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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John Calvin

존칼빈의 기독교 교리 #4 신조, 소망

 

* 신조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얻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지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고 숙고해야 할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여 보자.

 

이것은 이른바 신조 안에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지혜, 구원, 생명, 의 그리고 거룩함이 되셨는가를 보게 된다.

 

이 신앙의 요약이 어떤 저자 혹은 어떤 저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신조는 그 안에 어떤 인간적인 가르침도 내포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확실한 증언들로부터 연유한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그 어떤 사람도 혼란에 빠뜨려 넣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먼저 이에(=삼위일체) 대해 약간 언급해야 될 줄로 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여기서) 세 하나님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성서와 우리들의 신앙체험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모습이 빛나고 있는 아들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성령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아버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을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 세워, 고정시켜 놓도록 하자! 그러나 아들과 성령과 더불어(서만) 아버지를 명상하도록 하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고백의) 말은 단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가르쳐 주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가르쳐 준다. 또한 이 (고백의)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대상 속에 우리들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가르쳐 준다.

 

전능이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당신의 섭리대로 조종하시며,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또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지칭될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한번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항상 보전, 지탱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게 계속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계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우리가 앞서 가르친 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이 그분 안에 제시되어 있다는 이 (고백의) 말속에 (아주) 용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라고 부르는데, 이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계시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바 있는 바로 그 칭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서는 (행 4장)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인간들에게 주신 바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란 칭호는 그분이 성서 안에 기름이라는 말로 묘사되어진 성령님의 모든 은혜를 충만히 받으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성령님의 은혜를 결하면 우리는 (모두) 시들고 메말라 없어져버리고 만다.


이 기름부음을 통해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셨는데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당신께 굴복시킴으로 우리로 그분 안에서 왕들이 되어 악마, 죄, 죽음 그리고 지옥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며 당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킴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제사장들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 긍휼의 행위 그리고 우리 자신 및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호인이요, 중재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밖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신자들처럼 양자됨이나 은혜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되고 합법적이며 유일무이하신 아들이시라는 점에서 다른 아들들(=양자들)과 구별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영원전부터 아버지(하나님)와 공유하신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시된 그분의 육에 따라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시다. 이는 바울이 말한 바와 같다(고전 8장).

'만물이 영원한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또 만물이 말미암은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 (이 고백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예수가 되셨는가 하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즉 그분이 어떻게 구주요 그리스도 곧 우리를 보전하시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으며,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시키는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것은 당신께서 (친히)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의 궁핍을 짊어지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부요를 양도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의 약함을 취하신 것은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죽을 운명을 받아 들이신 것은 당신의 영원불멸을 우리에게 분여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땅위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끌어 올리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당신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진정한 아들로서(=자손으로서) 인식되어지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참 인간으로 인식되어지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모든 약함에 따라 시험을 받으셨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약함에 대해 동정하는 것을 배우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놀랍고도 말할 수 없는 능력을 통해 동정녀의 몸에서 수태된 것은 그 어떤 육적인 부패에 의해서도 오염됨이 없이 지고한 정결함으로 성화되어 탄생하시기 위함이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이 (고백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목적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완수하셨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인간의 불복종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하나님의 진노를 당신 자신의 복종을 통해 도말해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셨는데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가 단번에 성취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피를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가로 뿌리신 것은 우리를 향해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며 우리의 불의가 정화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구원(사역)에 있어서는 그 어떤 부분도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유대땅의 재판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는데, 그분이 빌라도의 판결에 의해 범법자요 또 악한으로 정죄되심은 우리가 그분의 정죄받음을 통하여 (장차) 대심판관의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십자가 -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저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 위에서 죄로 말미암아 받아 마땅한 우리의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을 정복하며, 우리를 삼켜 먹어 치우려고 하는 죽음을 삼켜 버리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의 효력을 통해 그분과 연합하여 죄와 더불어 장사되고 악마와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 가셨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께로 부터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시려고 가공할 만큼 엄격한 하나님의 심판을 친히 감당하시고 경험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듯 당신 자신은 죄와 흠이 전혀 없으셨으면서도 우리의 죄악이 마땅히 치뤄야 할 그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짊어지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진노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전혀 고려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어떻게 그처럼 진노하실 수 있었겠는가?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정말로 진노하셨다면 그분이 어떻게 자신의 중재를 통해 아버지를 유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무거운 짐을 인내하시되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그리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아 괴로워 지치게 되었을 때에, 그분은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의 모든 징후들을 당신 안에서 경험하시게 되었고 마침내는 극도의 괴로움 속에서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죽음의 지배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에 매여있지 않고 권능으로 하늘에 올라가시어 죽음의 모든 병기들을 꺾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것들은 더이상 우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미래의 부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에서 살게 해주는 현재적 부활에 대한 확실한 진리요, 실체이며, 기초인 것이다.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담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닫혀 있던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이름과 우리 인간의 육을 가지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소망을 통하여 하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분과 더불어 하늘의 처소 안에 좌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바 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의 직무에 따라 항상 우리를 위한 변호인이요 또 중재자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보전하시기 위해 만물의 왕, 재판관 그리고 주님으로 임명되셨으므로, 그 결과 그분의 통치와 영광이 우리의 힘, 능력 그리고 영광이 되어 우리가 지옥과 대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모든 은혜들을 풍성히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써 그분은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이를 나눠주어 저들을 풍성하게 해 주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승천 후 그리스도의 육이 우리의 눈앞에 더이상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도우심과 능력을 통해 쉼 없이 당신의 신도들을 돌보고 계시며 저들에게 당신의 현존이 가지는 명백한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약속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끝으로 '저리로서 오시리라'라는 말이 뒤따르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사람들이 본 것과 똑같은 가시적인 형태로 마지막 날에 오신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 하시기 위해 당신의 통치가 갖는 포촉할 수 없는 위엄 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다(이 날은 아직 살아 있는 자들과 이전에 이미 죽은 자들을 모두 기습할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저들의 행위에 따라 갚아주실 터인데 저들의 행위를 통해 신, 불신으로 인정되는 바에 따라 그리하실 것이다. 이 심판이 우리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재림하시는 바로 그분에 의해 내려진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위로가 된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을 믿으라는 가르침을 받을때, 이것은 성서 안에서 그분에 관해 약속된 모든 것을 그분으로부터 기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의 능력을 통하여 어디서든지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 지탱, 보존하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신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불러 당신에게로 이끄시는데 이는 우리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렇듯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는 당신의 빛으로 우리를 비워주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부요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로 완전히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탐욕에서 나오는 악덕들을 매일매일 점차적으로 제어하시며 멸해 버리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떤 선행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성령님의 은혜의 열매요 효력인 것이다.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엔 단지 어두운 지성과 왜곡된 마음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사오며'

