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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Christianity

전체 총평 및 총회 이슬람 선교의 방향과 정책 제안

전체 총평 및 총회 이슬람 선교의 방향과 정책 제안

김영동 명예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전(前)PCK 선교사(인도네시아))

 


1. 서론
21세기 선교의 가장 난해하고 어렵고 복잡한 벽 가운데 하나는 종교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로서 생로병사의 진리를 설파하기에 쉽게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정체성 형성과 삶의 원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정치와 얽히고설켜 있으면 더욱더 선교가 어렵다. 현대 선교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이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은 20세기를 지나면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종교이고, 정치와 종교가 엮여 있기에 이슬람 선교의 방향과 정책을 토론하고 정립하는 것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차제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이슬람 선교의 방향과 정책을 토론하고 정립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실천과 경험적으로 탁월한 분들을 모시고 모임을 마련한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학문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발제자들의 핵심 내용과 제언과 주장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하고, 제시한 내용을 토대로 전체 총평과 총회 이슬람 선교의 방향과 정책 제안을 모색하려고 한다.

2. 발제의 핵심 논지와 전개
1) 먼저 아랍어에 박식하고 다양한 중동 선교 현장 경험을 쌓았으며, 이슬람과 무슬림 인식의 오해와 편향성을 강도가 높게 비판하는 공일주 선교사는 "이슬람권 선교정책과 이슬람에 대한 총체적 이해: 충돌, 공존, 회심"이라는 심도 있는 발제에서 이슬람과 무슬림의 정체성과 관계성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적한다. 아울러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선교는 종교가 처한 상황 속에서 파악하고 “주의 깊게 살펴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은 동적이고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실체"라는 특성을 강조한다.
이슬람의 종교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데올로기적 특성은 거부하되 무슬림을 사랑하는 것이 바른 선교적 관점과 태도라고 한다. 이슬람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랍어를 아는 쿠란 전공자들이 쿠란 번역을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슬람권 선교의 자세는 충돌, 공존, 회심으로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데, 이 중 한국교회 선교가 채택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로 충돌보다는 공존을 정복보다는 대화와 회심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무슬림 이주민에 대한 선교의 구체적인 방향은 이슬람권 현장에서 "사역한 한국인 선교사들이 국내 이주민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행정적 조처를 하고, 회심한 무슬림 배경의 신자를 양육하고 훈련하여 국내 무슬림 이주민을 전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해외 무슬림에 대한 선교는 무슬림의 관심사와 필요에 부응하는 방향을 취하되, 시공간에 따라 다르게 대응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사역자 양성과 제자 훈련, 상황화와 기존 교회 지원, 교회 개척과 사역자 양성, 무슬림 배경 신자의 경제적 지원 등 다양하다.
2) 이규대 선교사의 “무슬림에 대한 사역 전도와 양육 및 온라인 사역(동남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분포도를 지역과 인구분포도에 따라 총 다섯 영역으로 나눈다. 미국의 퓨 연구센터의 분류를 따라 이규대 선교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슬림 인구 현황과 선교 방향을 모색한다.
“2010년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62.1% 약 10억 명을 차지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61개 나라)의 이슬람은 나라와 지역에 따라 신자 수와 종교 분포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슬람 선교정책과 방향도 상황에 적응하는 다양성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타 종교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종교의 공존과 대화를 기본적인 자세로 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의 전제는 정복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뿌리내린 이슬람 적대 의식이나 혐오를 극복하고 겸손한 태도 속에서 공존과 대화, 협력과 섬김의 선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대화는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타협이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규대 선교사의 타 종교, 특히 이슬람에 대한 선교는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무슬림을 향한 기독교회의 선교 자세는 “심판자와 변호인이 아닌 증인”으로, “군인이 아닌 평화의 사절로서 부담 주는 판매원이 아닌 주님의 대사로 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슬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생각보다 인종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그리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슬람이 절대다수이며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나라들 선교도 지속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 같은 남반구 무슬림 지역 선교에 매진해야 한다는 논지를 이규대 선교사는 편다. 그 이유 그런 지역에는 종교 자유와 선교사의 합법적 활동이 가능하고, 더 효과적인 선교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례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전 인구 중 약10%(2천7백만 명)가 그리스도인이며, 인도네시아 무슬림 중에는 명목상 무슬림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선교의 호기가 된다. 그리고 무슬림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을주장하고, 이제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으로 한국교회가 시급히 추진해야 할 선교는 남반구 교회들과의 협력과 우정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과는 물론이고, 때로는 무슬림과도 공동선을 추구하며, 함께 지구가 당면한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해결하는 데 매진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복음 진리가 증거되리라 믿는다.
