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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이찬수목사님

우울한 시대에 해야 할 도전 | 열왕기상 18장 41-46절 | 이찬수 목사님 | 분당우리교회 | 2024.3.17 설교문 녹취록

본문 : 왕상 18:41-46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오늘 살펴보게 될 엘리아 선지자를 생각하면 저는 게임 체인저는 단어가 생각이납니다.

이 게임 체인저는 그 상황 전계를 완전히 바꿔 놓는 사람 혹은 아이디어나 사건, 이걸 이제 게임 체인져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지금 A팀과 B팀이 축구시합을 하는데요 A팀이 1대 0으로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이 잘 풀리지가 않아 가지고 지금 aA팀 선수들이 굉장히 좀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1대 0영으로 그냥 패하고 말겠다 지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A팀의 한 선수가 그 상대방 선수에게서 공을 뺐더니 무섭게 질주를 해서 그렇게 동점 골을 터트립니다.

가라앉아 있던 팀의 사기가 확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막 이제 사기가 올라가 가지고 조금 지나니까 또 그 A팀에 어떤 선수가 바로 한 골을 더 넣어서 이제 2대 1로 대역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면 맨 먼저 A팀에서 한 골을 넣었던 그 선수가 그게 바로 게임 체인져라는 거예요.

그 선수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머지 선수들이 사기를 되찾고 활력을 되찾게 돼서 상황 전개를 완전히 바꾸 놓게 되었다, 이게 게임 체인져거든요.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시대 시대마다 게임 체인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준비시키시는걸 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요,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모두가 두려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상밖에 복병, 어린 다윗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래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무기를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쳐서 분위기가 단번에 바꾸어지게 되는 것, 이게 게임 체인져에요.

모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애굽에서 오래 노예로 신음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게임 체인져로 부르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의 길을 가게 만드시는데 이 모세도 의외의 인물입니다.

본인이 자기는 아니라고 난 자격이 없다고 난 못한다고 그렇게 극구 사양하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고 다듬어서 게임 체인져로 만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말씀들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저를 그렇게 좀 써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어둡고 힘든 시대에 하나님 앞에 게임 체인져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악한 왕 아합 때문에 온 나라가 암울한 상황이에요.

특히나 지금 오랜 가뭄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어둡고 우울한 상황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두운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를 게임 체인져로 그렇게 준비시키고 계셨던 거거든요.

그래서 그가 오늘 본문에서 참 게임 체인져로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제일 먼저 본문에서 등장하는 것은 그 어두운 가뭄의 시대에 대한 이 엘리야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자 열왕기상 18장 41절 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소서 큰 비소리가 있나이다"

 

여러분 3년 6개월이라는 엄청난 그 가뭄의 기간에 고통당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이것보다 반가운 소식이 있겠냐고요.

"큰 비소리가 있나이다" 이런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아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요 사실은 엘리야가 큰 비소리가 있다고 선포하던 그때 비가 안 왔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래서 자세히 보니까요 엘리야가 비가 온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빗소리가 들린다 그래요.

자기한테만 들리는 거죠.

이런 면에서 보면은 엘리야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거짓말쟁이거나 허풍쟁이거나 아니면 선견자이거나.

'선견자' 이걸 제가 사전을 찾아 보니까요,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식견이나 능력을 지닌 사람, 이렇게 풀이 하더라고요.

엘리야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선견자인 것이 확실한 것은 그다음 나오는 결과입니다.

지금 비가 오지 않는데도 빗소리가 들린다고 그렇게 선포한 엘리야가 선포한 바로 이후에 45절에, 여기서 중요한 건 "조금 후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면 큰 비가 내리는지라"

이래서 엘리야가 선견자라는 거죠.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식견,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

아니 비 오고 있는데 비 온다 이게 무슨 선견자입니까? 그건 그냥 시끄러운 사람이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참 이 비 올 조짐도 없는 그래서 너무나 사람들의 심령이 매말라가는 그런 때에 하나님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걸 선견자라고 한다면, 그럼 이제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겠죠.

그럼 엘리야는 어떻해 비가 오지도 않는데 그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나?

저는 그것을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바로직전 오늘 본문 열왕기상 18장 맨 앞에 나오는 1절에 보면은 그가 받은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자 1절 한번 보십시오.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그다음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비를 치면에 내리리라"

그러니까 제가 상상해 보니까 이런 겁니다.

