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문서로 바뀌어 성서라는 책에 수록되었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말씀은 먼저 역사적 사건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과 말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긴 역사를 통해서 여러 기자들의 손을 통하여 차례로 기록되었고, 오랜 시일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에 의하여 읽혀졌고, 신비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성서는 긴 형성 역사를 가진 책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부분도 사람의 글이 아닌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저자들이 특정한 환경에서 기록한 책들이 모여서 성서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서는 역사적인 검토와 문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구약성서로부터 시작하여 그 속에 포함된 책들이 대개 어떤 경로를 거쳐서 기록되었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진술해 보기로 한다.
구약성서는 물론 유대교의 경전이기도 하다. 우선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하는 것을 한 두 가지 대표적 문헌을 통해서 알아보자.
요세푸스라는 유대인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1)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기록된 것이다. 즉 모세로부터 아닥사스다(Artaxerxes, 465-424 B.C.) 왕 따까지 기록된 것이다.
(2) 성서는 그 내용 자료의 거룩한 성격 때문에 세속적 문헌과는 구별되며, 그것을 건드리기만 해도 손이 부정을 탄다. 그러한 손은 결례의 의식을 통해서만 깨끗함을 얻을 수 있다.
(3) 성서에 포함되는 책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어떤 곳에는 22권, 어떤 곳에는 24권이 열거되어 있다).
(4) 단어 하나도 바꿔서는 안된다(Contra Apionen 1, 8).
이와 같이 요세푸스와 그 시대의 일반 유대인들은, 성서의 각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썼기 때문에 성서는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이미 그 경전이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스드라 4서 14:18-40(100 A.D.)에 의하면 경전은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에스라 때에 단번에 되었다고 말한다. 즉 예루살렘 함락 후 30년이 되는 해(B.C. 557)에 에스라가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받아, 이미 불타서 없어진 구약성서를 40일 간에 걸쳐서 다섯 명의 조수에게 불러주어 받아쓰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에 쓴 것이 정경 24권, 비밀서 70권이라고 한다. 이 70권은 지혜 있는 사람만을 위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 전체를 암송하여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구약 경전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2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번졌고, 에스라 때에 구약 정경이 단번에 다 완성됐다는 설은 계속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유행되고, 개신고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 전부가 그렇게 쉽게, 더욱이 한 사람 에스더에 의해서 완성됐다고 보는 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 설을 부인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돼서, 곧 느헤미야 시대에 국가적 분열이 생겨서 사마리아인들이 따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의 첫 다섯 권, 곧 5경만을 성서로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이 분열하던 시대에 경전으로 간주되던 것이 5경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 다른 책들도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졌다면 사마리아인들이 5경만을 경전으로 가지고 나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세 구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 성서나 기타 현대어 성서는 구약이 39권의 작은 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배열은 율법서, 역사서, 시서, 예언서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유대인들은 그것을 다르게 구분하며, 오늘날까지 히브리어 원어 성서에는 율법서(토라), 예언서(느비임), 성문서(크투빔) 이렇게 세 부류로 구분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구분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문서적 증거에 의하면 적어도 기원전 180년경까지로 잡을 수 있다. 예수 벤 시락이라는 사람이 '집회서'(Ecclesiasticus)라는 책을 히브리어로 썼는데 그의 손자가 헬라어로 그 책을 번역하였다. 그때가 기원전 180년경이었다. 그 번역의 서론에 의하면 그의 조부가 율법과 예언서와 또 조상들의 다른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이며, 율법과 예언자들과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많은 지혜와 교훈을 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곧 그때에 적어도 세 종류의 문서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39권으로 된 구약 경전을 구약성서라든가 구약전서라는 말로 흔히 부루고 있다. 그러나 원어 성서에는 그런 이름 대신 오늘날까지도 토라, 느비임, 크투빔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이것은 세 가지의 책들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그 세가지 명칭의 순서는 그 세 부분이 성서로 채택된 역사적 순서를 말해 주는 것도 된다. 다시 말해서 토라(율법)가 제일 먼저 되고, 그 다음에 느비임(예언서)이 되고 끝으로 크투빔(성문서)이 정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에는 구약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들어있다. '예언서'라는 부분은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뉘는데, 전기 예언서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이렇게 네 권이 속하고, 후기 예언서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서(짤막한 12예언서가 한 권으로 된 것 -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속해 있다. 이리하여 예언서 부분에는 여덟 권이 들어 있다. 성문서 부분에는 더욱 잡다한 책들이 모여 있다.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룻기, 예레미야 애가,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본래 한 권), 역대기(본래 한 권), 다니엘 이상 열 한 책이 들어 있다.