3) 무슬림 선교의 장애 요인을 심도 있게 제시하고 겸손한 자세로 선교에 임할 것을 촉구하는 김종일 선교사는 "난민 사역과 현지(또는 국내) 교회와의 협력(유럽, 중동)”이라는 발제를 통해 난민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국제법과 우리나라 법을 통해 살펴보고, 난민을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선교의 대상화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성경적 관점을 강조한다. 한국도 이제 어엿한 난민에 관한 법을 제정한 아시아 최초 국가로서 부러움을 살만한국격을 갖춘 나라임을 지적하면서 그는 국내에 유입된 난민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종교와 문화가 다른 타국인이라기보다는 이웃으로서 난민에 대한 올바른 선교 자세를 제기한다. 한국에 유입되는 난민에 대한 한국교회 선교의 방향으로 이미 정립된 'KWMA 난민위원회의 실행 정책'을 소개한다.
‘KWMA 난민위원회의 실행 정책'은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난민선교 지원센터 설립과 운영이고, 둘째는 난민의 사회통합을 위한 멘토링(Mentoring) 시스템의 활성화이다. 특히 후자는 우리나라의 국수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관점의 동화 정책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김종일 선교사는 이것을 하나의 방법이라기보다는 태도임을 강조한다. 결국 이러한 멘토링 시스템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난민을 우리의 참된 이웃으로 인식하고 관계 형성을 하는 “선한 이웃 되어 주기”를 실행하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종일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발제의 결론을 내린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들의[난민] 선한 이웃이 되어 줄 때, 그들[난민]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 땅에 들어온 난민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일과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상한 마음과영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는 일에 균형을 가지고 동시에 감당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우리가 난민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선교적 사명감이나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체험할 권리를 가졌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내 난민선교는난민이 난민에게 복음 전하는 R2R(Refugee to refugee)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하며, 난민을 회심시켜서 그리스도인 만드는 차원을 넘어 난민선교 사역자로 양성할 것과 난민 사역을 하는 국내외 단체와의 네트워크 형성을 제시한다.
4) “중동 이주민 전도와 양육 사역 실제"에서 이만석 목사는 중동 이주민에 대한 문화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지 오랫동안의 이란 선교사와 국내 이란인 교회 목회 사역의 실제 사례를 들어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총체적인 이데올로기요 시스템으로서의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고 기독교와의차별성을 부각한다. 하지만 무슬림은 비록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지만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며 “우리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관점에 따라 무슬림에 대한선교 사명을 다하되 무슬림의 신, 경전, 예수, 보혜사 등에 대한 속임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다만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점을 다양한 매체(인터넷, 휴대전화, 위성방송, SNS 등)를 이용해서 제시함으로써 무슬림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아울러 한국이란인교회의 다양한 목회 사역(찬양사역, 체육대회, 음악교육 등)을 소개하면서 이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한국에서 가능한 선교의 여지를 제시한다.
5) 김중석 선교사는 “국내 이주민(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의 교회 개척과 실제"라는 발제에서 국내에 체류하는 인도네시아 인의 현황과 분류 및 선교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에 대한 핵심 선교 방향은 인도네시아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를 개척하여 인도네시아인 목회자와 협력하여 선교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인도네시아인에 의한 인도네시아인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 방향은 한국교회의 부설 교회가 아니라 독립적인 교회 개척과 성장을 도모하고, 인도네시아 현지의 교회/교단과 협력을 실현하며,제자 훈련과 한국어 교육 활성화, 미디어를 통한 소통, 인도네시아인을 통한 북한선교, 다문화 공동체(콘비벤츠) 형성, 상담과 중재 역할 등을 제안한다.
