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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John Calvin

존칼빈의 기독교 교리

 

 

*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태어났다

 

제아무리 미개하고 또 야만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그로 미뤄보아) 우리 인간은 창조주의 위엄을 인식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즉 그분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그 무엇보다도 존경하며 모든 두려움과 사랑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 속에 심겨진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자신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 없애버리려고만 애쓰는 불신자들은 제쳐놓고,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들은 이 덧없고 짧은 인생이 영원불멸에 대한 명상 이외의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영원불멸의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된 걱정과 염려는 하나님을 찾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모든 애정으로 그분을 열망하며, 단지 그분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는 일에 두어야 한다.

 

 

 

*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차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종교를 잃어버릴 경우 매우 가련하게 되며 동시에 동물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일반적인 견해의 일치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에 신 인식과 신앙심으로부터 전적으로 격리되어 있다고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를 표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 대다수가 진정으로 신 경외에 감동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항상 그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한 생각에 의해 속박을 받고 있다.

즉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의 권능으로 자기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권능에 대한 생각에 놀란 그들은 행여 자신들의 지나친 신 경시 행위가 이 신을 자극시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신을 어느 정도는 숭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난잡하게 살며 모든 단정함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경멸하는 거대한 안전감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엄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오성이 가지는 어리석고 경솔한 허영심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참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함은 그들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하나님 대신 그들 자신의 마음의 환영과 망상을 경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더 큰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서 공경하며, 그분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참된 열정을 말한다.

 

이러한 열정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하나님을 무엄하게도 고안해 내려 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구하며, 자신들에게 계시되고 분명하게 나타난 그대로만 하나님을 이해할 뿐이다.

 

 

 

*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인식해야 될 일

 

하나님의 위엄은 그 자체에 있어서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으며 또 그것에 의해 납득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거대한 광채에 의해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탐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의 위대하심을 예배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롬 1장, 히 11장)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의 사역들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또 그분을 정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가 주님께 대해 다른 방법으로는 볼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경박하고 무익한 사변을 통해 우리의 이해력을 붙잡아 매어놓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우리에게 영적 영양분을 산출해 주고 우리 안에 참되고 견실한 경건, 즉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을 강화시켜 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만물의 시작이요 기원이신 우리 하나님의 영원 불멸하심, 하나의 거대한 기계장치를 만드시고 그것을 지탱하고 계시는 그의 권능, 하나의 거대하고 혼란되어 있는 다양한 물체를 조성하시고 이를 아주 독특한 질서로써 계속 다스리시는 그의 지혜, 만물이 창조되고 또 계속 지탱되고 있는 원인인 그의 선하심, 선인들의 보호와 악인들의 징벌에서 놀랍게 나타나고 있는 그의 공의, 우리를 회심에로 이끄시기 위해 그의 지극히 크신 관대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인내해 주시는 그의 긍휼을 명상한다.

 

만일 우리의 조야함이 이처럼 거대한 불빛에 대하여 눈멀게 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 가르침을 받는데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풍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맹목만을 통해서 범죄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타락은 극심하여 하나님의 사역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악의적이고 삐뚤어진 태도를 취하지 않는 구석이란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고, 창조물 안에서 명백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의 모든 지혜를 우리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그의 사역들을 통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로 향해가야 한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사역들이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척도에 의해 측정되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유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 모든 의, 모든 지혜, 모든 능력, 모든 선 그리고 모든 인자하심의 근원이요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모든 좋은 것은 예외없이 그분으로부터 연원하므로 모든 찬양이 당연히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상술한) 모든 것들이 하늘과 땅의 각 부분에서 분명히 나타나 보여진다 하더라도 결국 성서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것들이 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그것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주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의 생명, 그의 지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향해 그의 공의, 인자, 그리고 선하심을 행사하시는지 고찰하게 된다.

 

 

* 인간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고상하게 입혀주신 그 존엄으로 자신의 창조주를 찬미하며 당연한 감사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탁월한 본성을 신뢰하고, 그것이 정작 어디서 연원하여 존속하고 있는지를 망각한 채 오히려 주님 밖에서 자기관철을 해 보려고 애썼기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이 어리석게도 뽐냈던 하나님의 은사들을 박탈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이 그분의 관대하심에 의해 부요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경멸했던 바로 그 하나님을 이제는 모든 자랑이 상실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씨로부터 유래한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져 버렸기 때문에 육으로부터 육으로 태어나게 된다.

 

비록 우리의 몸이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 안에서) 육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우리가 눈을 돌려 바라보는 인간의 어떤 부분 안에서도 불결하지 않고, 속되지 않으며, 하나님께 가증스럽지 않은 그 무엇을 우리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지혜는 맹목이 되고 또 무한한 오류에 휩싸여 있어서 늘 하나님의 지혜와 대립해 있고, 인간의 의지는 악하고 부패한 격정으로 가득차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보다 더 혐오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의 힘은 모든 선한 일에 무능하게 되어 미친 듯이 죄악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자유의

 

성서는 종종 인간이 죄의 종이라고 증거한다.

 

이는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의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하지 않고, 비뚤어지지 않고, 부당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인간이 계획하거나 갈망하거나 기도할 수 없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죄의 독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죄악의 열매밖에는 산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에 의해 강제를 받아 죄를 범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단히 자발적인 성향을 가진 의지의 동의를 얻어 범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정의 부패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의를 매우 혐오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악에 열성적이기 때문에,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불리우는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결론한다.

 

 

* 죄와 죽음

 

성서에서 죄란 모든 악덕의 근원인 인간본성의 부패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생겨나는 악한 탐욕들 그리고 이 탐욕들로부터 나오는 가증한 악행들 곧 살인, 도적질, 간음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범죄들이 총칭된다.

 

그러므로 모태로부터 죄인인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 밑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자신 위에 더욱 무겁게 쌓아 놓는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하여 줄곧 죽음에로 더욱 가까이 향해가고 있다.

만일 모든 범죄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가증할만한 것이라면, 크나큰 죄짐으로 인해 억눌리고 극도의 추잡함에 의해 더렵혀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진노가 가져다 줄 명백한 수치 말고 또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사유는, 비록 그것이 인간을 공포감으로 무력하게 만들며 절망으로 짓누를지라도, 우리를 위해 필요하다.

즉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가 박탈당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내던져지며, 삶에 대한 모든 기대가 거부당한 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빈궁, 가련함 그리고 수치를 인식함으로써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며 또 우리 자신의 부패, 무능 그리고 저주를 자인함으로써 우리가 거룩, 능력 그리고 구원의 모든 영예를 (오직) 주님께 돌리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다.

 

 

* 구원과 생명에로의 복귀

 

우리의 무가치함을 제시해 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 지식이 진실로 우리 마음 속을 파고 든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을 얻는데 쉽게 접근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매우 악질적인 역병들, 곧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무사안일의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신뢰를 파괴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때 이미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을 열어주신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지금까지 땅에 겨냥되어 머물러 있던 눈을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며, 자기 자신 안에 안주하던 우리는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주님을 열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리의 죄악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긍휼하신 아버지께서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고민하며 당혹해하는 우리에게 자진하여 나타나사 우리의 연약함에 알맞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을 오류에서 바른 길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파멸에서 구원으로, 악마의 나라에서 그분 자신의 왕국에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천상의 삶을 유산으로 주시기를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이 단계, 곧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과 죄짐에 의해 몹시 고통을 받아 신 경외에로 부추겨지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 단계로) 설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인식 안에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율법을 먼저 선물해 주셨다.

 

 

* 율법

 

우리가 주님의 영원하신 뜻이라고 불러 마땅한 오든 의에 대한 완전한 규칙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이 두 돌판 안에 완벽하고도 분명하게 포함시켜 놓으셨기 때문이다.

 

첫번째 돌판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기뻐 받으시는 당신께 대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몇 가지 계명으로써 규정해 놓으셨다.

