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정경1 / 정경2

정경1 heart

사람이 처해 있는 형편이나 모습. ‘네페쉬'는 '영혼', '욕망', '갈망'으로서, 출애굽기 23:9에서는 나그네의 영혼의 피곤함과 그가 소원하는 바 갈망을 묘사하였다(공동번역 '심경', 새번역 '서러움').

정경2 Canon

1. 구약의 정경. (1) 정경이란 용어. '정경' 이란 말은 '자' (잣대)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논' 에서 유래한다. 4세기 이래 카논이란 말은 구약 또는 신약에 속하는 권위있는 책들의 목록을 가리키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구약에 포함되어야 할 책들의 범위에 대해서 오랫동안 일부의 의견 차이가 존재하여 왔다. 기독교 시대 이전에 이미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을 제외한 구약의 모든 책들을 거부하였다. BC 2세기경부터 외경의 성격을 띠는 위경적 작품들이 영감받은 책들의 지위에 올라 일부 집단에서 신뢰를 받는 일도 있었다. 랍비 문헌에서는 일부 현자들이 기독교 시대 초기에 내적 증거를 들어 구약의 다섯책(에스겔, 잠언, 아가, 전도서, 에스더)의 정경성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지적되어 있다. 교부 시대에는 기독교인 가운데 헬라어 와 라틴어 성경 중의 외경을 영감받은 책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불확실하였으며, 결국 외경의 문제는 종교개혁 시대에 첨예화되었다. 로마 교회는 외경을 구약의 일부라 주장하였으나 개신 교회들은 이를 부정하였다. 성공회와 같은 일부 개신교회들은 외경을 인생의 교화에 필요한 책으로 간주하여 예배의식 때 읽는 성경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개신교회들은 구약 정경은 히브리 성경에 속하는 책들 - 유대인들에게서 인정받고 신약의 가르침에서 승인받은 책들 - 만으로 구성된다는 데 모두 동의하였다. 동방 정교회는 얼마 동안 이 문제에 관해 의견이 나누어졌으나 최근 개신교 입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어느 책이 구약이나 신약의 정경의 자격을 얻으려면 오래되고 유익한 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오랫동안 읽히면서 가치를 인정받은 책이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하나님의 권위를 지녀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를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계시의 기록이 아니라 계시의 영구적 기록이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라는 말은 이것을 뜻하며 이로 인해 성경은 다른 모든 책들과 구별된다.
(2) 정경의 첫 출현. 성경영감설은 신약에 와서 완전하게 발전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미 우리는 일부의 글들이 신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신앙과 행동의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모세가 언약서를 백성들에게 읽어 줄 때(출24:7), 대제사장인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이 먼저 왕에게, 나중에 회중에게 낭독될 때(왕하22-23 강대하34장), 또는 에스라가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낭독할 때(느8:9,14-17;10:28-39;13:1-3) 이들의 반응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이런 글들은 오경의 일부이거나 전체이다(언약서는 출20-23장일 것으로 추측된다). 오경은 이와 같은 존경을 받고 있다(수 1:7이하;8:31;23:68; 왕상 2:3; 왕하 14:6;17:37;호8:12;단9:11,13;스3:24:대상 16:40; 대하 17:9;23:18;30:5,18;31:3;35:26).
오경은 기본적으로 모세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흔히 모세를 통하여 구두로 말씀하셨으나 모세의 저술(기록)활동 또한 자주 언급된다(출 17:14;24:4,7;34:27; 33:2;128:58,61;29:2001;30:10;31:913,19,22,24-26). 모세 시대에는 다른 선지자들도 있었다(출15:20;민12:6;신18:15-22;34:10). 선지자들의 본격적 활동은 사무엘로부터 시작되었으며(삿4:4;6:8), 이런 선지자들의 문헌 작업도 우리가 아는한, 사무엘로부터 출발하였다(삼상 10:25;대상 29:29). 선지자들이 광범하게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최초의 기록 활동은 후에 역대기의 기초가 된 역사서였으며(대상29:29;대하9:29;12:15;13:22;20:34;26:22;32:32;33:18 이하) 아마도 사무엘서 및 역대기와 공통된 자료를 상당히 많이 지닌 열왕기의 경우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도 이런 선지자들이 기록한 역사에 기초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선지자들은 때때로 신탁을 기록해 놓기도 하였다(사30:8;렘25:13:29:1;30:2;36:1-32;51:60-64;겔43:11;합2:2;단7:1;대하21:12), 이것은 물론 구약 책들의 역사적 성격을 받아들이는 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구두로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록해 놓았던 이유는, 그것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서인 경우도 있었지만(렘29:1;36:1-8;51:60이하;대하21:12), 보다 많은 경우에 미래를 위해 기념으로(출17:14), 또는 증거로(신31:24-26) 보존하여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사30:8), 구전 전승이 신뢰하기 어려운 점은 구약 저자들에게 익히 알려졌는데, 므낫세와 아몬의 학정 시기에 율법서가 상실된 것이 그 하나의 객관적 교훈이었다. 율법이 망각되어져 왔기에 힐기야가 율법서를 재발견한 사건은 큰 충격이 되었다(왕하22-23장;대하31장). 따라서 하나님의 메시지의 영구적 형태는 구진 형태가 아닌 기록형태였으며 구약 정경이 생기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경이 그 최종적 형태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출24장에 언급된언약서의 경우에서 우리는 출20-23장과 같은 짧은문서가 지금의 출애굽기와 같은 긴 책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정경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 가능하였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창세기도 보다 초기의문서들을 수록하고 있으며(창5:1), 민수기도 고대의시문집에서 온 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고(민21:14 이하), 신명기의 주요 부분도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추가되기 전의 모세 생존시에 언약궤 옆에 정경적 말씀으로 두어졌다(신31:24-26), 출24장 및 신29-30장의 언약(계약)들과 고대 근동의 조약이 체결되는 때 조약 문서들은 십계명이나 신명기 책의 경우와 같이 성소에 보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이루어진 적절한 때는오경이 말하는 출애굽 때,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한 민족으로 형성하셨던 때였던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오경의 설명과 같이 바로 이 시기에 십계명과신명기를 성소에 놓아 두었던 것이며 이것은 또한이때로부터 이들의 정경성이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선지자들이 연이어 활동하는 동안, 물론 앞서 지적한 방식을 따라 신4:2;12:32;잠30:6에서 주어진경고를 어기지 않으면서 보다 초기의 성스런 기록들이 추가되고 편집되는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구약의 다른 부분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여호수아서는 본래 여호수아 자신에 의해 기록된(수24:26) 언약을 그 마지막 장에 수록하고 있다(수24:1-25). 사무엘서는 본래 사무엘에 의해 기록된(삼상10:25) 왕의 제도에 관한 문서를 수록하고 있다(삼상8:11-18). 이 두 문서들은 처음부터 정경적말씀이었다. 전자는 세겜 성소의 율법서에 기록되었으며, 후자는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두어졌다.시72:19과 잠25:1에는 시편 잠언이 확대 발전해간 흔적들이 나타나 있다. 고대 시문집에서 온 내용들이 여호수아(10:12이하), 사무엘(삼하1:17-27)에 수록되어 있다. 열왕기는 솔로몬의 행장, 이스라엘 왕 의대지략, 유다 왕 역대지략을 자료로 사용하있음을 밝히고 있다(왕상11:41;14:19,29등; 왕하1:18;8:23등).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과 유다 왕 역대지략이 합쳐진 것이 역대기에서 자주 자료로 거론되는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일 가능성이 있다(대하 16:11;25:26;27:7;28:26;35:27;36:8;대상9:1에는이스라엘 열왕기, 대하24:27에는 열왕기 주석이란약칭이 사용되고 있다). 이 자료책은 역대기에서자료로 또한 거론되는 많은 선지자의 역사 기록들도 취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대하20:34;32:32).