6)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과 인도에 살 때에는 무슬림이 내 이웃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들을이웃으로 삼을 수 없을까?" "국내 이슬람 대책의 재고와 선교지향적 방향성 모색”이란 제하의 발제에서 박종상 목사는 정곡을 찌르는 ‘상당히 위험한 질문을 제기한다. 위험한 질문이란 것은 한국교회안에서 이슬람을 적대시하거나 이슬람포비아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이슬람 이해와 대응의 역사를 간략히 살핀 후에 박종상 목사는 한국교회의 이슬람 선교는 과거의 고답적 태도와 관점을 탈피할 것과 선교 방향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무슬림을 이웃과 친구로 삼기, 자국어로 복음을 제시하기, 한국 사회에 균형 잡히고 설득력 있는 이슬람의 특성 소개하기 총회 산하 이슬람연구소 설립 등이다.
이상의 여섯 분의 발제 가운데 현재까지 필자가 받은 여섯 분의 발제를 중심으로 간략히 발제의 핵심 논지를 중심으로 정리를 하였다. 필자의 소견에 여섯 분의 발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핵심 키워드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이슬람에 대한 좀 더 바르고 깊이 있는 이해와 대응을 도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총회 차원의 이슬람연구소를 설립하고, 일회성 세미나나 대회가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와 문서 출판 등 자료 축적과 노회와 교회 차원의 홍보가 필요하다.
둘째, 선교적 차원에서 이슬람 전문가를 양성하고, 이슬람 문화와 지역 상황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네트워킹을 도모한다. 교육, 문화, 학술계 등 일반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 이슬람의 속성과 특성을 바르게 이해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셋째, 국내 무슬림에게 자국민(목회자와 평신도)에 의한 자국어 복음 전파와 양육과 제자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남반구 교회들과 협력을 실천한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해서, 복음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효과적이며 효율적으로 잘 전하기 위해서 무슬림을 적대시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슬림을 함께 공존하는 이웃과 친구로 관계 형성하고, 섬김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복음 제시를 도모해야 한다.
다섯째, 이슬람권 선교사의 조기 귀국이나 은퇴 후에 국내에서 선교지 사람들을 위한 교회 개척과 해외 교회/교단과 협력을 도모하며 선교하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여섯째, 가장 약하고 낮은 이웃이라 할 수 있는 난민선교는 난민선교 지원센터 설립과 운영과 난민의 사회통합을 위한 멘토링(Mentoring) 시스템의 활성화 및 난민 사역하는 국내외 단체와 네트워킹을 도모한다.
일곱째, 총회의 무슬림 선교정책과 방향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드러났다. 이번 발제자 가운데서도 이슬람, 무슬림, 이슬람의 확산과 선교 등에 관해서 상당한 이견을 나타내었다. 이슬람의 확장과 무슬림 인구의 증가가 주로 생물학적 요인과 이민 증가에 의한 것이며,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전반적인 인구 감소와 노령화로 이슬람 성장을 크게 두려워하거나 적대시할 것은 아니라는 견해와 이슬람이 유럽을 지배하다시피 할 것이며 이슬람이 다수가 되면 반드시 테러나 국가 전복의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관점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국내 무슬림 유입을 무조건 경계하고 막아야 한다는 의견과 오히려 그들을 향한 선교의 호기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도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무슬림을 친구나 이웃으로 관계를 맺음으로 복음 증거를 더 잘할 수 있다는 주장에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역 선교를 당해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수렴된 관점을 마련해서 지역교회와 선교사들이 통일된 무슬림 선교신학과 정책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한국교회의 이슬람 선교의 방향과 정책 제안
무슬림 선교 역사를 통틀어 실천된 무슬림에 대한 선교 방식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간과 공간, 즉 상황에 따라 다양하고 복합적이었다고 본다. 다만 역사상 무슬림 선교의 모델 혹은 패러다임을 간추려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로 마크 테리(John Mark Terry)의 이론을 들 수 있다. 테리는 기존의 무슬림 선교의 접근 모델을 대결적 접근(Confrontational Model), 전통적 복음주의적 모델(Traditional Evangelical Model), 제도적 모델(Institutional Model), 대화식모델(Dialogical Model), 상황화 모델(Contextualization Model) 등 다섯 가지 방식으로 분류한다.”테리는 이러한 모델을 종합하고 융합하여 총체적인 방식을 제안한다. 어느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하기가 무리인 이유는 무슬림의 상황과 문화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리는 총체적이며 일반적인 무슬림 선교 방향으로 교회 지향적, 예배 강조, 쿠란의 적절한 사용, 선교사의 생활 방식의 중요성, 이슬람 언어, 문화 이해, 선교지 상황과 문화에 적절한 설교 방법, 매스컴 활용 등의 여덟 가지를 제시한다. 최원진은 이러한 무슬림 선교 방식을 긍정하면서 한국 선교사가 취해야 할 다음과 같은 선교 방향을 주장한다. 무슬림에 대한 인식 변화, 한국적 전략의 필요성, 한국 선교사의 장점 극대화, 한국 선교사 약점의 인정, 융통성과 민감성의 개발, 열정적인 기도, 선교사의 성육신적 삶과 성령의 능력, 협력과 동역 등 여덟 가지이다. 이러한 다양한 선교 방식의 이론과 지침을 종합하는 총체적인 대안 모델은 가정 교회 모델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정 교회 모델이란 “여러 개의 작은 가정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하나의 연합체가 존재하는 특별한 형태의 한국형 House Church 모델이다. 