두번째 돌판에는 우리가 이웃에 대해 행해야만 하는 사랑의 직무들이 규정되어 있다. 이제 우리 이 율법에 귀 기울여 보자.

그리하면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취해야 할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것으로부터 얻게 될 유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제 1계명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너의 하나님이로라.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계명의 첫 부분은 전체 율법에 대한 서문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우리의 주님이시요 하나님이라고 확언하실 때, 그분은 당신께서 (우리에 대한) 명령권의 소지자라는 사실과 당신의 명령에는 우리 인간이 마땅히 복종해야만 되는 (지존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가 아비일진대 나에 대한 사랑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에 대한 두려움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불복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당신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의 배은망덕함을 손쉽게 낙득시켜 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유대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내신 바로 그 인자하심으로 지금도 당신의 종들을 믿는 자들의 항구적인 애굽 곧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해 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의 숭배를 금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 중 어떤 부분도 그분 자신외의 다른 것에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서'라는 말을 덧 붙이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형식적인) 외적 신앙고백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도 진실되게 하나님으로 인정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선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이(예배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있고 또 신성 모독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에 양도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함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모든 신뢰와 소망으로 그 분을 의지하고 선하고 거룩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모든 선함과 거룩함에 대하여 그분에게 찬사를 드리는 것이다.

 


제 2계명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전 계명을 통하여 당신께서 유일신 되심을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여기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대해 어떤 형상도 만들지 못하도록 금하신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신명기 4장과 이사야 40장에서 설명해 주신다 : 즉 영은 육과 아무런 유사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형상도 우리가 종교적인 이유에서 숭배하는 것을 금하신다. 이 계명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영적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하나님께서 (본질상) 영이신 것처럼 그분은 (당신의 본질에 상응하여)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되어지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요 4장).

그 후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다가 가공할 만한 위협을 첨가하시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의 범과로 인하여 당신께서 얼마나 심한 모욕을 받게 되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이다.

 

'나 주 너희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마음 속에 두어야만 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과 (당신 자신 외의) 그 어떠한 신도 (예배의 대상으로) 허용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만일 당신의 위엄과 영광이 (어떤) 형상들이나 다른 사물에 양도될 경우 이에 대해 복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복수는 단지 한번만 (당사자에게)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들, 자녀들 그리고 손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계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영속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긍휼이 크심을 우리에게 공표하시는데, 복수에는 단지 사대를 설정하신 반면 긍휼은 천대에까지 확대시키고 계신것이 이를 입증한다.

 


제 3계명

 

'너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는 주께서 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서할 때 무익한 사물들과 거짓말들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금하신다. 왜냐하면 서약은 우리의 즐거움이나 쾌락이 아닌 정당한 필요성 곧 주님의 영예가 유지되어야 할 때라든가 교화를 위한 일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을 때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일에 있어서도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지 말도록 철저히 금하신다. 우리가 서약을 한다든가 혹은 어떤일에 하나님을 인증한다든가 할 때 우리는 오히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따라 모든 존중심을 가지고 공손하게 그분의 이름을 운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의 주된 남용이 기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기도가 명해지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거짓 맹세나 다른 신성 모독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이 당신의 보복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징벌을 선포하고 계신다.

 


제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주 너의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 칠일에 쉬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안식일을 복주어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주님께서는 제 칠일의 안식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인 안식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기 원하셨다. 즉, 이 날에 성도들은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신들의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둘재,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율법을 듣고 당신을 예배하기 위해 모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날이 있기를 원하셨다.

 

셋째, 주님께서는 노예들이나 다른 사람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노고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갖도록 그들에게 휴일이 허용되어지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것이 안식일의 주된 이유라기보다는 안식일이 가지는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이긴 하지만.

 

첫째 이유에 대하여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심으로 그분의 현존을 통해 모든 비유적 형상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실체이심으로 그분의 오심을 통해 (실체의) 그림자들은 (이제) 무효화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2장) 안식일이 장래있을 일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확언한다.

 

그는 (골로새서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이 진리에 대해 선포한다. 즉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부패할 육체에 대해 죽기 위함이라고 가르칠 때이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질 때까지 우리의 전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특정한) 날들의 미신적 준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두 이유들은 옛 그림자들에 속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므로, 안식일이 비록 (모형적인 의미에서는) 폐기되었다 하더라도 (그 본래의 정신에 따라)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지켜져야 함이 마땅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떡을 떼며, 공적인 기도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특정한 날에 모여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종들과 일꾼들에게 노고로부터 해방되는 휴식이 주어지기 위해서도 안식일은 지켜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예배를 위한 집회들이 매일 지켜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유대인들에 의해 준수되던 날은 폐지되었고 (그것은 미신을 없애기 위해 필요했다) 다른 날 하루가 이 목적을 위해 지정되었는데, 이는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 보전하기 위해 필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비유적 형상으로 주어졌다면 우리들에게는 이 진리가 그림자 없이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내 보여졌다. 즉 우리가 일평생 사는 동안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은

 

첫째,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통해 (계속)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 하나님 말씀의 청취, 성례의 집행, 공적 기도의 수행을 위해 교회의 합법적인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가 우리 밑에 예속된 사람들을 노동을 통해 비인간적으로 억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계명을 통하여는 우리의 부모님들과 우리 위에 세움을 받은 군주들 및 행정관들에 대한 공경이 명령되고 있다.

즉 우리는 이분들에 대해 모든 존경과 복종 그리고 감사를 표해야 하며 또한 가능한 모든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낳아주신 분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이러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무제가 되지 않는다.

그분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그분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모로서 주신 바 된 분들이며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부수적으로 기입해 놓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 안에서만 그분들에게 복종하도록 명령되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주님의 율법을 범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분들이 하나님을 거스려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경우 우리는 그분들을 부모로 여겨서는 안되고, 우리들을 참 아버지께 대한 복종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이방인들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명은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듯이) 약속을 가진 첫 계명이다. 주님께서는 마땅한 방도로써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는 자녀들에게는 현세의 축복을 약속하신 반면 부모님을 거역하며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는 명백한 저주가 예비되어 있다고 선언하신다.

 


제 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여기서는 모든 폭행과 모욕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웃의 신체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모든 무례한 행위가 금지되고 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한다면 우리가 (동요 인간을 대할 때) 그를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겨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침해를 받을 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침해됨이 없이 단순히 인간자체가 침해 받을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제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주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방탕과 음란을 금하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오직 결혼의 법을 통해서만 남녀를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며, 이 결합이 주님의 권위에 의해 이루어질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으로써 이를 성화시키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결혼 이외의 다른 모든 결합은 주님 앞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절제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은사는 확실히 특수한 것이며 개개인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 결혼이라는 단정한 수단을 통하여 자신들의 무절제한 육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 결혼은 어떠한 경우에든 고귀한 것인 반면 하나님께서는 방탕한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정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히 13장).

 


제 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타인의 재산 탈취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모든 강탈행위로부터와 순박한 사람들의 순진함을 악용하는 모든 기만행위로부터 격리되어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손을 도적질로부터 지켜 깨끗하고 결백하게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모든 간책, 교활 그리고 강탈을 삼가야 한다.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주님께서는 형제의 평판을 중상하는 모든 저주와 모욕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이웃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거짓말들을 정죄하고 계신다. 만일 좋은 평판이 어떤 보화보다도 더 값진 것이라면, 깨끗한 평판을 상실함으로써 우리는 재산 상실을 통해 입는 것보다 결코 덜하지 않는 손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 증거를 통해 손으로 하는 약탈행위보다 결코 덜하지 않게 형제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전 계명(제 8계명)을 통해서 우리의 손이 매임을 당하는 것처럼 이 계명을 통하여는 우리의 혀가 매임을 받는다.

