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이슬람권 선교전략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담임, 전(前)PCK 선교사(이란))
이슬람권 선교를 말할 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시대적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세계적 재앙이 되었던 코로나가 오히려 비대면 예배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면서선교의 방법론적 입장에서 고속도로를 깔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인터넷, 휴대전화,위성방송까지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더라도 전하고 싶은 내용을 분명히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수단을 체험한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철학, 외교, 군사, 법률, 철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으로 보아야 하며 여기에 물론 종교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기본적인개념을 올바르게 정의하지 못하고 이슬람을 대하면 큰 혼돈을 일으킬 수 있다. 한때 기독교 신학 교육의 기둥 역할을 담당했던 독일의 튀빙겐 대학은 지금 이슬람 교사나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전락하고 말았다. 어이가 없는 현상이 우연히 일어났으니 같이 한번 웃어 보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튀빙겐 대학이 어떤 곳인가? 현대 철학과 신학의 기둥 역할을 했던 헤겔이나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본 회퍼, 한스 큉, 위르겐 몰트만 등 대학자들이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활약했던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서 이슬람의 알라가 기독교의 창조주와 같은 신으로 인정해 주는 보편적 착각이 거의 일반 상식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같은 신이라면 섬기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합리적인 착각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럽에 무슬림들이 많아지게 되자 중동에서 이슬람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들이 원리주의 이슬람을 가르치자 유럽에서 자라나는 젊은 무슬림들이 과격화되어충돌과 테러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슬람 교사들을 중동에서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건하게 가르쳐서 각 모스크나 학교에 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 튀빙겐 대학을 포함한 독일에만 전국적으로 9개 대학에서 약 2천 명 정도의 학생들이 이슬람 신학자나 교사, 이슬람 복지 전문가 등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독일 연방정부 교육부는 지난 10년 동안 총 4천400만유로의 규모로 이슬람 신학을 지원했다고 한다. 게다가 훌륭한무슬림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정부 주도 장학재단도 생기고 학계와 재계가 투자해서 이슬람학술원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고 한다. (이유재 튀빙겐 대 한국학 과장, 영남일보 2021.2.3)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이슬람국가에서 막대한 재정을 투자해서 기독교 신학교를 세워놓고 기독교 신학자, 목사, 선교사, 교사 등을 양성하고 있는 격이다.
우리가 기초부터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가 유럽처럼 다문화 정책이나 차별 금지법 등의 소위 시대적 흐름의 대세(?)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초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세계적인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가 쓰나미처럼 국제사회를 휩쓸고 있고 우리나라는 거의 정리 단계에 들어서다가 다시 시작되는 듯한 상황인데 그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수칙 등으로 교회도자유로운 예배가 방해를 받는 상황에서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고 선교비가 줄어들고 선교사들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고 아직도 그 후유증은 계속 진행 중이다. 이럴 때 무슬림들을 향한 우리의 선교는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가?
우선은 정확한 상황 인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가능한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권은 원래 접근이 제한된 지역이라서 코로나를 이유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함으로 접근이 불가하거나 불편한 현상은 새로 생긴 상황이라기보다 원래 있었던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미군 철수 후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나 그 외에 원리주의 이슬람국가들 혹은 국가는 아니라도 얼마든지 대규모 테러를 강행할 수 있는 이슬람 무장 세력들이 지구촌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제 대 무슬림 전도 전략은 이전보다 더욱 안전을 위한철저한 대비책이 필요할 것이다. 헌신된 무슬림들의 입장에서는 그들 가운데서 외국인이 들어가 사는것만 해도 당장 드러나는 노골적 공격행위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분을 위장하고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면서 철저히 감추려고 노력하지만, 이슬람권 현지 정보계통에 근무하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누구누구가 선교사들이며 이들의 신상정보를 알고는 있지만 무리하게 체포하거나 추방하지 않는 것은 적당히 눈감아 주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 지혜로 과학문명의 발달을 경험하고 누리며 즐기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기술을 통한 복음 전파도 간과해서는 안 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즉인터넷, 무선전화, 위성방송 등의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무슬림들 앞에서 감히 말도 못 꺼내던 확실한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며또 그 내용이 좋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있고 또 반복해서 들을 수도 있기에 이를통한 열매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듣는 사람이 얼마든지 혼자서 숨어서 들을 수도 있기에 전도 대상자들의 안전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위성방송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떤 한 교회나 교단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나 연합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인터넷 방송이나 유튜브, 이메일 전도 등은 많지않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개인적으로도 가능하고 소규모로도 가능할 것이다. 또는 휴대폰 앱을 개발해서 성경이나 좋은 책들도 보낼 수도 있고 성경공부 공간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쯤 해서 이슬람권 선교에 대해서 매우 기본적인 부분을 먼저 분명히 해 놓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슬람과무슬림의 차이 문제다. 이것은 선교의 매우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로 복종이라는 뜻이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다. 알라는 창조주니까 명령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종으로서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인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이슬람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사람들이 무슬림인데 그 무슬림 집단이나 개인들은사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가장 불쌍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창조주에게 충성하며 최선의 거룩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 행한 그 일이 사실상 눈을 뜨고보면 테러였으며 폭력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속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마을의 어른들이나 사회에서 힘 있고 권세 있는 분들이나 신문 방송 등의 매스컴을 통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우리의 형제들이며 우리가 건져내야 할 우리의 이웃이며 선교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무슬림들을 향한 선교 전략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무슬림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And other sheep I have, which are not of this fold: them also I must bring, and they shall hear my voice; and there shall be one fold, and one shepherd.
