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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의 형성사

성경의 형성사 #3 신약성서의 형성

 

 

신약성서의 형성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책들이 오래고 또 복잡한 역사를 통해서 집성되어 이루어졌다.
신약성서 역시 고스란히 하늘에서 기록되어 사람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고 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불러 주어 기록하게 하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본래 신약성서를 가지지 않았고, 아니 그것이 아직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의 계시에 뒤이어 "마지막 때에 아드님을 통하여"(히 1:2)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최종적이고 가장 효과적이며 또 가장 거창한 사건을 역사 속에 일으키셨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이 계시는 놀라운 사건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요, 말씀이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셨던대로 메시야가 나타나 땅에서 33년 동안 사시며 선한 일과 놀라운 일을 하시고, 마침내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사건이 역사 속에 일어났다.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뿐 아니라, 그 사건의 부분 부분이 하나도 남김 없이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곧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쁜 소식'(눅 2:10) 이었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들려 주시고 보내 주시는 복음이었다.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갊은 인간과 상관이 없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고, 그의 삶은 하나에서 백까지 절대적으로 우리 인간의 운명과 관계를 가진 것이었고, 우리를 그 비참한 운명에서 건져 주시기 위한 유일회적 사건이기에 그 사건이 그렇게도 귀한 것이며, '가장 큰'이란 최상급 형용사를 가지고도 그 기쁨의 크기를 형용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 먼저 있은 후 하나님은 그의 '영'을 보내셨다.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일러 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 16:13). 보혜사 성경이 사도들과 초대 교회에 강림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사건은 올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되었다. 성령의 운동으로 인해서 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고 확장되었다.

초대교회는 그들 자신의 책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었고 구약성서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예수님이 유대인이고 그의 제자들이 모두 유대인이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초대 교회가 유대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성서가 그들의 성서일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계속 가지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과 부활이 주는 감격스러운 의미에 도취되고, 성령의 감동과 지도를 받으면서 교회는 성장해 갔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교회가 오랫동안 구약성서만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었으며, 그러다가 어째서 신약성서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또 그리스도인들이 쓴 많은 책들 중에 유독 27권만이 신약성서에 포함되고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채택되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책을 쓰신 일이 없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런 일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신약 정경이 생기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가 생겼고 그리스도교의 경전이 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1세기 교회는 신약 정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초대 교회의 생활 형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정경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성서는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되는 정경이었다(물론 기원 후 90년경에야 비로소 얌니아에서 구약의 39권이 정식으로 채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 다른 성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고 하나님의 활동과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찾아낼 수 있었다. 구약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서 실현되고 성취된 것을 그들은 발견하였다. 따라서 구약성서에 대한 그들의 감격과 신뢰감이 더욱 두터워 갔을 뿐, 무엇이 모자란다는 느낌은 전혀 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인해서 생겨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유대인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문자 그대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건에 관련되거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약성서에 그리스도의 사건을 더해서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약성서는 이미 문서화한 성서였지만 그리스도의 사건은 생생한 산 역사였다.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신자들도 많았을 것이고, 적어도 그 목격자들의 생생한 보고와 증언을 들으며 거기에 도취되고 감격하여 황홀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미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가 확실히 살아 계셔서 그들 속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만큼 그에 대한 기억은 새롭고, 감격은 벅찬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 대해 기록할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구약의 약속과 예언을 가졌고 그것의 성취인 그리스도의 사건을 목도하고 혹은 증언을 듣고 기뻐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3)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구두로 전해져서 복음이 완전히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도들과 일부 제한된 사람들만이 목격한 예수님의 처형, 부활, 승천 등 예수님의 생애의 말기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이 우선 필요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건에 대한 사도들의 해석이 또한 불가결한 요소였다. 신약성서의 계시가 단순히 예수님의 사건 그 자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생애에 대한 사도들의 필요한 해석에서도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사도들의 주요한 해석이 신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이 문서화되어 신약성서가 형성되기 앞서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구두 증언과 사색의 시기가 얼마 동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볼 때 기이하고 강탄할 만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을 가졌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 자연히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누구이며, 그는 왜 태어났으며, 그의 기적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한 통일된 해석이 우선 요구되었다. 이러한 일은 먼저 사도들이 곳곳에서 구두로 전도하며 예수를 증거하는 가운데 자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신약성서의 문서화 이전에 복음 사건에 대한 해석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4) 신약 정경이 곧 나타나지 않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사도 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졌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산 역사를 목격한 그리스도인들은 새 질서가 싹트기 시작한 것을 실감하였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새 세계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긴 앞날을 계획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요구될 뿐이었다. 문서로된 정경이 있어야겠다는 요구가 생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수정되고, 급박한 하나님 나라 실현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영구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 운동 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5) 게다가 오순절에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고 보니,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적 분위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말일에 내가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라"(욜 2:28-32)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고 믿는 신도들로서는 자신들이 이미 종말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놀라운 효과를 실제로 거두고 있던 그들은 어떤 새로운 성서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바로 해석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담력을 얻고,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실상 구약성서나 어떤 신약 문헌에 의존하였다기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인쇄술이 발명되지 못한 그 시대에는 특수한 사정 이외에는 글을 써서 남겨 둔다는 것이 극히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습관도 아니었다. 대개 파피루스를 사용했지만 그것도 아주 진귀하고 비싼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손쉽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관습은 모든 것을 구두로 전승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랍비들은 글쓰기를 싫어했고 수세기를 내려 오면서 구두로 율법을 전수해 주었다. 구전 법률이 문서화한 것은 기원 후 8세기의 일이었으니, 그 많은 내용이(영어 번역으로 약 800페이지나 되는 소위 '미쉬나'라는 책) 수백 년 동안 구두로 전달된 셈이다. 이러한 풍속이 초대 교회에도 있었을 터이니까 특별한 이유와 필요성이 없이는 신약문헌이 생겨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구두전승의 신빙성

 

그리스도교 복음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적어도 30년 이상 흘렀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도 그 저술 연대를 기원후 60년 이전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고 보면, 구전 시대가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에 복음의 내용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전해지면서 어떤 면으로든지 변질되거나, 확대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 30년 후에 그것들을 문서화했다면 우리가 그 문서화된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복음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로의 복음 사화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사라고 단정할 수 있는 두어 가지 근거가 있다.

(1) 옛날 사람의 기억력이 현대인의 기억력과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산적한 인쇄물 때문에 기억력을 많이 상실하여싿. 우리는 어느 때든지 필요할 때 책을 참고하고 요구되는 지식을 얻어 적당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구태여 머리 속에 기억해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에는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싶으면 불가불 머리 속에 기억해 두는 길밖에 없었다. 또 책값이 비싸고 책을 만드는 일이 어려운 것이어서, 보통 사람이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무엇이든지 기억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옛날에는 학문의 양도 오늘날보다는 훨씬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여 옛 사람들처럼 한 가지에 몰두하여 기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옛날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수많은 가족의 생일을 기억하시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옛 삼들은 사서삼경을 다 암송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 특히 랍비들은 성서를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대에는 한 번 들은 것을 잊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우리들보다 훨씬 적었다고 볼 수 있다.