이에 비해 김종일은 기존에 알려졌지만 실상 현장에서 잘 적용되지 못하는 무슬림 선교의 일반적이면서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기도의 사역, 사랑의 사역, 성령께서 온전히 일하시도록 맡기는 사역,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한 사역, 현지인 제자 양육 사역 등이다.
어느 종교권이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무슬림 선교는 오랫동안의 적대적인 관계성을 고려할 때 무슬림의 필요에 부응하면서도 인격적이며 사랑의 관계 형성과 대화적, 성육신적 접근을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고 죽은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할 수 있을 때 참된 복음 선교가 실현될 것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장하는 현지 교회가 자국의 선교는 물론 이웃과 세계를 향해 선교를 이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1) 이슬람 선교의 기본 방향
(1) 이슬람 선교의 용어 사용제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전략과 전술이란 용어는 군사 용어로서 십자군 전쟁의 연속으로 오해받아 복음의 전달을 방해할 수 있다. 북아프리카 국가의 열심 있는 교회 리더 중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이슬람에서 회심한 기독교인이다. 한번은 그가 인터넷 서핑 도중에 자기 나라를 대상으로 선교하는 기독교 웹사이트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웹사이트에 자기 나라에 복음 전파의 교두보"가 세워지고, 머지않아 그 나라가 그리스도께 '정복당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슬림에게 그 웹사이트의 선포는 무슬림 국가를 군사적으로 침공하려는 기독교 지하드(성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군사적 비유를 무슬림 출신의 성숙한 기독교인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타 종교인들의 기독교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특히 무슬림의 복음에 대한 그릇된 태도는 기독교인에도 책임이 있다. 모든 도메인, 웹사이트는 기독교인 네티즌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정작 무슬림 자신들은 그들의 이슬람 지하드를 이야기할 때는 영적 전쟁으로 소개하나, 기독교 측의 군사적 비유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십자군은 코소보와 보스니아에서 '무슬림'을 살상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보복 공격과 전쟁을 하는 것을 보고 “십자군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십자군은 단지 역사적인 과거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테러와 이어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 공격으로 소위 새뮤얼 헌팅턴식의 "문명의 충돌"이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세계 대중에게 인식되고 있다. 전 세계 무슬림에게 미국인과 그리스도인은 한편으로 보이며, 그들과 기독교는 적대관계로 편성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테러는 테러를 낳고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
구약은 정복과 이교도 군대를 멸절시킨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이것을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폐기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담당하고 용서하기 위해서 스스로 겸손히 나귀를 탔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며,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참된 성전(holy war)은 “원수를 사랑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이다. 신약은 마귀와 세상, 육신에 대한 영적 전쟁을 묘사하지만, 실제적인 군사적 정복을 말하지 않는다.
