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그리스도인치고 누가 성서를 사랑하지 않으리요마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성서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것 같다. 한국의 선교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놀랍게 빠른 발전의 역사를 가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성서를 열심히 읽고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존중히 여기고 많이 읽으며 연구하는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일이며 복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를 중심으로 하고 성서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는 한국의 교회가 실제로는 성서의 정신과 엄청나게 배치되는 태도와 생활을 가지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 같이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경전이니까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매일 일과로 읽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신자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날의 할 일 가운데 하나를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나아가서는 성서의 피상적 내용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성서를 많이 읽음으로써 비록 그 뜻은 모른다 하더라도 어느 책에 무슨 말씀이 있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성서 지식만으로는 신자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둘째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읽기는 하지만 바른 성서관을 가지지 못하고 읽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괴상한 현상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서가 그 독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그릇된 생각과 생활을 조장하는 역효과를 내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가정에 비치한 약장에 여러 가지 약이 들어 있다면 어떤 병에 알맞는 약을 잘 골라서 적당히 사용함으로써 병을 바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약장에 들어 있는 것은 다 약이요 병을 고치는 데 쓰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리고 어떤 병이 나든지 차별 없이 아무 약이나 마구 사용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예를 들어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서를 읽되 각기 그 참 뜻과 작용과 성분을 모르고 차별 없이 적용한다든가 동일한 수준에 놓고 해석을 한다든가 할 때 우스운 결과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그것을 바로 보고, 바로 알아, 바로 적용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많다고 본다.
성서에 들어 있는 66권의 책은 그 저자도 각각 다르고 그 연대도 다르며 또 환경이 모두 다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일종의 총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성서를 평면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 모습 전체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성서는 입체성을 가진 것이어서 여러 차원에서 관찰하고 판단함으로서 정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 일반이 이와 같은 성서 개론적 배려와 연구 없이, 일차원적으로 읽고 어디서나 성구를 끌어다가 아무렇게나 적당히 생활에 결부시키고 적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판단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물론 사회에까지 혼란을 가져다주는 결과가 나타났다.
셋째로, 결국 이러한 현상은 교회 지도자들이 깊은 성서 신학적 연구 없이 한 가지 처방의 약으로 만병을 통치하려 드는 의사처럼, 제 나름의 새거과 제 나름의 처방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해 온 데에서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근 3000년 내지 2000년 전에 기록된 성서는 당시 특정 환경에 있던 특정 독자들에게 잘 이해되던 말과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잇다. 그러기에 성서를 읽을 때에는 먼저 역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동시에 성서가 단순히 사람의 글이 아니고 하나남께서 사람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사람의 글에 내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작업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 수행될 때, 그리고 그 말씀에 복종하려는 신앙적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그 말씀이 독자에게 활발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을 일반 평신도에게 쉽게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서를 사랑하는 한국 교회가 성서의 정신대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다면 그 책임은 교회를 바로 가르치고 성서를 바로 해석해 주었어야 할 목사들과 교역자들에게 있다고 느끼며 반성하는 바이다.
