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4:17-24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제 좀 연세가 들어가시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쓴 책인데요, 부제가 이렇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생산적이고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법'
그래서 이제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이겁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나이 듬.
모든 사람이 세월이 흐르면 나이가 들어가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행복하고 건강한 그런 삶을 이제 추구하는데 이 책이 주장하는게 뭐냐 하면은 세월은 모두가 똑같이 흘러가지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미리미리 대비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을 준비한 자만이 내일을 가질 수 있다.
참 와닿더라고요.
오늘을 준비한 자만이 내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서 권하는게 뭐냐면은 이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행복한 인생이 되려면 이 목적성이 분명한 활동을 해야 된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목차에 이런 제목이 나오는데요, '목적성 :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날 이유' 그렇게 설명을 하는데요.
이 무슨 말인가 하면은 이제 이런 거죠.
매일 아침마다 우리가 어떨 때는 좀 일어나기가 귀찮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좀 몸이 찌뿌둥하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가 있고 어떤 날은 야~ 오늘은 내가 그냥 오전에 내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다 그런 날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날에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갖고 있는 삶, 그런 삶을 계속 이제 훈련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또 한 가지가 뭐냐면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97세 되신 할아버지인데요, 랍비 조시 스탬퍼라는 분이 그 글에서 이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97세 할아버지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즐거움을 찾는 비결을 알고 싶다고? 나는 매일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한다네. 그러다 보면 즐거움은 저절로 따라오지"
이 말씀을 지금 97세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니까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이런 거죠.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 목적성, 그래서 내가 일어나야 될 이유가 있는 거죠.
그래서 좀 귀찮은 날도 가기 싫은 날도 또 일어나서 내가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되고 그다음에 두 번째, 그 일이 어떤 일이라 그랬죠? 매일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애쓰는 거, 이게 바로 그런 건강한 인생의 후반전을 위한 비결이라는 거거든요.
이게 딱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 내용 그대로 아닙니까?
이 책이 기독교 책이 아닙니다.
일반 세상의 전문가 교수님, 일반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많이 연구하신 두 분이 쓴 책이거든요.
제가 지난번에 설교하면서 자아 팽창 시대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요, 오늘 우리 시대가 왜 자아 팽창 시대입니까?
이 마음속에 자아,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가 풍선처럼 부풀러 올라가지고 다른게 끼어들 꺼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 시대는 지금 이 순간에 내 감정, 내 지금 기분이 어떤가? 이거를 방해하는 건 용납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내 기쁨, 내 유희, 그리고 나의 행복, 이것만을 위해 살아가도록 부추키는게 이게 자아 팽창 시대의 특징인데요, 그런데 참 이게 딜레마가 뭐냐 하면은.
제가 이 자아 팽창 시대는 그 실패한 모델이라 그랬잖아요.
미국에서 유럽에서 해보니까 이렇게 자기 중심, 자기를 위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삶이 이게 사실은요 점점 나이들수록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고 우울증을 가져오고 그런 것들을 양산하더라는 거죠.
제가 방금 소개해드렸던 그 책에서는 이런 그 극단적인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이 시대와는 조금 이제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다, 이제 그런 걸 제가 그 책에서 발견을 했고요.
그런가하면은 제가 이 책을 읽고 있던 때에 20대 중반 청년이 쓴 블로그의 글인데요, 우연히 제가 이 글을 봤는데 제목이 이렇습니다.
'개강을 앞두고: 20대 중후반에도 고등학생처럼 살 수 있었던 비결'
이게 지금 좀 자조섞인 이야기, 자기 스스로를 비웃는 표현이에요.
20대 중후반에도 고등학생처럼 살 수 있었던 비결.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는 차원으로 이런 제목을 만들었는데 내용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20대 중후반에도 고등학생처럼 현실 감각 없이 혼자서만 뒤쳐질 수 있었던 비결.
친구들은 졸업하고 취업하고 인생 설계하며 똑부러지게 살아가는데 한때는 똑부러지다는 소리를 들었던 제가 어느 순간 바보처럼 살게 된 비결.
자기를 엄청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그렇게 된 이유를 이 따옴표를 해 갖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20대 초반에 잘못 세운 롤 모델, 20대 중후반에 큰 역풍으로 돌아오리"
그다음 내용도 들어보십시오.