영어 번역 중 원문에 가장 가까운 킹 제임스 번역을 올려놓았다. 여기서 현재 상황을 볼 때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무슬림들”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무슬림들은 세계적으로 울타리 밖으로 나가 있는 가장 큰 집단이며 돌아올 수 있는 길을 공권력으로 차단당하고 있으며 오히려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핍박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도 “내 양들”이라고 소유권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리고 결국은 그 소유권을 되찾아 오겠다("I must bring.")는 결단을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shall'이라는 조동사를 사용하셨다. 영문법에서 'will'은 막연한 미래의 일을 말하지만 'shall'은 말하는 사람의 의지가 포함된 표현이다. 즉 막연히 '그들은 언젠가는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가 그들을 한 목자에게 속한 한 무리가 되게 하겠으며 그들로 하여금 내 목소리를 듣게 하겠다”는 것이 정확한 의미이다.
예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분이 결단하시면 그분의 능력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다만 그 일을 실행할 때 쓰시기에 적합한 사람과 그 시기와 방법을 찾고 계실 것이다.
그들이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만 하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줘야 할 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면서 복음의 나팔을 분명하게 불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무슬림들은 구원받아야 할 예수님의 양들이다. 다만 지금은 속아서 울타리 밖으로 나가 있고 돌아올 길을 공권력으로 차단당한 양들이지만 그 양들을 찾아오는 것이 예수님의 계획이며 예수님께서 의치를 가지고 이루시겠다고 선포한 내용이 확실한 이상 무슬림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대풍의 추수가 약속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터넷이 되었든 위성방송이나 무선전화가 되었든 전달 수단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중요한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을 바르게 알려주느냐 하는 것이라고 본다. 소위 내부자 운동이니 상황화 전도방법 등은 핍박을 면하기 위한 안전한 방법일 수는 있어도 무슬림들에게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옳은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무슬림 학자들이나 변증가들은 어떻게 하면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을 속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많이 연구해 놓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인들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는 속임수.
*성경은 원본을 분실하고 기독교인들이 제멋대로 변질시켰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경전의 원본을 가지고내려온 것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라는 속임수.
*예수는 한 번도 내가 하나님이니 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으니 이슬람처럼 선지자로 보는 것이 더 옳다는 속임수.
*예수는 내 뒤에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했는데 그 보혜사가 바로 무함마드라는 속임수.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예수가 믿던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슬람의 알라라는 속임수.
우리가 이런 문제들로 씨름하다 보면 결국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제 이슬람권 선교는 수비 위주의 선교도 아니고, 타협 위주의 선교도 아니고 안전 위주의 선교에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좀 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무슬림이라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이슬람의 교리나 율법들을 인용해 가면서 이슬람이 진리라는 그들의 확신에 대해서 최소한 궁금증을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궁금증을 가지고 파고들다 보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해답을 찾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이집트 정교회의 사제 "자카리야 부뜨루스"는 대표적으로 방송을 통해서 성경과 꾸란을 비교하면서무슬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비록 무슬림들이 살해위협을 하고는 있지만 그의방송을 듣고 엄청난 무슬림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코로나 시대이거나 그 이전이나 이후이거나 무슬림들과의 대면 선교는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권력으로 차단되고 방해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선교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일꾼들을 통해서 적지 않은 잘 익은 열매들을 추수하고 계시다. 이런 사례들을 들으면 오랫동안 선교지에서 살아보았던 사람으로서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저 감사할것뿐이다. 그렇지만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느끼는 것은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비대면 선교를 통해서 무슬림들의 회개의 홍수를 맞이할 방법을 찾는 것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할 또하나의 분야이며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된다.