구약 책들을 기록한 모든 사람들이 좁은 의미의선지자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왕이나 지혜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영감을 받아 기록을 하였고 이로 인해 정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시편 기자들의 영감은 삼하23:1-3; 대상25:1에, 지혜자들의영감은 전12:11이하에 언급되고 있다. 이와 함께욥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38:1;40:6)와 잠언이 신적 지혜에서 온 것이라는 암시(잠8:1-9:6) 도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3) 율법서의 마감. 오경 전체 혹은 부분을 정경적인 것으로 언급한 경우는 구약의 다른 책들이나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오경이 지닌 근본적 중요성에 크게 기인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경이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이유는 오경이 정경적인 것으로 기록되고 인정받았던 구약의 첫 부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경은 기본적으로 매우 오래된 단일 선지자 모세의 작품으로 그의 사후 편집되었으나 계속 추가되는 일이 없었던 데 비하여, 구약의 다른 부분들은 후대의저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수도 포로 귀환 후까지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경은 적어도 주전5세기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까지는 완결되어 정경으로 인정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전 3세기에 오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어 70인역 성경의 첫부분이 되었다. 주전 2세기에 창세기를 포함한 5권의 책 모두가 모세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주전 2세기 후반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단절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 양쪽이 모두 히브리 오경을 보존한 것은 오경이 이미 이들의 공동재산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모든 사실은 정경의 첫 부분은 5권으로 마감되어 가감이 없었으며, 단지 사소한 본문상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4) 선지서와 성문서의 발전과정. 히브리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개역 성경과 그 구조가 다르다. 그것은 선지서와 성문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선지서에는 8권의 책이 포함되어 있는데 역사서로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포함되고, 예언의 책으로서는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12소선지서가 포함된다. 성문서에는 11권의 책이 포함되어 있는데 서정적이며 지혜의 책들인 시편, 욥, 잠언, 전도, 아가, 애가가 포함되고 역사서인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 느헤미야역대기가 포함된다. 이것이 히브리 성경의 전통적 순서이다. 이 전통적 순서에서 성문서의 나머지 책인 룻기는 시편기자 다윗의 족보로 끝을 맺은 탓에 시편의 머리에 붙여진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 룻기의 위치는 뒤로 이동되어 비슷한 짧은 내용의 다른 4책(아가, 전도, 애가, 에스더) 옆에 자리를 잡았다. 유대 전통에서 사무엘, 열왕기, 소선지,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는 각기 단일한 책으로 계산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경적 책들이 처음 목록화되고 계산되던 시기의 히브리 가죽 두루마리의 용량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책들을 이런 방식으로 분류하는 오랜 전통성에 대해 적절치 못한 이유로 의심을 제기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보다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똑같이 현실적 근거가 별로 없는 가정은 그것이 구약정경의 점진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분류는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었으며, 선지서 정경은 BC 3세기 경, 곧 역대기와 같은 역사서와 다니엘서와 같은 선지서가 영감으로 된 것으로 인정받기 이전, 심지어 기록되기 이전에 마감되었다는 가정이다. 이 통속적 가설에 의하면 성문서의 정경은 AD 90년 얌니아 회의 때까지는 마감되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개방적인 구약 정경이 기독교회에 의해 인수되었으며, 게다가 많은 외경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정경(a broader Canon)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게 수용되었으며 70인역 성경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70인역 성경은 초기 기독교회가 사용한 구약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 그리고 아마도 에센파가 익명의 묵시적 작품들을 선호했던 사실로 인해 교부적 기독교에서 구약 정경의 유동성이 발생한 것으로 이 이론은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르다. 구약 책들의 분류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 성격에 따른 것이다. 다니엘서는 반(半)설화적이며, 전통적 순서의 성문서에서는 역사서들과 함께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율법서에도 창조로부터 모세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들이 있으며, 선지서에도 여호수아로부터 왕정 말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들이 있다면, 성문서에는 세번째 시기인 포로와 그 귀환시기를 다루는 역사들이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역대기는 아담에서 포로귀환에 이르는 전체 성경 이야기의 요약으로서 역사서 맨 마지막에 이루어져 있다. 선지서 정경은 역대기가 기록되던 때에는 완전히 마감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역대기가 인용하는 자료들은 사무엘이나 열왕기가 아니고 사무엘이나 열왕기의 자료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보다 풍부한 예언적 역사들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사무엘과 같은 책들에 들어 있는 선지서의 보다 초기의 요소들은 매우 오래된 것이 확실하며, 시편 잠언, 역대기와 같은 책들에 들어 있는 성문서의 가장 초기의 요소들도 이처럼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정경의 첫 부분이 최종 완성되기 이전에 이미 정경적인 것으로 인정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 느헤미야와 같은 성문서의 가장 최후의 부분들은 구약역사의 말기에 속한다. 그러나 에스겔,학개, 스가랴,말라기와 같은 선지서의 가장 최후의 부분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성문서의 책들이 선지서보다 늦은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향일 뿐 시기적으로 중복되는 경우도 상당히 있다. 성문서가 뒤늦게 수집되었다는 가정은 성문서의 개별 책들의 연대를 사실보다 늦게 잡도록 만들 수 있다.