신약에 나오는 군사적 비유의 의의를 잘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첫째는 비교의 의미다. 기독교인 삶과 군인의 삶의 유사점, 훈련받고 고통받고 한 가지 목적만 추구하라(딤후 2:3-4)는 것이다. 둘째는 대조의 뜻이다. 문자적인 전쟁과 영적인 전쟁 대조하고, 실제 적은 사탄(고후 10:3, 엡 6:12)임을 천명한다. 군사 비유는 우리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 자신을 위한 훈련, 희생, 헌신, 인내, 영적 전쟁에 사용되면 약이고, 선교지 사람들에게 사용하면 악이다. 신약은 전도의 임무를 군사 비유로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십자군', '동원한다' '교두보를 건설하라' '여호수아 프로젝트' '갈렙 작전' '타겟으로 삼아라'라는 매우 자극적이고 군사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 
비유는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효율적이다. 예술적, 미적 감각이 필요하다. 창조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축복(창12:1-3), 화해 혹은 화해 사역(마 5:9, 엡 2:11-17, 롬 14:19, 고후 5:18-19), 치유, 씨뿌리기와 수확(마 13장, 고전 3:5-8) 등과 같은 비유가 강조되어야 한다.
오늘날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십자군 정신'이 아니라 '십자가 영성'이다. 4세기 말, 380년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진 이후, 특히 6세기 샤를마뉴 대제 때 극에 달한 강압과 폭력과 무력에 의한 “기독교왕국(Christendom) 시민 만들기"로서의 선교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무슬림에게 지울 수 없는 적대관계를 만들었다. 근대 식민주의 시대는 이러한 무력과 강압에 의한 선교를 재현한 형태이다. 반선교적인 방법으로 선교를 한 셈이니 그 부작용과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4세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고 국교화되기까지 선교는 약자의 선교, 가난한 자의 선교, 무명인의 선교, 연약함과 어리석음 가운데의 선교였다. 고대 교회에 가장 중요한 선교 본문은 요한 복음 3장 16절이었다. 중세의 선교는 누가복음 14장 23절, 즉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가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라는 말씀이 그 본문의 문맥과는 무관하게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 가운데 네 가지 동사 중 본동사는 “제자 삼아라" 이고, 이 본동사를 수식하는 분사가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선교관은 한마디로 “제자 만들기"이다. 하지만 근대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는 소위 신대륙 탐험과 이국적 정취에 대한 호기심으로 멀리 오지에 가는 것이 강조되었다. 선교도 "가라"가 가장 중요한 기치로 인식되고, 식민주의와 선교가 짝을 지어 나아가게 되었으며, 현지인들에게 선교는 3C(Christianity, Civilization, Colonialism)로 인식되었다. 결국 1960-70년대에 '선교 활동일시 중지와 철수를 부르짖는 운동'(모라토리엄)이 일어나서 선교 재고를 하는 큰 계기를 만들었다. 최근에 와서 성육신적 선교와 협력 선교와 삼자원리 내지는 '사자 원리' (자립, 자치, 자전, 자신하화/자선교신학화)가 강조되고, 요한복음 20장 21절이 중심적인 선교 본문으로 자주 오르내린다.
(2) "선교 방법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서 나와야 한다."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선교 방법은 선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 즉 예수 그리스도(삶과 사역)에게서 나와야 함을 절실히,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히 요청된다. 그것은 용서, 사랑, 화해와 치유, 평화와 나눔과 섬김과 봉사라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선교의 목표가 우리 교단과 교파의 복사판 만들기가 아니고, 그러한 교회의 양산이 아니고 현지 문화와 역사와 상황에 부응하는 신학과 신앙과 삶이 있는 교회 공동체 형성에 있다. 오직 성령의 이끄심 따라 거듭난 삶과 문화가 있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게 하는 일이다.
(3) 협력의 영역 확대
모리스 보어만(Maurice Borrmans)은 “기독교와 이슬람 대화의 지침"에서 이슬람 선교의 방향을 몇 가지 제시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상호 간에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자기비판을 통하여 좀더 두 종교 역사의 비극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 합당한 평가를 하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오해와 왜곡된 가치로부터 고통받아 왔다. 상호 간에 공정하게 이해하도록 돕고, 우호적인 대화와 이해의 증진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다양한 편견을 제거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 생명의 가치와 정의와 형제애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서로 간에 협력해야 할 부분은 협력을 증진함으로써 선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사회 문화적 변환은 인간의 종교적인 삶에 영향을 미친다. 현대인은 그들 자신의 삶이 현대 세계의 명암의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결과임을 목도하고 있다. 그들은 부와 가난, 풍요와 불행, 강함과 약함, 대담함과 포기, 자유와 정복, 앎과 무지, 과학기술의 진보와 저개발, 건강과 질병, 생명과 죽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은 현대 세계를 괴롭게 하고, 나라와 공동체, 그리고 개개인들의 모든 관계를 왜곡시키는 분명한 불일치의 모습이다.
