수리아인들에게서 자유롭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나단은 유다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되었고 셀류커스 왕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자들은 앞다투어 그의 지지를 획득하려 하였다. 이 중 한 인물이었던 알렉산더 발라스는 B.C.153년 요나단을 대제사장에 임명하였고 150년에는 군사 및 행정 통치자들로 임명하였다. 요나단은 셀류커스 왕조의 약점을 계속 이용하였으나 B.C.143년 협력을 가장한 트리폰에게 배신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4. 시몬. 마띠디아의 아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시몬은 그의 다른 형제들 못지 않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시몬은 데메드리오 2세와의 어려운 거래를 성사시켜, 데메드리오 2세는 유다의 종주권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마카비1서13:41). 수리아 군대는 아크라에서 물러났고 유다 영토는 인근 여러 곳을 수중에 넣어 확대되었다. 비교적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기가 시작되었고 시몬은 대제사장과 동시에 도전받지 않는 통치자가 되었다.
5. 이후의 하스몬가 사람들. 시몬은 B.C.135년 그의 사위의 손에 죽었다.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는 붕괴되어 가고 있던 셀류커스 제국에 일시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이 죽던 B.C.104년에 유다 영토는 솔로몬 시대 이후 최대로 확장되었다. 요한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B.C.104-103)는 공식적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 아리스토불루스와 더불어 살인과 음모, 가문 불화의 비극적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다 국가는 당시 발흥하던 로마 권력의 희생물로 전락하여 갔다. 대제사장과 왕을 겸직하던 하스몬가의 마지막 인물인 안티고너스(Antihonus)는 B.C.37년 처형당했고 친로마적인 헤롯 왕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이후 헤롯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하스몬가의 모계혈통을 가졌다.
6. 마카비의 역사적 의미.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로운 목적의 거대한 지평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본 다니엘의 눈에 비친 마카비 반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조금의 도움' 밖에 되지 못하였다(참조. 단11:34). 하나님의 이런 목적 성취를 고대하였던 많은 하시딤들은 B.C.164년 유대교 금지령이 폐기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된 때에 군사적 행동의 의의는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모든 사건에서 하시딤과 마카비 형제들 간의 갈등이 점차 커져갔다. 대제사장직을 제사장 가문에 속하긴 했지만 아론 계열에 속하지는 않았던 요나단이 차지하고 그뒤 시몬과 그의 가족이 차지했던 것이 하시딤의 뒤를 이은 바리새인들은 세속적이고 독단적이 되어 갔던 하스몬가의 대제사장을 겸직한 왕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했다.
그러나 마카비의 목표를 일차적으로 종교적 자유의 성취, 이차적으로 정치적 자유의 성취라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이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방인의 구속(멍에)'을 벗어나려 하였다. 정치적 영도력을 겸한 세습적 대제사장이 왕정 부활을 꾀했던 필연적 과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요한 힐카누스와 하스몬가의 왕들이 군사 원정을 할 때에는 다윗 왕국의 이상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며, 이들이 정복했던 일부 지역들을 강제적으로 유대화시킨 기록들도 남아 있다.
몇가지 측면에서 마카비는 신약 시대의 유대 민족주의와 메시야 사상의 패턴을 설정해 주었다. 유다와 그의 후계자들은 일관되게 로마와 선린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이들의 시대에 로마는 아직 팔레스타인을 통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신약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들은 또 다시 '이방인의 구속', 즉 이번에는 로마의 구속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한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방제국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국격이 다윗의 찬란했던 시대와 거의 맞먹게 되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마카비의 승리를 기억하고 있었고 장차 로마 군대에 의해 포위당할 끔찍스러운 일은 전혀 예감하지 못하였다. 파머(W.R.Farmer)는 신약 시대의 반로마 선동가들 가운데 마카비의 이름들이 많이 나타난 점을 지적하면서 열심당을 마카비의 이상들과 연관시키고 예수님의 의기양양한 예루살렘 입성 때 보이 군중들의 반응을 이들이 유다와 시몬이 거둔 승리들을 의도적으로 떠올린 것과 연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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