 


제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로써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리의 모든 탐욕들에게 말하자면 굴레를 씌우고 계신다. 다른 모든 계명들은 행위로써 사랑의 규범을 범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반면 이 계명은 마음 속에 그것을 품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에서는 증오, 시기심 그리고 악의가 이전 계명에 나오는 살인과 똑같이 정죄되고 있다. 음란한 생각과 마음의 내적 불결함도 성적 방탕과 똑같이 금지되고 있다. 앞에서는 (제 8계명) 약탈과 책략이, 여기서는 탐심이 금지되고 있다. 앞에서는 (제 9계명) 중상이, 여기서는 악의 자체가 금지되고 있다.

 

우리는 이 계명의 의미가 얼마나 일반적이며 이 계명의 범위가 얼마나 넓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형제애가 경탄스러우면서도 더 이상 미치지 못할 정도의 뜨거운 애정이 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확실히 주님께서는 우리 이웃의 전 소유가 그 어떤 탐욕에 의해서도 교란 받지 않는 그러한 수준의 형제애를 원하고 계신다.

 

이 계명의 요약은 이렇다 :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짐으로써 그 어떤 탐욕에 의해서도 사랑의 법을 거스리도록 자극 받지 말아야 하며 각 개인에게 그 자신의 몫을 아주 기꺼이 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수행하는 직무의 의무를 통해 각 개인에게 마땅히 해 주어야 할 일이 바로 그사람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을 모든 사람에 대해 가져야만 한다.

 

 

* 율법의 요약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이 두 자기 항목 속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가르치셨을 때 율법의 모든 계명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충분히 알게 해 주셨다.

 

첫째는 우리의 온 몸과, 온 영혼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해석을 율법 자체로부터 취해 내셨다.

왜냐하면 첫번째 부분은 신명기 6장에 나타나 있고 두번째 부분은 레위기 19장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율법의 의의

 

율법은 올바르고 거룩한 삶의 모범이며 의에 대한 아주 완전한 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적으로) 제시한다면, 그는 완전을 위해 필요한 사항에 있어서 주님 앞에 아무런 결함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실행할 자들에게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현세의 큰 축복들 뿐만 아니라 영생의 보수(레 18장)까지도 약속해 주고 계신다.

 

다른 한편, 주님꼐서는 이 율법 안에 명령된 모든 것들을 행위를 통해 실천하지 않을 자들에게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예고하신다. 모세 역시 율법을 공포한 후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백성 앞에 두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비록 율법이 생명의 길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에 전적으로 알맞게 조형되어 있거나 배열되어 있다면 율법의 (단순한) 인식만으로도 구원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을 거스려 싸우고 있고 또 율법의 가르침을 통하여 전혀 갱신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주어진 바로 이 율법이 (율법이 착하고 또 적절한 태세를 갖추고 있는 청중들을 얻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죄와 죽음의 동기로 바꾸어지고 만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율법의 범법자들임을 확신하고 있는고로, 율법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제시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의 불의를 더욱 더 드러내어 놓는 거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이 보다 큰 범과시에 우리를 포착하면 할수록 우리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더욱 더 준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서 영생에 대한 약속을 빼앗겨 버리게 된다면 그 때엔 율법을 통해 주어지는 저주만이 (우리 모두 앞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율법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전 단계

 

만일 율법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불의와 범법함이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나타나 보여진다면 , 이는 우리로 절망에 빠지게 하기 위함도, 모든 용기를 상실한 채 파멸 속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율법의 심판을 통해 정죄 받는 것은 모든 입이 닫혀서 침묵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한 것으로 판달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롬 3장). 그렇지만 사도는 다른 곳에서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신앙 아래에 가두어두신 것은 그들을 파멸시키거나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라 하였다(롬 11장).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정함을 알려 주신 후, 당신의 능력과 긍휼에 대한 신뢰를 통해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이 위로는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당신께서 우리에 대해 친절하시고 또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율법 안에서(우리는 이 완전한 의를 전적으로 결하고 있다) 완전한 의에 대한 보수자로서 나타나시고, 동시에 죄에 대해 엄격하고도 공정하신 재판관으로 나타나신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그분의 얼굴이 비열한 자들과 가증한 죄인들을 향해 은혜와 온유로 충만하여 빛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놀라운 실례를 제공해 주셨고 또 이 아들 안에서 당신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의 모든 보화들을 우리에게 풀어서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인식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을 이해하며 그분이 우리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인식한다.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을 불러 그리스도께 참여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은 확실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고 강퍅하게 된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히 특별한 은혜를 멸시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향유하며 그분을 자신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서 영접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그분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그분을 추종하는 것이다.

 

 

* 선택과 예정

 

(복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의)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우리는 신적 결의의 크신 비밀에 대해 반드시 숙고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을 통해 당신의 자녀로서 그리고 하늘나라의 상속자로서 예정하신 사람들 안에서만 그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창세 이전에 동일한 하나님의 결의에 의해 유기된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진리는 (저들이)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냄새라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주님께서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준엄한 심판을 행사 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인식되어지도록 놔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게서는 그 이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그럴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이는 우리의 영이 가지는 불완전성이 그처럼 거대한 명료성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고, 우리의 빈약함이 그처럼 위대한 지혜를 깨달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거기까지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 이르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들의 영이 가지는 무모함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솔로몬이 말한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엄위를 궁구하려 하는 자는 그분의 영광에 의해 짓눌림을 당하고 말것이다.'(잠 25:2)


우리로서는 단지 이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즉 주님의 섭리는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가리워 있다 하더라도, 거룩하며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령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멸하기 원하신다 가정한다고 해도 그분은 그렇게 하실 권리를 갖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오직 그분의 지고하신 선하심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분의 긍휼하신 그릇이고 (이들은 사실로 그러하다) 유기된 자들은 그분의 정당한 진노의 그릇임을 인정하자. 전자나 후자 양편 모두를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논거와 이유로 삼도록 하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구원의 확신을 굳게 할 목적으로 하늘 안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들에 대해 결의해 놓으신 것을 궁구하려 들지 말도록 하자 (이런 탐구는 비참한 번민과 교란 작용을 통하여 우리를 불안하게만 만들 뿐이다). 차라리 우리는 주님께서 이 확신을 충분하고도 견고하게 만들어 주신 바로 그 증거로써 만족하자.

 

왜냐하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생명에로 예정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여 영접한다면 선택의 보증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에서 구하는 것이 영생에 참여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그분은 시초부터 생명이셨는데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신바 된 것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를 더 이상 궁구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거울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를 인치시고 굳게 하시는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다.

 

 

* 참 신앙

 

두뇌 속에서만 움직일 뿐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지식 또는 성서에 대한 어떤 이해가 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개연성 있는 근거에 의해 입증되는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 확실히 결단하는 확고 부동한 마음의 신뢰이다.

 

신앙의 정의는 이처럼 약속의 내용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 신앙이란 바로 이 기초 위에 의거해 있기 때문에 이 기초가 제거된다고 가정할 경우 신앙은 즉시 무너져 버리거나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복음적 약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긍휼을 제시하실 때 확신을 가지고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약속 하시는 분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신앙을 통해 그분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의는 신앙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도(히 11장)의 정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신앙)을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것들의 확실학고도 분명한 소유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사도는 신앙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명증 곧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우리가 소망하는 영생의 명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이렇듯)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항구적인 대상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과 신앙이 신적 긍휼의 모든 풍요로움을 관조하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 신앙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고가 하나님의 천상적 비밀에 대해 얼마나 맹목적이며 또 우리의 마음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정직하게 숙고한다면, 우리는 신앙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모든 능력을 무한히 능가한다는 사실 그리고 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값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고전 2장).