저자는 이러한 정황을 앞에 놓고 성서를 좀 더 정확하게 그리고 사실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서가 역사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정경으로 수집 되었으며, 또 마침내 우리의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평이하게 기술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앎으로서 여러 가지 혼란을 피할 수 있다. 교회의 신앙도 사회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해를 거듭함에 따라 그 전통에 이끼가 끼고 또 묻어 그 원형이 희미해지거나 아주 가려져서 원형을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성서에 관한 우리의 신앙도 교회의 긴 전통에서, 여러 의견이 잡다하게 첨가되고 마침내는 괴상망측한 모습을 가지는 데 이르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성서를 관찰하고 거기에 대한 판단을 각각 다르게 가진다. 사실은 사람을 살리고 인간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되도록 주신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도리어 교회 분쟁과 분열의 도구가 되고 그 원인이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좀더 객관적인 연구에 의해서 냉정하고도 건실한 종합적 견해를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어떤 기성 교회의 안경을 끼고 성서를 주관적으로만 해석, 취급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빚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성서 학자들의 노고에 의해서 규명되고 주장되는 보편적인 견해를 쉽게 소개하여, 성서가 정말 어떻게 기록되고, 어떻게 수집되어, 어떻게 그리스도교 정경으로 채택되고 마침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우리의 손에까지 전달되었는가를 밝힘으로써 잘못된 선입관념이나 그릇된 주견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명확하게 듣고 복종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성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서 고스란히 땅으로 떨어진 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편일률적으로 불러주어 쓰게 하신 책도 아니요, 다른 책과 다름없이 사람들이 사람의 문자로 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이 쓴 많은 책들 중에서 하필 66권이 성서로 수집되어 그리스도교 경전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보려는 것이 또한 이 책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히브리서 1장 1-2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우리 조상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방법'으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 것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입이 있고 어떤 특정 언어가 있어서 우리들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성서에 보면 여러 곳에 하나니므이 직접적인 음성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들은 음성, 사무엘이 들은 음성,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들으신 음성 같은 것 말이다. 그것들이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더라도 성서의 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할 뿐 나머지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실은 이사야가 들은 말씀(이것은 히브리 말로 들려왔을 것이다)이나,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들은 말씀(이것은 아람 말로 들려왔을 것이다) 같은 것도 하나님의 성대의 진동에서 나온 말씀은 아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일종의 방법이어서 사람에게 계시하려는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서 들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의 언어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거나 예언자나 사도들에게 말로써 들려주신 것이 성서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높은 차원의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영의 차원에서 영적인 말씀을 하신다면 사람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세상 평면에서 같이 사는 인간들 끼리도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를 때 흔히 의사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면, 하물며 존재의 차원이 다르고 무한한 간격을 가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일까보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하신 뜻을 역사화하는 공작을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냥 사람에게 전달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로 구체화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나 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생각의 차원에 그냥 남아 있으면 남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일단 그것이 행동으로 표시되거나, 말로 설명되거나, 언어로 기록될 때, 즉 구체화하여 표현될 때 비로소 사상이 전달된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뜻이 신령한 차원에 그냥 남아 있는 한,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인간 역사의 수준에 내려오셔서 그 속에서 구체화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월자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악하고 어리석고 상대적인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하시려고 할 때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방편 곧 역사화의 방편을 채택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 즉 말씀(로고스)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사건만이 하나님의 역사화 작업이 아니고, 성서에서 주신 말씀 역시 역사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류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방편이 많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실 때 사용하신 방편도 여러 가지고 나타났다. 하나님은 우선 역사 속에 사건들을 일으키셨다. 생겨나고, 없어지고, 변하고, 움직이는 우주 만물 어느 하나인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지 않은 것이 있으리요마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으로써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켜 주셨다.
어떤 아버지가 아침마다 비를 들고 앞뒤 마당과 한길을 쓸고 청소한다고 하자. 묵묵히 이런 일을 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그의 자녀들에게 무언의 교훈이 되며 그 사건이 곧 그 자녀들에게는 행동을 통한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가나안으로 이주케 하시고, 그의 후손을 선민으로 삼아 인도하신 긴 역사의 토막토막은 극적인 말씀이며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아니 그런 목적으로 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간 역사의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간섭하신 사건 하나 하나에서, 우리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그 작가의 의도를 깨닫고 배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인간 역사의 주역은 대개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일으키시는 사건들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람을 택해서 그들의 생활과 말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일이다.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같은 영도자, 제사장, 왕들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종교생활, 도덕생활, 국가생활 등의 규범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특히 예언자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사람의 말로 전달하게 함으로써 타락한 백성을 각성시키며, 의기 소침한 백성에게 희망을 북돋우게 하셨다.
이렇게 신비스럽게 하나님의 뜻이 예언자들에게 이르렀지만 예언자들은 이제 그것을 당시의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기호로써 포현하여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어떤 방법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는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말로 바꾸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각과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건을 진단하고 분석하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때로는 백성을 견책하고, 때로는 옹호하며 때로는 위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시인들과 지혜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예리한 감각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여러 가지 관계를 시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읊게 한다. 그뿐 아니라 지혜자들을 통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모든 실제적 지혜와 생활 원리를 가르치고 보여 주셨다.