(2)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에 대한 모든 것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계속해서 설교하던 자료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설교할 때마다 사용되니까 자연히 자그마한 탈선적 표현도 곧 지적되고 공격을 받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특히 교회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최대의 권위를 두고 있었던 터이므로 교회의 공통적 기억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해설은 당장에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기억에 근거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회중의 공동 기억을 토대로 하여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 사화는 어떤 개인들의 기억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억, 즉 초대 교회의 공동 기억에 근거하였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오랜 구전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그러한 공동 기억의 제지와 감시를 받으면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의 장난에 의해서 변하거나, 조작되거나, 왜곡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해석의 자유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다. 복음 사화의 기본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그들의 신앙과 소견을 좇아 그리고 독자들의 형편을 참작하여 적절한 해석을 붙인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은 아주 초기로부터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어 거의 변함없이 구전 시대를 통과했다고 생각된다.

 

 

 

 

구전 시대의 종결과 신약 문서의 형성 개시

 

(1) 역사는 흐르게 마련이다. 사도들과 예수 사건의 목격자들이 영구히 살아 있을 도리는 없었다. 기원후 70년경에는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죽어버렸고 따라서 그들의 생생한 증언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구전 시대는 불가불 끝날 수밖에 없었다. 구전 방법을 대용할 수 있는 방법은 글로 써서 전하는 것밖에 없었다. 사도들이 살아서 직접 증거하던 것을 이제는 글로 적어서 문서로 증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복음서 기록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마태는 히브리인들에게 전도하다가 그들을 떠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러 가려고 할 때 그의 복음을 기록하여 "그 자신이 거기에 있지 못하는 손실을 보상하였다"('교회사' 3. 24. 5). 또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 메드로와 바울이 죽은 후에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자이던 마가는 베드로가 설교한 것을 글로 써서 우리에게 주었다. 바울의 추종자이던 누가도 바울이 설교하던 복음을 책에 기록하였다"(Against Heresies 3. 1. 1, 2). 제롬의 말에 의하면 요한이 죽기 바로 전에 다행히도 급히 서둘러서 그의 복음서를 완료하였다고 한다(The Prologue to the Four Gospels).

 

물론 이런 진술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신빙성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문서화했다는 것이 그 큰 전도자들의 사별을 보상하기 위한 사도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들의 살아있는 음성이 사라지자 그것을 보충, 대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문서로 된 복음서들이었다.

 

(2) 그리스도교가 발전함에 따라서 팔레스틴의 지경을 넘어, 헬라와 로마 사회로 번져가게 되었다. 그런 지방은 유대 지방과 달라서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여 팔고 사는 일이 성행하는 사회였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문화적 세계로 확대되어 나갈 때 기록된 문서의 가치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자연히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로마에서 저술되고 발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라면,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초대 교회의 선교 운동이 급속히 전개되어 갈 때 기록된 말씀의 가치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교가 요원의 불길처럼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어 갈 때, 조급한 심정으로 땅 끝까지 가서 증거하려는 선교사와 전도자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었다. 교회가 독립할 만큼 뿌리가 박히기만 하면 곧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야 하고, 또 박해로 인해서 부득이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글로 적어서 남겨두는 일이었을 것이다. 혹은 어떤 사정으로 전도자들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문서로 된 복음을 전해줌으로써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 내용의 문서화는 선교 과정에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본다.

 

(4)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긴장된 생활을 하던 초대 교회는 이미 수십 년이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생각을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막연한 가운데서, 그들은 우선 현실적 문제에 주목하고 관심하게 되었다. 재림 신앙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 신앙 때문에 소홀히 하던 장래의 교회 문제에도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열렬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구전적 복음 내용만으로 만족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앞으로 오는 교회를 위하여 문서로 된 말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재림의 희망이 먼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교회 생활과 사업에 기록된 말씀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산 사람은 말을 하게 마련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활동하며 의견을 발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단이나 탈선적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활발한 교회였다. 따라서 복음 전파에 열광적이었고 또 반면에 복음을 오해하고, 곡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사로운 계시를 주창하고, 자기들 나름의 복음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제롬은 누가복음서의 서론에 관해서 말하기를 누가는 "너무 서둘러서 글을 쓴 자들을 정정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지적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좇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영을 좇는 거짓 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짓 복음들과 왜곡된 신학과 비윤리적 윤리를 판단하고 가려내기 위해서 표준적이고도 공적인 문서 복음이 필요하게 되었다.

 

(6) 교회는 또한 호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문서가 필요하였다. 첫째, 우선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아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필요하였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약 예언의 성취하였음을 보여 줄 수 있는 기록이 있어야만 했다. 마태복음서는 특별히 이러한 목적에서 기록된 문헌이라고 본다. 마태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주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한 것이다'라는 말은 구약성서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려는 목적으로 그 복음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둘째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선 로마 정부나 로마인들에게 대해서 예수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건전하고 유익한 종교라는 것과 또 예수는 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은 혁명 분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시네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문서화할 필요가 있었다. 즉, 정부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서 문서화한 복음서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또한 어떤 개인이 박해를 받을 때 그가 예수님의 수난 기사를 읽는다든가 예수님의 예고의 말씀과 그의 임재의 위로를 약속한 말씀을 읽음으로써 격려를 받으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도자들이 이교 사회에서 전도할 때, 전혀 사상이 다르고 이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상 전달의 방법으로서 그 사회가 쓰는 개념과 어휘와 사고방식을 매개로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예컨대 제 4복음서의 서론이 교양 있는 헬라인들을 상대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 복음서 기자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전도를 시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문서를 읽는 당시 헬라 사람들은 좀더 쉽게 복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전도자들은 이런 문서를 이용하여 좀더 효과적인 전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7)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겪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럴 때마다 예수님의 적절한 말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해결책이 없었다.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실은 기록이 있어서 거기서 말씀을 인용할 수 있다면 그 말씀의 권위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교회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고 표준을 찾기 위해서 문서화한 복음들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8) 초대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물론 유대 사회에서 생겨난 교회는 가장 중요한 교훈까지라도 관습상 구전으로 전승하였지만 일단 교회가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발전하였을 때에는 그 사회의 관습을 따라 예수님의 고귀한 생애와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록에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고정적으로 보관하는 최선의 길은 글로 적어 두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가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잃어서는 안 뒬 것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문서화될 수밖에 없었다.

 

(9)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계약을 맺은 관계에 있었다. 그 계약 유지의 기본 조건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편에서 은혜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계약을 맺을 때에는 반드시 율법을 기록한 책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곧 율법 책이요, 넓게 말해서 구약성서이기도 하다. 이렇게 낡은 계약이 책을 필요로 한 것처럼 새 계약도 책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낡은 계약이 구약 책을 가졌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맺은 새 계약은 새 계약 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 계약 시대에 신약성서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0) 초대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아주 활발한 교회였다. 성령으로 예언하는 자도 많았고 방언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일이 정도를 넘을 때 탈선적 행동이 나타나고 오히려 교회에 손해를 가져오는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의를 준 일까지 있었다(고전 12-14장, 살전 5:19-21). 실상 어느 것이 정말 성령의 감동으로 나오는 발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안정한 구두 발언보다는 좀더 신빙할 만하고 감정된, 성문화한 복음서가 요구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표준으로 하고 시도들의 예언 활동이나 방언 활동들을 판단하고 규제하려는 것이었다.