무슬림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이슬람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의경전 꾸란과 성경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거기에 대한 대책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슬람의 경전에서 말하는 내용이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 이슬람을 진리로 확신하는 그들의 생각을 바꿀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의심을 가지게 하거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가장 쉽게 다룰 수 있는 주제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 꾸란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성경과는 매우 다르고 상식적으로도 수긍할 수 없다는 점이다.
꾸란 19장 28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아론의 누이여 너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네 어머니도 부정한 여자가 아니었노라"
이는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내용이다.(꾸란19:16-34)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들판에 나가서 출산의 진통을 겪으며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는 중에 천사가 나타나서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거기서 떨어지는 대추야자 열매를 먹으라고 해서 그것을 먹고 또 발밑에흐르는 냇물을 만들어 주어서 그것을 마시고 기운을 차려 예수를 낳았는데 아기를 안고 마을에 들어올 때에 사람들이 부정한 행위를 해서 아이를 낳았다며 조롱하는 장면이다. 그 때 갓 태어난 예수가입을 열어 사람들에게 "나는 알라의 종으로 그분께서 내게 성서를 주시고 나를 예언자로 택해 주셨습니다."는 말로 해명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이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꾸란은 왜들판에서 종려나무 열매를 먹고 냇물을 마시면서 태어났다고 하느냐는 등의 논쟁은 한 마디로 성경과꾸란 중 어느 것이 옳으냐는 다툼이기 때문에, 끝없는 논쟁으로 결론 없이 마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무슬림들과 논쟁하고 다투는 행위는 전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고 적대감을유발하며 마음 문을 닫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꾸란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슬림 전도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일단은 검증을 위한 질문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무슬림들에게는 꾸란을 검증한다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된 사항이다. 꾸란의 계시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여 분명한 것은 묻지 말라 했으니 그것이 오히려 해롭게 하느니라. 또한 꾸란이계시되는 것을 묻는다면 이는 더욱 너희들에게 해악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지나간 것을 용서하시니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너희 이전의 한 무리가 그러한 질문을 하였으니그들은 그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되었노라. "
그래서 꾸란에 대해서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꾸란의 금기를 깨는 불법행위이다. 그저 의심하지말고 무조건 믿고 복종하라는 것이 이슬람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에게 왜 그러냐고 묻는 것이 일종의도전행위라는 것을 알고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검증은 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소위 역사비평이라는 것을 통해서 성경이 진리인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도 역사적으로 검증해 보자는 제안은 한 번도 그런것을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있기는 하지만 어떤 무슬림들에게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동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꾸란에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아론의 누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아론이라면 모세의 형이 아닌가? 이는 이슬람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를 출산한 마리아는 모세와 아론과는 남매지간이라는 뜻인데 모세의 연대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부분이다.
참고로 출애굽의 연대는 전기 설(주전1446년 설)과 후기 설(주전1290년 설)로 나누는데 필자가 전기 설을 취하는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 입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4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역사적으로 솔로몬의 즉위는 주전966년으로 본다. 여기에 480을 더하면 1446년이 된다.그러므로 모세는 주전 15세기 때 살던 사람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한편 이슬람의 꾸란이 말하는 대로 한다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모세와 아론의 누이(꾸란19:28)라는 말은 예수도 모세와 동시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하지 않은가?참고로 최영길 박사가 번역한 꾸란의 각주에 보면 여기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모세의 형인 아론은 이스라엘 최초의 성직자였다. 마리아와 그녀의 조카 엘리자베스(요한의어머니)도 성직자 가문이며 아론의 자매이자 또한 이므란(아론의 아버지)의 딸이기도 하다.(꾸란3:35절 각주 참조) 마리아의 가문은 훌륭한 혈통의 가문이었으므로 마리아는 그녀 부모의훌륭한 윤리관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녀의 가문을 욕되게 하려 하였다."
