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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안존 / 안쪽 / 안찰하다 / 안티오쿠스

안존 quiet

성질이 안온하고 얌전한 것, 또는 편히 지내는 것을 뜻한다. '고귀하고 귀중하다'는 뜻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지혜로운 입술과 좋은 성품이 얼마나 값지고 귀중한 것인가를 교훈하는 말씀에서 사용되었다(잠17:27).

안쪽 inward

안으로 향한 부분을 말하며, 제사장의 의복에 대한 계시의 내용에서 금고리를 흉패에 달 때 흉패의 아래 양끝, 곧 에봇에 대한 안쪽가에 달라는 말씀에 사용되었다(출28:26;39:19).

안찰하다 put one's hands upon

‘올려놓다'는 뜻에서 나온 단어로, 엘리사는 자신의 손을 활을 당긴 요아스의 손에 올려놓음으로써 활쏘는 힘이 엘리사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상징하였다(왕하13:16, 공동 · 새번역 '손을 얹다). <참조> 안수하다

안티오쿠스 Antiochus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으면서 그의 막료 장군들 사이에 투쟁이 전개되고 그의 대제국은 몇 갈래로 분열되었다. 이때 셀류코스(Seleucus)는 스스로 바벨론의 지배자가 되어 그의 세력을 서쪽으로는 수리아, 동쪽으로는 이란 너머까지 확대하였고 수리아의 안디옥과 티그리스 강변의 셀류키아를 복수(複) 수도로 삼았다. 이리하여 성립된 셀류코스 왕조 가운데 BC 280-65년에 걸쳐 왕위에 오른 13명의 왕의 이름이 안티오쿠스였다. 이들 중 성경 역사와 관련된 두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안티오쿠스 3세(BC 223-187), 안티오쿠스 3세는 셀류코스의 아들이며 안티오쿠스 2세의 손자로서 그의 형 알렉산더 셀류코스 3세가 암살당하자그의 뒤를 이어 223년 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쿠스 3세는 왕위에 오르자 곧 당시에 위축되었던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소아시아로부터 국경선에 이르 광대한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하며 애굽과 맞섰다. 전세가 몇 차례 엎치락 뒤치락하던 끝에 마침내 그는 요단강 수원지 부근의 파니움(panium) 전투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하고 아시아 땅에서 내몰아 승리를 거두었으며(198년) 팔레스타인을 셀류코스 제국에 합병시켰다. 이때 유대인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기뻐하며 무장 궐기하여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애굽 수비대를 공격하고 안티오쿠스도 유대인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과 포로로사로잡혀 온 자들의 석방을 명령하였다. 예루살렘의 경제회복을 위하여 3년간의 세금을 탕감해 주고일반 부과금도 3분의 1로 줄여 주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바사 시대와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 치하에서 누린 것과 같은 특권을 보장받았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생활할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고 제의를 지원하기 위한일정 액수의 국가 보조도 약속받았으며, 마침내는시급했던 성전 수리공사도 국가의 도움으로 완공될수 있었다(집회서 50:1-3).
안티오쿠스 3세는 셀류코스 왕조의 국력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기가 무섭게 자기 실력 이상으로 로마에 도전하였다. 로마 군대에 쫓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BC 189년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 패전하여(참조, 단11:18)굴욕적인 평화조약을 감수하였다. 그는 길리기아를제외한 소아시아 전역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들(후에 즉위하여 안티오쿠스 4세가 된)을 포함한 20명의 인질을 잡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그는 자기 통치 하에 있는 나라의 신전에서 재물을약탈하여 배상금을 갚으려 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성전의 재산도 압류당했다. 마침내 안티오쿠스 3세는 엘람(Elam)의 한 신전을 약탈하다가 살해당했다(참조. 단11:19).
2. 안티오쿠스 4세. 안티오쿠스 4세는 안티오쿠스 3세의 막내 아들로 암살당한 그의 형 셀류코스 4세를 계승하여 175년 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쿠스 4세는 왕위에 오르자 유대인들의 반란에 직면케 될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잡다한 종족들로 구성된 주민들 간에 실제적 통일이이루어지지 않아 내정이 불안정했던 이 나라는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동부의 여러 속주에서는파르티아인들의 위협이 점차 가중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우호적인 애굽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더우기 로마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다.
안티오쿠스 4세는 인질로 겪은 자신의 경험에서로마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토방위를 위해 자기 백성들의 통일·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시급하였고, 다른 한편 재정이 극도로 고갈되어 새로운 재원을 찾아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각종 신전들의 재물에 눈독을 들였다. 그는 정치적 통일을 위하여 여러 도시에 대해 희랍의 폴리스(Polis)와 같은 특권을 허용하고 헬라적인 모든 요소를 육성하고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제우스 신과 그밖의 희랍 제신들을 숭배하게 하고 그 자신을 제우스 신의가시적 화신으로 신격화시켜 숭배하게 하였다(그에게 붙은 에피파네스, Epiphanes란 이름은 '나타난신'이란 뜻이다).
