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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Christianity

국내 이슬람 대책의 재고와 선교지향적 방향성 모색

국내 이슬람 대책의 재고와 선교지향적 방향성 모색

 

박종상 목사 (현 영휘교회 담임, ()PCK 선교사(아프가니스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이슬람은 한국 사회에서 조용히 그러면서도 합법적 과정을 밟으며 확산하고 있다. 이것을 저지하려는 한국 교회의 노력과는 달리, 한국 정부의 이슬람 관련 정책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정부는 이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정책을 쓰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는 2021826일에 아프간 무슬림들 391명을 국내로 이송한 사건일 것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재장악하자 한국 정부는 2021826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로 공군 수송기를 급파하여 대() 아프가니스탄 협력 사업에 함께 했던 현지인 직원과 그의 가족들 378명을 특별 기여자들'이라는 명목으로 국내로 데리고 왔다. 정부가 국내로 데리고 온 아프간 사람들이 모두 무슬림이다. 주지하다시피, 이슬람권에서 무슬림에게 전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수백 명의 무슬림들을 한꺼번에 국내로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국내에 무슬림 마을 하나를 만들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극단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경계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1. 정부의 다문화 정책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20225월 말 현재 국내 체류외국인은 2,012,862명이다. 2021년 말 현재 체류외국인 중에서 이슬람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164,370명이며, 이들 중에서 20225월 말 현재 불법으로 체류한 자들은 68,568명이다. 뿐만 아니라 난민신청자는 1994년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75, 195 명이고 이중 1,222명이 난민인정을 받았고, 2,437명의 인도적 체류허가자를포함하여 총 3,659명이 난민인정(보호)을 받았다." 정부의 통계에 근거하여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무슬림 수는 20여만 명 곧 십 분의 일 가량으로 추정할 후 있으며, 한국인 무슬림 6만 명까지 포함하여26만 명 가량의 무슬림들이 국내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요지부동 다문화 포용정책을 펼치며 국내 무슬림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제3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2018~2022)에 따른 2022년도 시행계획"에 따르면, 2022년도 다문화가족정책 시행 예산은 총 7,413억원이다(중앙 부처 5,918억원, 지자체 1,494억원). 그 계획에 들어있는 다문화 가족은 전체 37만 가구(가구원 109만 명)이며, 전체 가구 대비 1.8%(가구원2.1%)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무슬림을 다문화가구원 대비 20%로 볼 때 1천 400억 원 정도의 재정이 무슬림들을 지원하는 데에 사용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아무리 이슬람의 확장을 막으려 해도 정부가 재정적으로 무슬림들을 지원한다면 매우 힘든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생각해 볼 것은, 한국 교회는 과연 무슬림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이 정도의 재정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2. 무슬림에 대한 선교의 포용성
정부의 다문화 정책이 무슬림들에게까지도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이유는 그것이 한국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교회는 정부의 정책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슬림들에 대한선교적 과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의 문을 여는 것이다. 무슬림에 대한 포용성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을 여러분의 이웃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까?”“아프가니스탄에서 온 391명이 여러분이 사는 동네로 이사 온다면 친절히 맞아 줄 의향이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정서상 대답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를 종교다원주의자로 볼 뿐 아니라 거짓 종교를 옹호하는 자로 낙인찍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슬람의 극단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슬림들이 우리 사회에서 알 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나 탈레반이 한 것과 같이 테러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많은 무슬림이 우리 곁에 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이슬람권에 가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무슬림들의 좋은 이웃이 되려고 무척 애쓰는데, 정작 한국에 들어와 사는 무슬림들에게는 좋은 이웃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요나와 같은 마음 때문인가?
아직은 우리가 안심할 수 있다. 국내의 상황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드러내며 한국 사회의 안보와 종교문화를 제압할 만한 단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아랍문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이슬람 문화 외에 다른 문화가 있다는 것과 꾸란의 알라 외에 성경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배울 기회를, 우리가 줄 수 있다.
무슬림들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모스크를 세워놓고 자신들의 종교활동을 즐기고있다. 우리 동네에 이사 와서 같이 살고 있고, 우리가 이용하는 교통수단을 공유하고 있고,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고, 우리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 아이들을 전도하여 우리 교회에 데려오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의 생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필자가 살던 아파트에는 유학 온 무슬림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많았다. 그들이 유학 온 대학교에서 제공해 준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과 인도에 살 때에는 무슬림이내 이웃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들을 이웃으로 삼을 수 없을까?”
선교지에 있는 때에는 먹은 것이 '할랄 음식'이었고, 입는 것이 무슬림들의 옷 '샬와르카메즈'였고, 사는 곳이 '무슬림들이 지은 집'이었는데 한국에서는 할랄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고, 내가 과거에 입던 옷은 '무슬림의 옷'이 되어 버렸고, 이웃이던 무슬림은 '추방해야 할 사람들'로 변해 버렸다. 이것이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3. 한국 교회의 이슬람 이해
이제 지난 오십 년 간 한국 사회는 이슬람을 이해함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점을 연대별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1970-80년대의 이해

한국 교회는 1980년대까지 이슬람 문제에 관한 한 그 심각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이슬람 국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테리는 먼 나라의 문제로 여겼다. 그 후 1990년대 들어 해외 무슬림 노동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이슬람을 막아야 한다는 견해와 극단적이지 않으면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불면서 많은 근로자들이 이슬람권으로 갔지만, 한국 교회는 그 당시 자기교인들을 선교자원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오히려 그들이 배워 온 아랍 문화에 신기하게 들을 뿐이었다.