"저는 이시기, 20대 초반을 말합니다, 저는 이 시기를 아주 잘못 보냈습니다. 금수저들을 롤 모델로 삼으면서 온라인에 떠도는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가장 잘못된 롤 모델을 세우게 됩니다. 삐까 번쩍 화려하고 돈 많은 이들을 선망하던 별 거 아닌 시간들이 쌓여서 20대 중후반에 나쁜 결과가 되어 돌아오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래요.
"누구를 부러워 하느냐에 따라 5년 뒤 내 모습이 달라진다"
야~ 이 20대 중반 밖에 안 된 청년인데요 제가 이 글을 보면서 막 엄청 막 수십년 산 사람이나 짧은 이십 몇년이라도 깨닫는 그 사람이 지혜자구나.
이 청년이 쓴 또 다른 글인데요, 이 제목이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20대 초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 중반이 뭐 초반으로 돌아간다는게 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뭐 돌아간다면 만약 내가 20대 초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서 이제 내용이 이렇습니다.
"내 인생의 롤 모델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롤모델로 세울 것이다"
저는요 노년들을 향하여, 연세 드신 어른들을 향하여 쓴 책인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래서 이제 목적성이 있어야 되고 또 그 97세 할아버지 말씀처럼 '내가 즐거움을 찾는 비결은 매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거 그것을 노력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을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다 맥이 통하는 거예요.
20대도 깨닫는 그리고 또 90대 할아버지도 그것을 증언하는게 바로 이게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그래서 저는요 지난 한 주 내내 요즘에 계속 묵상하고 있는 말씀이 이겁니다.
이사야 32장 8절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새번역으로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을 펼치며 삽니다"
지난주 제가 언급해 드렸던 이 구절을 한주 내내 제 마음에 담고 하나님 제가 참 하나님의 자녀 십자가로 구원받은 존귀한 자녀가 되었는데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존귀한 일을 행하며 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에 그런 결의가 많이 나온 한 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주 그 마태복음 4장 23절 24절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셨던 3대 사역에 대해서 이제 오늘은 그 범위를 조금 더 확장을 해서 마태복음 4장의 흐름을 가지고 말씀을 또 조금 더 깊이 나눠 보려고 합니다.
지난주 우리가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4장 23절이 예수님의 3대 사역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사역, 이게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지난 주에 마태복음 4장 23절 24절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는데요.
이제 이 그림을 좀 더 확장을 해 보자고요.
이 4장 전체 흐름을 보면은 이제 마태복음 4장으로 와서 앞부분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세요.
근데 그 예수님이 그 마귀의 시험을 너무나 멋지게 깔끔하게 그것을 극복해 내시고 그리고는 이제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이 됩니다.
그 선언처럼 알리는 선포가 마태복음 4장 17절 오늘 본문인데요 한번 보십시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렇게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을 선포하시고는 그리고는 이제 지난주 우리가 살펴봤던 예수님의 3대 사역,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시는 사역을 하셨는데요.
그 선포하시고 온 마을을 다니면서 그런 일을 행하시기 전 그 중간에 하나를 더 하셨어요.
그게 뭐냐 하니까 제자를 부르시는 거였습니다.
자 18절 19절이 그 내용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다음 21절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게 22절이고요 그리고 23절에서 예수님이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런 세 가지 사역을 행하신 거거든요.
이게 뭘 의미합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한 예수님의 어떤 원칙과 전략을 말씀하시는데요.
예수님은 그 놀라운 사역을 당신 혼자 하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함께 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원리를 가지고 보면은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공생애를 보면은 딱 두 가지예요.
하나는 당신이 직접 온 갈릴리에 직접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시는 사역을 직접 하셨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일을 전수시켜 줄 제자들을 키우는 일을 하셨어요.
이 두 가지가 예수님 사역의 큰 두 기둥이 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아까 제가 왜 주중에 계속 제 마음속에서 존귀한 사람은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이 말씀을 제가 계속 묵상했는가 하면은요 오늘 분당 우리 교회가 여기 있는 의미, 오늘 이찬수 목사와 모든 예수 믿는 여러분들이 함께 모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가 교회 된다는 것은요, 예수님이 하셨던 그 사역을 계승 받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계속 해내야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주에 우리가 이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회복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지난주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회복해야 된다, 이 교회는 서로 불쌍 여기는 공동체다, 그리고 이제 오늘 다룰 두 번째가 이겁니다.
또 하나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해야 될게 뭐냐면은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선한 일을 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제가 표현을 선한 일을 사모하는데, 그게 예수님이 하신 그 일, 그니까 아까 본문으로 말하면 그 3대 사역, 이게 예수님이 하셨던 선한 사역이거든요.