그 중에 다섯 두루마리(므길로트)라는 명칭을 가진 책들은 유대인의 명절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솔로몬의 아가는 유월절에, 룻기는 추수감사절인 오순절에,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기억하며 금식하는 압월 9월에, 전도서는 장막절에, 에스더서는 부림절에 각각 읽는다.
이리해서 도합 24권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39권의 책에 해당하는 것이며 정통 유대교가 경전으로 전수하였고 정통 그리스도교회가 오늘날까지 구약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책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성서 원전의 구분과 그 배열이 우리 성서의 그것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된 이유를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A.D. 90년에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유대인 학자들이 39권으로 된 구약 성서를 정경으로 결정하고 선포했을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왜 39권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정경에 들어 마땅한 많은 훌륭한 책들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가 외경이라고 말하는 책들도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칠십인역(LXX), 즉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에다가 외경까지 다 넣어서 정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헬라어 번역 구약성서(칠십인역)는 배열을 다르게 했다. 첫 부분인 율법서를 제외하고는, 순서를 많이 바꾸었다. 우리 개신교도들이 사용하는 성서의 구약 부분은 칠십인역과 거기에 근거한 라틴어역 불가타(Vulgata)의 배열 순서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구약 원전의 순서와 달라진 것이다. 39권을 포함시킨 것은 우리의 성서나 히브리어 성서 원전이라 다름이 없다. 로마 천주교의 성서는 외경 15권 중 12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점에서 우리의 것과 다르다. 거기에 대해서는 뒷 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율법서의 형성
유대인들이 성서의 모든 부분을 거룩하게 여긴 것은 사실이지만 성서의 각 부분을 똑같은 수준에 놓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율법서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성서라면 우선 율법서를 생각하였다. 성서를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하여 성문서를 성전의 바깥 뜰에, 예언서를 성소에, 율법서를 지성소라고 표현하였다. 또 그들은 율법의 선재설까지 주창하며, 모세보다도 1000세대 이전에, 그리고 세상 창조보다도 974세대 이전에 율법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메시아가 오시면 예언서와 성문서는 폐기될 것이지만, 율법만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한 글자라도 모세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예언서와 성문서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율법에 대한 전승, 설명, 해설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적 견해였다.
이렇게 5경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러주어 쓰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유대인들의 견해가 거의 그대로 그리스도교에도 전해졌고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믿고 있다.
그러나 율법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합성 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 전통은 율법의 한마디 한마디가 다 모세를 통하여 전해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세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손을 대었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신명기 34장은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을 말하고 있으니 모세 자신이 그것을 기록했다고 볼 수 없다. 또 창세기 36장에는 에돔이란 나라의 왕명을 열거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이들이 모두 다스렸다는 말을 내세운다(창 36:31). 이것은 적어도 이스라엘에 왕이 생겨서 다스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의 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창세기 14:14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사로잡아간 자들을 '단'이라는 곳까지 추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사기 18:29에 의하면 모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 곳이 '라이스'라는 이름으로 있다가 사사 시대에 '단'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경에 여러 번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지만(창 21:34; 26:14-18; 출 13:17) 실은 기원전 1200년경까지는 그들이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쓰여진 부분들을 5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5경에서는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묘사하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브엘세바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예약에서, 또 하나는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창 21:31; 26:33). 또 벧엘이란 이름의 기원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환상을 보는 이야기에, 또 하나는 야곱이 몇 해 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의 사건에 나타난다(창 28:19; 35:15).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녀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추방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추방되는 이야기이다(창 16:6 이하; 21:9 이하).