'만일 사람 속에 있는 영만이 사람의 생각에 대한 증언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영 외에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들에 있어서까지도 우리 안에서 불확실하게 나타난다면, 우리의 눈이 보지 못하고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약속하실 때 어찌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게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신앙은 성령님의 조명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은 비추임을 받고 우리의 마음은 확신 안에서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매우 확실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을 통하여 시행하시리라 약속하신 모든 것을 결국은 성취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이런 연고로 (고후 1장과 엡 1장)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신적 진리의 확실성을 견고히 해 주는 담보라 불리워지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날의 고대속에 인봉해 두는 도장이라 불리워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라(롬 8장)는 사실을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구불변한 신앙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영생은 이것이니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혹 죽을 지라도 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하게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불결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께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벗어버리면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고,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불의했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 안에서 어떤 의를 벌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불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의 의가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우리에게 부여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의를 한마디로 사죄라 부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가 종종 하는 바, 행위 의와 신앙의 의를 서로 비교할 때 그리고 전자가 후자에 의해 파기되었다고 가르칠 때 (롬10, 빌3)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말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 의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으며 이 의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사도신경 해설에서 살펴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근거해있고 의거해 잇는 모든 신조들이 사도신경에는 순서있게 논급되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신앙을 통해 거룩하게 된 것은 율법에 복종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우리의 의인을 위해 중재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를 당신의 영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우리를 성화시켜 정결하고 흠이 없게 만드신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분 위에 한량 없이 임하셨으므로 - 지혜의 영, 지성의 영, 권고의 영, 능력의 영, 지식의 영, 주님 경외의 영 -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데서 얻으며 그분에게 주신 바 된 은혜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자랑하면서도 그분의 영에 의한 성화를 전적으로 결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자들이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단지 의뿐만 아니라 거룩함이 되셨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거룩함을 동시에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통하여 당신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약속해 주심과 동시에 우리 마음 속에 당신의 법을 써 넣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렘 31장, 히 8장).


그러므로 율법의 준수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 아니고 영적인 힘에 의한 사역이다.

이 힘에 의해 우리의 마음은 부패로부터 정결하게 되며 의에 대해 순종할 수 있게끔 유화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 없이 이뤄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의에 대한 사랑을 새겨 넣으신 이래로 (이전에 율법은 하나의 외적인 가르침으로써 단지 우리의 연약함과 범과를 고발했다), 이제 율법은 우리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가 완전하게 되도록 우리를 형성하고 가르치며 격려하는 지혜이고, 또 우리가 사악한 방종에 의하여 부패하게 되는 것을 묵과하지 않는 삶의 규율이 되기 때문이다.

 

 

* 참회와 중생

 

이제 우리는 왜 참회가 항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결합되어 있으며, 또 왜 주님께서(요 3장)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회는 회개를 뜻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의 부패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길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죄의 종이 아니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 하신 후 당신의 의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이후에 새로운 허물을 통해 그 크신 은혜를 더럽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참회의 작용은 중생에 달려 있는데 이 중생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의 제어 즉, 우리 속에 선천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제어와 인간의 본성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영적 갱신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해 죽은 우리는 전 삶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위해 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이 중생은 우리가 썩어 없어질 육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참회는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한다.

 

 

* 선행 의와 신앙 의의 상호 관련성

 

순화된 양심에서 나오는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의 의를 잘 알아 보시기 때문에 이 선행들을 인정해 주시고 또 좋게 평가해 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행에 대한 헛된 신뢰에 이끌린 나머지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세심히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의에 상응하는 의 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그 어떤 행위 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몇가지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율법에 대해 완전한 복종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의 율법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성숙해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으로부터는 거리가 멀었다.

 

뿐만 아니라 가령 하나님의 의가 단 하나의 선행만으로 충족되어진다 가정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의에 대한 찬사가 주어져 마땅할 이 단 하나의 선행마저도 그의 성도들 안에서 발견할 수 없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선행이 비록 (외견상으로는) 놀라운 일처럼 나타나 보일지라도, 전적으로 완전하며 또 어떤 결점에 의해서도 오염되어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선행도 우리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죄인들이며 또 많은 죄의 잔재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 밖으로부터 의롭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불완전함이 그분의 완전함을 통해 가리움을 받고, 우리의 불결함이 그분의 정결함을 통해 씻음을 받으며, 우리의 불의가 그분의 복종을 통해 말소되어지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전혀 무가치한 우리의 행위들을 고려함이  무상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함들이 이렇게 가리움을 받을 때(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행위를 더럽게 만들어 설 수 없게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행위 안에서 순전한 정결함과 거룩함만을 바라보신다.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큰 평판과 칭찬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들을 의롭다 말씀하시고, 의롭다 여기시며 또 이에 대해 매우 풍성한 상급을 약속하신다.


요약하면 :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매우 값진 것이어서 이를 통해 우리는 대가 없이 무상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 역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됨은 물론 영원한 상급으로 보답받게 된다.

 

 

* 신조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얻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지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고 숙고해야 할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여 보자.

 

이것은 이른바 신조 안에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지혜, 구원, 생명, 의 그리고 거룩함이 되셨는가를 보게 된다.

 

이 신앙의 요약이 어떤 저자 혹은 어떤 저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신조는 그 안에 어떤 인간적인 가르침도 내포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확실한 증언들로부터 연유한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그 어떤 사람도 혼란에 빠뜨려 넣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먼저 이에(=삼위일체) 대해 약간 언급해야 될 줄로 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여기서) 세 하나님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성서와 우리들의 신앙체험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모습이 빛나고 있는 아들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성령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아버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을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 세워, 고정시켜 놓도록 하자! 그러나 아들과 성령과 더불어(서만) 아버지를 명상하도록 하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고백의) 말은 단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가르쳐 주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가르쳐 준다. 또한 이 (고백의)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대상 속에 우리들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가르쳐 준다.

 

전능이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당신의 섭리대로 조종하시며,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또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지칭될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한번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항상 보전, 지탱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게 계속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계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우리가 앞서 가르친 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 제시되어 있다는 이 (고백의) 말속에 (아주) 용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라고 부르는데, 이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계시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바 있는 바로 그 칭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서는 (행 4장)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인간들에게 주신 바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란 칭호는 그분이 성서 안에 기름이라는 말로 묘사되어진 성령님의 모든 은혜를 충만히 받으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성령님의 은혜를 결하면 우리는 (모두) 시들고 메말라 없어져버리고 만다.


이 기름부음을 통해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셨는데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당신께 굴복시킴으로 우리로 그분 안에서 왕들이 되어 악마, 죄, 죽음 그리고 지옥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며 당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킴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제사장들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 긍휼의 행위 그리고 우리 자신 및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호인이요, 중재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밖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신자들처럼 양자됨이나 은혜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되고 합법적이며 유일무이하신 아들이시라는 점에서 다른 아들들(=양자들)과 구별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영원전부터 아버지(하나님)와 공유하신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시된 그분의 육에 따라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시다. 이는 바울이 말한 바와 같다(고전 8장).