그걸 우리가 사모해야 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표현을 썼는가 하면, 제가 이제 29살이 되던 만 나이로 치면 이제 그때가 28 살인데요, 제가 이제 목사가 되기로 그렇게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이제 한국에 있는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에 의뢰하고 입학 허가를 받고 그러고 나니까 두려움이 밀려오는 거예요.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나 같은게 어떻게 목사가 되지?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정말 두려웠어요.
그랬더니 이게 병으로 오는 거예요.
너무 두려우니까 이게 병으로 오는데요 막 고열에다가 굉장히 하여튼 아픈 시간을 제가 가졌는데요 그때 하나님이 선물처럼 저에게 성경 구절을 하나 주셨어요.
그게 디모데전서 3장 1절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이 감독의 직분,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나 장로를 말하는 거거든요.
네가 두려워하지 마라, 목사가 되는 것의 의미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거야, 뭘 업적을 남기고 엄청난 일을 하고 사람을 막 다 뒤집어놓고 막 안수하면 병이 떠나가고 이런 거는 하나도 못하는데 그랬을 때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예요.
'목사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일이야'
너무 위로가 됐습니다.
사모하는 거 실력 없어도 할 수 있잖아요, 그냥 사모하는 거라는데.
여러분 이게 35년 동안 내 삶의 줄거리가 됐습니다.
목사는 지금 이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성도들을 불쌍해 여기기는 거라 그랬죠.
얼마나 엿새 동안 힘들게 사시고 물질적인 어려움, 자녀 문제, 부부 문제, 많은 여러 가지 어려움, 그런 것들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정말 좋은 것을 말씀으로 주고 싶어하는 그 선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 여기에서 설교가 나와요.
대충 하는 거하고 진짜 거기에서 선한 것을 사모하는 그 마음으로 하는 설교는요 그건 뭐 차원이 다른 내용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요, 여러분들 개개인이 전부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신다면 분당 우리 교회는 선한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이루는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셔가지고 주셨던 이 19절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도 결국은 같은 맥락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교회가 이런 선한 일을 행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사모하는게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리고 또 이거랑 똑같이 중요한게 그 사모함을 기도로 승화를 시키는 거예요.
이 기도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지난주에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 이 한나라는 여인에 대하여 새롭게 많이 제가 읽고 묵상을 했는데요.
왜냐하니까 이 한나야 말로 선한 일을 사모했고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 아닙니까?
아들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 아들을 위대한 인물로, 그 어두운 시대에 너무나 놀라운 지도자로 그렇게 길러낸 분, 그래서 사무엘의 어머니가 한나 아니겠습니까.
한나가 사무엘을 낳자마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무엘상 1장 26절부터 한번 보십시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여러분 지금 한나가 망설임 없이 그렇게 그렇게 갈급하게 구했던 아들인데요, 그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요.
그래서 그 악한 시대에 쓰임받는 위대한 인물로 그렇게 사무엘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데요.
그런데 중요한게 뭐냐? 아까 우리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그랬는데요, 이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한번에 확 철드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계속 점진적으로 깨달아가고 성장하는 거거든요.
한나가요, 그 귀한 아들 사무엘을 시대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 일이 이게 처음부터 있었던게 아닙니다.
한나가 처음부터 기도할 때 기도가 굉장히 단순한 이유예요.
그 질투심 때문에.
이 한나가 살던 그 시대는 타락의 정점에 있던 그런 시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이제 이 사사 시대 말기에 타락이 극에 달하던 시대인데요, 어느 정도 타락했는가 하면은,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요즘으로 치면 믿음이 엄청 좋은 크리스천입니다.
레위 자손이고 3절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리는데 열심히었던 사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걸 요즘으로 말하면 막 한 5대째 목사 집안에다가 믿음이 엄청 좋은 가문의 사람이고 자기도 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그런 믿음 좋은 사람인데, 놀랍게도 그 믿음 좋은 한나의 남편조차도 첩이 있어요.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요즘에 교회가 욕을 좀 먹는 거는 세상이 너무 타락해 있으니까 크리스천들도 뭐 다를 거 없더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물들어가는 그 때문에 욕을 먹는 거랑 좀 비슷한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제 한나가 괴로움을 당하는 거는, 이게 참 드라마를 봐도 그렇고 참 신기해요.
진짜 생명을 잉태해야 되는 사람은 잘 안 되고 꼭 이게 첩이 또 애를 그렇게 잘 낳아요.
이 한나네 집이 딱 지금 그 상황입니다.