이 두 부분에 속한 책들은 그 저자가 다양하고 대개 서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들이 서로 다른 때에 개별적으로 정경의 인정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혼성된 하나의 수집물로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얼마동안 예언이 끊기게 되고, 이 책들의 수가 완결되어 보이게 되었을 때, 이 책들은 보다 세심하게 분류되어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단9:2에 언급된 '서책'은 느슨하게 조직되어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작품들만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시편 기자들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는 한 덩치의 문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가 책을 수집하여 도서관을 세웠다는 전승은 이같은 혼성 수집을 반영해 주고 있다. 느헤미야가 세운 도서관에는 "여러 왕들에 관한 책과 선지자들과 다윗이 쓴 글과 제물을 드리는 일에 관해서 여러 왕들이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마카비2서 2:13). 이것이 고대 전승이라는 것은 이같은 모종의 행동이 포로기의 참화 이후에 필요했을 가능성에 의해 증명된다. 또한 '제물을 드리는 일에 관해서 여러 왕들이 쓴 편지' 가 그 중요성으로 인해 보존되고 있으면서도 에스라서에는 아직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6:3-12;7:12-26). 에스라와 같은 책이 완성되고, 이 가장 늦은 책들이 정경으로 인정받고, 예언이 끊겼다는 인식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선지서와 성문서를 확실히 구분하고 그 내용들을 세심하게 배열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집회서의 헬라어역 서문이 정경의 세부분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서문이 만들어지던 BC 2세기 말엽에는 선지서와 성문서의 구분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경의 세째 부분의 명칭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이 구분이 오래 전에 이루어졌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첫 부분을 ‘율법서', 둘째 부분을 '선지서’로 부르고 세째 부분은 '기타 조상의 책들' 이라고 단순히 기술할 뿐이다. 이 말은 다른 책들보다 덜 오래되었으나 그 권위는 인정받는 여러 가지 뒤섞인 한 무리의 책들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세 부분은 1세기에 필로(De Vita Contemplativa 25)와 그리스도(눅24:44)에 의해 언급되고 있으며 필로와 그리스도는 모두 세째 부분을 그 가장 오래된 이름인 '시편'으로 부르고 있다.
(5) 선지서와 성문서의 마감. 선지서와 성문서가 각기 분리된 부분으로 조직된 시기는 BC 165 년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앞서 인용한 마카비 2서의 전승이 정경 역사의 두 번째 큰 위기에 관해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유다도 우리에게 닥쳐온 전쟁 때문에 흩어졌던 모든 책들을 수집하였으며 그것이 아직 우리 수중에 있습니다"(마카비2서2:14), 이 ‘전쟁'은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에서 벗어나려 한 마카비의 해방전쟁을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성경을 매우 적대시하였던(마카비 1서1:5657) 까닭에 박해가 끝난 후 유다가 성경 사본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다는 예언이 오래 전에 끊긴 것을 알았다(마카비 1서9:27). 이런 그가 흩어져 있는 성경책들을 모아 정리하고 이때 이후 전통적인 것이 되었던 방식으로 목록화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책들은 아직도 각기 분리된 두루마리 형태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가 만들어 낸 것은 한 권의 책이 아닌 수집물에 불과하였고 책의 목록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목록을 작성하면서 선지서와 성문서를 확실하게 구분하였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순서와 책의 수도 확정해 놓았던 것 같다. 책의 목록은 순서와 수를 가져야 하며, 이 전통적 순서는 역대기가 성문서의 마지막에 오도록 되어있다. 역대개의 이 위치는 AD 1세기,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추적해낼 수 있다.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마23:35;눅11:51)라는 구절을 정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곧 창4:3-15에서 대하24:19-22에 이르는 동안 순교당했던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경적 책들의 전통적 수는 24권(율법서 5권, 선지서 8권, 성문서11권)이거나 22권(이 경우 룻기는 사사기에, 애가는 예레미야에 편입된다. 22라는 수는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에 따른 것이다)이다. 24라는 수는 AD 100년 경의 에스드라 2서 14:4448에 처음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계 4:4,10 등에서도 시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2라는 수는 AD 100년 직전의 요세푸스의 저작(Contra Apion 1. 8)에서 처음 기록되고 있다. 22라는 수는 히브리어 알파벳 글자의 수(22자)에 맞추기 위해 적은 책인 룻기와 애가를 각기 사사기와 예레미야에 편입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요세푸스는 이 모든 책들(24권 혹은 22권으로된)이 고대로부터 정경으로 인정받았다고 말한다. 이 책들은 거의 모두가 주후 1세기 혹은 그 이전의 저술들로부터 개별적 입증도 가능하다. 일부 랍비들이 문제삼은 5책 가운데 4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지 아가서만이 개별적 입증을 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내용이 너무 짧기 때문일 것 같다.
