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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John Calvin

존칼빈의 기독교 교리 #1 하나님 인식, 인간, 자유의지, 죄와 죽음, 구원

 

*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태어났다

 

제아무리 미개하고 또 야만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그로 미뤄보아) 우리 인간은 창조주의 위엄을 인식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즉 그분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그 무엇보다도 존경하며 모든 두려움과 사랑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 속에 심겨진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자신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 없애버리려고만 애쓰는 불신자들은 제쳐놓고,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들은 이 덧없고 짧은 인생이 영원불멸에 대한 명상 이외의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영원불멸의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된 걱정과 염려는 하나님을 찾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모든 애정으로 그분을 열망하며, 단지 그분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는 일에 두어야 한다.

 

 

 

*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차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종교를 잃어버릴 경우 매우 가련하게 되며 동시에 동물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일반적인 견해의 일치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에 신 인식과 신앙심으로부터 전적으로 격리되어 있다고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를 표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 대다수가 진정으로 신 경외에 감동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항상 그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한 생각에 의해 속박을 받고 있다.

즉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의 권능으로 자기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권능에 대한 생각에 놀란 그들은 행여 자신들의 지나친 신 경시 행위가 이 신을 자극시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신을 어느 정도는 숭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난잡하게 살며 모든 단정함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경멸하는 거대한 안전감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엄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오성이 가지는 어리석고 경솔한 허영심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참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함은 그들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하나님 대신 그들 자신의 마음의 환영과 망상을 경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더 큰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서 공경하며, 그분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참된 열정을 말한다.

 

이러한 열정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하나님을 무엄하게도 고안해 내려 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구하며, 자신들에게 계시되고 분명하게 나타난 그대로만 하나님을 이해할 뿐이다.

 

 

 

*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인식해야 될 일

 

하나님의 위엄은 그 자체에 있어서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으며 또 그것에 의해 납득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거대한 광채에 의해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탐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의 위대하심을 예배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롬 1장, 히 11장)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의 사역들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또 그분을 정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가 주님께 대해 다른 방법으로는 볼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경박하고 무익한 사변을 통해 우리의 이해력을 붙잡아 매어놓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우리에게 영적 영양분을 산출해 주고 우리 안에 참되고 견실한 경건, 즉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을 강화시켜 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만물의 시작이요 기원이신 우리 하나님의 영원 불멸하심, 하나의 거대한 기계장치를 만드시고 그것을 지탱하고 계시는 그의 권능, 하나의 거대하고 혼란되어 있는 다양한 물체를 조성하시고 이를 아주 독특한 질서로써 계속 다스리시는 그의 지혜, 만물이 창조되고 또 계속 지탱되고 있는 원인인 그의 선하심, 선인들의 보호와 악인들의 징벌에서 놀랍게 나타나고 있는 그의 공의, 우리를 회심에로 이끄시기 위해 그의 지극히 크신 관대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인내해 주시는 그의 긍휼을 명상한다.

 

만일 우리의 조야함이 이처럼 거대한 불빛에 대하여 눈멀게 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 가르침을 받는데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풍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맹목만을 통해서 범죄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타락은 극심하여 하나님의 사역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악의적이고 삐뚤어진 태도를 취하지 않는 구석이란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고, 창조물 안에서 명백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의 모든 지혜를 우리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그의 사역들을 통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로 향해가야 한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사역들이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척도에 의해 측정되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유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 모든 의, 모든 지혜, 모든 능력, 모든 선 그리고 모든 인자하심의 근원이요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모든 좋은 것은 예외없이 그분으로부터 연원하므로 모든 찬양이 당연히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상술한) 모든 것들이 하늘과 땅의 각 부분에서 분명히 나타나 보여진다 하더라도 결국 성서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것들이 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그것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주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의 생명, 그의 지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향해 그의 공의, 인자, 그리고 선하심을 행사하시는지 고찰하게 된다.

 

 

 

* 인간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고상하게 입혀주신 그 존엄으로 자신의 창조주를 찬미하며 당연한 감사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탁월한 본성을 신뢰하고, 그것이 정작 어디서 연원하여 존속하고 있는지를 망각한 채 오히려 주님 밖에서 자기관철을 해 보려고 애썼기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이 어리석게도 뽐냈던 하나님의 은사들을 박탈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이 그분의 관대하심에 의해 부요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경멸했던 바로 그 하나님을 이제는 모든 자랑이 상실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씨로부터 유래한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져 버렸기 때문에 육으로부터 육으로 태어나게 된다.

 

비록 우리의 몸이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 안에서) 육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우리가 눈을 돌려 바라보는 인간의 어떤 부분 안에서도 불결하지 않고, 속되지 않으며, 하나님께 가증스럽지 않은 그 무엇을 우리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지혜는 맹목이 되고 또 무한한 오류에 휩싸여 있어서 늘 하나님의 지혜와 대립해 있고, 인간의 의지는 악하고 부패한 격정으로 가득차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보다 더 혐오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의 힘은 모든 선한 일에 무능하게 되어 미친 듯이 죄악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자유의지

 

성서는 종종 인간이 죄의 종이라고 증거한다.

 

이는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의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하지 않고, 비뚤어지지 않고, 부당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인간이 계획하거나 갈망하거나 기도할 수 없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죄의 독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죄악의 열매밖에는 산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에 의해 강제를 받아 죄를 범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단히 자발적인 성향을 가진 의지의 동의를 얻어 범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정의 부패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의를 매우 혐오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악에 열성적이기 때문에,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불리우는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결론한다.

 

 

 

* 죄와 죽음

 

성서에서 죄란 모든 악덕의 근원인 인간본성의 부패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생겨나는 악한 탐욕들 그리고 이 탐욕들로부터 나오는 가증한 악행들 곧 살인, 도적질, 간음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범죄들이 총칭된다.

 

그러므로 모태로부터 죄인인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 밑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자신 위에 더욱 무겁게 쌓아 놓는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하여 줄곧 죽음에로 더욱 가까이 향해가고 있다.

만일 모든 범죄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가증할만한 것이라면, 크나큰 죄짐으로 인해 억눌리고 극도의 추잡함에 의해 더렵혀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진노가 가져다 줄 명백한 수치 말고 또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사유는, 비록 그것이 인간을 공포감으로 무력하게 만들며 절망으로 짓누를지라도, 우리를 위해 필요하다.

즉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가 박탈당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내던져지며, 삶에 대한 모든 기대가 거부당한 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빈궁, 가련함 그리고 수치를 인식함으로써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며 또 우리 자신의 부패, 무능 그리고 저주를 자인함으로써 우리가 거룩, 능력 그리고 구원의 모든 영예를 (오직) 주님께 돌리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다.

 

 

 

* 구원과 생명에로의 복귀

 

우리의 무가치함을 제시해 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 지식이 진실로 우리 마음 속을 파고 든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을 얻는데 쉽게 접근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매우 악질적인 역병들, 곧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무사안일의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신뢰를 파괴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때 이미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을 열어주신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지금까지 땅에 겨냥되어 머물러 있던 눈을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며, 자기 자신 안에 안주하던 우리는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주님을 열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리의 죄악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긍휼하신 아버지께서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고민하며 당혹해하는 우리에게 자진하여 나타나사 우리의 연약함에 알맞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을 오류에서 바른 길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파멸에서 구원으로, 악마의 나라에서 그분 자신의 왕국에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천상의 삶을 유산으로 주시기를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이 단계, 곧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과 죄짐에 의해 몹시 고통을 받아 신 경외에로 부추겨지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 단계로) 설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인식 안에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율법을 먼저 선물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