한나는 지금 난임으로 자녀가 없는데 첩이었던 브닌나는 자녀가 있는데요, 영어 성경으로 보니까 칠드런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로 봐서 그 첩이 애를 하나만 낳은게 아니에요, 복수에요.
그리고는 이제 그 악한 그 괴롭힘을 계속 한나가 당하거든요.
그 문제로 지금 사무엘상 1장 7절입니다.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여러분 이거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막 나라와 민족을 구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한게 아니고요, 그 브닌나라는 여자 때문에 끊임없이 그렇게 조롱당하고 하니까 괴로워서 이제 기도를 한 겁니다.
10절에 나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이번에는요 또 괴롭히는 또 딴 사람이 또 등장을 하는데 놀랍게도 엘리 제사장이에요.
너무너무 괴로워서 고통스럽게 그렇게 기도하는데 그 당시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이 엘리가 하는 말이 이게 가관입니다.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어라"
제가요 지난주에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새로 깨달은게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 믿는 거 진짜 어렵겠다.
세상 사람들은요 엿새 동안 그냥 브닌나만 상대하면 돼요.
세상에 있는 브닌나가 괴롭히는 거만, 직장에 가서 계속 괴롭히고 시달리고 그러면 요새 막 또 5일 근무하는 데가 많잖아요.
토요일 날 집에 가서 또 주일날 그들 표현으로 막 그냥 다 이제 힐링하고 그러는데요, 예수 믿는게 왜 어렵습니까?
주중에는 세상 사람 브닌나한테 시달리고 교회 오면은 또 엘리 같은 게 또 우리를 괴롭혀요.
이게 뭐 주 7일 괴롭힘을 당하는게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 안에 엘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이게 엘리 제사장이니까, 이게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니까, 아 저도 뜨끔해요.
저한테 괴롭힘 당하는 분이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만.
그래서 저는요 요즘에 가나안 성도가 급증하는게 너무 이해가 돼요.
아이고 이틀은 좀 쉬자 엘리를 피해 갖고.
그래 갖고 이제 가난한 성도가 그렇게 많은데요,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한나가 잘한 게 뭐냐 하면은, 한나는 내가 이제는 뭐 브닌나한테 시달리고 내가 이제는 엘리 제사장까지 나를 이렇게 억울하게 지금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서 나도 이제 가나안 성도가 될 거야, 그렇지 않고요 오히려 한나는 그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요.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락방이 이제 오픈이 됐는데요, 너무 여러분 다락방 가서 내가 거기가서 상처도 치료받고 난 대접도 잘 받고 다락방 가가지고 막 아 너무 기대가 돼, 설래 그러면 가지 마세요.
다락방은 대접 받으러 가는데도 아니고요, 그렇게 막 기대감을 갖고 가면은 돌아오는 거 실망 밖에 없습니다.
이제 한번가 보세요.
엘리가 먼저 앉아 있습니다.
이 농담이 아니고요 다락방은요 대접 받으러 가고 내 치료받으러 가는게 아니라 이 어두운 시대에 섬기러 가는 거예요.
서로서로 섬기면서 그 섬김이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 원리를 누리는게 이 다락방 이거든요.
그래서 엘리가 안 그래도 지금 죽고 싶은 이 한나라는 여인에게 그런 억장이 무너지는 그런 오해의 소리를 해대니까 한나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어떻게 설명하는가? 15절입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이 참 멋진 말 아닙니까.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어요.
여호와께 내 심정을 통하는게 기도래요.
그런데요 이때 자기가 하나님께 심정을 통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단계만 해도 한나는요 하나님 앞에 그냥 자기 아픔과 상황을 그냥 막 드리 퍼부은 것 뿐이에요.
이 심정을 통한게 쌍방이 아니고요 이때만 해도 일방이에요.
왜 하나님은 나한테 자녀를 안 주시냐고? 왜 하나님은 저 브닌나 같은 못된 거 처치를 안 하시느냐고 막 들이 퍼붓는걸 지금 하나님과 심정이 통했다는 거예요.
그랬는데 여러분 이 기도가 중요한게 뭐냐면은 이렇게 낮은 단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데요, 그 기도가 어떻게 발전하는 겁니까?
하나님과 쌍방의 심정을 통하는 것으로 발전해가는 거예요.
뭘 보면 압니까?
결국은 한나가 오래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려 하나님과 심정을 통했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를 자기가 어떻게 증명해 냅니까?
그렇게 어렵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 왜 드리느냐구요.
이제 한나가 어느 단계입니까?