창조 설화도 역시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는 세상 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창조된다. 그러나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동물,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가 창조된다. 홍수에 대한 기사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노아가 모든 짐승을 한 쌍씩 방주 안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창 6:19), 또 하나는 정결한 동물은 일곱씩, 부정한 동물은 한 쌍씩 넣으라고 명령을 받는다(창 7:2). 이와 같이 이야기가 중복된 것은 5경을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이 그 사건들에 대한 두 가지 기사들을 앞에 놓고 그 자료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취급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6:2-3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창세기 15:2. 8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사라와 라반도 그 이름을 불렀고(창 12:2; 24:31), 셋이 시대에도 그 이름이 사용되었고(창 4:26), 심지어 하와까지도 그녀가 아들을 낳을 때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창 4:1). 이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여기에 한 개 이상의 자료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지적해 낸다는 것은 5경 편집자를 과소평가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취급하는 자료나 문서에 대해서 지나치게 꼼꼼하다고 할 만큼 정직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일단 간추려 본다면 결국 5경은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처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 쓴 책이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5경은 하나 이상의 문서의 편집으로 형성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5경의 저자나 편집자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보수 진영에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어받거나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5경의 실제 저자를 모세로 인정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전통대로 5경의 모세 저작권을 그대로 인정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이 두터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권위와 그의 지식의 무오성을 내세우며, 예수가 인정하신 5경의 모세 저작권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두 가지를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
우리는 한글을 가리켜 세종 대왕의 한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세종 대왕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 밑에 있던 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1611년에 출판된 영어 성서를 제임스 왕 역(King James Version)이라고 부르지만, 그 왕이 친히 번역한 것이 아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어떤 공로를 돌린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었고 관례였다.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해서 함무라비 왕이 직접 만든 법은 물론 아닐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국부라고 할 만한 인물로서 민족 해방과 영도에 공을 세웠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법을 받아 선포하고 가르친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모든 법과 기본적인 교훈들과 심지어 그 민족 형성의 기본적인 역사 까지도 포함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종의 기본 헌장으로 삼았을 때, 그들의 국부요 또 이스라엘 법의 창시자이기도 한 모세를 그 저자라고 부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이 되었고, 누구나 거기에 젖어 있는 시대에 예수님도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전통을 따르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매개로 하실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예수께서 그 시대적 전통을 그대로 이용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좀 더 대담하게 말해 본다면 인간이기도 하셨던 그리스도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제약성을 가지셨기에, "키가 자라고 지혜도 자랐으며", 가시에 찔린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는 고통을 느끼셨던 것이다. 예수는 그 시대 사람으로 태어나 그 시대의 말을 하셨고, 그 시대의 문화와 지식을 가지고 사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5경의 정확한 저자를 알았어야 할 이유도 없고, 우리가 그렇게 기대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5경이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아무도 그 정답을 줄 사람은 없다.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서를 막론하고 그런 문서가 생기기 전에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오랫동안 지내오는 역사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에게 특별히 예언자들을 일으키시어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해 주도록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위대하신 구속적 사건들과 신앙의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그의 뜻과 목적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모세 시대에도 물론 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언자들의 설교를 언제 문서화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족장 시대와 그리고 가나안 정복 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법률 등 모든 것들이 구두로 대대에 전승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안정된 정치 체제를 이루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혼란기를 얼마 동안 가졌다. 이런 난국에 관한 이야기들, 곧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등의 정벌기들이 민중 가운데 계속 인기를 모으며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사무엘과 사울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 족속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고 자기 방위와 자립의 실력이 넉넉해졌을 무렵에는, 상당한 부피의 법률과 이야기들과 찬양시들이 구전으로 혹은 문서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다윗시대(B.C. 1010-970년경)에 우선 여러 뭉치로 수집된 성문 자료들이 입수되었던 것 같다. 또 이 시대에 왕궁의 기록들과 공식 연감들이 수록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문서 활동이 이스라엘 민족 생활에서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먼저 남쪽 나라 유다 왕국에서 솔로몬 왕(B.C. 970-931)의 사망 후에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문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 문서에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남쪽 왕국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그것을 여호와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따서 J문서라고 부른다. 그것은 또한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기술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J문서는 하나님을 귀여운 어린이 같은 단순성을 가진 분으로 생각하며 묘사한다. 여호와가 사람을 땅의 흙으로 만들고 그 콧구멍에 숨을 불어넣는다(창 2:7). 남자의 짝인 여자를 남자에게서 떼낸 갈빗대로써 만들어낸다(창 2:22). 여호와가 동산을 만들고 서늘한 시간에 그 속을 거니신다(창 3:8). 노아 자신과 그의 모든 가족이 안전하게 방주 안에 들어갔을 때 여호와께서 문을 닫아 주신다(창 7:16). 이런 식으로 아주 천진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J문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북쪽 나라 이스라엘에서 또 하나의 문서가 생겼다고 본다.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5경에는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으로는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문서와 그 반면에 처음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문서가 섞여 있다. 북쪽 이스라엘에서 생긴 소위 E문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시기까지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는 문서다. E라는 것은 하나님을 히브리 말로 엘로힘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쪽 지방을 일명 에브라임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쪽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창조 기사부터 시작하지 ㅇ낳고, 아브라함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이 문서는 J문서처럼 그렇게 단순하거나 어린이스럽지 않다. 여기에는 특히 꿈, 천사, 축복, 이별 등에 관심을 두었고,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 유난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다. E 문서에 속하는 요셉의 이야기에는 르우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출애굽 이야기에도 에브라임 족에서 나온 여호수아가 뛰어난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벧엘과 세겜, 곧 북쪽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지방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런 사실들을 보아 이 문서는 결구 북쪽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보여 주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J문서보다 1세기 이상 늦게(B.C. 750년경)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북쪽 나라 이스라엘이 기원전 721년에 멸망한 후(B.C. 650년경) J와 E 두 문서는 남쪽 유다 나라의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하나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JE문서라고 부르는 것이 오늘날의 관습이 되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그 두 문서를 앞에 놓고 그들의 차이점을 정직하게 그대로 소개하면서 한 줄거리의 이야기로 엮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21년에 유다 나라 요시야 왕의 대혁명이 전개되기 시작하엿다. 그것은 성전에서 발견된 책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었다(왕하 22:8-20). 학자들은 이 챙이 현재의 신명기와 대동소이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를 영어로 Deuteronomy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 문서를 D문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때 발견된 문서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유다 나라의 법으로 삼는 데까지 이르렀다(왕하 23:3). 정경 형성의 긴 과정이 구체적으로 여기에 발단을 두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책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짐짓, 그리고 공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법도로 삼은 일은 이 사건에서 비로소 생겼다는 말이다.