한편 유대 지도층 가운데서도 안티오쿠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대제사장직을 탐했던 여호수아라는 인물은 헬라식 이름인 야손(Jason)으로 행세하면서 거액의 뇌물을 왕에게 바쳐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면서부터 적극적인헬레니즘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마카비 11:1115; 마카비 2서4:10-15). 예루살렘에 희랍식 체육장(gymnasium)이 세워졌고 젊은이들은 거기에 입회하였다. 희랍의 갖가지 운동경기가 장려되었고 희랍식 의상이 유행하였으며 젊은 제사장들마저도 본분을 망각하고 경기에 열중하였다. 운동 경기에는 나체로 참가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은 할례자국을 거북하게 여기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야손은 대제사장직을 3년밖에 유지하지 못하고그보다 많은 뇌물을 약속한 메넬라오스에게 쫓겨났다. 메넬라오스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약속했던 뇌물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성전의 기물들을 훔쳐팔기 시작했다(마카비 2서4:27-32).
BC 169년 애굽과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던 길에 안티오쿠스 4세는 자기를 대적하던 반란군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갔다. 마카비 2서 5:5-10에 의하면 안티오쿠스가 애굽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풍문이 팔레스타인에 들려 왔으며, 야손은 이 풍문에 힘입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도성을 점령했었다. 안티오쿠스는 이 소동을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으며 메넬라오스의 묵인하에 성전을 약탈하여 그 거룩한 비품과 기물들을 마구 쓸어가고 심지어 성전 전면의 금박까지 벗겨갔다.
BC 168년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을 침공하여 수월하게 성공을 거두고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격하였으나 로마의 간섭을 받고 애굽에서 철수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추진하던 헬레니즘화 정책이 심한 반발에 부딪쳐 현지 주둔군으로는 질서 유지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167 년 초 아폴리니우스에게 큰 병력을 주어 예루살렘에 급파하였다(마카비1서 1:29-35; 마카비 2서 5:23-26). 아폴리니우스는 예루살렘을 적의 도성처럼 다루어 평화를 가장하여 접근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을 급습,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그밖의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부렸다.
한편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종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다(마카비 1서 1:41-64;마카비 2서 6:1-11). 정기적으로 바치던 제사는 중지되었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전통적 축제를 지내는 것도 금지되었다. 율법의 사본들은 파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어린이들의 할례도 금지되었다. 이런 금령들 중 어느 것이든 순종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다. 이교 제단들이 도처에 세워지고 거기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으며 먹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이교도 주민들은 유대인들에게 우상숭배 의식에 참가하도록 강요함으로써 헬레니즘화 정책에 협력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침내 이러한 시책의 절정으로서 167년 12월 올림피아 제우스 신의 제의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었다(마카비 2서 6:2). 제우스 신을 위한 제단이 아마도 그 신상과 함께 세워졌으며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가 말하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 (단11:31;12:11)이다. 유대인들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 축제와 왕의 생일을 위한 월례 제례에도 참가하도록 강요되었다(마카비 2서 6:3-7).
안티오쿠스 4세의 이런 정책에 대하여 헬레니즘화한 유대인들은 왕의 칙령을 환영하여 흔쾌히 호응하였고, 그외 많은 사람들을 자진해서 혹은 탄압이 무서워서 조상 전래의 신앙을 버렸다(마카비 1 서 1:43,52). 그러나 율법의 사소한 조항 하나도 어기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저항에 대해 안티오쿠스는 잔혹한 박해로 대처했다. 어린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그 가족들과 함께 사형에 당했다(마카비 1서 1:60이하;마카비 2서 6:10). 은밀한 곳에 모여 몰래 안식일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쳐들어 오는 군대에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칼에 맞아 죽었다(마카비 1서 2:29-38;마카비 2서 6:11). 부정한 음식에 손대기를 거부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마카비 1서 1:62 이하).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마따디아는 그의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뜻을 함께 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인 하시딤과 함께 무력으로 저항하였다. 특히 용감무쌍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던 마따디아의 세째 아들 유다('쇠망치'를 뜻하는 마카비라고도 불렸다)는 유대인들의 저항을 전면적인 독립투쟁으로 전환시켰으며 일반적으로 이를 마카비 전쟁이라 부른다.
유대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무렵(BC165년) 안티오쿠스 4세는 파르티아인들을 치기 위해 출전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주력 부대를 팔레스타인에 파견할 수 없었다(마카비 1서 3:27-37). 왕의 직무를 대행한 리시아가 파병한 군대는 165년 엠마오에서, 164년 벳수르에서 마카비 군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그리하여 마카비 형제를 비롯한 온 이스라엘 회중은 성전이 모독된 지 꼭 3년만인 164년 12월 25일에 성전을 재봉헌할 수 있었다(마카비 1서 4:52-59).
바사에 있는 엘리마스 신전을 약탈하려다 실패하고 돌아온 안티오쿠스 4세는 설상가상으로 팔레스타인에 진격했던 군대가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BC163년에 죽었다(마카비 1서6: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