이 설명을 보면 최영길 박사는 마리아가 모세와 아론의 혈통적으로 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꾸란을 최영길 박사보다 먼저 한글로 번역했던 김용선 박사의 번역본에서 꾸란19장 28절에대한 각주를 보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는 미리얌이지만, 무함마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 미리얌과 혼돈하고 있는 것으로, '성서'에 관한 그의 지식이 부정확한 것을 말해 줌."
이분들은 아랍어 꾸란을 한글로 번역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다른 견해를 기록해서출판해서 판매하고 있다. 만일 아랍권에서 김용선 박사의 견해를 말했다면 선지자 모독죄로 돌로 치려했을 것인데 그분이 한국에 살고 있고 아랍무슬림들이 한글을 몰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내용을 공격하듯이 무슬림들에게 퍼붓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예수님과 마리아는 1세기 때 살던 사람이고 모세와 아론은 주전15세기 때 살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착각을 경전에 기록할 수가 있을까? 꾸란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고 싶어도 최영길 번역의 주석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김용선 번역의 주석이 맞는 것일까? 하는 논쟁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라고 슬쩍 들려주면 헤어진 뒤에라도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첨단 과학이 발달하여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어서 원한다면 인터넷 등을 뒤져가면서 얼마든지 스스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묻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지만 일단 생각해보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시키면 이슬람은 깨지게 되어 있다. 일단 꾸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면 씨앗은 심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생각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일단 생각해 보고 따져보고 확인해 보고 결단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는데 이슬람에서는 궁금한 것을 묻지 말라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을 숨기고 싶을까?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지 않을까?
또 꾸란의 28장38절에 대해서도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파라오가 말하길 족장들이여 나 외엔 너희를 위한 어떤 신도 내가 아는바 없나니 하만아 진흙으로 벽돌을 구어 내가 모세의 신을 볼 수 있도록 높은 궁전을 짓도록 하라 실로 나는 그(모세)가 거짓말하는 자라 생각하니라."
여기서는 모세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파라오(이집트의 왕)가 등장한다. 그리고 하만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애굽의 파라오가 하만에게 모세의 신을 볼 수 있도록 높은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하는 장면이다. 이는 바벨탑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데 애굽의 파라오가 하늘까지 이르는 궁전(바벨탑)을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에게 명령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은 노아의 홍수 이전의 사건이다. 모세와 파라오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에스더서에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하만은 바벨론 포로 이후 주전 5세기에 통치하던 아하수에로 왕 때의 인물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이 마치 동시대에 일어났던 것처럼 묘사하는 꾸란을 역사적 검증해 보고 싶다면 그런 질문에 대해서 이슬람 학자들은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 정도라면 충분히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있는 질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것들은 꾸란의 자체 모순들의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꾸란은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어느 왕, 몇 년에, 누가, 어디서, 무슨 일을, 왜 했다는 이야기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를 역사적,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검증이 가능하다. 그러나 꾸란은 검증을 할 수 없도록 6하원칙(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에 의해서 기록된 기사가 거의 없다. 그래서 역사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꾸란은 성경이 변질되었다 가르친다. 그런데 그 주장에 대해서 입증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무슬림이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할 때, 단순하게 "어! 그래요? 아직 제가 그걸 모르고 있었군요.그렇다면 언제 변질되었지요?" 라고 되물으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변질 되었다는 소리는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언제 변질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못하면 오히려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나 보군요. 그럼 이렇게 질문 볼께요.
첫째 무함마드 이전에 변질 되었다.
둘째 무함마드 당시에 변질 되었다.
셋째 무함마드 사후에 변질 되었다.
그 중 어느 답변이 옳은지 한번 골라 보시겠어요?
만일 무함마드 이전에 변질 되었다고 대답하면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꾸란에 이런 구절이 있던데요.