이렇게 D문서가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JE라고 하는 서사적 역사 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D 문서를 모세가 준 율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JE와 D를 함께 섞고, 모세의 죽음 이전까지의 이야기 속에 삽입하였다. 이렇게 하여 5경은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갔다.
어떤 학자들은 그 다음으로 형성된 것을 H 문서라고 말한다. H는 Holiness Code(거룩한 법전)를 대표하는 기호이다. 그 문서의 내용은 거룩에 대한 규칙과 원리를 규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고 한 이스라엘 종교의 근본 정신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교훈과 원리와 법칙들이 점차로 자라 한 개의 문서를 이루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레위기 17-26장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원전 550년경에 편집되어 발표된 것으로 그때까지 편집 확대되어 내려오던 경전에 자연적으로 첨가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끝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시대와 포로 이후 시대에는 비록 정치적으로 독립을 잃었을지라도 유대인 고유의 종교적-문화적 생활을 확립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제사장의 무리와 기타 학자들이 선민 역사의 줄거리와 그들의 종교 제도와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의 의식법과 절차들을 수집,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해서 Priestly Document, 곧 제사장 문서라고 부르게 되었고 따라서 P라는 약자로 표시하게 되었다. 그 속에는 레위기의 나머지 제사법과 5경의 나머지 역사 부분들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 P문서의 특색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역사를 말할 때처럼 고상하고 엄숙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종교적 제도나 절기들의 기원을 말해 주는 이야기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P문서의 창조 설화는 안식일의 절대적 중요성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족보를 매우 중요시 한다. 제사장에게는 계보의 성결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5경은 이 P문서를 골격으로 하고 다른 부분들이 거기에 맞추어졌다고 본다. 이 문서는 에스라 시대에 완성되었고, 에스라가 기원전 444년에 백성들에게 읽어 준 것이 바로 이 문서일 것이라고 말한다(느 8장).
그 후 약 100년 동안 하나님의 인도 아래 5경은 완전히 오늘날의 형태와 같이 낙착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요,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교훈과 법도인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400년경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5권이 제일 먼저 성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잇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
첫째로, 기원전 285-246년에 애굽 왕으로 있던 필아델퍼스라는 톨레미 2세의 후원으로 히브리 경전인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 5경뿐이었다.
당시 다른 책들도 있었겠지만 그때가지는 아직 5경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히브리인의 경전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번역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기원전 250년경에는 5경이 경전으로 수락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잇다.
둘째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적 분열이 생겼다. 그때에 사마리아인들이 분리되면서 율법만을 사마리아 글자로 옮겨 가지고 자신들의 성서라고 하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것은 그때에 5경만이 성서로 수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때를 기원전 400년경으로 본다.
셋째로, 느헤미야 8-10장에 의하면, 서기관 에스라가 백성을 모아 놓고 율법첵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정치적인 영광을 얻어 보겠다는 열망보다도 종교적이고 영적인 일에 그들의 위대성을 발휘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에 율법서를 완성하고 성서를 가진 백성으로서의 특유성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전 400년경에는 성서라는 큰 건물의 첫 단계가 낙착되고 완성되었으며 구약 정경의 첫 부분이 생겨난 것이다.