지금 엘리야의 귀에 뭐 후두두두둑이 빗소리가 들리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라'는 이 약속의 말씀이 귓가에 이게 빗소리처럼 들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엘리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들려졌던 그것 때문에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희망의 사람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저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목회자로서 하나님 저도 부족하지만 엘리야처럼 이 말씀이 주는 확신, 그래서 여러분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이 다 이런 거 아닙니까?

모두가 암울하고 3년 6개월 동안에 비가 오지 않는 가뭄으로 심령이 매말라 있는 것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에게 제가 주일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빗소리가 들립니다' 이걸 전하는 역할 아니겠습니까.

들리지도 않는데 들린다, 그건 거짓말이니까요.

하나님 저에게 날마다 이런 희망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도록 영적으로 항상 민감해져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가하면 여기서 또 한 가지요,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가 또 한 가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자 본문 44절 입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그랬더니 44절 하반절 한번 보십시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누가 선견자입니까?

이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 손만한 작은 구름이 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요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 이제 그 절대 권력을 가진 왕에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운 거 아닙니까?

확신을 가지고 엘리야가 이제 '비가 옵니다 마차를 준비하고 마차를 타고 가시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두 종류 아닙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어느 부류에 더 가까우세요?

손만은 구름 밖에 못 보시는 분, 맨날 아쉽고 맨날 목마르고 맨날 그런 것 때문에 우울하고 내 눈에는 손만한 구름에 안 보여, 그런가 하면은 어떤 사람은 그 손만한 구름을 보고서도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운 비가 허락될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주변에 희망을 전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요.

이런 면에서 저는 엘리야 하면은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비저너리'라는 단어예요.

이 비저너리라는 단어는 미래를 읽고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이래요.

또 비전이 있는 사람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지금 엘리야가 딱 그런 인물 아닙니까.

 

제가 미국에 이민 가던 해에 그 ABC 방송이라고 그 이제 미국 전국 방송인데요 거기에 이제 무슨 시사 프로그램이 테드 카플인가? 제가 기억이 어렴풋한데요, 유명한 앵커가 진행하는 시사 프로그램인데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 제목이 20/20에요.

저는 뭐 영어도 그때 잘 못했고 미국 문화도 모르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어 갖고 뭐 검색하면 금방 나올 텐데 이 투니 투이가 왜 제목이 20/20인지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이민생활을 끝날 때까지 몰랐습니다.

너무 궁금한 겁니다.

20/20, 왜 시사 프로그램을 이렇게 하는가? 그랬는데 최근에 제가 책을 읽다가 그 설명하는 걸 제가 읽고 막 아 정말 너무 체증이 내려가는데, 아 이게 이런 뜻이구나.

그게 뭐냐 하니까요 왜 그 시사 프로그램 제목이 20/20인가 하니까 그 미국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시력이 좀 약하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 인간의 최고 시력을 뜻하는 2.0/2.0 그 뜻이래요.

그러니까 이게 시사 프로그램이니까 내가 정확하고 밝은 눈으로 취재를 하겠다 그런 뜻을 담아 가지고 제목을 그렇게 정했어요.

아 35년 만에 제가 궁금한게 하나 이제 풀렸습니다.

 

근데 여러분 사실 제목을 참 잘 진 거 같은데요, 솔직히 말하면 인간의 최고 시력을 2.0이라고 말한 것은 옳은게 아닙니다.

근래에 제가 어느 안과 병원 소개 글을 보니까요 이 몽골 사람들 시력이 3.0에서 4.0이래요.

그 의사 선생님이 이제 소개글에서 몽골 사람들 시력이 이렇게 밝은 이유는 환경 때문인데요, 그 넓은 평야에서 먼 거리를 보면서 그렇게 살아가다가 보니까 이게 눈이 점점 발달이 된대요, 이 시력이 점점 좋아진다는 겁니다.

그 뭐 진짜인지 모르겠는데요 어떤 몽골 사람 시력이 6.0도 있다고 해요.

이게 뭐 진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편적으로 그 3.0에서 4.0은 그건 뭐 거의 보편적인 이야기거든요.

그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의사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는 이 스마트폰 뭐 전자기기 또 책 이런 것 때문에 이제 먼 곳을 바라볼 기회가 없어서 점점 이제 눈이 더 나빠진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렇게 쓱 보니까요 거의 한 절반 이상이 지금 안경을 다 쓰고 계세요.