'만물이 영원한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또 만물이 말미암은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 (이 고백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예수가 되셨는가 하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즉 그분이 어떻게 구주요 그리스도 곧 우리를 보전하시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으며,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시키는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것은 당신께서 (친히)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의 궁핍을 짊어지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부요를 양도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의 약함을 취하신 것은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죽을 운명을 받아 들이신 것은 당신의 영원불멸을 우리에게 분여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땅위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끌어 올리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당신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진정한 아들로서(=자손으로서) 인식되어지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참 인간으로 인식되어지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모든 약함에 따라 시험을 받으셨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약함에 대해 동정하는 것을 배우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놀랍고도 말할 수 없는 능력을 통해 동정녀의 몸에서 수태된 것은 그 어떤 육적인 부패에 의해서도 오염됨이 없이 지고한 정결함으로 성화되어 탄생하시기 위함이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이 (고백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목적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완수하셨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인간의 불복종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하나님의 진노를 당신 자신의 복종을 통해 도말해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셨는데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가 단번에 성취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피를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가로 뿌리신 것은 우리를 향해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며 우리의 불의가 정화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구원(사역)에 있어서는 그 어떤 부분도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유대땅의 재판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는데, 그분이 빌라도의 판결에 의해 범법자요 또 악한으로 정죄되심은 우리가 그분의 정죄받음을 통하여 (장차) 대심판관의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십자가 -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저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 위에서 죄로 말미암아 받아 마땅한 우리의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을 정복하며, 우리를 삼켜 먹어 치우려고 하는 죽음을 삼켜 버리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의 효력을 통해 그분과 연합하여 죄와 더불어 장사되고 악마와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 가셨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께로 부터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시려고 가공할 만큼 엄격한 하나님의 심판을 친히 감당하시고 경험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듯 당신 자신은 죄와 흠이 전혀 없으셨으면서도 우리의 죄악이 마땅히 치뤄야 할 그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짊어지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진노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전혀 고려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어떻게 그처럼 진노하실 수 있었겠는가?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정말로 진노하셨다면 그분이 어떻게 자신의 중재를 통해 아버지를 유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무거운 짐을 인내하시되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그리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아 괴로워 지치게 되었을 때에, 그분은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의 모든 징후들을 당신 안에서 경험하시게 되었고 마침내는 극도의 괴로움 속에서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죽음의 지배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에 매여있지 않고 권능으로 하늘에 올라가시어 죽음의 모든 병기들을 꺾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것들은 더이상 우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미래의 부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에서 살게 해주는 현재적 부활에 대한 확실한 진리요, 실체이며, 기초인 것이다.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담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닫혀 있던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이름과 우리 인간의 육을 가지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소망을 통하여 하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분과 더불어 하늘의 처소 안에 좌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바 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의 직무에 따라 항상 우리를 위한 변호인이요 또 중재자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보전하시기 위해 만물의 왕, 재판관 그리고 주님으로 임명되셨으므로, 그 결과 그분의 통치와 영광이 우리의 힘, 능력 그리고 영광이 되어 우리가 지옥과 대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모든 은혜들을 풍성히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써 그분은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이를 나눠주어 저들을 풍성하게 해 주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승천 후 그리스도의 육이 우리의 눈앞에 더이상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도우심과 능력을 통해 쉼 없이 당신의 신도들을 돌보고 계시며 저들에게 당신의 현존이 가지는 명백한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약속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끝으로 '저리로서 오시리라'라는 말이 뒤따르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사람들이 본 것과 똑같은 가시적인 형태로 마지막 날에 오신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 하시기 위해 당신의 통치가 갖는 포촉할 수 없는 위엄 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다(이 날은 아직 살아 있는 자들과 이전에 이미 죽은 자들을 모두 기습할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저들의 행위에 따라 갚아주실 터인데 저들의 행위를 통해 신, 불신으로 인정되는 바에 따라 그리하실 것이다. 이 심판이 우리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재림하시는 바로 그분에 의해 내려진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위로가 된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을 믿으라는 가르침을 받을때, 이것은 성서 안에서 그분에 관해 약속된 모든 것을 그분으로부터 기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의 능력을 통하여 어디서든지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 지탱, 보존하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신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불러 당신에게로 이끄시는데 이는 우리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렇듯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는 당신의 빛으로 우리를 비워주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부요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로 완전히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탐욕에서 나오는 악덕들을 매일매일 점차적으로 제어하시며 멸해 버리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떤 선행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성령님의 은혜의 열매요 효력인 것이다.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엔 단지 어두운 지성과 왜곡된 마음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사오며'

 

우리는 이미 교회가 유래한 근원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교회를 믿으라는 것이 명령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선택된 자들은 신앙의 띠를 통해 한 교회, 한 공동체,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되어 있음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교회의 지도자, 군주 그리고 한 몸의 머리와 같으신 분이심을 우리로 확실히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우리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모두 회집되도록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실히 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공동체는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결코 둘이나 셋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오직 한 머리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오직 한 몸안에서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 몸의 지체들처럼 한 체질적 성향을 통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들은 참으로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한 믿음, 한 소망, 한 사랑 안에서, 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유산인 영원한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또한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 교회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에 의한 내적 갱신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말인 '성도의 교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즉 성도의 교제란 이런 것이다 : 성도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을 때, 비록 이 은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어졌다 하더라도 모든 성도들이 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에 서로 참여 하면서도 그들 각자는 특수한 은사들과 상이한 직무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모든 선택받은 사람들은 부름을 받고 모여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 확고하세 된 우리는 이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죄를 믿사오며'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사죄는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한 길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왕국 안에 붙들어 두고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모든 의는 사죄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긍휼을 통하여 이 의를 얻는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짓눌리고 고통 받으며 혼란을 받게 될 때 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낙담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며, 마치 무거운 짐에 눌린 것처럼 신음하며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증오와 죄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의 육과 그들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제어하기에 힘쓰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로운 사죄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의 피를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 죄를 속량해 주셨다. 우리는 이 피 안에서만 죄로부터의 정결과 죄에 대한 보속을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아 교회의 몸에 접합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사죄와 은혜를 얻는다는 사실을 믿도록 교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사죄는 어떤 다른 곳으로부터도, 어떤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도록 교훈 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 교회와 성도들의 교제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여기 이 고백은 먼저 장차 있을 부활을 기대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동일한 능력으로 대심판 이전에 죽음을 통해 소멸된 육체들을 먼지와 부패로부터 새 생명에로 불러내신다는 것이다. 그때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의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돌발적인 변형을 통해 새 생명에로 옮아가게 된다.

 

부활은 선인들에게나 악인들에게 모두 공통된 것이긴 하나 서로 다른 조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마지막 말(=영생)이 여기에 첨가되었다. 이 말은 우리 신자들의 상태와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구분하고 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이러하다 : 우리가 부패로부터 정결에로, 죽음으로부터 영원불멸한 상태로 일으킴을 받아 영육간에 영화롭게 된 후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의 변형이나 부패의 가능성도 없는 영원히 존속될 복락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여 영접하실 것이다. 이 복락은 생명과 빛 그리고 의에 있어서 참되고도 온전한 완성의 극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모든 충만함을 지니신 주님께 불가분리적으로 꼭 붙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락은 모든 빛과 기쁨, 능력과 행복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실재들은 현재로서는 인간의 인식능력 밖에 있는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그날이 올 때까지는 우리가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이를 바라볼 뿐인 것이다.

 

반면에 참되고 생동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또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은 유기된 자들과 악한 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악마와 더불어 불멸하는 죽음과 불가변의 부패 속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나라의 모든 기쁨, 능력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다른 은사들과는 격리되어 영원한 어두움과 영원한 고통에로 정죄를 받아 결코 죽지 않는 벌레들에 의해 갉아 먹힘을 당하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에 의해 괴롭힘을 받게 될 것이다.

 

 

* 소망

 

만일 신앙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기만할 수 없는 그리고 공허하거나 거짓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라면, 이러한 확신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약속들은 참된 것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소망이란 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진실로 약속되어졌다고 믿는 바로 그 약속들에 대한 기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듯 신앙은 하나님께서 참되신 분임을 믿는다. 반면에 소망은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실 것을 기대한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반면에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언제나 그런 분으로 행동하시기를 기대한다.

 

신앙은 영생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 믿는다. 반면에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드러나 나타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신앙은 소망에 근거해 있는 기초이다. 반면에 소망은 신앙을 부양하면서 보전한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엇을 기대한다던지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연약한 신앙은 소망과 인내의 기다림을 통하여 지탱되고 보전되는 것이다.

 

 

* 기도

 

참된 신앙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한편으로 자신이 얼마나 가련하고 모든 은사에 결함이 많은 존재인가 하는 사실과 자기 자신에게는 자력구원에의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자신의 가련함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찾는다면 이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곳에서 이를 구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그는 당신의 관대하신 마음과 선하신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주시고 또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주신 주님의 뜻을 명상한다.