이상에 언급된 문서설은 물론 문자 그대로 가설이요 일개의 학설이어서, 아무도 확실성을 가지고 그대로 주장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까지 인간의 학문적 추구를 통하여 얻어진 최선의 설명이라고 보고, 그보다 더 적합하고 더 믿을 만한 설명이 나타나기를 고대할 뿐이다.
예언서의 형성
5경이 비록 율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계약의 하나님께서 신실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예언자들의 꾸준한 투쟁과 노력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역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모두 예언자라고 불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욥, 에스라, 모르드개 등도 다 예언자였다고 말하여, 유대 학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남자 예언자가 40명, 여자 예언자가 7명이라고 계수한다. 이렇게 유대 민족에게서 예언자가 차지했던 위치는 높고 또 중요하였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힘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하며, 그가 주시는 말씀을 받아 거기에 의해서 정황을 진단하고 그 시대 인민에게 서슴지 않고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5경(율법)도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숨은 예언자들의 손을 거쳐서 오늘의 형태로 낙착되었다고 보지만, 예언자들의 문서 활동은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구약성서의 둘째 부분인 예언서가 율법에 뒤따라 형성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예언서들은 북쪽 이스라엘에서도 생기고 남쪽 유다 나라에서도 생겼다. 예언서라고 하면 우리는 첫 인상이 예언이라는 글자의 표면적 뜻에 묶이기 때문에,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흐려 놓고 만다. 선지자라는 이름을 붙여도 역시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예언자나 선지자라는 명서는 문자 그대로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거나 미리 아는 사람이라는 의마밖에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예언이라면 으레 모두가 장래 일을 미리 말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언자란 말로 번역되는 히브리 말 '나비'는 그러한 시간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람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그에게 명하시는 것이면,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지 또는 미래의 것이든지를 막론하고 충성스럽게 그것을 전할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이란 어휘는 참 예언자의 기능 중의 일부분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전기 예언서라는 부분을 보자. 거기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등 네 책이 들어있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역사서라고 부른다. 그런데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예언서라고 불렀다. 거기에 무슨 예언이 들어 있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이야기와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사건에서부터 그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갔던 사건까지를 엮은 역사가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예언서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사람 '나비'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 입장에서 그 역사를 관찰하고 해석해 주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후기 예언서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예언서들을 보더라고 그렇다. 거기에는 주로 예언자 자신의 설교가 시적으로 적혀 있고, 산문조의 서술이 부분적으로 들어 있으며, 순수한 예고적 예언은 그리 많지 않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시초부터 다루어 약속의 땅 가나안 접경에 도달할 때까지를 묘사, 해설해 주는데,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유업의 땅에서 어떻게 취급하셨는가 하는 것과 또 어떻게 그들을 고집과 죄에서 건지시려고 참고 노력하셨는가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여호수아 자신이 여호수아기를 썼고, 사무엘이 사무엘서와 사사기를 썼고, 예레미야가 열왕기를 썼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여호수아와 사무엘까지 예언자로 간주하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이 책들을 예언서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들의 참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예언자들의 글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멈출 수밖에 없다.
어떻든 이 책들은 역사 책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그들의 참 목적과 기능은 예언자들의 원리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히브리인에게 체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히브리인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는 책이 곧 예언서들이다.
예언서 기자들은 사건을 그대로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하고 설명해 주느냐 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예언서들은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역사를 묘사하였고 예언자들의 말, 곧 그들의 경고와 약속이 다 같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 단순한 인간의 사건들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또는 그들을 통해서 행하신 바를 기록, 보존하여 후세대에게 읽히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호수아기와 사사기는 가나안 정복과 정착 이래 수립되었던 구전 자료 또는 성문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형성되었을 것이고, 사무엘서와 열왕기는 사무엘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가지 기록된 여러 문서들을 기초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건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발견하고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도록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사람, 곧 예언자들의 해석이 필요하였고 그들의 특수한 예언자적 역사 편찬이 필요했다.
이와 같이 전기 예언서의 형성도 하나님의 간섭과 여러 예언자들의 오랜 노력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완성된 형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의 영향이 제일 컸던 시대 곧 기원전 650-550년에 낙착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 예언서의 경우에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등 위대한 예언자들이 자기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나마 기록에 남겨 두었던 것이 있었을 것이고, 그 밖에는 그 예언자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의 말씀과 행동을 기록에 남겨 보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언자의 생전에 혹은 죽은 직후에 그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담은 문서들이 이스라엘의 문학적 유산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메시지가 주로 시의 형식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와 그 밖의 독자들에게 퍽 인상적이었고 그것을 기억하거나 후대에 전달하는 데 퍽 용이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예언 문서가 정경으로 수락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불가피한 일이라고 본다.