하나님이 그대에게 계시한 것에 그대가 의심한다면 그대 이전에 성서를 읽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실로 주님으로 그대에게 진리가 이르렀나니 의심하지 말라. (꾸란10:94 최영길 역)
이 꾸란의 구절은 성경이 변질되지 않았으니 꾸란에 대해서 의심이 간다면 먼저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또 이런 구절도 있네요.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내리셨고 앞서 온 것을 진리로 확증하면서 그대(무함마드)에게 그책(꾸란)을 계시하노라"
구약과 신약을 진리라고 확증하면서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계시했다고 하셨는데 꾸란이 무함마드이전에 변질되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일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또는 무함마드 당시에 변질되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구상에 수천수만 개의 성경 사본이흩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성경 사본들을 찾아다니면서 고쳐 놓았으며 누가 어떤 내용을 고쳐 놓았을까요? 등의 질문을 만들어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꾸란이 하늘에 원본이 있고 그 원본이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랍어는 7-8세기 때에 만들어진 언어라고 하는데 아랍어의 발전과정에서 땅에서 아랍어에 점을 찍는 것을 최초로만들었을 때 하늘에서도 점을 찍었을까요?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꾸란12:20절에 이런 구절도 역사 검증을 위한 질문의 소재로 사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소액의 은전 몇 푼으로 팔아버리니 그를 하찮게 간주하였더라"
이 구절은 모세의 형들이 모세를 상인들에게 팔았던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어로 “소액의 은전 몇푼"이라고 번역된 내용을 아랍어로된 꾸란 원문에 보면 몇 디르함(Dirham)에 팔았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디르함이란 화폐단위가 아랍권에서 사용된 시기는 언제인가를 살펴보니 우마이야왕조(주후661~750년)의 다섯 번째 칼리프였던 압드 알 말리크 때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셉의 시대에 디르함이라는 화폐단위가 사용되었다고 하는 꾸란의 내용을 이슬람학자들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무슬림들과 경전의 진위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무슬림들이 얼마나 속고 있는지를 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도 예수님께서 구원하고 싶어 하시는 잃어버린 양들이라는 기준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절대로 전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시대에 18~19억이나 되는 많은 잃어버린 양들을 방치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생명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간절히 무슬림들을 전도하기 원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우리가 담대히 선포하는 것은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하실 때 우리가 선택받아 쓰임을 받을 뿐이다. 많은 무슬림들을 전도했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인간을 선한 일에 써 주신 것을 감사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울타리 밖의 양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하실 때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도구도 주셨다고 믿는다.
그 도구 중 가장 강력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무슬림들은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적이 없다. 이슬람학자들이 “성경은 변질된 책이니 읽지 말라”고 교육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진지하게 읽은 사람들은 성경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을 수술하는 도구가 되어서 영혼을 치유하신다. 무슬림들은 의외로 순수한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꾸란과 비교될 것이다. 꾸란은 육하원칙에 의해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왕 몇 년에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검증이 가능하다. 무슬림들을 전도하고 싶으면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구하여 읽혀라. 그러면 그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강력한 도구이지만 "기도"역시 강력한 도구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환경과 상황에서 깊은 고민과 어려움에 빠질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환경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무슬림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그 때와 상황에 맞는 메시지나 도움이 주어진다면 의외로 쉽게 돌아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 상황에 맞는 말이나 그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원했으나 그들이 들은 말씀에 믿음을 갖게 될지 아니면 오히려 대적할 것인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그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다. 그 마음을 여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는 결코 빠져서는 안되는 필수 선교 도구이며 하나님과의 소통의 비밀 창구이다.
또 한 가지 빠져서는 안 되는 선교의 도구가 있다.
그것은 빛과 소금의 삶이다. 선교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무슬림들도 감동을 받을 것이다. 무슬림들은 메시지나 말로 변화를 받는 것보다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는다. 평생을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의 굴레 안에서 억눌려 두려움 가운데서 살다가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에 넘치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고 듣고 만나고 체험하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은 교리상 허점이 많고 감추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래서 질문도 금하고 의심하지도 말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정말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삶이 그렇게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모범적 삶을 살았다면 전 세계 인류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너무 쉬울 것이다.우리가 복음서를 영화로 만들어 선교에 사용하는 것처럼 무함마드의 삶을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면 얼마나 효과가 크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무함마드에 대해서 말도 못 하게 한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붙여서 그의 삶에 대해서 논하는것을 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를 어기면 처벌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슬림들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모든 자유를 반납한 채로 이슬람 율법의 포로가 되어 그렇게 살다고 그렇게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을 풀어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감당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며 우리의 영광스런 짐이다. 이 일을잘 감당해서 수많은 무슬림들을 돌아오게 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고 크게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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