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인식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을 이해하며 그분이 우리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인식한다.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을 불러 그리스도께 참여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은 확실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고 강퍅하게 된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히 특별한 은혜를 멸시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향유하며 그분을 자신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서 영접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그분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그분을 추종하는 것이다.
□ 선택과 예정
(복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의)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우리는 신적 결의의 크신 비밀에 대해 반드시 숙고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을 통해 당신의 자녀로서 그리고 하늘나라의 상속자로서 예정하신 사람들 안에서만 그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창세 이전에 동일한 하나님의 결의에 의해 유기된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진리는 (저들이)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냄새라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주님께서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준엄한 심판을 행사 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인식되어지도록 놔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게서는 그 이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그럴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이는 우리의 영이 가지는 불완전성이 그처럼 거대한 명료성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고, 우리의 빈약함이 그처럼 위대한 지혜를 깨달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거기까지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 이르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들의 영이 가지는 무모함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솔로몬이 말한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엄위를 궁구하려 하는 자는 그분의 영광에 의해 짓눌림을 당하고 말것이다.'(잠 25:2)
우리로서는 단지 이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즉 주님의 섭리는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가리워 있다 하더라도, 거룩하며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령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멸하기 원하신다 가정한다고 해도 그분은 그렇게 하실 권리를 갖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오직 그분의 지고하신 선하심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분의 긍휼하신 그릇이고 (이들은 사실로 그러하다) 유기된 자들은 그분의 정당한 진노의 그릇임을 인정하자. 전자나 후자 양편 모두를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논거와 이유로 삼도록 하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구원의 확신을 굳게 할 목적으로 하늘 안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들에 대해 결의해 놓으신 것을 궁구하려 들지 말도록 하자 (이런 탐구는 비참한 번민과 교란 작용을 통하여 우리를 불안하게만 만들 뿐이다). 차라리 우리는 주님께서 이 확신을 충분하고도 견고하게 만들어 주신 바로 그 증거로써 만족하자.
왜냐하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생명에로 예정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여 영접한다면 선택의 보증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에서 구하는 것이 영생에 참여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그분은 시초부터 생명이셨는데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신바 된 것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를 더 이상 궁구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거울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를 인치시고 굳게 하시는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다.
* 참 신앙
두뇌 속에서만 움직일 뿐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지식 또는 성서에 대한 어떤 이해가 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개연성 있는 근거에 의해 입증되는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 확실히 결단하는 확고 부동한 마음의 신뢰이다.
신앙의 정의는 이처럼 약속의 내용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 신앙이란 바로 이 기초 위에 의거해 있기 때문에 이 기초가 제거된다고 가정할 경우 신앙은 즉시 무너져 버리거나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복음적 약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긍휼을 제시하실 때 확신을 가지고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약속 하시는 분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신앙을 통해 그분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의는 신앙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도(히 11장)의 정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신앙)을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것들의 확실학고도 분명한 소유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사도는 신앙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명증 곧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우리가 소망하는 영생의 명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이렇듯)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항구적인 대상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과 신앙이 신적 긍휼의 모든 풍요로움을 관조하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 신앙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고가 하나님의 천상적 비밀에 대해 얼마나 맹목적이며 또 우리의 마음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정직하게 숙고한다면, 우리는 신앙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모든 능력을 무한히 능가한다는 사실 그리고 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값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고전 2장).