1973년의 '빌리 그레이엄 초청 전도 대회'는 한국이 세계선교를 주도해야 한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으면서 선교적 안목을 갖게 했다. 그 자신감은 1975년의 '엑스폴로 74'로 이어졌고, 1977년에 개최된 '77 민족복음화대성회'를 통해서는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 복음화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한국을 '성시화하려는 데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다른 종교와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성을 강화하는 것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한 국가 단위의 전도 모델'로 설정한 또 다른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980812일부터 16일까지 여의도에서 개최된 '88세계복음화대성회'였다. 필자는 이 대회가 한국 교회의 낙관주의 선교 의식이 정점에 이끈 것으로 평가한다.

그 후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1988년 올림픽'160개국이 참가함으로 한국교회도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즈음에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사 파송수도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오백여 명이었던 해외 선교사 파송 수가 천 명을 넘은 것이 그때였다.” 그 당시 한국 교회의 낙관주의는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화공보부에는 선교단체를 통해 선교사들에게 문화 주재 여권을 발급했는데, 정부가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하계 올림픽을 즈음하여 해외여행 규제를 풀면서 해외 선교사들의 여권 신청 건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이때 이슬람권으로 파송되었다.

. 1990년대의 이해

한국 정부가 해외 노동 인력을 대거 수입하면서 이슬람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입국하였다. 한국교회는 '88 올림픽' 기간에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환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주 노동자들에게 지역 교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지역 교회초대를 받아 예배도 참석하고 각종 프로그램에도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무슬림들이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많이 방문한 적이 없을 정도로, 이 시기에 한국 교회는 무슬림들에게 개방적이었고 또 무슬림들은 지역 교회를 자유롭게 출입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위험한 이슬람 국가에 비싼 비용을 들여서 선교사를 보내기보다는국내에 들어와 있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하며, 찾아 무슬림들에 대한 전도의 관심을 높였다. 심지어 그들을 전도할 목적으로 신앙이 좋은 교회의 여자 청년들을 무슬림 청년과 결혼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교회를 찾아오는 무슬림들의 수가 어느 순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무슬림들이 한국에 가서 교회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이슬람 국가에전해지면서부터 이들을 통제하고 이슬람 공동체(움마)에서 이탈하는 자들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 나라에서 이맘을 파송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기에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중앙성원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점점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지방으로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80년대 말 한국에는 3개의 모스크가 있었는데, 이들이 지방의 무슬림들을 규합하면서 모스크를 세우는 집중하였다.2022년 현재 17개의 성원과 1개의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무슬림들이 한국 교회를 찾는 빈도수가줄어들면서 그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사역의 결과를 낙관하던 분위기를 사라지고 이슬람에 대한 경계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다. 2000년대의 이해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슬람권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분위기였지만 예기치 못하게 사건들로 인해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더 나아가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복음전도도 크게 위축되었다. 뿐만아니라 이슬람권 선교를 주도하는 단체에서도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한 쪽에서는 이슬람이 한국 사회에 침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다종교사회에서 이슬람만 공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다원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럴수록 더 적극적으로 이슬람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고 하는 주장도 커지기 시작하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2000년대 들어서 한국 교회는 이슬람 저항 세력으로부터 받은 극단적인 도전을받았다. 우리는 그 사건들을 통해 한국 교회의 이슬람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세 가지 사례만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2004년에 이라크에서 발생한 '김선일 피살 사건'이다. 알자지라 방송은 6월 21일 가나 무역 소속의 김선일 씨가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지하드)라는이라크 저항 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미국의 9.11 테러 사건처럼 한국인도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납치된 지 22일만인 6월 23일, 김선일 씨는 팔루자 인근 도로변에서 참수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가 기독교 선교활동을 한 것이 밝혀지면서 한국교회도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또 다른 사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하였다. 2007년 7월 19일 분당 샘물교회 봉사단원들 23명 전원이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가즈니 주의 카라바그 지역에서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것이다. 탈레반은 7월 25일 배형규 목사를 살해하고, 31일에는 심성민 형제를 살해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대표단을 보내어 탈레반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슬람의 극단성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 한국인의 가정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치를 떨게 만들었다. 김선일 피살 사건이 '개인적으로' 당한 사건이었다면 샘물교회 봉사단의 피랍 및 피살 사건은 '집단적으로' 당한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인터콥(InterCP)이라는 선교단체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단체가 주도한 인터콥의 '아프가니스탄 2006 평화 축제 행사'였다. 그해 7월 25일, 한국 정부는 6개 부처의 장관들의 이름으로 합동담화문까지 발표하며 인터콥이 스스로 그 행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최바울 대표는 “이슬람에 대한 전문성 부재가 불러온 과도한 조치”라고 하면서 정부를 비난하고, 인터콥의 산하 기구인 아시아협력기구(IACD)도 “명백한 종교 탄압과 인권 탄압 행위"라고 규탄하며 행사를 추진하였다. 그 행사를 위해 동원된 1,200명 가량이 카불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으며, 미리 입국하여 행사를 추진한 사람들은 8월에 문화 행사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는 사실상 '추방'이라는 결정을 내리며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그들이 스스로 떠나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아프간 정부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식으로 발표를 함으로써 한국의 외교부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런 사건들은 한국 사회는 물론이고 한국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우리 교단도 이시기부터 이슬람 문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총회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4. 총회 차원의 이슬람 대책
이슬람이 국내외의 주요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총회는 '이슬람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슬람 문제에 대해 일 년 동안 연구하도록 하였다. 동 위원회는 3차 회의를 거쳐 대이슬람교 관련 사업 방안을 논의하고 이슬람교에 대한 홍보, 세미나 개최 등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그리고 '이슬람연구위원회'의 존속과 동 위원회의 명칭을 "이슬람교대책위원회”로 변경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그 후 총회는 제95회 총회부터 제104회 총회까지는 “이슬람교대책위원회”로, 제105회 총회는 “이슬람대책위원회”로, 그리고 제106회총회는 "이슬람및단군상대책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이슬람대책과 관련한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한편, 우리 교단이 가입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크리스천이 자유롭게 무슬림을 만나서 대화하듯이 무슬림도 자유롭게 크리스천을 만나서 대화할 것을 기대하며 공식적인 창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이 이른 바 '종교 간의 관계와 대화'(Interreligious Relations and Dialogue)이다. 그에 대한 지침은 이슬람 문제를 다루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선교는 그들과의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먼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에게 두신 일반 계시의 요소들을 파악하는데에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그리스도의 '대화'는 무슬림에 대한 복음 증거의 모델이 될 수 있다(요 3:1-15, 4:7-26 참고). 오늘날 이슬람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안의 충돌’이고 또 종교 간의 충돌이 아니라 '종교 안의 충돌'이다.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총회의 과제라고 본다.