예언자들의 말이 구두로 또는 문서로써 오랫동안 전달되는 중 그 자체가 지닌 권위와 감화력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 감화를 받게 하였으며, 반성과 위로와 격려를 받게 하였다. 특히 자기 나라를 잃고 고국산천을 떠나 먼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예언자들의 말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예언자들의 신랄한 경고와 예언을 등한히 하고 무시하던 민족이 이제 망국의 운명과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통을 직접 당하게 되자, 예언자들을 통하여 들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기억하며, 동시에 예언자들의 예고와 경고가 얼마나 진실성을 가졌던가 하는 것을 스스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장소가 없다. 그들은 오직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하며, 또는 그들의 글을 읽고 보존하여, 마음으로 새로운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후에도 형편은 그리 호전되지 않았다. 그때에도 여전히 예언자들의 글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만 했다. 옛날의 영광스럽던 시절의 이야기를 열심히 읽으면서 오늘의 괴로움은 자신들의 죄의 값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기 예언서의 역사와 후기 예언서의 약속을 읽는 중에 그들은 새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법도 안에 있기만 하면 반드시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었다. 이렇게 포로 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의 지친 영혼에 절대적인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예언서는 곧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언자들의 말을 존중히 여기게 된 또 다른 이야구 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예언자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의 소리가 끊어졌고 다시는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믿었다. 구약성서 안에도 이러한 신앙의 잔재가 보인다. 신명기 18:15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에 언제든지 예언자를 일으키신다는 신앙과 희망이 나타나 있는데, 말라기 4:5에 의하면 이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새 예언자가 아니라 엘리야가 다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스가랴 13:3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기가 예언자라고 말하면 그를 가짜 예언자로밖에 볼 수 없는 그러한 시대를 스가랴가 내다보았다. 시편 74:9에는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예언자가 끊어지는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외경 중 마카비 1서에는 이스라엘 중에 예언자가 끊어진 날 이후에, 전에 없었던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마카비1서 9:27). 또 그 책 4:46에는 더러워진 제단의 돌들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예언자가 이스라엘에서 일어나 말해 주기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14:41에는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 밖에 랍비들의 글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어떤 구절에서는 알렉산더 대왕 때까지(B.C. 330년경) 예언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했지만, 그 이후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지혜자, 곧 서기관(율법학자)의 말을 듣는 일이라고 한다. 1세기에 살던 아키바라는 랍비는 어떤 유대인이든지 그리스도인의 책을 읽으면 내세에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예언자의 시대가 지난 후에 저술된 책, 곧 벤 시락의 책이나 기타의 책은 사람이 읽기는 하여도 보통 편지를 읽는 정도로 생각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언자의 시대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끝났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예언자들의 글들을 극히 중요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예언서는 영감의 시대에 기록된 것이며, 그 시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영감으로 된 책들을 소중히 수집하여 보존하며,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예언서들이 실제로 언제 수집되고, 편집되고, 발행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정확한 판단을 얻을 수 없고, 다만 거기에 대한 전설들을 통해서 추리하는 수밖에 없다.
마카비 2서에 나타난 전설에는(2:13) 느헤미야가 도서관을 창설하고 왕들과 예언자들의 행적과, 특히 다윗의 역사와 거룩한 예물과 제물에 관한 왕들의 서신들을 수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역사적 진실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는지 알 수 없지만, 느헤미야가 예언자들의 글을 수집했다는 진술에 우리의 주목이 끌리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로, 앞에서 언급했던 제2에스드라(기원후 1세기 후반에 나타난 책)라는 외경에 의하면 국난을 당했을 때 율법이 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라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행하신 일과 앞으로 하시려는 일에 대하여서 옛 율법에 기룩되었던 것과 똑같이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훈련받은 필공 다섯을 거느리고 40일 간 사람들 없는 곳에 물러가 있으라고 하셨다. 에스라는 물 한 잔을 마시고 40주야를 계속해서 말을 하였다. 그때 그가 받아쓰게 한 책이 94권이었는데, 그 중의 70권은 현인들에게 넘겨줄 책이고, 24권은 누구에게나 읽히도록 공개할 책이라고 한다. 이 24권이 곧 구약성서였다고 말한다(제4 에스드라 14:19-48).