 

우리는 이미 교회가 유래한 근원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교회를 믿으라는 것이 명령되고 있는데 이는 모든 선택된 자들은 신앙의 띠를 통해 한 교회, 한 공동체,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되어 있음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교회의 지도자, 군주 그리고 한 몸의 머리와 같으신 분이심을 우리로 확실히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우리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모두 회집되도록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실히 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공동체는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결코 둘이나 셋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오직 한 머리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오직 한 몸안에서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 몸의 지체들처럼 한 체질적 성향을 통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들은 참으로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한 믿음, 한 소망, 한 사랑 안에서, 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유산인 영원한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또한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 교회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에 의한 내적 갱신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말인 '성도의 교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즉 성도의 교제란 이런 것이다 : 성도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을 때, 비록 이 은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어졌다 하더라도 모든 성도들이 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에 서로 참여 하면서도 그들 각자는 특수한 은사들과 상이한 직무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모든 선택받은 사람들은 부름을 받고 모여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 확고하세 된 우리는 이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죄를 믿사오며'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사죄는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한 길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왕국 안에 붙들어 두고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모든 의는 사죄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긍휼을 통하여 이 의를 얻는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짓눌리고 고통 받으며 혼란을 받게 될 때 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낙담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며, 마치 무거운 짐에 눌린 것처럼 신음하며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증오와 죄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의 육과 그들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제어하기에 힘쓰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로운 사죄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의 피를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 죄를 속량해 주셨다. 우리는 이 피 안에서만 죄로부터의 정결과 죄에 대한 보속을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아 교회의 몸에 접합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사죄와 은혜를 얻는다는 사실을 믿도록 교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사죄는 어떤 다른 곳으로부터도, 어떤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도록 교훈 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 교회와 성도들의 교제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여기 이 고백은 먼저 장차 있을 부활을 기대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동일한 능력으로 대심판 이전에 죽음을 통해 소멸된 육체들을 먼지와 부패로부터 새 생명에로 불러내신다는 것이다. 그때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의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돌발적인 변형을 통해 새 생명에로 옮아가게 된다.

 

부활은 선인들에게나 악인들에게 모두 공통된 것이긴 하나 서로 다른 조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마지막 말(=영생)이 여기에 첨가되었다. 이 말은 우리 신자들의 상태와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구분하고 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이러하다 : 우리가 부패로부터 정결에로, 죽음으로부터 영원불멸한 상태로 일으킴을 받아 영육간에 영화롭게 된 후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의 변형이나 부패의 가능성도 없는 영원히 존속될 복락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여 영접하실 것이다. 이 복락은 생명과 빛 그리고 의에 있어서 참되고도 온전한 완성의 극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모든 충만함을 지니신 주님께 불가분리적으로 꼭 붙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락은 모든 빛과 기쁨, 능력과 행복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실재들은 현재로서는 인간의 인식능력 밖에 있는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그날이 올 때까지는 우리가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이를 바라볼 뿐인 것이다.

 

반면에 참되고 생동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또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은 유기된 자들과 악한 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악마와 더불어 불멸하는 죽음과 불가변의 부패 속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나라의 모든 기쁨, 능력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다른 은사들과는 격리되어 영원한 어두움과 영원한 고통에로 정죄를 받아 결코 죽지 않는 벌레들에 의해 갉아 먹힘을 당하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에 의해 괴롭힘을 받게 될 것이다.

 

 

 

* 소망

 

만일 신앙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기만할 수 없는 그리고 공허하거나 거짓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라면, 이러한 확신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약속들은 참된 것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소망이란 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진실로 약속되어졌다고 믿는 바로 그 약속들에 대한 기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듯 신앙은 하나님께서 참되신 분임을 믿는다. 반면에 소망은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실 것을 기대한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반면에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언제나 그런 분으로 행동하시기를 기대한다.

 

신앙은 영생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 믿는다. 반면에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드러나 나타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신앙은 소망에 근거해 있는 기초이다. 반면에 소망은 신앙을 부양하면서 보전한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엇을 기대한다던지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연약한 신앙은 소망과 인내의 기다림을 통하여 지탱되고 보전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