자기의 심정도 하나님께 다 토해놓았지만 그 악하고 어두운, 그래서 그 사사기 말기는 영적으로 불임의 시대라 그러거든요.
그 불임의 시대, 그 악한 시대에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 그 마음을 이제 쌍방으로 통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이 소중한 아들을 드립니다.
오늘 여기 예배 드리시는 분은요 딱 세 종류예요.
첫 번째 종류는 '아니 그 하나님과 심정을 통한다는 게 무슨 말이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모태 신앙인데요 중직자인데요 하나님과 심정이 통한다는 거를 모르는 분이 계세요.
한나처럼 억장이 무너질 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통해서 심정이 통하는 그게 어떤 걸 의미하고 어떤 효과가 있고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교회 다니는 분이 계세요.
그런가면 두 번째 부류는 중간 단계인데요, 조금 나아요.
그런데 그 심정을 자기는 통한다 말하는데 그게 일방 통행이에요.
하나님의 심정은 관심도 없고 내 심정을 토하는 걸' 나 하나님과 심정을 통해'.
여러분 통하는 건요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부부가 그 남편과 아내가 서로가 통해야만 이게 아 우리 부부는 심정이 통한다는 거지, 상대방에 대해서는 하나도 그 아픔을 무관심하게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자기 얘기만 드리 퍼붓는거를 심정이 통한다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믿음이 꽤 좋다고 생각하는 분 중에 이 두 번째 부류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는 소수라 생각하는데요 하나님과 쌍방의 심정이 통하는 분이 계세요.
그래서 정말이 혼란한 이 시대에 아버지의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면 눈물이나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악한 시대에 이 배교의 시대에 얼마나 탄식하고 계실까.
많은 헌신자들, 기도하는분들, 다 여기서부터 나오는 거거든요.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하신 크리스천이세요?
한나가 하나님 앞에 심정을 통했기 때문에 선한 일을 사모하게 되었고 그 선한 일을 실제적으로 아들 사무엘이 어두운 시대에 쓰임받는 하나님의 대행 종으로서의 역할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면 아까 두 번째 분당 우리 교회가 이제 선한 일을, 예수님이 하셨던 선한 일을 사모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그분과 유무상통하면서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는 많은 성도님들이 배출되는 교회가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베드로도 처음에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이후로 제가 베드로의 행보를 쭉 보니까요 베드로는요 이 말의 뜻을 1도 몰랐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뭐고? 그렇게 끝났어요.
그랬는데 베드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랐고 계속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오다가 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의 말이 뭘 의미하는 를 어느날 탁 관통하는, 깨닫게 되는 그런 그 지점이 있는데요, 그게 놀랍게도 가장 비참할 때예요.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베드로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을 배신해 버리잖아요.
팔아 버린단 말이죠.
마음으로 이제 예수님을 저주해 버린단 말이죠, 말로서.
그래서 이제 베드로는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갔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 베드로를 찾아오세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예수님 같으면 난 걔 안 봐요.
그래서 이제 우리교회 출신들 한번 모여라 그러는데 그 베드로는 빼고 오라 그래라, 나 걔는 안 보고 싶다.
그 가룟 유다는 지가 알아서 꺼져서 다행이고, 그 베드로도 부르지 마라.
글쎄 내가 암만 생각해도 좀 그럴 거 같아요.
여러분 어떨 것 같으세요?
근데 예수님은 그 베드로를 찾아가세요.
그리고는 이제 뭐 나중에 성경 읽어 보세요.
그 베드로가 그렇게 비참하게 주님을 배신하던 그 유사한 분위기를 주님이 만드시고요, 그리고는 질문을 그냥 이렇게 회피하지 않고 쑥 들어가세요.
그게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 같은 사람에게 물으면 그냥 이게 일반적인 말씀이니까 뭐 생각 없이 그냥 "예 주님 사랑합니다" 그랬을 텐데요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제가 이렇게 상상해 보니까 그냥 이렇게 심장이 툭 떨어졌을 것 같아요.
'이 왜 물으시지, 이 질문 왜 하시지?'
그래서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참 주님 잔인 하세요.
직면시키는게 이런 거에요.
그 다음 두번째 질문, 똑같은 질문, 16절.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래서 이 뭐 두 번째까지는 "뭐 아까 말 못 알아 들으셨나? 주님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한 번 더 하십니다.
17절.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주신 동일한 말씀이 이거 아닙니까.