이와 같은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시고, 자라시고,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고생을 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 모든 사건들이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극적인 말씀이시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만을,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요한복음 기자의 말과 같이 예수가 곧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건 하나 하나와 그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들도 역시 역사 속에 구체화한 하나님의 말씀의 일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승천 후에 그의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성도들을 일으키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감동시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들과 그 측근들에 의해서 초대 교회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동시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라들을 통해서 문서화하게 되면서 더욱 더 다양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언어를 통하여 표현될 때 각양 각색의 표현 양식이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서의 계시를 인간에게 주시던 때는 지금부터 4000년 내지 2000년 전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미개하고 과학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지식과 우주관과 제도와 언어와 그 표현 양식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현대인은 과학적 지식을 가져서 사물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과학적 정확성으로 진술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현대인 역시 소설을 즐긴다. 소설이라는 표현법을 통해서 작가는 자기의 깊은 사상을 전달할 수 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옛 이야기는 절대로 사실일 수는 없다. 허황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것이 사실인 양 흥이 나서 듣고 즐기고 또 교훈을 받는다. 그 이야기는 신화적인 것이지만 동서고금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교훈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이 없는 옛 사람들에게는 과학적으로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신화적인 표현법을 써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다. 비유는 물론 그 소재를 생활 주변에서 가져왔다 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창작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비유 속에는 황금과 같은 값진 진리가 담겨있다. 구약의 시인들은 시로서 그들의 의사와 사상을 표시했고, 많은 예언자들도 시적 표현으로서 진리를 진술했다. 역사적 사건을 산문으로 기술한 부분도 있고, 개인이나 단체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다. 희곡도 있고, 묵시 문학도 들어있다.
이렇게 볼 때 성서 안에는 이 모양 저 모양의 말씀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따라서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역사로, 시는 시로, 비유는 비유로, 격언은 격언으로, 소설은 소설로, 희곡은 희곡으로, 신화는 신화로 각각 분류하여 거기 해당하는 적절한 해석법에 따라서 해석할 때 그 계시의 참 뜻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디모데 후서 3:16에 의하면 "모든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를 위에서 설명했지만, 다시 간단히 단계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네 단계로 감동을 주셨다고 생각된다.
(1) 하나님은 우선 역사 속에 특수한 사건들을 일으키셨다. 아브라함의 사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정복 사건,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 등을 역사의 무대 위에 일으키셨고,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휘하시고 간섭하셔서, 당신의 뜻을 그 사건들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이다. 역사 속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든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그의 장중에 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리요마는, 그것들은 보통 역사에 불과하고, 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도하고, 간섭하고, 지휘하셔서 일으키신 사건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서 일어나고 벌어진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그 특별 계시의 사건들이 일어날 때 그 사건들 속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감동하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들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즉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건들이 평범한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사건은, 한 개인의 단순한 이주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한 사건은 하나의 영웅담이요, 이스라엘 민족사의 한 토막일 수 있다. 예수 사건도 보통 사람의 눈에는 유대 민족의 하나의 종교적 이단자의 괴기한 이야기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그 사건들을 바로 해석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사람의 눈에는 그 사건들이 엄청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보였다. 소위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 위에 일으키신 특수한 사건들을 바로 보고, 바로 해석하여 그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그것을 그 시대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감된 역사 해석을 들으면서 살았다. 초대 교회의 상황도 그와 같았다. 즉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예수 사건을 해석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 그가 바로 인간을 위하여 대속적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영감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해석을 먹고 자란 것이 교회이다. 그러니까 둘째 달계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들을 영감에 의해서 해석하는 단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영감된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해 졌다. 얼마 후에는 그 구전들을 단편적으로 문서화하는 단계가 왔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좀더 계통 있고 체계가 있는 글로 적어야 하는 단계가 왔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리고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조리있게 책으로 엮었다. 과거의 구전과 단편 자료들과 영감을 통한 계시를 엮어서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가 그 글들을 읽으면서 자라난 것이다. 이렇게 셋째 단계에서는 성서에 수록된 많은 책들이 기록되는 과정에 하나님의 감동이 그 저자들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4)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글을 썼고, 그 글들이 많이 유포되었지만, 그 중에는 어느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인되어 회당이나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할 책들이 배쳑을 받아 목록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긴 역사 가운데 성령의 감동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가 결정되고, 정경이 낙착되기에 이르렀다. 기원후 397년 카르타고에서 정경이 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정경 형성의 긴 과정에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됐다는 말은 적어도 앞에서 말한 그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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