 

(11) 신약 문헌의 대부분은 어떤 개체 교회 혹은 교회의 작은 단체를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이 편지들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생활의 여러 가지 위기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참 좋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사실 바울 자신도 이 편지들이 그 지정된 한 교회뿐 아니라 더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은 골로새서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읽혀지고, 라오디게아를 통하여 오는 편지를 골로새에서 읽으라고 명령한 것을 볼 수 있다(골 4:16). 이렇게 성문화된 문헌들이 광범위하게 세력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다는 실제 경험은 더 많은 문헌을 생기게 하는 동기가 되었고, 마침내는 그 문헌들이 수집되고 또는 널리 반포되어 결국 정경에 포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복음의 형식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를 보면서 구전 시대에도 그와 같은 형태로 전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구전 시대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단편적인 이야기로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도가 어느 곳에서 전도 설교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의 생애의 그 많은 내용과 교훈을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엮어 내려갈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제목을 정했을 때 거기에 부합되는 몇 가지 이야기와 교훈을 끌어다가 예증을 삼았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또 다른 이야기와 교훈을 이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동안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토막 토막의 이야기와 교훈은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다. 근자의 신약학자들은 이렇게 고정된 이야기들과 교훈 자료들을 몇 가지 형식으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1) 첫째 형식을 범례 혹은 경구, 또는 선언적 이야기라고 한다. 이 형식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오로지 그 이야기들이 내포하고 있고 또 목표하고 나가는 어떤 고귀한 격언(말씀)을 위해서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격언이 전적으로 중요성을 가졌고, 격언이 담긴 사건은 그 보옥 같은 격언(말씀)에 대한 배경이나 틀에 블과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먹은 이야기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간직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막 2:23-28). 세리 마태를 부르신 이야기는 오로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다"라는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마 9:9-13). 세금을 바치는 이야기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전수하려고 존재한다는 것이다(막 12:13-17). 이렇게 예수님의 몇 가지 중요한 격언적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토막 교훈들이 복음서에 산재해 있다고 본다.

 

(2) 둘째 형식은 설화 또는 이야기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가 자연이나 사람에 대해서 기적적 능력을 구사하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이야기들이다. 그것들은 예수님의 어떤 격언적 말씀을 간직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고, 어떤 뜻있는 사건 그 자체를 기억케 하기 위해서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유형은 거의 예외 없이 똑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다. 먼저 병의 내력을 진술하고 나서 그 병을 고치는 이야기가 나오며, 끝으로 그 치유의 결과를 말한다. 연못가에서 전신불수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요 5:1-9),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이야기(요 9:1-7),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5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막 6:32-44) 등이 다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은 예수가 하신 말씀보다도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있는 것들이다.

 

(3) 셋째는 교설이라는 형식이다. 이것들은 어떤 전후 관계가 없이 독립적으로 보존된 예수님의 말씀들이다. 그리고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것의 가장 좋은 실례는 산상수훈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경구적이고 기억하기에 매우 쉬운 것이어서 어떤 전후 관계라든가 이야기 같은 것을 배경으로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단독적으로 있거나 연관된 다른 말씀들과 함께 나란히 수집되어 있을 뿐이다.

 

(4) 다음은 성전이란 형식이다. 이것은 어떤 성인이나 성소와 관련된 비상한 사건들에 대해서 교훈할 목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들을 말한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좋은 실례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아 시적의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비상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비상한 인물이 언제나 거기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5) 다섯째는 신화라는 형식이다. 신화는 곧 사람의 언어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진술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그림으로써 진술하려고 한 이야기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이야기, 변화산의 사건, 예수께서 시험당하신 사건들은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이야기들이다.

학자들은 이상과 같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을 여러 형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으로 초대 교회에 유포되고 고정되어 있던 것이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자료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실제적 출현

 

일단 구전 시대가 지나고 문서 운동이 시작되자, 그리스도교 문헌이 우후죽순 격으로 사방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누가는 자기보다 먼저 복음 사건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눅 1:1). 제롬은 그의 4복음서 서론에서 다른 많은 복음서들을 언급하였다. 애굽인의 복음, 도마 복음, 맛디아 복음, 바돌로매 복음, 12사도의 복음, 바실리데스 복음, 아벨레스 복음 등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복음서들을 일일이 다 말하자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라고 하였고, 그것들이 대개는 위험하고 이단적인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행전도 여러 가지가 나타났다. 도마 행전, 안드레 행전, 빌립 행전, 베드로 행전, 요한 행전, 바울 행전, 데클라 행전 등이다. 요한 계시록 외에도 베드로의 계시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문서들 중에서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어떤 교회에서 성서로 수락되어 사용되었던 것이 적지 않게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전체 교회가 다 같이 수락했던 것은 아니다. 그 실례로는 12사도의 교훈, 클레멘트의 제 1로마서, 바나바서, 헤르마스의 목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문서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림을 받았을까? 어째서 어떤 것은 아주 자취를 감추고 또 어떤 것은 사사롭게나마 읽을 수 있도록 용납되거나 추천을 받았을까? 그리고 어째서 어떤 것은 마침내 완전히 신약성서에 끼어들 수 있게 되었을까?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어떤 책에 권위와 명성을 부여하고 마침내 성서로 채택되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은 오직 한 가지 조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 낭독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보통 문서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별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서 낭독된다는 것과, 그것이 정경이 된다는 것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책을 공중 예배에서 읽어야 하는가를 누가 결정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는 성령의 사람들이 있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교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면 사람들은 그 결정에 복종해야만 했다. 그들은 신앙 생활을 감시하는 보초명이요 파수꾼들이어서, 무엇이든지 신앙을 해치거나 왜곡하거나 사람의 마음과 사상을 바른 길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있으면 재빨리 발견하여 경고했다. 그러므로 어떤 문서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승인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요, 또 권리이기도 하였다. 교회 예배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읽지 말아야 할는지 결정하는 것은 이와 같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의 사람들의 일이었다.

이렇게 어떤 개인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리를 바로 판단해 주는 일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회집할 때, 그리고 특히 교회가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언제나 성령의 감화 아래서 모이고 행동하고 결정한다는 의식을 깊이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을 책벌하는 일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때, "나로 말하면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으니, 실제로 여러분과 같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한 사람을 벌써 심판해 버렸습니다"(고전 5:3)라고 말했다. 클레멘트는 고린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우리가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클레멘트 1서 59)고 했으며,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말하고 또는 씁니다"(63)고 덧붙였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이 선포될 때 '성령과 우리가 결정하였다'(행 15:28)고 하는 말을 첨가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체의 공중 예배에 어떤 책을 사용할 것인지, 또 어떤 책을 인정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어떤 책이 교회에 의해서 승인되는 것은 자연히 그 책을 마침내 성서로서 채택하게 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령의 사람과 성령 감동하의 교회가 어떤 책을 취사 선택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표준으로 하고 책들을 판단하였을 것인가? 아무런 척도나 표준이 없이 제 멋대로 판단 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표준은 두말할 것 없이 그 책이 사도적 권위를 가졌는가 아닌가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어떤 사도의 저술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사도들과 직접 접촉하던 사람이 쓴 글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적 권위의 정당성

 