이슬람, 기독교와 유대교의 모든 신앙인은 종교 혹은 관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 상황에 대한 공동의 메시지와 협력의 구체적인 행동을 포함하여, 구체적인 응답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선한 의지의 사람들과 연합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공동체에 같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인류를 위한 그들의 사랑이 그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신앙인들이 실천과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만큼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존재하는 슬픔, 죄악, 죽음의 느낌은 무엇인가? 상당히 비싼 값을 치른 성공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회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지구상의 삶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내야 한다. 함께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첫째, 협력의 주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식한다는 전제하에 상호 간에 솥오교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와 같이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세계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계획, 즉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뜻대로 세계가 완벽한 일치를 향해 나아가며, 진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무엇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사랑 안에서 인류가 협력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선택하였다. 기독교인들은 피조물이 하나님 아들의 나타남을 오래도록 갈망해왔음을 알고 있다. 피조물은 자의가 아니라 소망 가운데 그것을 숭배하고자 하는 의지로 무익한 것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피조물 스스로가 그것의 속박을 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부패하거나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고통 가운데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롬 8:19-22).
반대로 무슬림은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에 있는 무엇이든지 너에게 유용하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한다(쿠란 31:20).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강들이 너를 예배하도록 만들었다. 해와 달도 너를 예배하도록 만들었고, 낮과 밤이 너를 예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구하는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다.”(쿠란 14:32-34). 따라서 신앙인들은 세상의 궁극적인 완성을 위해 효과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탁을 받았고, '피조물의 완성'에 참여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의 나타남을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탐구의 영역은 인간과 자연 간의 소중히 여김과 순종, 융통성의 관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오염과 폭력과 정복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과학과 자연 간의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야 한다. 도시화와 산업화, 대량 생산과 같이 되돌릴 수 없는 진행을 조절해야 한다. 물질적인 이익 추구에서 인간 욕구를 절제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술문명이 인간다운 모습, 즉 아름다운 것과 진실한 것, 선한 것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과연 유토피아적인가? 창조와 모든 문명화의 실현을 언급하는 예술과 문화는 원시적일지라도 이것을 증명하여왔다. 하나님은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형제애의 이상 즉, 그들이 사회 속에서 좋은 본보기로 찾고자 함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협력의 영역은 인류에 대한 봉사다.
신앙인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그들의 중심 되는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인간의 탁월한 존엄성을 확인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로서 특별한 위치를 지니기에,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모든 사람에게 단체로든 개인으로는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신을 예배하고, 신의 은혜와 영광을 위해 부름을 받고 선택되었다.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이 최고로 향상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다.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또 다른 면은 영에 대한 존엄성이다. 또한, 인간의 위엄은 심리학적, 도덕적으로 이해되는 양심의 존엄성 안에서 표현됐다. 인간 양심의 신비는 자유에 대한 존엄성으로 이어진다. 이 자유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단체나 어떤 사람의 힘의 권력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행동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자유에 대한 지혜로운 훈련이 사회학적이고 합법적인 안전망과 함께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알고 있다. 그래서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어느 지역에서든지, 이와 같은 교육과 안전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 노력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들이 각각의 국제 사회 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인 조직에 의해, 신앙인들은 종교적 혹은 이념적인 소속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도주의적 봉사로, 연합을 위한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할 수 있다. 국제적인 봉사와 헌신의 영역에서 양측 모두는 각자의 특별하고 종교적인 동기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통하여, 이미 그들과 연합된 영적인 가치를 존중하면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불어 넣어주고 싶은 인간 위엄의 고상한 비전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누가 먼저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신자의 인권 존중 의식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봉사이다. 억압받는 자들과 고아와 장애인이나 한센병 환자, 혹은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정으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행함으로 동기화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인간을 향한 사랑은 사회의 주변인들에 대한 친절이나, 노인과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애정으로 증명된다. 무신론자조차도 이런 인류를 향한 관심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들이 비록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권을 짓밟거나 평화를 깨뜨리는 일탈행동을 할 수 있지만, 그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신론자들에게 믿는 사람들이 모든 인간이란 '하나님을 향한 길'이라고 말함으로써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모리스 보어만이 그의 책 제6장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대화를 진행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와 공존공영을 위해 협력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 공통의 신앙적 가치와 이념을 여섯 가지로 제시한다. 신적인 신비, 말씀의 선물, 선지자의 역할, 공동체의 지지, 기도의 비밀, 그리고 거룩의 길이다. 이러한 유대와 공통의 기반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널리 펼 수 있다고 본다.