이 같은 증거는 그리스도 시대가 시작될 무렵 모든 정경적 책들의 정체가 익히 알려지고 일반적 인정을 받았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정경의 세째 부분이 기독교회가 탄생한 후 수 십년이 지난 뒤에 열린 얌니아 회의 때까지 마감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었을까? 그 주된 이유로는 랍비 문헌이 그 중 다섯 책들에 대한 논란을 기록하고 있고, 이 중 일부는 얌니아 토론에서 해결되었다는 점, 70인역 성경의 많은 사본들이 외경을 정경적인 책들 속에 섞어 놓아 보다 폭넓은 알렉산드리아 정경 이론을 자극 하였다는 점, 쿰란의 발견들로 인해 묵시문학적 위경들이 에세네파에 의해 간직되고 정경적인 책들로 인정받았을 가능성까지 보여지게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그러나 랍비 문헌은 다른 많은 정경적인 책들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이의가 제기되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물론 쉽게 그 해답이 나오긴 했으나) 당시의 문제는 정경적인 책들을 추가하는 것이 아닌 제거하는 문제(이것이 가능했다면)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논란이 된 다섯 책들 중 에스겔서는 그리스도 시대 이전에 마감된 것으로 인정된 정경의 둘째 부분에 속한다. 알렉산드리아 정경에 관해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저술들은 그것이 팔레스타인 정경과 동일했던 것임을 보여 준다. 필로는 유사한 세 부분들을 언급하고 세 부분 모두에 있는 많은 책들의 영감을 인정하면서도 외경에 대해서는 결코 영감을 인정하지 않는다. 70인역 성경 사본에서 선지서와 성문서는 기독교인의 손에서 비유대적 방식으로 재정리되었던 것으로, 외경을 섞어 놓은 것은 유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독교적인 현상이다. 쿰란에서 익명적인 묵시적 작품들은 표준적인 유대 성경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 에세네파의 부록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에스드라 2서 14:4448에 이 부록에 대한 시사가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사실은 에세네파가 주전 2세기 이후 유대교 주류와 경쟁관계에 있었으면서도 성문서의 일부를 정경으로 간주하였으며 아마도 경쟁관계가 시작되기 이전부터도 그랬을 것이라는 점이다.
(6) 유대 정경에서 기독교 정경으로, 70인역 성경 사본들은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바깥에서 70인의 성경이나 그것에서 유래된 옛 라틴역 성경을 사용했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저술들과 나란히 존제한다. 이 교부들의 저술에서 넓은 정경과 좁은 정경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넓은 정경은 외경을 포합하여 교회에서 널리 읽히고 존중되던 그리스도 이전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좁은 정경은 유대 성경에 속한 책들에만 한정되어 있다. 오리겐, 제롬 등과 같은 학자들은 유대 성경에 속한 책들만을 영감받은 것으로 여겨 나머지 책들과 구분하려고 애쓴 흔적을 보여준다. 외경은 교회의 시작부터 교회 안에 알려졌으나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외경이 영감받은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신약 자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당시 유행하던 여러 칭호로 유대 성경들을 인정하고 유대 정경의 세 부분과 그 책들의 전통적 순서를 받아들이신 것을 보게된다. 또한 계시록이 정경적인 책들의 수를 시사한 것과 그 대부분의 책들이 개별적으로 신적권위를 가진 것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되지만 외경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유14-15절이 에녹1서를 언급한 점인데, 이 경우는 당시 유행했던 묵시사상 학파에 속하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해온 사람들에게 에녹의 이름을 빌어 설득하려고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초기 몇 세기에 일어났던 일은 분명히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히브리 성경과 같은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그가 받으신 성경을 전해 주셨다. 처음 기독교인들은 동시대 유대교인들과 함께 정경적인 책들의 정체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성경은 아직도 표지에 입혀진 책이 아니었고 기억으로 보존된 두루마리들의 목록이었다. 유대 구전 전승과의 간극, 유대인과 기독교인간의 소원,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외부 지역 교회에서의 셈 언어들에 대한 일반적 무지로 인해 기독교인들 가운데 정경에 관한 의심이 증가되었으며, 이 의심은 다른 원칙들에 의해 정리된 성경 책들의 새로운 목록들이 나타나고 새로운 성구집(lectionary)이 도입되면서 가속화되었다. 정경에 대한 이런 의심은 종교개혁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신약의 가르침과 이를 이해할 유대적 배경으로 되돌아감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2. 신약의 정경. (1) 초창기. 성서신학은 민저 성경 문헌의 범위 확정을 필요로 하며 이 범위는 전통적으로 위대한 신학적 논쟁의 시대 이후 신약 정경으로 확정되어 있다. 정경(카)은 교회가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는 책들의 목록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신앙과 실천의 규범이 되는 영감받은 글로 인정하는 책들의 목록이기도 하다. 영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성경 본문을 확정하고, 성경 책들의 내적 역사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정경의 개념과 정경 자체의 발전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추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 특히 초창기에 관한 연구에서는 세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특정한 교부나 자료에 의해 나타나는 한 책에 관한 지식, 둘째, 교부나 자료 쪽에서 이 같은 책을 영감받은 글로보는 태도이며(이 경우 '씌어 있는 바와 같은’, ‘성경은 말하기를’과 같은 인용구가 붙는다. 개역 성경에는 ‘기록된 바’ ‘기록한 바’와 같은 인용구가 많이 등장한다), 세째, 인용된 작품이 들어있는 목록 혹은 정경 개념의 존재이다(이것은 실제 목록들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책들' 혹은 '사도들' 에 대한 언급에 의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이 구분이 항상 명백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탓에 혼란을 발생시켰다. 