그러나 또 그중에 또 안 쓰는 분의 절반은 또 그 또 렌즈를 끼고 계시잖아요.

안경 안 쓰는 척 하시면서.

그니까 뭐 거의 다 이제 안경 도움없이 렌즈 도움 없이는 볼 수 없는 시력이 이렇게 약해졌다는 거죠.

 

그래서 그 안과 의사분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요 이제 자꾸 그 스마트폰 내려다 보고 전자 기기 보고 또 책을 보고 이러면은 틈틈히 멀리를 보라는 거예요.

계속 멀리를 내다보고 또 먼산을 바라보고 그렇게 자꾸 균형을 맞추어 줘야 눈이 덜 나빠진다, 그런 설명을 제가 보면서 아 이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 시대는 자꾸 우리를 눈앞에 것에만 연연하게 만들잖아요.

좀 멀리 보는 눈을 이 시대가 다 빼앗아가 버리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요,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그다음 보세요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에요 그리고 그다음 18절 19절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 믿는데도 그저 눈앞에 것, 이것 좀 주세요 이것 좀 주세요 이것 좀 어떻게 해결해 주세요 저것 좀 해결해 주세요 늘 눈앞에 있는 것에 안달복달 하다가 보니까 먼 눈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광대하심, 이런게 거의 잘 안 보이는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닙니까.

막 예수 믿은지 10년이 되고 20년이 지나도 도대체 시야가 넓어지지 않는게 오늘 우리 현실 아니냐고요.

그래서 자꾸 큰 그림으로 봐야 돼요.

넓은 마음으로 큰 그림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는데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우리 부르심의 소망, 이 전부 다 큰 그림들 아닙니까.

그 제가 이 엘리야를 묘사하면서 단어 몇 개를 제가 썼는데요, 먼저는 게임 체인저는 단어를 썼잖아요.

어려운 상황 전개를 완전히 바꿔 놓는 사람.

그런가 하면은 선견자,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식견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

그다음 비저너리, 미래를 읽고 전망을 제시하는, 그리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이 전부가 다 멀리 보는 사람이에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너무너무 힘든데 막 그냥 괴롭고 어려운 일이 많은데 그런데 손만한 구름 하나만 보여줘도 거기서 용기를 찾아내고 큰 그림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 이게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 오늘 저는 그 지난 연말에 이 본문을 가지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렸는데요 그때 저의 어머니 장례를 마치자마자 이제 바로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예배 가운데 저에게 은혜를 많이 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은요 슬픔을 당한만큼 위로를 주시더라고요.

제가 그 설교를 이제 송구영신 예배니까 성도들 중에 절반도 안 오시잖아요.

언제 제가 이 설교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다듬어서 한번 모든 성도님들이 설교를 다 들으시도록 그런 마음의 꿈을 지난 한 석 달 동안 꿔왔습니다.

이거 언제 이 말씀을 선포할까?

모르겠습니다. 그날 뭐 저의 어떤 특별한 상황 때문에 저에게만 이런 은혜를 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오늘 우리는 이 게임체인저 또 선견자 또 비저너리 이런 것들로 설명할 수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여러분이 어둡고 우울한 시대에 우리도 엘리야처럼 게임 체인저로 쓰임받기 원합니다, 이런 큰 그림을 그리면서 오늘의 이 대안을 한 네 가지로 제가 정리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어둡고 우울한 이 시대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몰입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몰입이요.

자 오늘 본문 열왕기상 18장 42절 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여기 보면 지금 엘리야가 기도하는데 어디로 기도하러 갔습니까?

갈멜산 꼭대기로 갔습니다.

이 갈멜산 꼭대기는 엘리야에게 있어서 사람들과 격리된 장소예요.

엘리야는 그 격리된 장소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오직 하나님과만 소통할 수 있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졌거든요.

제가 신학교를 들어가던 90년만 해도요 여기 그 청계산 기도원이라고 아시죠?

그 도시 가운데 있는 청계산 기도원이 있는데요.

거기 가면은 밤 10시 11시까지 부르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그 청계산 기도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엘리야에게 갈매산 꼭대기인거에요.

그래서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 12시 1시 막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그런 소리들을 많이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거의 그 소리가 안 들려요.

뭘 의미합니까? 지금 사람들이 큰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님 앞에 큰 꿈을 가지고 그렇게 부르짖는 기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건 이건 이 시대가 그만큼 영적인 침체기를 맞고 있다는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지금 어떤 영적인 갈멜산 꼭대기를 갖고 계십니까?