이 이야기는 물론 순수한 전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구약 모든 책을 보전하고 공포한 것을 에스라가 한 일로 돌리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셋째로, 다른 유대 전통에 의하면 대회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족장들의 어록'(Sayings of the Fathers"이란 책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여호수아에게 전했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그것을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잇다. 이 대회란 에스라가 소집한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키며, 그 중에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 느헤미야, 다니엘, 모르드개 등도 들어 있따고 말한다. 즉 이 대회란 이스라엘의 영적 통치자들의 집단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이 에스겔서, 12소예언서, 다니엘서, 에스더서를 쓰고, 동시에 에스라는 에스라서와 그리고 역대기에 있는 그때까지의 족보를 썼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전설에 지나지 않으며, 대회라는 것이 사실 존재했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러한 유대 전설들이 공통적으로 확실히 말해 주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성서의 여러 책들이 모이고 수집되어 정경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율법이 정경서로 채택된 것과, 예언서들이 모이고 수집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였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예언서들이 수집되었다는 것뿐이고 그것을 성서로 채택하여 율법과 나란히 두었다는 말은 아니다. 예언서들이 정경으로 채택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 예언서가 정경으로 인정되었는가?
먼저 다니엘서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167년경에 나타난 책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다니엘서는 확실히 예언적 성격을 가진 것이어서 예언서와 같이 나열되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그것이 히브리 원어 성경에는 언제나 성문서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다니엘서가 나타날 무렵에는 이미 예언서들이 종결되고 확정되어 있었으므로, 아무리 훌륭한 내용의 예언서라 하더라도 그 이상 다른 것을 첨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서가 적어도 기원전 167년경의 다니엘서가 나타난 때 이전에 성서로 인정되었다고 보아도 안전할 것이다. 그러면 기원전 2세기 초에 구약성서에는 그 둘째 부분이 첨가된 셈이다. 즉 이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두 부분이 성서로 채택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성문서의 형성
구약성서의 셋째 부분은 히브리 말로 '크투빔'(Kethubim)이라 하고 헬라어로는 '하기오그라파'(Hagiographa, 거룩한 글)라고 한다. 이 성문서는 성격이 다른 여러 책들이 모여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동질적 통일성을 가진 것이 되지 못한다. 거기에 속한 여러 책들이 개별적으로 대중의 수납에 의해서 성서로 간주된 것이지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성서라기보다는 종교 문학으로 간주되어 내려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당에서 예배 드릴 때 예배 의식의 일부로 낭독되기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사용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비공식 부록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렇게 성문서가 2차적인 성격의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구약성서를 보통 '율법과 예언자'란 말로 호칭했던 사실에서 나타난다. 신약성서에서만 하더라도 그러한 실례를 여러 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마 5:17). 또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마 7:12). 또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때보터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눅 16:16).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눅 24:27)고 누가가 기록했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도 낭독된 것이 율법과 예언서였다(행 13:15). 각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이 낭독되었다고도 기록되었다(행 15:21).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것도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었다(눅 4:17).
이렇게 회당에서 공중 예배에 낭독하는 것은 율법과 예언서였으며, 율법과 예언서는 곧 구약성서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문서가 율법이나 예언서와 같은 수준에 서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면 성문서에 속하는 11권의 책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성전 곧 구약성서의 일부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아야 하겠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일일이 손으로 써서 만들었다. 그렇게 노고를 들여서 만드는 책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인기가 없거나 읽혀지지 않는 경우에는 오래 가지 않아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성문서는 우선 일반 백성이 널리 알고 읽던 인기 있는 책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책들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애독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어떤 책이 성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히브리어가 아니라면 적어도 아람어로라도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역사를 취급하는 책일 경우에는 그 역사가 반드시 히브리인의 역사의 고전적 시대에 대한 역사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참된 예언적 영감이 말라기에서 끝나고 기원전 450년 이래 하나님의 음성은 잠잠하였다는 확신이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든지 정경에 들기 위해서는 에스라 이전에 기록되었어야 한다고 우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가지 아주 재미있는 예외가 있다. 만일 어떤 책이 익명으로 된 것으로 누가 쓴 것인지를 알 수 없는 경우에, 그러나 사람들이 그 책을 매우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때에는 그것을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의 책으로 돌릴 수 있으며, 따라서 정경에 속하는 책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책의 저자가 에스라 이후의 사람이면, 그 책은 정경에 들 희망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실례로서 집회서라는 책을 들 수 있다.