초대 교회가 사도적 저작권을 정경 선정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1) 우선 교회에서 사도들은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 사상에서, 보냄을 받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낸 자와 동등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예수님이 보내신 사도들은 곧 예수님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곧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말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예수님의 최고 대표자들이요,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최고의 기관이요, 그의 목적의 해석자로서 응당 존경을 받을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내게 주신 왕권을 너희에게 준다"(눅 22:29)라고 말씀하셨고,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0:40)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위 있게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그리스도교는 사실의 종교다. 하나님께서 역사적 정황 속에 들어오셨다는 사실 위에 세워진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이 사실이 참이냐 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이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많은 이단 종파들이 일어나서 자기들은 그들 나름의 계시를 가지고 있노라고 주장했다. 바실리데스라는 사람은 베드로의 통역이었다고 하는 글라우키아스로부터 특별한 정보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발렌티누스는 그의 그리스도교가, 바울의 친구였다고 하는 테오다스를 통해서 왔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가 친히 몇몇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사사로운 계시에서 자기들의 고유한 교훈을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교 이단들의 주장은 제쳐두고, 이방 세계에서도 신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신비 종교가 모두 그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방 신화에도 그런 것이 가득하다. 여기서 자연히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 예수도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다른 신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단 말인가? 예수가 단지 일개 신화의 중심 인물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사실적인 인물로서 그에 대하여 말하는 사건들이 정말 참으로 생겼던 일들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는 일밖에 없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도들뿐이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이 곧 사도들이었기에, 그들의 증언과 그들의 글은 권위를 가지기 마땅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어떤 책을 판별할 때 그것이 사도의 글이냐 아니냐 하는 표준을 가지고 했다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고, 또 옳은 일이었다. 터툴리안이 복음서들을 설명할 때도 이런 표준을 가지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이미 그 명칭에 사도의 이름이 붙어 있기 때문에 사도적 저작권 문제에 걸리지 않고 무난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어떤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마가가 편찬한 것은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이었으므로 베드로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누가의 기록에 대해서는 그것을 바울에게 돌리는 것이 사람들의 습관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수락하는 것은 사도였던 사람들과 직접 사귄 사람들이 썼다는 데서 그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 신약성서 정경에 들게 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우선 그것이 기록되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기록된 책이 교회에서 널리 읽혀졌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리에 유용한 것으로 인정되고 수락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낭독될 수 있는 것이 되고, 다음에는 어떤 지방에서만 아니라 온 교회가 채택하고 수락해야만 한다. 끝으로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아야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신약성서가 집성되는 과정을 좀더 상세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바울 서신의 집성

 

신약문서들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것들이 바울 서신이고 또 제일 먼저 한 책으로 수집된 것도 바울 서신들이었다. 기원후 100년경에는 이미 바울 서신들이 한 책으로 수집되어 널리 알려졌고, 또 수납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어째서 바울의 편지들이 수집되고 모든 교회의 공동적 소유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기이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거의 모든 경우에 어떤 지방의 잠정적 형편을 다루어 취급하면서 글을 썼다. 무지하고 위험한 이단 사상들이 대두하거나, 실제적인 문제들이 일어나 어떤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경우가 생길 때, 바울은 직접 찾아가서 그 모든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 줄 길이 없어,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과 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실제 문제에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또는 교회의 화평과 통일을 유지하게 하려고 편지를 써 보낸 것이었다.

바울의 편지들은 어떤 서재나 도서관에서 조용히 앉아 연구하여 작성한 신학 논문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특정 시간에 어떤 특정 교회가 당면한 정황을 취급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들이었다.

 

다이스만이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기존의 유대인 서한들에다 몇 개의 새로운 글을 첨가하려는 따위 생각은 전혀 없었고, 자기 나라의 거룩한 문학(성서)을 보충하겠다는 생각은 더구나 없었다. ... 그의 말이 세계 역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예감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다음 세대에까지 그것이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도 없었을 것이며, 앞으로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성서라고 하여 우러러보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편지를 쓰다가 자기가 사람 이상의 존재가 아닌 것을 독자들에게 특별히 상기시키는 때가 종종 있었다. 로마인에게 글을 쓰면서 "나는 인간적 방법으로 말합니다"(롬 3:5)라고 하였고, 고맂도인에게는 "처녀들에게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명령이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려 합니다"(고전 7:25)라고 하였으며, 또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주의 지시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처럼 자기 자랑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고후 11:17)라고 밝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만일 우리에게 사도행전밖에 없었더라면, 바울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울을 숭배하며 따라다니던 누가가 사도행전 13장 이하에서 바울의 전기를 전적으로 썼지만, 바울이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바울 자신도 자기의 편지들이 정말 모든 사람에게 읽혀질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데살로니가로 편지를 써 보내면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이 편지를 모든 형제들에게 읽어 주시오"라고 간곡히 부탁을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의 편지 중에 더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없어진 것도 있다. 고린도 교회로 간 편지 중에 적어도 한두 개는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들이 한 책으로 모아지고 온 교회의 귀중한 소유물이 되어 마침내 성서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자연적으로 수집되었다는 설이다. 어떤 교회가 바울에게서 온 편지를 간직하고 애독한다. 그 이웃 교회도 역시 바울의 편지를 받았고 또 그 사실이 첫째 교회에 알려진다. 그러면 그 이웃 교회가 서로 편지의 사본을 청하여 가진다. 이런 방식으로 점점 편지가 수집되어 나간다. 장소에 따라 각 교회가 얻을 수 있는 편지의 수효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지만, 1세기 말에 가서는 바울의 서신이 모두 한 책으로 수집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 후 90년에 생긴 글에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참고한 흔적이 전혀 없는데 90년 이후의 글에는 바울의 편지가 많이 인용되고 그것을 익숙히 알고 있다는 증거가 뚜렷이 나타나 있는데, 위의 학설은 이러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즉 기원후 90년 이전에 기록된 공관복음서에나 심지어 바울의 제자인 누가의 복음서에서도 바울의 언어나 사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90년 이후에 기록됐다고 보는 제4 복음서,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요산 서신 증에는 바울의 사상과 언어에 친숙하다는 증거가 다분히 들어 있다. 어째서 기원후 60년에서 90년 사이에는 바울의 편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근래에 와서 미국의 굿스피드와 존 녹스, 영국의 미튼이 새로운 학설을 내세웠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바울의 편지들은 오랫동안 망각된 상태에 있었고, 교회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거나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의 문서 창고에 처박혀 먼지 묻은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한 세대는 바울을 모르고 지낸 시대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원후 80년에서 90년 사이에 사도행전이 기록, 발표되는 일로 인해서, 그동안 거의 망각되어 있던 바울의 모습이 돌연 교회에서 각광을 받게 되고, 초대 교회에서 누구보다도 영웅적이고 거인적인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비범한 인물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지 즉각적으로 귀중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의 유물이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수집하려고 애썼다. 그가 쓴 것은 남김없이 이를 되찾아 연구하고 존중히 여겼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이 발표됨을 계기로 바울의 편지들이 수집되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이 매우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단정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쨌든 기원 후 90년 이후로는 갑작스럽게 그리스도교 사회에 많은 편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계시록은 일곱 교회로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어째서 일련의 편지를 가지고 한 책의 서두로 삼게 되었을까? 어째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로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한 곳에 모아 놓았을까? 이것은 혹시 당시에 편지를 모아 한 책으로 묶어 발표하는 전례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서신 등을 볼 때, 그것들은 정말 편지라고 하기보다는 편지 형식을 가진 논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결국 당시에 편지를 써 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클레멘트가 고린도로 가는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고, 폴리캅이 이그나시우스의 일곱 편지를 모아 발행한 것이 같은 시대의 일이다. 이와 같이 기원후 90년을 넘어서면서 편지 쓰는 일이 전염병처럼 유행한 것이 사실이다.