저에게는 새벽이 그 시간이에요.

낮동안에는 뭐 이게 뭐 제 몸 아니잖아요.

저를 필요로하는 또 기도가 필요한 성도님들에게 드려진 시간이니까 무슨 뭐 제가 아침에 여기 교회로 출근해 가지고 저만의 갈멜산 꼭대기를 어떻게 경험하냐고요.

그러니까 갈멜산 꼭대기를 저는 마련하는데 그게 저에게 새벽이에요.

저희 집 서재가 저의 갈멜산 꼭대기에요.

왜 그런 시간을 가집니까?

그런 시간을 가지지 않고는 제가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 고갈이 돼 가지고.

다 퍼주고 퍼주고 고갈이 되면 어떡할 거냐고요.

놀랍게도 그 새벽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 한 서너시간이 저에게 충전의 시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이 부족한 제가 이 귀한 분당 우리교회 담임목사로 22년 쓰임을 받는데 고갈되지 않도록 그리고 주님 저도 비저너리 되도록 주님 저도 게임 체인저가 되도록 하나님 제가 이 교회에서 선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은혜로 구하면 뭐 그 기도가 바로바로 응답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 마음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저를 회복시켜 주는 시간이거든요.

 

여러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에게 단 30분만도 좋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 하나님과 독대하는 장소를 마련해야 돼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돼요.

뭘 꼭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 품이라는 것은요 뭘 꼭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기가 엄마 품에서 뭘 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잖아요.

평안한 가운데 그냥.

어떨 때는요 제가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답답하고 힘들 때는 그 글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기도도 안 나와요.

그러면 그냥 서너시간 그냥 주여.

우리 애들이 지금 20대가 넘었는데 얘들은 뭐 힘든 일 생기면 '주여' 그래요.

이제 어릴 때부터 보고 이제 그거를 이제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은 여기 보면은 엘리야가 또 한 가지 더 하는데요.

그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런 자세를 취했을까요?

주변 환경에 자기 시선을 뺏기고 싶지 않은 의지의 표현이거든요.

저는 이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던 엘리야를 보면서 그 경주마 눈가리개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경주마 다 아시죠?

이렇게 눈 가리개를 다 하잖아요.

이렇게 가리면 큰일나고.

눈가리개를 옆으로 해서 옆으로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믿는 사람은 영적인 눈가리기 필요해요.

오늘 우리 시대는 너무나 산만한 시대예요.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막 온갖 기능이 다 있어 가지고.

성경이 다 있어 가지고 교회 올 때 스마트폰 들고 오는 분이 계세요.

그 나쁜 건 아닌데 그 좀 위험해요.

자 이제 본문이 오늘 뭐 열왕기상 18장 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선한 마음으로 찾았는데 기사가 떠요, 어 이 가수가 이혼했네? 그때부터 이제 엘리아는 온데간데 없고 이혼한 그 가수가 이제 궁금한 거예요.

왜 이혼을 했지? 성격이 안 맞았나? 축도가 빨리 끝나면 내 집에가 찾아봐야지.

그래서 여러분 스마트폰보다는 성경이 안전해요.

이거 열번 읽어도 이혼한 가수 얘기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너무너무 산만한 시대예요.

그래서 엘리야가 무릎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렇게 집중해서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경주마가 눈 가리기를 하고 하듯이.

 

그런가하면은 두 번째로 이 우울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하나더 있는데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과 기대감을 가지는 겁니다.

앞에서 엘리야가 열왕기상 18장 41절에서 "큰 비소리가 있나이다" 그리고 또 44절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들이, 이런 확신이 어디서 나왔다 그랬죠?

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해주셨기 때문 아닙니까.

왜 그렇게 우리 교회가 말씀 묵상을 강조합니까? 큐티를 강조합니까? 성경 통독을 강조합니까?

3년에 한번 읽을 거리를 찾아다 드리고 1년에 한번 읽을 거리를 찾아다 드리는 이유는 말씀이 있어야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이 돼야 그 기도의 확신과 응답이 나타난다는 사실이에요.

 

참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반성을 좀 하는게요 본문 43절 한번 보십시오.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엘리야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해도 손에 잡히는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때문에 확신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한번 조언해 드릴까요?

기도하기 전에는 말씀을 붙잡아야 돼요.