 

즉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인간의 모든 신앙이 이 사랑하는 아들을 바라보는데 열중하며, 인간의 모든 기대가 이 아들에게 달려있게 하며, 인간의 모든 소망이 이 아들 위에 근거되고 또 이 아들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구해야 하며, 하나님 안에 분명히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바를 기도를 통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님이시고, 모든 선한 것들의 분배자이시며, 우리를 권하사 필요한 것을 당신께 구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심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에게 기도하거나 간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보물이 땅속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관심하여 그것을 그냥 거기에 놔둔 채 수고하여 파낼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 기도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일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대화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바램, 기쁨, 하소연 등 요컨대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내어 놓기 때문에, 주님께 간구할 때에는 단지 목구멍이나 혀로써 말하려 하지 말고 마음의 심층에 내려가 거기서 그분께 간구하도록 대단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혀가 기도에 있어서 때때로 유용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혀는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생각에 주의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특정된 우리 육체의 이 부분은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상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사 29장, 마 15장)를 통해 마음은 당신께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입술로는 당신을 경배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매우 준엄한 징계를 선언하실 때, 마음없는 기도가 과연 무슨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주고 계신다.

 

만일 참된 기도가 마음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때 우리 마음이 갖는 순수한 감정의 작용이라면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의 영예에 대한 모든 생각, 자신의 품위에 대한 모든 생각 그리고 자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벗어 버려야만 한다.

 

이처럼 선지자(단 9장, 바룩 2장)도 우리 자신의 의에 따라서가 아니고 주님의 크신 긍휼하심에 따라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의 이름이 단순히 우리 가운데에서 불리워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가련함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우리 자신을 높인다거나, 우리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애들이 어버이들에게 격의 없이 자기들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재난을 고백하며, 슬픈 탄식으로 부르짖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정은 우리를 더욱 더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부추기기 위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강하게 움직여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한 모든 것을 받게 된다고 확신시켜주는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위로를 얻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진리(=약속)를 확신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되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며, 찾으라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시편 50편에서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원하며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에 나오는 성구는 기도의 두 종류를 보여주고 있다. 즉 간청 혹은 요구 그리고 감사의 행위가 그것이다.

전자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마음의 바램들을 하나님 앞에 털어 놓는다. 후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한다.

 

이 두 기도 방식을 우리는 부단히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심한 빈곤과 궁핍에 눌려 괴롭힘을 받고 있는 존재들이므로 우리 중에서 아주 완전한 자들까지도 쉬임 없이 탄식하고 신음하며 모든 겸손으로 주님께 간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주께서 당신의 인자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사가 너무나 풍성하고 또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던지 그분의 기적의 행위들이 너무나 위대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찬양의 이유와 감사의 행위가 우리에게서 결할 날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주기도문 해설

 

긍휼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환난날에 당신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지만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마땅히 구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또 우리가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무지를 도우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당신의 것으로 보충해 주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인자하심으로부터 우리는 특별한 위로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주님의 입술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주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가 주님께 비합리적인 것 엉뚱하거나 부적절한 것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것을 결코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기도의 모범은 여섯 가지 간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중 처음 세 가지는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간구들을 드릴 때엔 자신의 유익을 바라보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함이 마땅하다. 다른 세 가지 간구들은 우리 자신과 관계있는 것으로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유익에 속한 것들을 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처음 세 가지 간구에서 구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정신을 우리 자신의 유익으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다.

 

반면에, 나머지 세 간구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만 구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기도문에서는 모든 기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규칙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이름으로는 그 어떤 기도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이때 우리는 벌써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면전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 마땅한 이러한 속수무책의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해내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를 중재자요 변호인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중재자의 이름으로 구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거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단지 엄위의 보좌만이 아니라 은혜의 보좌이기도 하다. 우리는 필요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보좌 앞에 결연히 서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명령과 하나님께 간구 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지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라는 특별한 명령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는 것이다(요 14, 16장).

여기에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엄위를 나타내 준다(우리의 정신은 무지하여 다른 표현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 앞에는 하늘보다 더 빼어나고, 더 위엄으로 가득찬 실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 말(=하늘에 계신)은 또한 하나님은 고귀하시며, 능력이 있으시며, 불가해한 분이시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워질 때마다 우리의 생각을 하늘을 향해 높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육적이고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거나 우리 자신의 이해의 폭에 따라 하나님을 측정하지 않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욕망에 종속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첫째 간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분의 속성들 곧 그분의 지혜, 선, 권능, 의, 진리 그리고 긍휼 때문에 그분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이 그분의 속성들 때문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간구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분 안에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위엄이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함인 것이다. 즉 그분의 위엄이 참으로 인정받고 찬양 받게 하기 위함이 것이며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든지 그분의 모든 사역들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이 징벌하실 때면 의롭다 여김을 받으시고, 그분이 용서하실 때면 긍휼하신 분으로 여김을 받으시며, 그분이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면 참되신 분으로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요컨대 그분의 영광이 각인되어 빛나지 않는 실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분께 대한 찬양이 모든 인간들로부터 모든 언어를 통해 울려나오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두번째 간구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행하는 모든 사역들이 당신 자신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의 풍성함을 나타내 보이도록 당신의 자녀들을 성령을 통해 인도하시고 다스리심을 뜻한다.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에 굴복하려 하지 않는 유기된 자들을 심연 속에 빠뜨려 혼비 백산케 하며 또 저들의 고약한 교만을 꺽으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 즉 우리는 모든 행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수효를 주님께서 날마다 증가시켜 주시기를 위해 기도한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당신의 풍성하신 은혜를 계속하여 넉넉히 부어 주시도록 위해 기도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성도들을 당신 자신과 완전히 결합시켜 충만히 채우실 때까지 성도들 안에 점점 더 능력 있게 거하시고 통치하시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탄을 그의 나라의 거짓 및 어두움과 함께 흩어버리시고 폐하시기 위해, 새로운 영적 각성을 통해 당신 자신의 빛과 진리를 날마다 비춰주시기를 위해 간구한다.

 

우리가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완전해지고 성취되어지기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즉 심판의 날이 임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성도들을 영광 가운데로 영접하시고 모든 사탄의 통치를 꺾어 멸하신 후 당신만이 높임을 받으시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도록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세번째 간구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이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하신 것처럼 땅에서도 만사를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기를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시며 또 모든 의지들을 당신께 굴복시킴으로 만사를 당신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결말로 이끌어 가시기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이 간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바램을 버리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정신적 성향들을 주님께 굴복시켜 바치며, 만사를 우리의 염원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며 결정하시는 바에 따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뜻과 배치되는 우리의 바램들을 주님께서 공허하고 효력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시기만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우리들의 낡은 영을 멸하시사 주님의 뜻과의 순전한 일치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욕망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새 영과 새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원치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소원하시기만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의 영의 조명을 통하여 주님의 뜻에 맞는 것들은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들은 미워하며 또 증오하는 것을 배울 수 있기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넷째 간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사물들 중 우리 육신의 부양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곧 음식과 의복 뿐만 아니라 우리의 빵을 평화로운 조건 하에서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간구한다.

이 간구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부양하시고, 보전해 주시도록 주님의 섭리에 우리 자신을 의탁하며, 주님의 돌보심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긴다. 왜냐하면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당신의 보호와 돌보심 안에 두는 이까지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빵 한조각 물 한방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기대하게 함으로써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도 당신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훈련시키신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간구할 때 이것은 우리가 단지 오늘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만을 바래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먹이신다면 내일도 또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신뢰를 우리가 가져야 함을 뜻한다.