인용구는 초창기에도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인용이 영감받은 글의 지위를 말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또 하나의 문제로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기준들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이런 까닭에 어떤 정경 목록 혹은 정경 개념의 존재에 대한 결정이 전혀 어떤 직접적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추론에 의존하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최초의 지점은 신약 자체가 제공하는 자료 안에 있다. 사도 교회에도 성경이 없지 않았다. 사도 교회는 그 가르침을 대개 헬라어로 된 구약에서 찾았다(물론 일부 저자들은 히브리 본문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에녹 1서와 같은 외경 또한 일부 집단에서 사용되기도 했여기 '정경적' 이란 용어가 사용되어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유대 정경은 적어도 합법적으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그것이 합법적으로 확정되었을 때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지만 반기독교 논쟁에 의해 주조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배 가운데 이미 그 자신의 일부 특수한 전승들을 사용하였다. 주의 만찬(성만찬) 때 주의죽으심이 아마도 말씀(다시말해, 최초의 수난 설화)가운데서 또한 의식의 상징들 속에서 '선포되었다'(고전11:26), 주의 만찬 이야기 자체가 '주께 받은 것', 곧 치밀하게 보호된 전승으로 간주된다. 주의말씀을 근거로 윤리적 행동을 권하는 곳에서도 이 용어가 나타난다(참조. 고전7:10,12,25;행20:35). 주로 구전 자료에 나타나는 이 용어는 양식비판에서 드러났듯이 전하는 내용의 부정확성을 시사하려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초창기 사도 시대에 기독교 전승의 기록 보관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성경대로' (고전15:3-4) 라는 구절에서 이 시기의 문서들을 언급한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구전자료에서든 기록된 자료에서든 우리는 초창기 교회가 예수님의 수난, 부활, 삶(참조, 행10:36-40), 그리고 교훈의 전승들을 의식적으로 보존하려 한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에 의해 알게되고 보존된 것이 무엇이든 그에게는 다른 곳에서 보존된 전승들의 타당성과 가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기독교 성경 발전의 이 '역사 이전적' 단계에서 이 보존은 대체로 자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복음서 형성에서도 이것은 계속되며, 여기서는 주요한 두 흐름이 상호 독립적으로 발전한다.
신약 서신 자료의 경우도 처음부터 영감에 대한 주장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교리와 행동의 문제들에 관한 권위있고 적절한 가르침이란 일정한 주장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서신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처한 특정한 수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서신들의 수집은 바울이 죽은 후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바울 문집의 본문들은 동질적이며, 그 수집이 한 특정 시기(아마도 AD 80-85년 경)에 단번에 이루어졌다는 설(E.J. Goodspeed가 매우 철저하게 발전시킨)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설(하르낙)보다 유력하다. 바울 문집은 처음부터 권위있는 기독교 문헌으로 존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1세기후반과 2세기 초기의 교회에 미친 영향은 이 시기문헌의 교리, 언어 및 문학양식으로 보아 명백하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바울 이외의 저술들에는이와 상응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 사도행전의경우도 교훈 자료를 주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은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요한계시록은 신약 문서의 직접적 영감을 가장 명확하게 주장하고있으며 신약 교회 선지자들의 말과 환상들의 문헌에서 독보적 위치에 선다. 이렇듯 우리는 신약 자체 안에서 구전 단계에서도 권위있고,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 자료의 몇 가지명백한 사례들을 보게된다. 그러나 어떤 글도 그홀로 전승을 보존하고 있다는 주장을 명백하게 내세우는 경우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이 단계에서는 정경, 더 이상 추가될 수 없는 배타적 목록에 대한 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가지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구전전승의 존재이며, 또 하나는 주의 전승들에 참여하고 해석했던 사도들, 사도적 제자들 및 선지자들의 현존이다.
(2) 사도 교부들. 이와 동일한 요인들이 이른바사도 교부들의 시대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이들에의해 제공된 정경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복음서들에 관하여, 클레멘트(『클레멘트 1서』, AD 90년경)는 공관복음서와 비슷한 자료를인용하지만 아직 어떤 특정 복음서와 완전히 일치한 형태의 것은 아니며, 또한 성경 인용의 형식을빌어 그 말씀들을 소개하지도 않는다. 옥의 이그나티우스(115년 경 순교)는 '복음'에 관하여 자주 말하지만 모든 경우에 그의 말은 그것이 그가말하고 있는 메시지이지 문서는 아니라고 해석할여지를 준다. 마태복음과의 잦은 유사성은 이 자료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요한이 그에게 알려져 있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것같다. 유세비우스와 다른 곳에서 단편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파피아스는 우리에게 복음서들에 관한정보를 주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불확실하거나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는 특별히 책의 가르침보다 ‘살아 있는 영원한 목소리'를 강조한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미나의 폴리캅의 서신은마태와 누가를 분명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이 두 복음서를 사용한 최초의 명백한증거가 되지만 그의 서신은 각기 다른 때(13-14장은 115 년 경, 나머지는 135년 경)에 씌어진 두 글을 결합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므로 과거에생각했던 것 보다 그렇게 이른 시기의 것은 아닐것이다. 이른바 『클레멘트 2서』와 『바나바 서신』은AD 130년 경의 것이다. 이 두 서신은 많은 구전자료를 이용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도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 서신은 성경 인용구임을 표시하여 복음서들로부터 한 구절을 소개하고 있다.
