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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흥왕/ 흥하다/ 흩어짐/ 희귀하다/ 희년

흥왕 flourish

세력이 매우 왕성함 또는 흥하고 번창함을 의미한다(시72:7;느2:10). 시편 기자는 비록 악인이 흥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하였다(시92:7).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전파되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는데(행12:24), 초대교회 시절에는 사도들의 이적과 말씀 전파로 인하여 복음이 점점 더 널리 피지나갔다(행19:20).

흥하다 flourish

잘 되어 일어나 번성하다. 잠언기자는 악한 자의 집은 망하지만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한다고 했으며(잠14:11),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고 하면서(눅2:34, 새번역 '일어나다' ) 예수의 사역을 미리 알려주었다.

흩어짐 dispersion

'흩어짐' (헬. 디아스포라)이란 단어는 이방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요7:35;벧전1:1)을 뜻하는 경우도 있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약 1:1;유딧서5:19)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1. 기원.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흩어짐 (해외 진출)이 어느 시기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일찍이 다메섹에 이스라엘의 '거주지' 가 있었다는 암시가 있고(왕상20:34), 솔로몬의 팽창주의 정책이 그보다 일찍 무역의 전초 기지들을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정복했던 앗수르와 바벨론의 왕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왕하15:29;17:6;24:14 이하:25:11이하). 이 강제 이주정책의 주요 목적은 이스라엘의 지도층과 훌륭한 장인들기술자들)을 거세시키는 데 있었다. 이렇게 이주한 집단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특히 북왕국 출신들)은 그들의 민족적이며 종교적 주체성을 잃었던 것 같으나 바벨론의 유대인 공동체는 풍부한 예언적 사역을 받아 성전이나 제사가 없는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를 유지하였으며, 바벨론 포로에서 귀국하여 예루살렘을 재건할 지사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고레스 왕 때 귀국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자의식이 강한 상당한 규모의 유대 공동체는 그들 자신이 번역한 탈무드와 함께 중세시대에도 존속해 있었다.
2. 범위. 해외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에서도 잊혀지지 않았으며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그린 선지자들의 미래상에는 '이스라엘의 쫓긴 자'의 행복한 회복이 포함되고 있다(참고, 사 11:12:슈3:10: 또한 70인역이 '이스라엘의 흡어진 자'로 번역하고 있는 시 147:2). 선지자들이 내다본 지역은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들보다 훨씬 넓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또 다른 흩어짐이 이미 시작되었다(렘43:7:44:1). 유대인들은 애굽과 그 너머의 지역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정착하고 있었다. 애굽에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의 모습은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더불어 흩어짐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로써 매우 다양한 지역에서 유대인 이주민의 점증되는 물결이 인지된다.
A. D. 1세기 필로는 애굽의 유대인 수를 100만으로 산정하였다. 필로보다 조금 앞선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구레네의 유대인의 수와 지위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논평하였다. “이 백성은 이미 모든 도시에 진입하고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에서 이 민족을 수용하지 않고 이 민족의 영향을 느끼지 않은 곳을 찾아 보기 어렵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14, 115에서 재인용). 스트라보의 평가가 대체로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는 많다. 수리아에는 대규모 유대인 '거주지들'이 있었다. 저스터(Juster, 1914)는 소아시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영향을 미치는 71개 도시를 열거하면서 이 숫자는 현대에 오면서 증가될 수 있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호라티우스와 같은 로마 시인은 우호적 입장은 아니면서도 로마 시대 유대인들의 존재와 습관들을 증거해 준다. B. C. 139년에 이미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받은 적이 있다. 사도행전 18:2에 언급된 유대인들의 로마 추방령은 여러 선례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항상 되돌아오곤 하였다. 모든 좋지 않은 여론 - 빌라도와 갈리오 총독의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고, 빌립보(행16:20)와 에베소(행19:34)의 군중들의 외침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 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예외로 인정받게 하였다. 유대인들의 사회적 배타성, 이해하기 어려운 금기 및 비타협적인 종교는 모두 관용을 받았다. 유대인들만이 로마 제국의 '공식적' 제사와 군복무(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행진을 기부했으므로)에서 면제될 수 있있다. 셀류시드, 프톨레미, 로마 제국 아래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많은 혐오도 받고 야만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평화와 번영을 누렀다. 유대인들의 해외 진출은 로마 제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오순절 군중에 대한 기사가 말해주듯이 (행2:9-11) 유대인들은 바사 영향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3. 특징.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의 생활은 율법과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망명한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 오니아스(Onias)가 B. C. 2세기에 이사야 19:18 이하의 예언을 근거로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성전을 세웠던 것은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한다. 흩어진(해외)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꼭같이 살 수는 없었다. 로마 제국 서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헬라 세계에 살면서 헬라어를 사용하여야 했다. 그 결과가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었다. 70인역 성경의 기원에 관한 전설들은 최소한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선교 정신을 증거해 준다. 알렉산드리아의 경우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잘못을 범할 수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기존의 헬라 문화와 지적 접촉을 시도한 번영하고 교육받는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공동체의 특징적인 산물은 '메시야 사상에서 벗어난 것 이외에는 정통성을 지닌 지혜서와 필로의 유대교이다. 로마서 2:17-24은 해외(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설교 이해에 관한 다소 풍자적인 논평인 것으로 보인다.