여러분 금요 기도하러 수요 기도하러 나오기 전에는 말씀을 묵상하고 여러분의 기도 내용을 정리해 갖고 오셔야 돼요.

그래야 기도가 재밌어져요.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참 이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좀 문젠데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도 사실은 없이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은 참 요즘말로 웃픈 그런 기사가 하나 나와 있는데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이 그 당시 지도자였던 야고보를 죽이고 그리고 또 다른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옥에 가둡니다.

큰 위기 같습니다.

그랬더니 참 아름다운 모습이 나와요.

그게 사도행전 12장 5절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도자는 주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그렇게 고난 속에 감옥에 갇히는데 온 성도들이 함께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만큼 약간 우픈 내용이 나옵니다.

자 그다음 그 내용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응답을 받고 풀려납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가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는데요.

그 내용이 사도행전 12장 12절부터 나옵니다.

한번 보십시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는데 로데라 하는 여자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쳐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아니 지금 감옥에 가 있는 베드로가 지금 어떻게 문을 드리냐? 지금 자기들이 베드로가 풀려지기를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무의식 속에 '아 우리가 기도한다고 무슨 감옥에 있는 베드로가 풀려나?'

여러분 기도하는 여러분 내면에 이런 불신이 없습니까?

지금 저는 분당 우리 교회가 한번 영적인 부흥을 꿈꾸는데요.

그 첫 출발은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기도 응답이 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려면은 첫째 기도해야 돼요, 둘째 말씀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 하면은 세 번째로 이 우울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하나 더 있는데요 인내 배우기 인내.

자 본문 43절 44절 입니다.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닷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여섯 번하고 기도 끝냈으면 하나님의 뜻이 그날 안 펼쳐지는 거죠.

제가 여러분 몇 주 전에 팝콘 브레인이라는 신조어에 대해 설명해 드렸잖아요.

두드리면 바로바로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이런 스마트 같은데 익숙해지다 보니까 이게 지금 뇌 구조가 이 현실 적응에 좀 둔감하게 만든다는 거에요.

그래 가지고 실험하면서 이 인터넷을 장시간 사용하는 사람의 뇌를 그 mri 영상을 찍어서 분석해 보니까요, 그 사람 뇌에서 생각 중추를 담당하는 그 회백질의 크기가 줄어들어 있더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지금 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남의 나라 얘기하기가 좀 그런데요 미국에 선거하는 거 한번 보세요.

아니 그 수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고 뭐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에서 그 두 할아버지가 지금 선거 대결하고 있는 거예요.

인물이 안 나와요.

인물이 안 나옵니다 지금.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아니 지금 이 생각 중추를 담당하는 그 회백질의 크기가 줄어드는데 거기서 깊은 사고를 하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나오겠냐구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아들 세대하고 제가 자란 세대를 바꾸라 그러면 절대 안 바꿉니다.

티비도 없던 시대, 겨우 흑백 티비 갖고.

축구중계 있으면 만화방 가서 돈 내고 보고 그랬잖아요.

무슨 스마트폰 같은게 있었냐구요.

그래서 불편했지만요 저는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거지 지금 우리 아이가 누리고 있는 이 시대가 저의 10대가 아닌 걸 저는 막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요 뭐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이 생각 중추가 자꾸 이제 기능이 약화가 되다 보니까 그래서 팝콘 브레인이 돼 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너무 참 너무 얕아요.

목사도 그렇고 장로도 그렇고 권사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고 뭐 어른도 그렇고 너무 얕아요.

그러니까 이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은 그거 그냥 한번만 꿀꺽 참으면 넘어갈 수 있는데 폭행이 일어나고 살인이 일어나고 이런 일들이 지금 계속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훈련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한번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런 말씀 별로 안 좋아하시죠, 아니 무슨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데 기쁘게 여기냐구요.

 

이유를 설명합니다, 3절.

왜 그러냐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

바로바로 기도하고 바로바로 응답받고 아침에 기도하고 점심 전까지 응답해 주셔야 돼 그게 응답이에요.

기도하고 바로 응답이 안 되면 '이씨 기도해도 재미가 하나도 없네 안 해'

원래부터 안 했는데 뭘.

이 팝콘 브레인이에요.

여러분 네살짜리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가요 그 애가 뭐를 달라고 막 그렇게 칭얼칭얼거리면 반드시 응답을 해 줘요.

그거 넘어가는 엄마는 없습니다.