종교 간의 대화는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됐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화의 유형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회 형식의 대화(Parliamentary dialogue)"로서, 1893년 시카고에서 처음 열렸다. 종교간의 협력과 종교인의 평화 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둘째, 제도적 대화(Institutional dialogue)로서, 종교 간의 제도 사이에 소통을 도모하고 장려하며, 주로 WCC와 바티칸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셋째, 신학적 대화(Theological dialogue)로서, 신학적 철학적 이슈를 일차적 의제로 삼는다. 특히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대화는 신, 예수, 계시, 인간의 사회적 책임 등의 이슈를 다룬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종교 전통의 의미도 논의한다.
넷째, 공동체 대화(Dialogue in community)와 삶의 대화(the dialogue of life)이다. 종교와 국가, 종교적 소수자의 권리, 종교 간 결혼, 종교적 가치와 대중교육 등의 다양한 실제적인 이슈를 대화의 주제로 삼는다. 이 대화는 종종 공동의 행동을 장려한다. 종교가 다른 이웃과의 일상적인 접촉과 대화도 장려한다.
다섯째, 영적 대화(Spiritual dialogue)로서, 종교 간 대화를 통해 영적인 삶의 개발, 자극, 고양을 촉진한다. 여기에는 타 종교의 예배 참관, 금식 혹은 기도의 의미 나눔 등을 포함한다. 좀 더 발전된 형태는 공동의 예배를 하는 것이다.
이슬람 선교의 방향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위에서 제시한 것은 기본적인 선교 방향이다. 이슬람 선교의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것은 상호간에 오해와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시키는 용어 사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평화와 화해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복음진리의 본질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주는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에 선교 방법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야 마땅하다. 오랜 역사 동안의 갈등과 반목과 폭력과 전쟁을 불식시키고 이슬람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선교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유와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세계 평화와 복지 분야에서 상호 협력하는 것도 복음 진리 전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는 근본적으로 복음 진리에 대한 철저한 확신을 기초로 하고, 전도의 기회가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하며, 상대방의 종교적 확신과 주장을 경청하면서도 기독교의 진리 전달에 힘써야 한다. 앞에서 대화의 다섯 가지 종류를 소개했는데, 모든 선교에 이상의 다섯 가지 방식, 즉 의회 형식, 제도적, 신학적, 공동체적, 영적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도 대륙과 나라 혹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황에 따라 주도면밀하고 적절한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우리의 모든 합법적 노력들 중 가장 깊은 열망은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라는 케이프타운 서약은 타종교인을 향한 기독교 선교 방향에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협력이든 대화든 어떤 방식을 따르든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실천이 중요한 선교 방향이다.

2. 이슬람 선교 정책 제안 - 결론을 대신하며
1) 이슬람, 무슬림, 쿠란 등 이슬람을 총체적, 복합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하며 선교 대안을 탐구하는 가칭 이슬람 연구 기관을 설립하여 결과물을 꾸준히 산출하고, 국내외 이슬람 연구 단체와 공동 연구 및 선교 협력을 도모한다.
2) 국내 체류 중인 무슬림 선교는 자국의 영적 지도자가 자국어로 전하는 복음을 소통하고 대화와 공존과 협력의 영역을 확산하는 방향으로 제도화하고 활성화한다. 이를 위해서 해외 자매 교단/교회와 공동의 선교사 파송과 후원 제도 도입과 확산을 도모한다. 아울러 이슬람권 선교사의 은퇴 후 국내 사역의 장 계발과 무슬림 선교의 활성화를 제도화하고 후원체계를 마련한다.