사도 교부들은 바울 문집에 관하여 상당히 광범하게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언어는 이 사도의 말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들이 높이 평가받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으로인용 소개하는 경우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기독교 집단에서 구약과 기독교인의 글들구분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는 많은 구절들이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공문서' (archives)에 의해 '복음' 을 판단하였다(이그나티우스, 빌라델비아서』, 8. 2). 『클라멘트 2서』는 ‘책들과 사도들'(14. 2)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대조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복음서가 매우 소중히 여겨졌지만(예를 들면 이그나티우스나 파피아스에게서) 그것은 분명 기록 형태라기 보다 구전형태의 것이다. 바나바는 구약을설명하는데, 『디다케(Didache)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공통적인 교훈적이며 윤리적인 자료을 설명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도 교부들은 정경적인 복음서들과 병행하여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외경' 혹은 '정경 이외의' 자료도 이용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물론 이런 자료가 외경이아니었다. 우리는 아직도 신약 저술들이 다른 교훈적 자료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를 다루고있다. 이런 상황은 2세기까지도 계속되며 순교자저스틴이나 타티안의 경우에도 이런 상황을 엿볼수 있다. 저스틴은 복음서라 불리우는 '사도들의회상록' (memoirs of the apostles)이 기독교 예배에서 낭독되었다고 기록하고 그러나 그의 인용과 인유들은 이들의 범위가 네 복음서와 동일하지 않았으며 '외경적' 자료를 포함하였던 것을 증거해 준다. 이와 동일한 자료가 타티안에 의해 복음서들을 종합해 놓은 디아테사론 (Diatessaron)에서도 사용되었다.
(3) 말시온의 영향. 정경과 성경적 지위의 개념에 관한 의식이 기독교인들의 사고와 활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세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이단적 교사들의 도전이 큰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인물 중에 시노페의 말시온이 있었다. 말시온은 AD 150년 경 로마 교회와 결별하였던 인물로 그 이전에는 몇 년간 소아시아에서 활동하였던 것 같다. 그는 복음서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구절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신약과 구약, 율법과 복음, 선행과 은총을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상극이라 하였다.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같은 신이 아닌 전혀 다른 신들로서 구약의 신은 엄격하고 정의를 내세우고 화를 잘 내고 고약한 신인 데 반해 신약의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되시는 분으로서 착하시고 자비심이 많다고 하였으며, 구약의 신은 천지창조를 이룩하였고 신약의 신은 인류 구속을 성취하셨다고 하였다.
말시온에 의하면, 예수의 열 두 사도는 구약과 유대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예수의 전한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지 못하고 구약 율법과 복음을 뒤섞어 놓았으나, 오직 사도 바울만이 유대 율법에서 탈피하여 참된 복음을 전하였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제거하여 진짜 성경을 편찬한답시고 말시온은 자기 특유의 성경을 만들어내었다. 말시온은 구약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구약은 악한 신의 작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신약에 있어서도 사복음 가운데 누가복음만이 성경이며 나머지는 전연 가치가 없는 복음들로 여겼고, 누가복음에도 불순한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손질을 가해 고쳐 놓았다. 말시온은 바울 서신에도 손을 대어 유대 율법의 냄새가 나는 부분을 깨끗이 삭제해 버렸으며 히브리서와 목회서신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정경 개념을 태동시켰던 또 하나의 주요한 이단적 교훈은 각양각색의 영지주의의 가르침이었다. 1946년 에집트 상류 지방에 위치한 낙-함마디(NagHammadi)에서 50여 권에 달하는 영지주의 문헌들이 발견됨으로 인해 이런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할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신약을 구성하게 되었던 대다수의 책들이 영지주의 집단들 안에서 알려졌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면 이른바 『진리의 복음 (Gospel of Truth)에 있는 일부 감동적인 구절들은 계시록, 히브리서, 사도행전 및 복음서들에 근거한 것이다.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의 경우도 공관복음서와 유사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공관복음 전승과 공통된 이 말씀들을 정경적 성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말씀들과 뒤섞어 놓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진리의 복음이란 명칭은 영지주의 교사의 교리가 다른 복음 문서들과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이레니우스에서 유세비우스까지. 2세기 후반에 정경 개념의 명확한 증거가 나타난다. 리용의 이레니우스는 『이단비판』(Against the Heresies)에서 사복음이 그의 시대에 땅의 네 모퉁이, 하늘의 네 방위와 같은 자명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그에 의해 때로 명시적으로 성경으로 인용된다. 바울 서신, 계시록, 일부 공동서신들은 성경으로 명시되는 경우는 많지 않더라도 논쟁의 상황에서 반드시 의존해야 할 교리요 권위의 주요한 근거로 인정되었다. 이른바 그의 반대자들의 신비의 지식에 대하여 그는 사도들로부터 유래하는 교회의 전승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히브리서는 바울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호히 배척하였다.
이레니우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는 저술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신약의 대부분의 책들을 인용하며 두 언약(testaments)과 사복음서에 대하여 분명히 말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무라토리 정경목록(平書 연구가인 L. A, Muratori가 밀란 소재 암브로스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1740 년 인쇄 발표했던 탓에)으로 알려진 라틴어로 된 단편적 정경목록을 히폴리투스의 것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입증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이 라틴어는 반드시 헬라어에서 번역된 것이라 할 수 없다. 『헤르마스의 목자를 얼마 전에 저술된 것이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무라토리 정경은 170-210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의 현존하는 부분은 신약 저술들의 목록을 제시하면서 그 기원과 범위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도 다시 우리는 사복음서를 만나게 되고, 바울 서신들을 인정하고, 일부 공동서신, 사도행전 및 요한 계시록을 알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묵시』(베드로 서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와 놀랍 『솔로몬의 지혜』가 포함되고 있다. 헤르마스의 목자가 언급되긴 하나 공중예배용으로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무라토리 정경은 이 시기에 보다 포괄적인 정경 개념이 존재했던 점과 그 한계의 불확실성, 후에 외경으로 배척당했던 저술들이 탈락되기도 하고 포함되기도 했던 점을 역력히 보여준다.