요한복음 21장 15절.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절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치라 하시고"
그리고 17절은 다 읽어 드릴게요.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요 이 과정에서 주님이 지금 자기가 그 끔찍한 배신의 자리를 직면케 하신다는 것도 알았고요, 그래서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내가 주님 사랑하는 거 주님 아십니다 이 말 속에는 분명히 이런 말이 포함됐을 것 같아요.
"예수님, 그날 내가 참 비참하게 주님을 팔아 버렸는데요, 사실은 그 순간에도 저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너무 겁이 많고 내가 너무 비겁하고 내가 두려웠을 뿐이지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던 그 순간에도 저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고백을 세 번째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가 하게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랬더니 주님이 "내 양을 먹이라" 그러는데요 저는 지난 주에요 신학 공부한지 35년이 지나는 동안에 모르고 있던 거 하나를 제가 깨달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뭘 깨달았느냐 하니까요,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부하시는 내 양을 먹이라 할 때 양이 어떤 상태의 양이었는가?
그게 지난주에 살펴본 마태복음 36절입니다.
자 35절부터 한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치료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 할 때 그 양은 목자없는 양 같아서 유리방황하고 혼란을 겪고 갈등을 겪는 그 시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오늘 교회가 베드로 같이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베드로 같이 목사인데도 실족하는 사람이 있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교회가 지금 너무너무 어렵지만 기여이 우리가 회개하고 일어서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목자없는 양같은 사람들이에요.
유리 방황하고 혼란에 빠지고.
수없이 강조하지만 지금 오늘 이 시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혼미한 시대 아닙니까?
우리가 기어이 등불을 밝혀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 누구라서 한나처럼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냐고요.
직장에서 안 괴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의 중직자 치고, 교회에 뭐뭐 성가대 봉사하고 안내하고 주차 봉사하고, 우리 일만 성도 파송 운동 끝나고 너무 혼란스러울 때 그때 어떤 사람은 주차 봉사하는 분한테 침도 뱉고 그랬어요.
세상에 그런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그거 닦아내고 봉사해야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목자 없는 양 같아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의 상처가 여러분의 아픔이 그게 재료가 돼서 하나님과 심정을 통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게 할 수 없습니까?
저도 아파요.
토요일만 되면 내가 언제 은퇴하나?
주일 되면 다시 힘을 얻고.
이 7일로 반복 사이클이 돌아간지가 꽤 됩니다.
누가 상처를 안 받느냐고요.
교회 안에는 상처 준 사람이 없다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교회 안에 미숙한 사람이 더 많잖아요.
다락방 이야기 농담이 아닙니다.
각오하고 가셔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처가, 내 눈물이, 내 아픔이, 기도의 자리로 나가게 하고 그 기도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그래서 나는 내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결론이 이거예요.
맨 처음에 제가 책에서 인용해 드렸던 그 전문가 두 저자가 했던 그 말, 나이가 들수록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귀찮아 죽겠어도 침대에서 일어나야 될 이유가 있는 그 사람이다.
그리고 97세 할아버지가 했던 말, 그 이유는 오늘도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저 사람이 더 나아지는 삶을 행하기 위해서.
기독교 책에서 그렇게 말하면 뭐 저도 뭐 교회는 맨날 이렇게 말하는 거지라고 하는데요.
그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께서 오늘 지난주 말씀과 더불어서 분당 우리교회가 이제 모든 기능이 정상화가 된 것을 선언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의 아픔과 여러분의 상처가 여러분이 참 교회를 생각하면은 막 분노가 생길 수 있는 어떤 과거의 어떤 아팠던 기억이 가나안 성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재료가 되기를 바래요.
그것이 아~ 이 시대에 나만 아픈게 아니라 하나님도 아프시구나, 나만 상처받는게 아니라 이 교회의 무기력을 보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아프신 거구나, 그 심정을 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면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오늘 한번 이 찬양을 이 '부르심'이라는 포인트로 제가 이 곡을 택했는데요.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베드로가 풍랑이는 그 바다를 뛰어들던 그 내용을 갖고 만들었는데 계속 반복하는게 '주님 여기 계시기에 주님 여기 계시기에' 또 '주님 나를 부르시니 나를 부르시니'
저는 두 가지를 놓고 기도합니다.
한나처럼 교회에서 받았던 여러분의 상처가 진짜 치유되기를 바래요.
혹시라도 저나 우리 교역자가 여러분에게 준 상처가 있다면 정말 치유가 일어나기를 바래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 하나님도 아프시구나.
우리 하나님도 이 시대를 탄식하고 계시구나.
그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그래서 이 교회는 예수님이 하셨던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이 찬양 불러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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