 

 

 

 

바울 서신 집성의 장소와 책임자

 

바울 서신 집성의 장소는 아무래도 에베소인 것 같다. 바울이 자유로운 몸으로 전도하던 시절에 에베소만큼 오랫동안 체류한 것은 없었다. 거기에서 3년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전도하였다. 일곱 편지를 실은 계시록이 에베소에서 발표되었으며, 바울 사상의 감염을 받았다고 보이는 요한 서신들이 역시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 이그나시우스의 편지가 집성된 곳도 소아시아였다. 이런 여러 가지 면으로 보아서 에베소야말로 바울의 편지들이 집성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고 생각된다.다시 말해서 바울의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고장이 에베소이고 보면, 그에 대한 관심도 에베소가 제일 컸으리라고 생각된다는 말이다. 굿스피드와 미튼 같은 학자는 에베소서를 바울의 글로 보지 않고 바울의 제자가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의 여러 편지와 특히 골로새서에서 감화를 받은 바울의 제자가 바울 서신을 모아놓고 거기에 대한 머리말과 서론격으로 쓴 글이 곧 에베소서라고 말한다. 이 학설의 옳고 그름은 단언할 사람이 없다. 다만 바울 서신들이 집성되어 발간된 것이 사도행전 출판에 뒤이어, 즉 기원후 90년경에 에베소에서 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는 것뿐이다.

 

그러면 이 뜻있는 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겠느냐 하는 질문이 아직 미결로 남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확답을 얻을 만한 역사적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또 다시 상상의 영역에서 추리해 볼 뿐이다. 여기에서도 굿스피드와 존 녹스의 설이 아주 매력적이다.

바울 서신집 중에서 일반 서신들과 아주 다른 것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빌레몬서이다. 그것은 매우 짧은 개인적 편지인데, 제롬 같은 사람은 이것이 성서에 끼어든 것을 수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이상하게 여겨지는 서신이 그 서신집에 들어 있는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존 녹스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빌레몬서가 그 서한집 속에 끼게 된 것이 파격적이면 파격적일수록, 그것이 실제로 포함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빌레몬서가 부적당하게 보인다는 그 사실 자체가 바로 그 원 편집자에게는 아주 좋은 이유가 있어서 그것을 포함시켰을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우리가 만일 그 이유를 안다면 바울의 편지들을 출판한 데 대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알게 될 것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일반 편지들과는 아주 다른 그 자그마한 편지를 그 서한집에 포함시킨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빌레몬서는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한 종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 보내면서 쓴 편지이다. 객지에서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있으면서 바울에게 아주 친근하고 유용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이러한 청을 하였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머물러 있게 하여 복음을 위하여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당신을 대신해서 나를 섬기도록 하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몬 1:13,14). 이런 편지를 받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바울에게 돌려보내어 그를 돕고 시중들게 했을는지 모른다. 가령 그랬다면 오네시모는 바울의 오른팔처럼 일하고, 그에게 불가결의 존재였을 수밖에 없다.

그때로부터 약 50년이 경과한 후, 그러니까 오네시모가 50년 뒤에도 살아 있었다면 퍽 나이가 많았을 때일 것이다. 이그나시우스가 투기장에서 짐승들과 싸우기 위해 로마로 끌려가면서 에베소 교회로 편지를 하였는데, 그 내용에 에베소 감독을 가리켜 "형언할 수 없으리 만큼 자애스러운 사람, 곧 여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의 너희의 감독"이라고 하였다. 그 감독의 이름이 오네시모였다. 즉 바울 서한집이 에베소에서 생기던 때의 감독인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종이던 오네시모가 같은 사람이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면, 이런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이 나타남으로써 바울의 모습이 충분히 교회에 드러나고, 따라서 그 위대한 인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보관해야 하겠다는 각성이 생겼을 때, 에베소의 오네시모는 자기가 사랑하고 또 자기를 사랑해주던 상전 곧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 서한집에다가 오네시모는 집짓 빌레몬서를 포함시켰다. 그 이유는 그 편지가 자기를 가리켜 도둑질하고 달아났던 노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오네시모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보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자, 보라"고 하는 듯이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의 기록을 고의적으로 그 서한집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이와 같이 하셨으니 너희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물론 한낱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그럴 듯하고 또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고 싶다.

 

이 둘째 설의 난점은 바울의 편지들이 어째서 30년 동안이나 그 수신지 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럴 수가 없었겠다고 보여진다. 바울 자신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자기 편지를 서로 교환하여 읽으라고까지 권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골 4:16). 그러므로 자연히 그러한 교환이 계속되고 점점 다른 교회에까지도 번져 나갔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미국 침례교 학자 다나는 바울의 사망이 그의 서신 수집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바울이 죽었으니 이제는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편지라도 모아서 읽으면 그의 산 음성을 듣는 대용이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사망이 동기가 되어 다시 바울의 글을 읽게 되고, 그것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종합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소규모로 진행되어 오고 그의 사망으로 인해서 자극을 받아 좀 더 활발하게 전개된 서한 수집 작업이 사도행전 발행 후에 한층 더 본격화하여 종결을 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어떨까? 이렇게 한 책으로 수집됨으로써 마침내 정경으로 채택되는 결과에 좀 더 가깝게 나아간 것이 사실이다.

 

 

 

 

복음서의 형성과 집성

 