 

비록 우리가 현재 풍요함을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생계 수단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축복의 주입을 통해 이를 번창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해주실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매일같이 우리의 빵을 간구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시간마다 그 사용을 허락하시어 우리에게 그 한 부분을 분여해 주실 때에만 우리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식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라고 부를 때 하나님의 선하심은 더욱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어떤 권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귀속될 수 없는 것을 우리의 것이 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옵시고'라고 간구할 때 이 말의 뜻은 이러하다 : 비록 어떤 것이 우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다섯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사죄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위해 간구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나 예외없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를 빚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죄에 대한 대가로써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며, 만일 우리가 사죄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부터 오는 값없는 용서를 통해 무죄 방면되지 않으면 결코 이 죄의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에게도 사죄가 주어지기를 위해 간구한다. 즉 그것이 행위를 통해서든, 말을 통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상처를 입한 자들을 우리가 용서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귀절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나 하는 것처럼 부가된 조건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증오, 질투 그리고 복수심으로부터 정결하게 될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을 우리의 양심 안에서 확신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틀림없이 우리를 당신의 긍휼 안으로 영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표인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 표를 통해 복수심을 지니고 용서하기를 거부하면서 마음속에 뿌리 박힌 적의를 견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에 속한 수로부터 제외시키신다. 이런 자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간구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동료인간들에 대해 품고 있는 분노는 결국 그들 자신 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시험도 당하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드리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정적상태를 통해 맥이 빠지고 태만해지기 쉬운 우리는 오히려 이러한 시련들을 통하여 깨우침과 자극을 받으며 심적으로 동요되어질 필요가 많이 있다. 주님께서는 수치, 빈곤, 시련 그리고 다른 십자가들을 통하여 당신의 선민들을 가르치심으로써 매일같이 이들을 시험하고 계신다.

 

우리가 간구하는 바는 주님께서 시련들과 더불어 이 시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수단도 아울러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이 시련들에 의해 패배당하여 쓰러지지 않도록 해 주시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분의 능력으로 굳건해지고 강하여져서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권세들에 대항하여 굳게 설 수 있도록 해주시라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주님의 보호와 후원을 받고, 성령님의 은혜로 성화되며, 주님의 지도를 통해 다스림을 받게 된 후 이것을 넘어서서 악마와 죽음 그리고 지옥의 모든 책략들과 대항하여 불굴의 상태로 서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드리는 우리의 간구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악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들이 사랑의 법에 따라 측정되어 자기를 얼마나 원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이웃을 생각함이 없이 자신만을 위해 자신에게 좋은 것을 간구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시고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염려하라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 기도에 있어서의 끈기

 

끝으로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어떤 법칙 밑에 예속시키거나 그분에게 어떤 조건을 부과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상황에 매어 놓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그분께 어떤 간구를 드릴 때 우리는 먼저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의 뜻이 이뤄지이다.' 이로써 우리는 벌써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있는 것인데 이는 우리의 뜻이 마치 굴레를 통해 저지되고, 억제 되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자신 밑에 굴복시키거나 예속시키려는 자만심을 우리가 결코 갖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우리 마음이 이러한 복종을 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진 후 신적 섭리의 선하신 뜻에 따라 다스림을 받게 되면, 우리는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을 손쉽게 배우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에겐 어떻게 여겨지든지 간에,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과 비록 기도들이 사람들의 판단으로 볼때는 하나님에 의해 무시되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둔한 귀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심으로 그분의 때에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끝으로 만일 오랫동안을 기다린 후에도 우리의 감관이 기도를 통해 얻은 유익이 무엇인지 포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기도의 열매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감관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해 줄 것이다 :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노라고! 동시에 신앙은 우리로 빈곤 속에서 풍성함을, 고통 가운데서 위로를 얻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기다림과 인내를 실망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분만이 모든 것을 충분히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현재 당신 자신 안에 모든 선한 것들을 지니고 계시며, 미래에는 이것들을 우리에게 완전히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성례

 

성례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먼저 성례들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줄때 우리의 믿음을 단련한다.

주님께서는 고상하고 천상적인 비밀들이 가시적인 물질들을 매체로 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무지한 육을 위해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성례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성례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물질들의 본성 안에 어떤 천상적인 특성들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 물질들에게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약속은 언제나 선행하며, 가시적인 표는 이 약속을 확증하고 날인하며 또 이 약속을 우리에게 보다 확실히 해주기 위해 부가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한 능력에 적합하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작고 나약하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모든 측면에서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모든 수단을 통해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 즉시로 크게 뒤흔들리게 되며, 동요하게 되고 나약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성례들은 사람들 앞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단련한다. 즉 우리의 신앙이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도록 고무되어질 때 그러하다.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란 주님께서 우리의 약한 신앙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신 뜻을 제시해 주시고 또 증거해 주시는 외적인 표이다.

보다 간결하고 분명하게 말하면, 성례란 외적인 표를 통해 공표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언이다. 기독교회는 두가지 성례, 곧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하고 있다.

 


세례

 

세례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돕고 둘째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것이다.

신앙은 약속을 바라본다. 이 약속을 통해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제공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든 재화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례는 특히 두 가지를 상징해준다 :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얻는 죄씻음이다.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얻은 육의 제어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민들에게 죄사함을 얻기 위해 세례를 받으라고 명하셨다. 또한 바울은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된 교회를 생명의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하시며 물의 씻음(=물세례)을 통해 정결하게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아 그 분의 죽음 안에서 장사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에서 행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물이 죄씻음과 중생의 원인이나 방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러한 은사들에 대한 인식이 성례(=세례) 안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것 뿐이다. 이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믿는 바 그것을 우리가 실제로 받으며, 얻으며, 취득함을 뜻한다.

 

우리가 이 은사들을 처음 알게되건 혹은 우리가 이전에 이미 인식했던 그 은사들을 이제 보다 확실하게 하든 세례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신앙고백에 유익하다. 왜냐하면 세례란 우리가 동일한 종교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속에 편입되어 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표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맺으시는 계약은 무엇보다도 세례를 통해 이루어 지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들은 영원한 계약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계약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찬

 

성찬의 신비에 부가되어 있는 약속은 그것이 무엇 때문에 제정되었으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즉 이 신비는 주님의 몸이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주어졌으므로 그것은 이제 우리의 소유이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소유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히 해준다. 또한 이 신비는 주님의 피가 우리를 위해 단번에 뿌려졌으므로 그것이 언제나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이 신비의 가시적 표는 빵과 술(=포도주)인데 주님께서는 이 두 표들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에의 참된 교제를 제공하신다.

 

그러나 이 교제는 영적인 것으로써 이를 위해서는 성령님의 메는 띠만으로 충분하다. 즉 이 교제는 그것이 빵의 형체 안에서의 육의 현존이든 혹은 포도주의 형체 안에서의 피의 현존이든 그 어떤 제한된 물적 현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움을 받아 우리가 순례자로서 거하고 있는 이 땅을 떠나시긴 했다 하더라도, 이 장소의 격리가 주님의 능력을 해체시켜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양육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는 아주 확실하고도 명백한 교훈을 해주고 계시므로 우리는 성찬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풍성함을 지니시고 마치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그분을 보며 우리의 손으로 그분을 만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분명히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의 능력과 효력은 매우 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을 통해 단지 영생에 대한 확신만을 우리의 영혼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불멸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은 주님의 불멸의 육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체로써 주어진 것은 그것들이 단지 우리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양식이 됨을 우리로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된 빵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이 유비를 생각해야 한다.

 

즉 빵이 우리의 육적 생명을 지탱하고 유지해 주듯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적 생명의 양식이요 보호책이라고! 그리고 포도주가 우리의 육에 가져다 주는 동일한 혜택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영적으로 받는다고!