5. 선교지향적 방향성 모색
가. 무슬림들의 변화
한국 사회는 현재, 역사상 가장 많은 무슬림들을 보유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 무슬림들의 수가 다소 줄었지만 방역 규제가 해제 되면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갈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보였던 이슬람 이해와 그 대책을 그대로 답습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당분간 무슬림 사회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예측해 본다.
첫째, 올해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가 이슬람 국가에서 열린다. 이로 인해 이슬람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방성을 띨 것이다.

둘째, 테러를 일으켜서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시도는 당분간 주춤해 질 것이며,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를 수용하여 세계를 주도하는 종교로서의 이슬람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셋째, 무슬림들은 더 개방적으로 나가지만 크리스천들은 더 폐쇄적으로 나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넷째, 이슬람은 역사상 한 번도 '개혁다운 개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나 그들 자신이 급변하는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실제적인 개혁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기독교계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슬람의 움직임이 국제 사회에 유익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 선교적 방향성 모색

198810, 필자가 영국의 런던에 있는 '이슬람 중앙 문화센터'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이맘은 필자에게 "영국이 그런 것처럼, 한국은 곧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이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30년 후 한국 사회는, 그의 말대로 또우리 크리스천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슬람화' 과정을 밟고 있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가지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무슬림을 이웃이요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다. 무슬림을 적극적으로 만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자살 폭탄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게 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부터 바꾸어야 한다.

둘째, 한국 문화와 이슬람 문화 사이에 드러나 차이점과 유사점을 가르쳐 주면서 무슬림들이 타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곧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 혹은 아랍 문화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무슬림들이 자국어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해야 한다. 움마를 벗어날 수 없는 이슬람 사회의 특성상 그들이 안전하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다. 또 그들을 일대일로 양육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가 '이슬람 대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슬람의 위험성을 한국사회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이 문제가 많은 종교요 사상이긴 하지만 우리 교단에서 이슬람 대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총회의 격에 맞지 않다고 보고, 다른 표현을 발굴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다섯째, 총회 산하의 신학교에 이슬람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슬람연구소 등.

 

6. 맺는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진행해 온 국내 이슬람 대책 활동은 그 실효성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활동의 결과는 대부분 무슬림들과의 적대적 관계를 심화시키거나 아니면 이슬람들 두려워하여 오히려 그 문제에 대해 방관자가 되게 할 우려를 낳게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국내에 체류하고 있거나 국적으로 취득한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서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무슬림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고 '좋은 친구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무슬림들에게 좋은 친구와 이웃이 되어 준다면 그들은이 땅에서 하그들을 위한 준비하신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