죄로 인해 죽을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문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사건 자체가 복음이었고 그에 대한 가르침이 곧 복음이었다. 이 복음은 우선 구두로 전달 되었고,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직접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전 시대는 지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들이 대번에 기록되어 나타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이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에 예수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문헌자료 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현재 학자들이 이름 붙인 Q자료 같은 것이 있어서 마태나 누가가 자기들의 복음서를 쓸 때 자료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 말 Quell의 첫 글자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의 자료이다. 그러나 그 개연성은 아주 짙다. Q외에 Testimonia(증빙서)라고 해서, 예수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가 그의 복음서 서두에 암시한 것처럼, 크고 작은 많은 복음서들이 유포되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는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않았으므로, 자세히 상고하며 순서대로 잘 엮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난 4복음서가 기록된 후에도 많은 복음서들이 교계에 나돌아 도리어 교회에 혼잡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거짓 복음과 유해한 사이비 복음서들이 나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해서 4복음서만이 남아 승자의 관을 쓰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처음부터 4복음은 하나님의 진리와 그 영이 깃들인 책들이어서 정직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독자들에게는 무언중에 감화를 주고 따라서 영과 영이 통하는 중, 자연히 진정한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어느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복음서 자체가 지닌 그 진리성과 권위가 독자들을 압도하고 강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그렇지 못한 사이비 문서들은 자연히 도태당하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우리의 4복음서는 완전히 승리했고 거의 적수가 없었던 것 같다. 오리겐(182-250)은 4복음서만이 하늘 아래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의를 받지 않은 책들이라고 말하였고, 유세비우스는 4복음서를 가리켜 "거룩한 4권의 한 질의 복음"이라고 불렀다(교회사 3.25). 즉 어느 하나도 뺄 수 없는 네 권짜리 한 벌의 복음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기원후 200년 이전에 이미 4복음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였고, 교회의 기본 문서가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어째서 네 개의 복음을 그냥 가지고 있었을까? 그 수를 줄이거나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는가? 서로 약간씩 다른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곤란을 가져다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가 각각 다르다. 요한복음서는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예수 생애의 초기에 두었고, 반면에 다른 세 복음서는 그 말기에 두었다. 첫 세 복음서는 예수가 유월절 후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술하였는데, 요한복음서는 유월절 전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록했다. 예수님의 부활 설화도 복음서마다 차이점을 지닌다. 이런 것들을 아는 교회가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만들어 조화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을까? 기원후 180년경에 타시안이라는 사람이 소위 디아테사론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4복음서를 종합한 것이었다. 얼마 동안 이것이 매우 영향이 컸고, 4복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얼마 후에는 그 책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레니우스(125-200)는 디아테사론 같이 하나로 합성한 복음을 극력 반대하는 나머지 네 개의 복음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고 의당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사방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 네가지 바람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교회가 온 땅에 흩어져 있고 복음이 교회의 기둥과 기초이며 또 생기인 것처럼, 교회는 사방에서 불멸을 토하고 사람의 생명을 새롭게 불질러 주는 네 개의 기둥을 가져야 할 법하다. 그러므로 만물의 건축자 곧 그룹(천사)들을 타고 앉아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시는 말씀(로고스)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후에 네 개의 형상으로 그러면서도 한 영으로 묶여 있는 복음을 주신 것이 확실하다"(Irenaeus, Against Heresies 3. 11. 8). 이와 같이 교회는 서슴지 않고 네 복음을 그대로 간직하였고, 네 복음이 있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김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하나로 만들려는 운동을 배척하였다. 그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사도적 증언을 무엇보다도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들이 모두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 문서로서의 위치를 견지하여 온 것이다.

 

 

 

 

그 밖의 책의 수집

 

4복음서와 바울 서신 외에는 그만큼 일찍 어떤 종류의 집성체로든지 수집된 책들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사도행전은 신약 정경에 끼어들어 복음서와 서신을 연결하는 적절한 다리의 역할을 하게 되기 전까지 어떤 특수한 수집물 속에 있지 않았다. 물론 본래는 누가복음서와 자매 관계를 가진 책이었지만 누가복음서가 분리되어 4복음서가 따로 수집됨에 따라 사도행전은 외롭게 독립되고, 영구히 버려진 책과 같이 취급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사도행전은 예수의 생애와, 서신이 기록된 때 사이를 자연스레 연결해주는 책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완전히 분리된 책으로 취급을 받은 것 같다.

공동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었고 그 과정이 퍽 느렸다. 어쨌든 초기에는 그런 수집체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2세기 말까지도 베드로 전서와 요한 1서만이 보편적으로 수락되었으니 말이다.

계시록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다. 그렇게 높이 인정된 묵시서는 비단 요한 계시록만이 아니었다. 헤르마스의 목자와 베드로 계시록도 널리 사용되고, 상당히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1세기 때 그리스도인들은 묵시 문서들을 환영하였고, 미래에 대하여 빛을 던져 주는 여감 있는 글이라고 해서 수납하였다.

그러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이 묵시서들이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고 하는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몬타누스 파와 같은 그룹들이 과도하게 성령의 시대를 주장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제 멋대로 복음과 어긋나는 발언을 자행하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고, 터무니없는 묵시적 예고에다 중점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헤르마스의 목자라는 책은 로마서 16:14에 나타나는 허메 곧 바울의 제자가 쓴 책이라는 허황한 근거 때문에 일시 유포되고 사용되었지만, 오래지 않아서 버림을 받았다. 베드로 계시록은 베드로라는 이름 때문에 상당히 인기를 끌었지만, 교회의 전반적인 용납을 받지는 못하였다. 지금은 그것이 단편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의 광범한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일부의 반대를 받아왔다. 그리하여 그 책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상당히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도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말이 떠돌고 있다.

 

 

 

 

성서로서의 인정

 

초대 교회에 나타나 유포되던 많은 그리스도교 문서들 중에 이미 우리가 논한 4복음서나 바울 서신이나 사도행전 등, 국한된 책들만이 잡다한 유사 문서들을 물리치고 남달리 거룩하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렇데 된 것은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제 멋대로 어떤 책을 영감된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인정해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사도적 저작인 동시에,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증적인 품질이 독자에게 자연적으로 신언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책 그 자체가 지닌 거룩한 권위와 가치가 아니었다면,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해 준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책이 도태를 당하고 몇 권만이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곧 좋은 증거가 된다. 어떤 책이 사도적 권위를 가질 뿐 아니라, 먼저 채택된 다른 책들과 내용적으로 조화가 되는 것이어서, 교회가 일시적으로만 아니라 계속 그것을 수락하여 예배에 사용하게 될 때 마침내 성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좀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서이고 어느 책은 성서가 될 수 없는지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기원후 140년경에 시노페(Sinope)에서 온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사람이 로마 교회에 나타났다. 그는 부유한 선주로서, 사방에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며, 로마 교회에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Gnostic)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도들의 비밀 교훈과 심지어 예수님 자신의 비밀 교훈으로부터 직접 그들에게 전해진 특수하고도 내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온 우주를 이원적으로 보며, 영과 물질을 둘 다 영원한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요 완전히 선하시며, 반면에 물질은 본질적으로 모소디고 악하다고 보았다. 물질도 영원한 것이니 세계가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한 이 물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혀 선하시기 때문에 악한 물질을 직접 만지거나 취급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이온이라고 하는 존재들을 차례로 방출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아이온일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에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온일수록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을 적대시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마침내는 악한 물질에 손을 대고 만질 수 있어 결국 세상을 창조하기까지 한 아이온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창조의 아이온 데미우르고스(Demiurge)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자들은 창조의 하나님과 참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고, 서로 적대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죄, 슬픔, 고통, 악 등을 설명한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도 아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질이 악한 것일진대 예수는 절대로 실제적 신체를 가졌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육체의 모습만 가진 영적 환상 같은 것이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육체가 악한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육체를 부정하여 금욕주의로 떨어지든지, 육체는 상관이 없는 것이니 마음대로 먹고 마시자고 하는 방종에 빠지든지, 둘 중의 하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무지하고 적대적인 창조의 신을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한편 예수가 계시하신 신약의 하나님과는 아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서와 또는 그것과 관계된 것들을 모두 악한 하나님의 작품이요 또는 말이라고 해서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통례였다.