'만일 사람 속에 있는 영만이 사람의 생각에 대한 증언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영 외에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들에 있어서까지도 우리 안에서 불확실하게 나타난다면, 우리의 눈이 보지 못하고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약속하실 때 어찌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게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신앙은 성령님의 조명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은 비추임을 받고 우리의 마음은 확신 안에서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매우 확실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을 통하여 시행하시리라 약속하신 모든 것을 결국은 성취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이런 연고로 (고후 1장과 엡 1장)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신적 진리의 확실성을 견고히 해 주는 담보라 불리워지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날의 고대속에 인봉해 두는 도장이라 불리워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라(롬 8장)는 사실을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구불변한 신앙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영생은 이것이니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혹 죽을 지라도 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하게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불결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께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벗어버리면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고,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불의했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 안에서 어떤 의를 벌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불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의 의가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우리에게 부여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의를 한마디로 사죄라 부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가 종종 하는 바, 행위 의와 신앙의 의를 서로 비교할 때 그리고 전자가 후자에 의해 파기되었다고 가르칠 때 (롬10, 빌3)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말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 의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으며 이 의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사도신경 해설에서 살펴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근거해있고 의거해 잇는 모든 신조들이 사도신경에는 순서있게 논급되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신앙을 통해 거룩하게 된 것은 율법에 복종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우리의 의인을 위해 중재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를 당신의 영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우리를 성화시켜 정결하고 흠이 없게 만드신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분 위에 한량 없이 임하셨으므로 - 지혜의 영, 지성의 영, 권고의 영, 능력의 영, 지식의 영, 주님 경외의 영 -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데서 얻으며 그분에게 주신 바 된 은혜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자랑하면서도 그분의 영에 의한 성화를 전적으로 결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자들이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단지 의뿐만 아니라 거룩함이 되셨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거룩함을 동시에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통하여 당신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약속해 주심과 동시에 우리 마음 속에 당신의 법을 써 넣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렘 31장, 히 8장).
그러므로 율법의 준수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 아니고 영적인 힘에 의한 사역이다.
이 힘에 의해 우리의 마음은 부패로부터 정결하게 되며 의에 대해 순종할 수 있게끔 유화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 없이 이뤄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의에 대한 사랑을 새겨 넣으신 이래로 (이전에 율법은 하나의 외적인 가르침으로써 단지 우리의 연약함과 범과를 고발했다), 이제 율법은 우리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가 완전하게 되도록 우리를 형성하고 가르치며 격려하는 지혜이고, 또 우리가 사악한 방종에 의하여 부패하게 되는 것을 묵과하지 않는 삶의 규율이 되기 때문이다.
* 참회와 중생
이제 우리는 왜 참회가 항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결합되어 있으며, 또 왜 주님께서(요 3장)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회는 회개를 뜻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의 부패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길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죄의 종이 아니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 하신 후 당신의 의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이후에 새로운 허물을 통해 그 크신 은혜를 더럽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참회의 작용은 중생에 달려 있는데 이 중생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의 제어 즉, 우리 속에 선천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제어와 인간의 본성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놓는 영적 갱신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해 죽은 우리는 전 삶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위해 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이 중생은 우리가 썩어 없어질 육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참회는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한다.
* 선행 의와 신앙 의의 상호 관련성
순화된 양심에서 나오는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의 의를 잘 알아 보시기 때문에 이 선행들을 인정해 주시고 또 좋게 평가해 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행에 대한 헛된 신뢰에 이끌린 나머지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세심히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의에 상응하는 의 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그 어떤 행위 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몇가지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율법에 대해 완전한 복종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의 율법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성숙해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으로부터는 거리가 멀었다.
뿐만 아니라 가령 하나님의 의가 단 하나의 선행만으로 충족되어진다 가정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의에 대한 찬사가 주어져 마땅할 이 단 하나의 선행마저도 그의 성도들 안에서 발견할 수 없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선행이 비록 (외견상으로는) 놀라운 일처럼 나타나 보일지라도, 전적으로 완전하며 또 어떤 결점에 의해서도 오염되어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선행도 우리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죄인들이며 또 많은 죄의 잔재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 밖으로부터 의롭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불완전함이 그분의 완전함을 통해 가리움을 받고, 우리의 불결함이 그분의 정결함을 통해 씻음을 받으며, 우리의 불의가 그분의 복종을 통해 말소되어지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전혀 무가치한 우리의 행위들을 고려함이 무상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함들이 이렇게 가리움을 받을 때(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행위를 더럽게 만들어 설 수 없게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행위 안에서 순전한 정결함과 거룩함만을 바라보신다.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큰 평판과 칭찬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들을 의롭다 말씀하시고, 의롭다 여기시며 또 이에 대해 매우 풍성한 상급을 약속하신다.
요약하면 :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매우 값진 것이어서 이를 통해 우리는 대가 없이 무상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 역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됨은 물론 영원한 상급으로 보답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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