 

이 성찬의 신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줌과 동시에 그렇게도 명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은망덕하지 말고 마땅한 찬미를 통하여 그분을 기리며 감사의 행위를 통해 이 성찬을 시행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나아가 이 성찬의 신비는 한 몸의 지체들이 상호 연결되어 하나로 결합되어지는 것과 똑같은 일체감을 가지고 우리가 서로를 열렬히 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도록 권면하시고,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심으로 만인을 당신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신 이 경우보다 우리의 상호 사랑을 더 강하고 더 짜릿하게 불러 일으키고 격려해 주는 자극제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는 없었다.

 

 

* 교회의 목사들과 그들의 권위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성례들이 인간들의 봉사를 통해 우리에게 시여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백성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고 성례들을 거행하며 좋은 모범을 통해 사람들을 거룩하고 순수한 삶에로 훈련시키는 임직된 목사들이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 훈육과 질서를 경멸하는 자들은 사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 이들은 분파주의자들처럼 그러한 영적 직무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이탈해 버린다.

주님께서 언젠가 증언하신 말씀은 실로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진다 : 즉 주님께서 보내신 목사들이 영접을 받을 때 이것은 주님 자신이 영접을 받는 것이요 저들이 거절을 당할 때 주님 자신이 거절을 받는다는 것이다.

 

목사들의 목회직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확고부동한 직책이 되어 지도록 목사들에게는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권한에는 약속이 부가되어 있다 : 즉 그들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거나 풀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맨다는 것은 죄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을 뜻하고 푼다는 것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뜻한다고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복음이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가르칠 때 어떻게 푸는지를 말해주고 있으며, 그가 모든 불순종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다고 말할 때 어떻게 매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복음의 개요는 우리가 죄와 죽음의 노예라는 것,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며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다 준엄한 정죄의 새로운 사슬에 의해 속박을 받게 된다는 이것이다.

 

그러나 성서 안에서 목사들에게 부여된 권위는 전적으로 말씀의 봉사에만 억류되며 제한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권위를 사람들에게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에 부여하신 것이며, 사람들이란 단지 주님께서 이 말씀의 봉사자로 삼으신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봉사자로 임명된 목사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과감하게 수행할 수 있기를! 저들이 세상의 모든 권세, 영광 그리고 고귀함을 굴복시켜 이 말씀의 엄위하심에 복종케 할 수 있기를! 저들이 이 말씀을 통하여 가장 위대한 사람들로부터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기를! 저들이 그리스도의 전을 세우며 사탄의 주권을 파멸할 수 있기를! 저들이 양들을 치며, 이리들을 죽이고, 순종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돌이키며 설득할 수 있기를!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수행할 수 있기를!

 

그러나 만일 저들이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저들 자신의 머릿 속에서 나온 몽상과 공교한 말을 따를 경우, 저들은 더이상 목사로서 용납되어질 수 없다. 이들은 해로운 이리들이므로 마땅히 면직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지 말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인간의 전통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일반적인 규칙을 소유하고 있다 : 즉 교회에서는 모든 일들이 단정하며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얽어 매는 사슬처럼 기능하여 교회 안에 질서와 예절을 유지해 주며 평화와 일치를 견지해 주는 법규들을 인간의 전통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그것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양심을 구속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것들이 예배에 관련되거나 경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한, 이 규정들은 바울사도가 말한 규칙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하나님의 영광에 필요하기나 한 것처럼 영적인 법이라는 미명 하에 양심을 속박할 목적으로 제정되는 규정들에 대해서는 힘차고 단호하게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얻어 주신 자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참 종교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오직 당신의 말씀만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의 것이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과 '인간의 계명이 가르쳐지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헛되이 섬김을 받는다'는 말씀은 확고부동한 진리가 되어야 한다.

 

 

* 출교

 

출교란 명백한 방탕자, 간통자, 강도, 살인자, 수전노, 강탈자, 부정한 자, 싸움꾼, 폭음폭식가, 술주정뱅이, 폭도 그리고 낭비가들이 권고를 받고도 교정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성도의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말한다.

 

교회가 이들을 출교할 때 이들을 항구적인 파멸과 절망 속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생활과 품행을 정죄하려는 것 뿐이며, 그들이 행실을 고치지 않을 경우엔 정죄받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주기 위함이다. 이 권징은 신자들 사이에 필요불가결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머리되신 분의 영예를 손상시키는 악취나며 부패한 자들에 의해 더렵혀지거나 오염되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권징은 성도들이 행악자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부패,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또한 행악자들의 악이 징벌을 받는 것은 당사자 자신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관용을 통해서는 더욱 더 완고해지는 반면 권징을 통해서는 수치심에 의해 겸허해져서 자기 갱신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행악자들이 스스로를 갱신할 경우 교회는 이들을 교회의 공동체 안으로 그리고 전에 배제된 바 있던 일체성에의 참여에로 관대하게 다시 받아들인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판결을 완강하게 멸시하거나 또는 성도들의 판결에 의해 정죄되었다는 사실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판단이 바로 당신 자신의 판결 선언이며 성도들이 땅에서 행하는 바는 하늘에서 인준되어진다고 증거해 주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들은 타락한 자들을 정죄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자신을 갱신한 자들을 다시금 은혜 안으로 영접할 수 있다.

 

 

* 정부

 

주님께서는 정부의 직무가 단지 당신 자신에 의해 승인받은 것이요 당신 자신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이 직무를 우리에게 강력히 추천하셨고, 이 직무의 품위를 아주 명예로운 칭호들로써 영예롭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정부의 직무가 당신 자신의 지혜로부터 나온 행위라고 단언하신다 :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그리고 다른 곳에서 주님은 정부의 직무를 맡은 이들을 '신들'이라 칭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 자신의 사역을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다른 개소에는 그들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공의를 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보다 길게 논술하고 있는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아주 분명히 가르치기를 다스리는 자들이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것이며, 다스리는 자들은 선해하는 사람들을 칭찬함과 아울러 행악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징벌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군주들과 시장들은 자신들의 직무로 누구를 섬기는 것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하며 하나님의 종이요 대리자라는 그들의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그 어떤 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전 관심사는 종교(예배)의 공적 형태를 순수하게 보전하고, 좋은 법률을 통하여 백성의 삶을 지도하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복들의 행복과 평화를 마련해 주는데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의와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곧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통치자들에게 특별히 권고 되었다.

 

정의란 무죄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며, 지지해 주며, 보전해 주며, 해방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공정한 재판이란 악한 자들의 방약무인함에 대항하여 맞서며, 그들의 폭력을 꺾으며, 가증한 범죄행위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복들의 의무는 단지 그들의 정보 당국자들과 상관들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그들의 안녕과 행운을 주님께 빌며, 자발적으로 그들의 권위에 굴복하고, 그들의 법령과 규약들에 복종하며, 그들에 의해 부과된 짐들 곧 세금, 통행세, 공물, 시민봉사, 징용 그리고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을 거부하지 않는데 있다.

 

우리는 법에 따라 그리고 통치자의 의무에 상응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만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력을 포악하게 남용하는 자들도 인내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엔 우리가 합법적인 질서를 통해 그들의 멍에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그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한 군주가 인간의 안녕을 보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증거임과 마찬가지로 불의하고 고약한 군주는 백성의 죄를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채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자에게든 후자에게든 권력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들에게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항하는 일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확실한 사실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복종에 있어서 언제나 한 가지 예외사항만은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이 때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철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분의 법령에는 모든 왕들의 명령이 마땅히 굴복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왕들의 왕이시다. 주님께서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입을 여실 때 모든 인간들은 그분의 말씀에 경청해야 한다. 그분만이 모든 인간들 위에 서서 경청되어져야 할 유일한 분이시다. 결국, 우리들이 우리 위에 세움을 입은 사람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은 단지 주님 안에서만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을 거스려 어떤 명령을 내릴 경우 우리는 그것을 행하거나 거기에 마음을 쓰지 말고 오직 성서에 있는 이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 : '사람들에게보다는 하나님께 더 복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