이런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3세기에도 계속되었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은 모두 논쟁에서나 교리의 논의에서나 주석에서 신약 성경들을 폭넓게 이용하고 있다. 현재의정경에 있는 대다수의 책들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고 정경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일부 공동서신, 요한계시록의 경우에는 불확실한 점이 남아 있다. 정경이 아닌 복음서들이 인용되고아그라파(agrapha)가 주의 진정한 말씀으로 인용되며, 『바나바 서신』『헤르마스의 목자』『클레멘트 1서』와 같은 사도 교부들의 일부 작품들이 정경적혹은 성경적인 것으로 인용되기도 하며, 이 후자의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 4세기와 5세기의 대사본들도 존재한다.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은『바나바 서신』과 『헤르마스의 목자』를 포함하고, 알렉산드리아 사본은『클레멘트 1서』와『클레멘트 2서』를 포함하고 있다. 클라로몬타누스(Claromontanus)에 들어 있는 정경 목록에는 히브리서가 빠져 있는반면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 『바울 행전』및 『베드로 묵시』는 포함되어 있다. 요약해서말하면, 명확한 정경에 대한 관념이 확립되고 그 주요한 윤곽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어느 책을 정경에 포함시키느냐로 압축되고 있다.3세기의 교회의 입장은 유세비우스(교회사』3, 25)에 의해 잘 요약되어 있다. 그는 인정받은 책(homologoumena), 논란되는 책(antilegomena), 위조된 책(notha)으로 구분한다. 제 1분류에는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 베드로전서, 요한 1서 및 (어떤 경우에 따라) 요한 계시록을 배치하고, 제2 부류에는 (논란이 있으나 대부분에게 알려져 있는)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2서 및 3서를배치하고, 제 3 부류에는 『바울행진』, 『헤르마스의목자 베드로의 묵시』, 『바나바 서신』, 『디다케』, 『히브리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및 (다른 경우에 따라) 요한계시록을 배치한다. 이중 후자의 책들은 철저한 이단적 관심에서 사도들의이름을 빌어 복음서와 행전을 의도적으로 위조하는것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면 제2 부류에 능히들어갈 수도 있음을 유세비우스는 시사한다. 이런 유에 속하는 예로 그는『도마복음』, 『베드로 복음』,『맛디아 복음』, 『안드레 행전』, 『요한 행전』을 들고있다. 이런 책들은 “위조된 책에 속한 것으로도 간주하지 말아야 하며 전적으로 사악하고 불경한 것으로 멀리 하여야 한다."
(5) 경전의 확정. 제 4세기에 기독교 세계의 동서방 양쪽에서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범위로 된 정경의 확정을 보게 되었다. 동방의 경우, 결정적 시점은 367 년의 아다나시우스의 39번째 부활절 서신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꼭같은 범위의 신약을 보게된다. 종교적 가르침의 유일한 근거로 묘사되는 정경 안에 든 작품들과읽는 것은 허용되는 다른 작품들, 예컨대『디다케』와『헤르마스의 목자』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진다. 이단적인 외경들은 속임수의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위조된 것이라 한다. 서방의 경우, 정경은 397년의 카르카고 회의의 결정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때합의된 목록은 아다나시우스의 목록과 비슷하였다.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많은 라틴 저자들은 신약정경의 범위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의 브리스길리안, 골(Gaul)의 아퀼레이아 루피누스, 북 아프리카의 어거스틴(어거스틴의 견해는 카르타고 회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감독 인노센트 1세 등은 모두 동일한 견해들을 갖고 있었다.
(6) 수리아 정경. 수리아 교회는 3세기에 에데사(Edessa, 현재 터키의 Urfa市)에서 시작하여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산재해 있던 수리아어를 사용하던 교회들을 말한다. 수리아 교회에서정경의 발전과정은 매우 달랐다. 수리아 교회에서는 5세기까지 타티안이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만들었던 디아네사론을 복음서로 사용하였다. 이외에도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이 정경으로 사용되었다.빌레몬서는 바울의 친작으로 인정했으나 한 교회를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을 상대로 한 사사로운 편지였기 때문에 정경으로 취급되지 않았다.공동서신 및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반면 히브리 복음』과 『고린도 3서』가 정경으로 인정받은 때가 있었다.
수리아 교회는 5세기에 공용(用) 번역성경인 페쉬타(Peshitta)를 완성하였다. 이 페쉬타의 신약에는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 14편,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요한 1서가 포함된 반면 공동서신4편과 요한계시록은 빠져있다. 에베소 회의(431년)다음에 수리아 교회는 양분되었는데, 동부 수리아교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따랐으며 페쉬타에 포함된 문헌들만 정경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동부 수리아 교회의 신약 정경은 22권으로서 공동서신 4편과 요한계시록이 빠져 있다. 서부 수리아교회에서는 6-7세기에 다시 성경을 번역하였으며이 기회에 공동서신 4편과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7) 요약 재정리. 우리는 신약의 개별 책들의정경적 운명들을 추적하여 요약 재정리해 볼 수 있다. 네 복음서들은 정경적 사복음서로 형성되기까지 비교적 독립적으로 유통되었다. 마가복음은 분명 그것의 '확대판' 인 두 복음서에 가리워지긴 했으나 파묻히지는 않았다. 누가복음은 말시온의 후원을 받았지만 반대에 부딪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은 매우 일찍부터 우월한 지위를 얻었으며, 이 지위는 근대 성서학의 시대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와 다소 경우가 달라2세기 후반에 로마의 장로 가이우스와 같은 인물에게서 상당한 반대를 받았다. 그 이유는 그 배경, 기원 및 초기의 유통과 관련된 모호한 점들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일단 인정을 받은 후부터 요한복음의 위세는 계속 높아졌으며 교리적 대논쟁이나 규정에서 최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입증되었다.