제일 많이 하는 응답이 "안 돼"에요 "안 돼".

그 네 살짜리가 자꾸 칼 달라 그러는데 아 귀찮아 죽겠는데 한 100번 참았다가 한 번만 더 하면 줘 버려야지 이런 엄마는 없습니다.

100번을 해도 천번을 해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이게 그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의 표현이에요.

그런가 하면은 바로 응답해 주는게 있습니다.

이 아이한테 이게 유익하겠다? 그러면 하던 일도 멈추고 달려가 가지고 구해 주는게 그게 엄마의 사랑이에요.

그리고요 제일 많이 하는 응답이 안 돼라고 한다면 그다음 많이 나오는게 기다려에요 기다려.

너 일곱살 될 때까지 기다려, 지금은 안 돼, 일곱살 될 때 그때 엄마가 사 줄 거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시작하면 인내를 배워가는 거죠.

지금 하나님의 거절이 이게 사랑의 표현이구나.

기다리라고 그러셨으니까 인내를 이루어 가기를 원한다.

 

마지막네 번째로요 이 우울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네 번째 대안, 기쁨의 퍼포먼스입니다.

사실은 이 네 번째 때문에 제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졌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직후에.

자 본문 45절 46절 입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면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엘리야는 3년 6개월의 가뭄을 종식시키고 큰비가 내리자마자 그 비를 맞으면서 미친듯이 달려가요.

지금 그 악한 아합 왕은 마차를 타고 가는데 지금 왜 이 엘리야가 미친듯이 그렇게 달려갈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죠.

무엇보다도 응답이된 기쁨 때문이에요.

내 기도를 들으시는 신실한 하나님, 그 3년 6개월간의 가뭄을 종식시켜주신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거예요.

체면이고 뭐고 막 미친듯이 달리는 거예요.

 

제가 신학교 2학년이었던걸로 기억해요.

내가 그때 지방에서 교육 전도사 하면서 달동네에서 살았거든요.

목사가 물질 훈련해야 된다 그래서.

월세 4만 8천원짜리 달동네에서 창고를 개조해 가지고 겨울에는 추워서 정말 죽을 것 같고, 여름에는 더워서 못 견딜 것 같은 그 공간에서 꿈을 키웠는데 어느날 하나님이 이 말씀을 제게 주셨어요.

빗속을 달리는 그 엘리야를 보고 제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하나님, 이 어두운 시대에 응답의 기쁨을 가지고 빗속을 달려가는 거, 그리고 왜 빗속을 달려갑니까?

그 악한 아합왕이 마차를 타고 달려가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그 악한 왕에게 당신 같은 악한 왕으로 인한 이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신다! 시위하는 거에요 시위. 빗속을 달리는 엘리야.

 

저희 어머니가 소천하시고 며칠 지나고 이 예배를 준비하고 이 말씀을 준비하는게 송구 영신 예배인데.

하나님이 제 마음에 뜨거움을 주셨어요.

누구나 이제 하나님 앞으로 부름을 받아 다 가는건데 제가 남아 있는 이 시간 동안 다시 뵙게 될 어머니 앞에, 뵙게 될 우리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은, 빗속을 달리는 이 은혜를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거죠.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뭐가 충만합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세상에 이 어두운 시대를 봐 가지고 뭐 그냥 기분 좋은 일도 없고 기쁜 일도 없고 그냥 그런 세월 가운데 저는 분당 우리 교회 매 예배가 이 기쁨의 퍼포먼스가 일어나는 예배가 되기를 원해요.

저는 우리 다락방, 그냥 뭐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대화하고 교제하는데 그 다락방 모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 가지고 빗속을 달리는 엘리야처럼 이 손바닥만한 구름 밖에 떠 있지 않는 그런 상황이지만, 그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미친듯이 달려가는 그런 퍼포먼스가 다락방 안에서 우리 모임 모임 안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결론을 저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서 진정한 게임 체인저가 한 분 계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세요.

그분은 우리 삶을 역전으로 이끄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참 우울하고 힘든 그런 상황에서도 로마서 8장 36절 입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대반전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현실은 손만한 구름 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손만한 구름 보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퍼포먼스가 예배 가운데, 다락방 소그룹 안에서, 여러분 가정에서, 길을 걷다가, 저도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어서 미친듯이 달려가던 그 순간들이 여러 번 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여러분 인생에 이런 거룩한 기쁨의 퍼포먼스가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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