3) 모든 종교권 선교에 해당하지만, 특히 무슬림 선교는 적대관계나 정복 선교가 아니라 우정선교를 지향하고, 구체적인 대안과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타 문화권 선교의 한계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참된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바로 우정, 즉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정의와 구원의 복음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사대회에서 서구 중심의 인종차별주의와 가부장주의 및 식민제국주의 선교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냈던 아자리아(V. S. Azariah)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교회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소리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 인도 교회는 선교단체의 영웅적 헌신과 자기 부정의 수고에 감사함으로 증언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주었으며, 여러분들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 우리는 또한 사랑을 원한다. 우리에게 친구를 주시오!"20) 아자리아의 이러한 호소는 비단 20세기 중반까지의 선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다원화하고 세계화로 더 네트워크화한 지구촌에서도 여전히 요청되는 덕목이요 영성이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관계성이 중시되는 시대에 우정 선교는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환기해야 할 신학적이며 선교 실천적인 요소로 보인다.
여러 발제자가 언급했다시피 무슬림을 친구로 삼는 것이 선교에 중요한 방향이다. 그렇다면 이슬람권에 있는 기존의 교회를 무시하고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란 같은 대단히 폐쇄적인 나라에서도 아르메니아와 앗시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언어로 예배를 허용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그들과 우정선교의 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이란의 아르메니아 교회가 이천년대 초반에 이란 정부의 종교 정책 안에서 그 한계점을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하여 자체의 생존과 선교의 기회를 넓혀가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외부의 일방적인 선교보다는 현지의 기성 교회가 바르게 생존, 성장, 발전하도록 기도하고 간접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란에 존재하는 “전통적”, “참된 교회"는 아르메니아, 앗시리아, 칼데아 등의 가톨릭과 정교회라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개신교는 일탈적인 기독교(Messihiat-e enherfy)로 간주하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아르메니아 종교 지도자들은 20세기 개신교 선교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개신교 선교가 식민주의와 연루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경험적 오해와 장벽을 어떻게 불식시키고 우정선교를 이루어 낼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비록 법적 제한이 있는 기독교인으로 자기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여 정체성을 유지하는 아르메니아 교인들이지만 이란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대단히 난해하고 복잡한 상황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선교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4) 이슬람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문서를 발간하고 전국 교회와 신학교의 신학생들을 교육하고 확산하며, 무조건적인 비판과 이슬람 혐오증의 양산을 막고, 종교다원주의의 위험과 이슬람 측 선교의 현황과 도전을 인식시키는 세미나를 지역별(혹은 노회별)로 열어나간다. 기독교 선교 입장에서 승리주의와 대립적-적대적 사고방식을 탈피하되, 이슬람의 특성인 제정일치적 성격과 반민주적인 정치 문화의 속성을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 이해시키는 작업이 요청된다. 
5) 범세계적 이민과 난민의 증대 및 도전 속에 무슬림 선교의 획기적인 블루오션과 기회를 찾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각계각층의 지도자와 정부의 유관 부처와의 협력을 도모한다. 이슬람법에 정통한 법조인 양성과 격려 및 교육계에 미치는 이슬람 공동체의 영향력 파악 및 법적 제도적 행정적 대응 조치를 마련한다.
6) IT 기술의 발달과 미디어의 막강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슬람 세계관과 가치관 및 문화(“정직함, 질서 의식, 인간 사랑, 희생, 경건,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경배, 남녀평등, 인권존중, 정의감, 근면, 노동에 대한 높은 가치")>에 상황화하는 전문가 발굴과 조직화 및 활동을 장려한다.
7) 총회가 이슬람 연구와 선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이슬람 선교 정책 마련을 위한 패널 토의 주제 선정에서 보여준 지역 분류가 과연 현재 전 세계 이슬람의 실상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인지? 이규대 선교사가 제공한 "퓨 연구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세계 무슬림 인구의 미래: 2010-2031 전망”의 다섯 지역 구분(아시아-태평양, 중동-북아프리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유럽, 북·중 · 남미)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론, 기독론, 성령론, 경전론 등의 바른 이해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핵심 주제에 대한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신학적 정립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8) 지역교회의 무슬림 선교 무관심과 선교 의식 약화를 타개할 대책을 마련하고, 총회의 무슬림 선교 정책은 대정부 차원과 지역교회 차원으로 구분하여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은 경계하고 무슬림을 사랑하라"라는 구호보다는 “이슬람 바로 알고, 무슬림 선교하자"라는 관점과 자세로 이슬람과 무슬림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고, 범 교단적 선교정책과 실천을 위한 협력과 교류를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