영지주의자인 마르시온은 구약성서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 나름의 성서 정경을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정경에서는 구약성서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구약성서가 율법, 예언, 성문서 이렇게 3부로 나뉘었던 것을 본따서 마르시온은 율법의 자리에 복음서를 두었다. 그는 마태, 마가, 요한의 3복음서가 너무 유대 사상의 냄새가 난다고 해서 집어치우고 제 멋대로 수정한 누가복음으로 대치하였다. 즉 구약성서 인용구들을 모두 누가복음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예언서의 자리에는 사도행전을 놓고 거기에다 바울 서신 열 편을 첨가하였다. 마르시온은 바울을 낡은 율법의 큰 원수요, 새 복음의 위대한 해석자로 간주하였다. 그가 첨가한 열 편의 바울 서신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라오디게아서(골 4:16을 근거로 해서 에베소서를 라오디게아서로 단정하였다),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이다. 셋째로, 성문서 대신에 자기의 자작인 "대구"라는 책을 넣았다. 그 책에는 구약성서의 구절들과 거기에 상반되는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대립 열거하였다.

 

이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일개 이단자가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바울의 위치였다. 마르시온은 바울을 거의 우상처럼 예배하였다. 그에게는 바울이 교회의 최고 인물이었다. 심지어 하늘나라에서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우편에 앉아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곧 약속된 보혜사이며,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약속한 그 위안자라고 주장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두 번 하늘에서 내려오셨는데 한 번은 고난을 받고 죽기 위해서요, 두 번째는 바울을 불러서 자기 죽음의 참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렇게 제멋대로 자기의 의견에 맞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왜곡 해석하였으며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이고 하였다.

 

이러한 형편을 당한 교회는 불가불 어떤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구약성서는 쓸데없는 것일까?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정말 제거되어야 할 책들인가? 누가복음을 그렇게 마구 손대어 가감할 수 있는 것일까? 사도가 아닌 사람이 아무나 자기 글을 성서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자연히 새로운 작업을 개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무슨 작없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거의 물적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무라토리(Muratori) 정경 목록이라고 하는 신약성서 목록이다. 즉 당시 교회가 마침내 신약성서의 목록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는 물적 증거를 그 목록에서 볼 수 있다. 이 목록이야말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도서관장인 L. H. 무라토리라는 사람이 Bobbio라는 수도원에서 나온 8세기 사본 Bibliotheca Ambrosiana에서 이 목록을 발견하여 1740년에 공표하였기 때문에 그 발견자 무라토리의 이름을 그목록에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목록은 로마에서 작성된 것으로 판명되어 있다.

이 목록은 처음 부분이 없어져서 실제로는 누가복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본래는 물론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모두 다 포함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목록에 나타난 책을 열거해 보면 아래와 같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고린도 전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전후, 로마, 빌레몬, 디도, 디모데 전후, 유다, 요한 1,2,서, 요한 계시록, 베드로 계시록이다. 이것이 기원후 17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 교회가 성서로 받던 책들이다. 그 목록에 들지 않은 책이 베드로 전후서, 야고보서, 요한 3서, 히브리서이다. 베드로 전서가 그 목록에 들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며, 나머지 책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어려운 투쟁을 거쳐서 정경으로 채택된 것이다.

 

어쨌든 마르시온 이단의 자극을 받은 교회는 신약 정경 형성에 거보를 내디디게 된 셈이다.

마르시온 이단은 성서에서 많은 것을 제거하려는 경향으로 나간 것이 특색이었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정경 확정 운동을 시작하였다고 본다면, 이제 또 다른 이단은, 성서에다 더 많은 것을 첨가하려는 경향으로 흘렀기 때문에 정경 형성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마침내 정경을 마감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2세기 중엽에 접어들자 열광적 시대는 지나가고 제도화한 교회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는 이미 예언의 영이 역사하는 곳이 못되고, 사람들이 교회로 마구 밀려들어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어지고 말았다. 교회가 세속화하여 이방 사상, 문화, 철학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미 그 숭고성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몬타누스(Montanus, 156-172)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일찍이 이방 종교 키벨레(Cybele)의 제사장이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소아시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더 높은 표준과 더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고, 교회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좀 더 깨끗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몬타누스가 거기서 멈추었더라면 참으로 유익한 인물 구실을 했을 것이다. 몬타니즘이 낙착되어 그 과도한 점을 배제했을 때, 즉 터툴리안 같은 이가 기원후 202년에 몬타니스트가 되었을 때는, 그럴 만한 좋은 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몬타누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다. 또 다른 두 여자 예언자 프리카스와 바시밀라가 같이 다니면서 성령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그리스도의 조속한 재림을 예고하였다. 거기에다 몬타누스는 스스로 자기를 약속된 보혜사라고 하며, 교회를 위하여 새 환상과 메시지를 가지고 왔노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그 두 여자 예언자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도구요, 성령이 새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거문고라고 확신하였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경향이었다. 몬타누스는 이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니 성서는 무진장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침내 성서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2세기 말경에 이르러서 교회는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원칙적으로 성서 산출이 이미 끝났다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2세기 말까지 나타난 신약 정경 형성의 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거의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 13편, 베드로 전서, 요한 1서를 정경으로 소유하고 인정하였으며,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적인 수납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클레멘트 1서, 바나바서, 헤르마스의 목자, 12사도의 교훈(일명 디다케라고도 함) 같은 다른 그리스도교 문서들이 몇몇 교회 저작가에 의해서 성서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것들을 배척하였다.

 

이제는 3세기와 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가 된 책들을 체질하여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더러는 정경으로 더러는 외경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정경 문제를 주의 깊게 조사 연구한 교부들 중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270-340)를 특기할 수 있다. 그는 그의 교회사에서 정경의 한계에 대한 과거 저술가들의 발표를 인용하고 그의 조사의 결과를 종합하여 놓았다(3권 25장). 그는 세 종류의 책으로 분류하였는데 첫째는 호모레고메나(Homolegomena)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진 책 22권을 지적했다. 거기에는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14권(히브리서를 바울 서신으로 간주함), 요한 1서, 베드로 전서, 계시록이 들어 있다. 둘째는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라고 하여 일부에서 논란의 대상을 삼기는 하지만 그래도 널리 채택된 책 5권을 지적했다. 거기에는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가 들었다. 셋째는 노타(Notha)라고 해서 가짜 책 또는 사생아 같은 책으로 바울행전, 헤르마스의 목자, 베드로의 계시록, 바나바서, 디다케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다 요한 계시록도 첨가해야 할 것이다. 더러는 그것을 수납된 책들 속에 넣지만 더러는 그것을 배격하고 있다"고 부언하여 요한 계시록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상과 같이 이미 유세비우스 때에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이 모두 실질적으로 정경 목록에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정경의 내용의 변화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이 가졌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발할 것 없이 각 책의 사도적 저작권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그 책들의 저작자가 확실치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예컨대 히브리서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 책의 저작자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터툴리안은 그 책이 바나바의 글이라고 주장한 일이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오리겐의 판단과 같이 "누가 그 편지를 썼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렇게 저작자가 미상이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성서로서의 가치를 가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정경이 되려면 사도적 권위가 있어야 하므로,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확실하지만 바울의 저술로 돌렸던 것이고, 야고보서를 주의 동생에게, 유다서를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에게, 베드로 후서를 베드로에게, 요한 2,3서를 요한에게로 각각 돌렸던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저작자가 미상이기 때문에 이의를 받았지만 그 책들의 가치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보아서 확실히 사도적인 것들이므로, 그것들이 성서 정경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사도의 이름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교회가 오랫동안 고민하며 이의를 제기했다는 사실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고 또 마침내는 그 모든 풍파를 물리치고 사필귀정으로 그 책들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도 당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정경 형성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예루살렘의 키릴(Cyril, 315-386)은 교회 회원이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신약성서의 목록을 강의하면서 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을 소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후 367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이제 그 편지의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나는 서슴지 않고 신약성서에 속하는 책들을 다시 진술하려 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4복음서, 곧 마태에 의한 것, 마가에 의한 것, 누가에 의한 것, 그리고 요한에 의한 것이 있고, 또 그 뒤에 오는 것은 사도들의 행전과 사도들의 소위 공동서신 일곱 권인데, 그것은 야고보의 것이 하나, 베드로의 것이 둘, 요한의 것이 셋, 그 뒤에 유다의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 외에 사도 바울의 14서신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배역합니다. 첫째가 로마인에게 보낸 것, 다음 둘은 고린도인들에게, 그 뒤에 갈라디아인에게 보낸 편지, 다음이 에베소인에게 보낸 것, 그뿐 아니라 빌립보인에게 보낸 편지, 골로새인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가인에게 보낸 것 두 편, 그리고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다음 둘은 디모데에게, 또 하나는 디도에게, 마지막 하나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위에 또한 요한의 계시록이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방에서는 힙포 레기우스(Hippo Regius)에서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age)에서 전자는 393년, 후자는 397년에 각각 대회로 모여 27권을 신약성서로 정식 채택하였으며 어거스틴도 이 정경을 지지하였다. 그것이 마침내 제롬(Jerome)의 라틴어 번역(Vulgata)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에서는 일부가 계시록의 정경성을 계속 의심하였지만 대부분의 동방 교회도 결국은 서방 교회의 정경과 동일한 정경을 가지는데 도달하였다. 그러나 수리아 교회는 22권만을 채택하였다. 즉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계시록을 제외한 정경이 5세기 초에 수리아 말로 번역, 발표되어 표준성서의 구실을 하였다. 그 성서를 페쉬타(Peshitta)라고 부른다.