헬레니즘적 유대 문화는 율법과 민족에 충실하였다(참고, 빌3:5-6, 이것은 흩어진 한 유대인의 고백이다). 이 공동체들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쳤으며 서로 간의 접촉은 물론 예루살렘과의 접촉도 유지하였다(참고, 행28:21-22), 경건한 자들은 큰 절기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으며(행2:5이하;8:27), 모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자주 가졌다. 그러나 문화적 분위기가 매우 달랐던 탓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들은 현지에 자체 회당을 갖고 있었다(행6:9). 스데반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해외 유대교에서 성전에 대한 급진적 사상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유대인에게 좋지 않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강력한 매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유일신 숭배, 고상한 윤리, 일반적으로 높은 가족 생활의 표준 등은 상류층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희망으로 불러들였다. 할례의 필수 조건으로 인해 많은 남자들은 완전한 개종자가 되기를 주저했던 듯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행 13:16) 로서 회당에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울의 전도여행시 언제나 회당에 참석한 이방인들을 보게 된다(참고, 행 13:43 이하: 14:1:17:4:18:4이하).
유대교의 매력이 부작용을 낳는 경우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비상한 마술적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의 신성한 말들은 주문의 효과가 크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음은 많은 자료들에서 입증된다. 파렴치한 유대인 중에는 이런 명성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사도행전 13:6이하에 나오는 바예수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일부 이교적 제의들 - 브루기아의 사바지오스 제의(Sabagioscult)와 같은 - 은 그 색다른 맛의 종교적 잡탕찌개에 유대교를 양념으로 섞어 넣으려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기독교 이단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으나 그 자체가 전체적인 해외 유대교를 대표하였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대로 고고학적 연구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상당한 형식적 차이들과 문화적 배타성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해외 유대교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유일성, 율법에서의 그의 계시, 그의 백성에 대한 어떤 우유부단이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4. 기독교와의 관계. 흩어진 유대인들이 복음의 길을 준비하는데 영향을 미쳤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당시 알려진 세계의 상당 지역에 뻗어 있던 회당들은 초기 전도자들의 발판이 되었다. 사도행전은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한 바울이 회당 설교로 그의 전도 활동을 개시했던 것을 보여준다. 그의 회당 설교 이후에는 거의 예외없이 분열이 뒤따라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거부했고 이방인들(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메시야를 환영하였다. 고넬료와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은 대표적인 기독교 개종자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개종자들이었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둔 성과였던 - 은 초기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사진적 지식을 가지고 이미 우상숭배와 부도덕을 경계하는 상태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다. 70인역 성경 또한 회당과 접촉한 이방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훨씬 넘어 전도에 기여하였다. 여러 기독교 교부들은 70인역 성경을 읽었던 것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일부 이교 저술가들의 혼동으로 인해 그들이 말하는 것이 유대교인지, 기독교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 기독교 공동체가 해외 유대교의 품안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았던 사실이 이들의 혼동의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방화나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끔찍한 소문을 믿었더라도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이교도에게는 많은 전통적 관행들에 한 기독교 개종자들의 태도는 유대적인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많은 지도급 개종자들에게 미친 유대인의 영향은 '유대화' (Judaizing)가 사도적 교회에 위협이 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모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야고보가 그리스도인들을 '흩어진 나그네' (벧전1:1;약1:1)로 부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흩어진 옛 유대인들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거주지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사람들' 이다. 이들은 이교도들은 알지 못하는 유대감을 누린다. 그리고 이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의지하며 초월적 충성심을 보인다.

희귀하다 precious

귀하고 드물다. 어린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당시에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하였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삼상3:1). 또한 이사야는 바벨론에 임할 화를 선포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는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사 13:12).

희년

<보라> 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