사도행전은 예배용으로나 논쟁 용도로 사용되지않았다. 사도행전은 이레니우스 이후까지는 별다른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그 이후부터 성경의 한 부분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바울 문집(서신집)은 초창기부터 성경의 자리를굳혔다. 말시온은 목회서신을 명백히 거부하였다.그 이외에서는 목회서신에 관한 의심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폴리캅은 이미 목회서신을 권위있는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와 달리 히브리서는 여러세기 동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았다. 동방에서 판테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그 저자성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겐은 바울의 사상이 히브리서에서 익명의 저자에의해 표현되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유세비우스와 다른 사람들이 서방의 의심들을 보고해 주고 있으나 오리겐 이후 히브리서는 동방에서 인정을 받았다. 3세기의 파피루스(ChesterBeatty papyrus)에 히브리서가 로마서 다음 자리를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서방에서는 초창기부터 히브리서에 대한 의심이 그치지않았다. 이레니우스는 그것을 바울의 서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터툴리안과 다른 아프리카 자료들은 그것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고, 암브로시아스터’(ambrosiaster)는 이에 관한 주석을 쓰지 않았으며 이 점에서는 펠라기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히포와 카르타고 회의는 정경을 열거하는 가운데 히브리서를 나머지 바울 서신들과 분리하였으며, 제롬은 그의 시대에 로마의 의견은 여전히 그 진정성을의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문제는 한 세기 가량이후까지는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공동서신의 집성은 2세기 말 정경의 기본 구조가 확립된 이후에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정확한 구성은 교회에 따라, 교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요한 1서는 이레니우스 시대부터 일정한자리를 차지한다. 요한2서와 3서는 별로 인용되는경우가 없으며, 무라토리아 정경에서 보듯이 이 두서신이 언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이것은 물론 그 내용이 너무 간단하거나 신학적 의미가 빈약해 보이는 데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베드로전서 역시 별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지못한다. 베드로후서는 유세비우스 시절 여전히 논란이 있는 책들'에 속하였다. 야고보서와 유다서의지위는 교회, 시대 및 개별적 판단에 따라 유동적이였고 요한계시록은 두 번 반대에 부딪쳤다. 2세기에는 선지자의 영감을 받았다는 몬타누스(Montanus)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듯하여 반대를 받았고, 3세기 후반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Dionysii) 논쟁에서 요한복음과 비교한 비판적 근거에서 반대를 받았다. 이 두 가지 의심은 희랍 교회들의 계속되는 불신을 조장하였으며, 또 이로 인해 요한계시록은 수리아와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매우 늦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서방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매우 일찍부터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요한계시록은 적어도 각기 다른 세 기회에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페타우의 빅토리누스(304년 순교) 시대 이후 많은 주석들이 나왔다.
(8) 현재의 입장. 이와 같이 신약 정경은 여러발전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확정되었다. 10세기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논쟁 이후 전통들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였으며, 로마 교회는 더욱 최근에도 이 입장을 강조하였다.보수적 개신교 역시 전통으로 받은 정경을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들까지도 일반적으로 이 정경을 지킨다. 현대 성서연구에 의해일부 학자들이 적어도 일부 신약 문서들에 관해 사도의 저작이 아님을 새롭게 인정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글에서 개괄한 역사적과정들의 기저에 깔린 요인과 동기들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서들이 정경에 포함된 것은 기독교회가 이 문서들의 권위를 인정한 까닭이다. 초창기에는 사도들이나 그 제자들이 현존하고 있었고 살아있는 구전 전승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2세기 중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회상록이나 다른 기념물들이 이들의 메시지를입증해주었다. 이와 동시에 이단이 발생하였으며,이단들이 신학적 이론이나 새로운 영감을 내세움으로 해서 정통 교회의 권위를 새롭게 내세우고 권위있는 책들을 보다 세밀하게 규정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이미 널리 사용되던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들이 성경으로 선언되고 일부 다른 작품들도 사도의 저작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교리와 학문적 토론과 발전이 이 인식과정에서 계속되어 기독교가 지적이며 교회적으로 틀을 갖추는 위대한 시대에 정경은 완성을 보게 되었다. 2세기 혹은 4세기에 기록 문서들이 사도적 증언의 목소리와 메시지의 참된 기록임을 확정하는 데 세 가지 기준들이사용되었다. 첫째 기준은 사도 저작성이다. 모든문서들이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는 못하였다. 마가와 누가와 같은 복음서들은 사도들과 친밀했던 동역자들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둘째 기준은 교회의 이용성, 곧 지도적 교회 또는 다수의 교회들에의해 인정을 받느냐는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해 많은 외경들이 배칙을 받았다. 외경 중의 일부는 해가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전승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듯하지만 많은 외경들은 철저히 위조된 것이었다. 어쨌든 다수 교회의 인정을 받을 만큼 알려진 외경은 하나도 없었다. 세째 기준은건전한 교리의 표준들과의 일치성이다. 이 기준 때문에 요한복음은 처음에 의심을 받다가 나중에 받아들여졌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베드로 복음』은 사도 칭호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현설적경향 때문에 안디옥의 세라피온(Serapion of Antioch)에 의해 금지 당했다.
이렇듯 신약 성경의 정경 발전의 역사는 그것이사도들이나 그 제자들에게 귀속된 것임을 보여준다. 처음 4세기의 교회는 정경이 사도적 교리를 적절하게 밝혀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겼으며,따라서 정경을 구성하고 있는 책들은 신성한 예배에서 공중 낭독용으로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이 점을 이해할 때 정경의 점차적 발전과 그 다양한 성격과 더불어 정경에 포함된 구체적인 작품들에 대한 문제와 의심들이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앞서의 세 가지 기준들을 적절한 것으로 여기는 정통적인 개신기독교는 오늘날 앞선 세대들의 결정들을 거부할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며, 신약을 옛부터 선택받고 헌신적이며 영감받은 사람들에 의해 선포된신적 계시의 완전하고 권위있는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