그 후 서방 수리아 교회는 6세기와 7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성서에 그 다섯 권을 포함시키게 되었지만(그 성서를 Philoxenian 성서라고 한다), 동방 수리아 교회는 여전히 나머지 그리스도교 세계와 접촉을 끊고 지내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22권짜리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5세기 이후의 정경문제

 

교회는 처음부터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그 정경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때로는 마르시온(Marcion) 같은 이단자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나타난 구약의 중대형, 곧 외경의 대부분을 포함시킨 정경이 로마 교회의 정경으로 인정되고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즉 로마 교회에서는 토빗(Tobit), 유디트(Judith), 에스더 부록,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Ecclesiasticus), 바룩(Baruch), 세 성동의 노래, 수잔나의 역사, 벨(Bel)과 용, 마카비 1서, 마카비 2서를 정경에 포함시키고, 에스드라 1서, 에스드라 2서, 므낫세의 기도를 외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우리들의 것과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로마 카톨릭교회는 동방 수리아 교회와는 정반대로 증대된 정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이렇게 교회가 구약성서를 증대시켰을 망정 감하는 일이 없이 종교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였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를 반대하는 종교개혁자들은 선행으로 칭의를 얻는다든가 성자의 공로를 믿는다든가 하는 교리들이 구약 외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루터(Martin Luther)는 마카비 2서와 에스더서를 가리켜 너무 유대화한 것이며 이방 사상이 너무 짙은 책이라고 하였고, 그런 책은 없었더라면 좋았겠다고까지 말하였다. 마카비 2서 12:43에서 연옥설을 끌어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그 책은 성서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였다. 이리하여 구약 외경을 배격하기 시작하였으며, 루터는 그의 획기적인 독일어 번역에서(1534년도 출판)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 유디트, 토빗, 마카비 1서, 에스더 부록, 바룩, 다니엘서 부록, 므낫세의 기도를 구약성서의 맨 끝에다 따로 붙이며 다음과 같은 표제를 첨부하였다. "외경 - 이 책들은 성서와 동등한 취급을 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읽어서 유익하고 좋은 것들이다."

 

존 위클리프의 영어번역(1380)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일즈 코버데일의 영어번역(1535)은 루터역을 따르되 므낫세의 기도를 빼고 에스드라 1,2서를 첨가하였다. 그 후의 영역 성서에도 외경이 들어 있다. 즉 대성서(The Great Bible, 1539), 제네바 성서(1560), 감독 성서(The Bishop's Bible, 1568), 제임스 왕 역(KJV, 1611)이 모두 그렇다. 그러나 1626년부터 어떤 성서는 외경을 빼고 출판되었고, 1827년 이래 제임스 왕 역뿐 아니라 대개의 개혁교회 성서가 외경을 제외하고 출판되었다.

로마 천주교회는 외경을 계속 정경으로 취급하여 오지만 칼빈주의 교회와 기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외경을 성서 이외의 책으로 따로 취급하여 출판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 교회, 영국 성공회, 취리히 개혁 교회의 습관을 따라 생활의 모범과 행동에 대한 교훈으로서 교회가 읽되, 교리를 세우는 일에는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교회는 1977년 공동번역이 출판되기까지 외경을 거의 본 적도 없고 교회에서 언급되거나 논의된 일조차 없다(단편적으로 학계에서 번역해 낸 것은 있지만).

 

신약성서에 대해서는 1516년에 헬라어 성서를 처음으로 편집한 에라스무스가 옛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어 그 문제성을 자유롭게 진술하였다. 즉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계시록 등이 옛날부터 계속 의심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는 충성된 로마 카톨릭교회 교인으로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개혁자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상기시킨 7권의 이의서 중에서 넷만을 문제 삼았다.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배교자들에게 두 번째 사죄를 허락지 않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보다 행위를 더 고조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비난하였고, 유다서는 베드로 후서에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언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계시혹은 애매하며 그리스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들을 자기의 번역에서 신약성서의 맨 끝에 두었다. 먼저 그가 완전히 수락한 23권을 열거하고 그 번호를 적어 넣었으며, 다음에 약간 여백을 남겨 놓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 오는 책들은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임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 열등함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번호도 붙여놓지 않았으니 결국 일군의 신약 외경과도 같은 취급을 한 셈이다.

 

그러나 개혁 교회는 구약 외경을 반대하는데 태도가 분명한 동시에 신약성서 정경 전체를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수락하는 일에도 거의 통일을 보이고 있다. 칼빈은 요한 서신과 계시록에 대해서 전혀 주석을 쓴 일이 없고, 언젠가 그의 친구에게는 계시록을 어두운 책이라고 묘사한 일이 있다고 하지만 그의 '그리스도 강요'에는 요한 서신들과 계시록을 성서로 인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 준다. 개혁교회에서는 신약성서 정경이 절대로 심각한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고 현행 정경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상과 같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다시 한번 풍파를 겪었지만 성서 정경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생의 길잡이와 지침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인간의 말에 담아, 오고오는 인간에게 전닿라고 계시다. 정경 형성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성서의 여러 책들은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이유 때문에, 서로 성미와 구미가 다른 수억만 명의 까다로운 인간의 체질과 기질을 모두 통과하여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책 중의 책으로서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어떤 개인이나 단체 곧 인간의 뜻이나 조작으로 된 일이겠는가? 과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신비로운 능력과 지혜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