그 책은 아주 훌륭하고 위대한 책으로서 이미 정경에 들어 있는 어떤 책보다 도덕적 힘이나 영적 힘에서 더 우수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저자가 기원전 200년 얼마 후에 살던 예수 벤 시락이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경에 들어갈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성문서 중 여러 책이 기원전 4세기 또는 3세기에 기록되었고 적어도 한 책(다니엘서)은 기원전 2세기에 저술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이 쓴 책으로 돌릴 수 있었고, 따라서 정경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룻기를 사무엘의 저작이라고 말하고, 모든 시편을 다윗에게 돌렸다. 열왕기와 애가를 예레미야가 썼다고 말하였으며, 잠언과 전도서를 솔로몬의 글이라 하였고, 욥기를 모세가 썼다고 말하게 되었다. 에스라, 느헤미야를 에스라의 글이라고 하였으며, 역대기를 쓰는 데도 에스라가 관여했다고 보았다. 솔로몬의 아가는 실제로 솔로몬의 글이거나 혹은 적어도 히스기야 시대의 것이라고 말한다. 에스더서는 그 '대회'(The Great Synagogue)의 회원들의 작품이거나 혹은 그들의 편집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정경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절대적 가치가 인정되면서, 동시에 그것이 익명의 책들이어서, 영감이 작용했던 옛 시대의 인물들의 작품으로 취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의 경우도 그렇다. 다니엘서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 기원전 167년경이라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포로 시대의 큰 인물인 다니엘의 실제적 기록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 책이 정경 속에 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문서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유대인들의 정경으로 간주되고 존경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성서로 채택되기까지에는 역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믿을 만한 것은 못되나 마카비 2서 서두에 나타난 편지 가운데 느헤미야에 관한 진술이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왕들과 예언자들과 다윗의 책들을 수집하여 도서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윗의 것들'(ta tou David)이란 말은 다윗의 글 혹은 책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마 이것은 시편 수집의 큰 과정이 느헤미야에게서 시작됐다는 뜻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구약성서의 셋째 부분의 존재가 명료하고 확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집회서를 접하는 때이다. 기원전 132년경에 집회서의 원저자인 예수 벤 시락의 손자가 자기 할아버지의 책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거기에 서론을 써서 붙였다. 거기에서 그는 율법과 예언자들과 또 그들의 발자취를 따른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전수된 위대한 일들에 관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어떻게 율법과 예언서와 또 조상들의 다른 책들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였는가 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율법, 예언서, 그리고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물론 그는 성문서(크투빔, Hagiographa)라는 술어를 쓰지 않으며, 또 그 다른 책들이 무엇인지도 밝혀 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에 율법과 예언서 외에도 다른 한 군의 문서가 있었다는 것과, 그것들이 율법과 예언서들처럼 확실히 규정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유대인들의 거룩한 문헌들 중의 또 하나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는 신약성서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24:44에 의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편이 율법과 예언서 외의 또 다른 부류의 성서 부분에 포함되거나 혹은 다른 부류의 성서의 전형 또는 대표였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문서가 비록 그 구성 내용을 밝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만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기원후 1세기 말에 나타난 좀 더 뚜렷한 증거가 두 가지 더 있다. 제4 에스드라서라는 외경이 기원후 90년경에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 기록되었는데, 거기에 의하면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에스라가 구약성서 전체를 다시 썼다고 하며 누구에게나 공개된 책이 24권이라고 했다(제4 에스드라 14:44-46). 유대인들의 계산법에 의하면 이 24권이 현재의 구약성서 39권을 가리킨다(옛날에는 사무엘서가 상하로 나뉘지 않고 한 책이었으며 열왕기, 역대기 등도 다 그랬다. 그래서 그 수가 줄어든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제 4에스드라서가 기록될 즈음에는 이미 성서의 목록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나 예언서에 속하는 책의 수가 확정된 만큼 성문서에 속하는 책의 수도 확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원후 100년경에 저술 활동을 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이다. 헬라인들은 상충되거나 상반되는 수다한 책을 가지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오직 22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22라는 수는 룻기와 사사기를 한 책으로, 그리고 예레미야의 애가와 예레미야서를 한 책으로 간주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말하기를 모세의 책이 5권, 예언자의 책이 13권, 찬송 혹은 생활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 교훈이 4권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예언서에는 다니엘, 욥, 역대기,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성서의 범위를 말한 후에 성서를 취급하는 정신을 말했다. 즉 그 책들이 기록된 지가 그렇게 오래지만 감히 거기에 한 음절이라도 더하거나 빼거나 변동시키는 사람이 없었고, 유대인은 출생하는 날부터 그 책들을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살며, 필요할 때에느 그것들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즐겨 바치려는 것이 그 본능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세푸스 때에는 이미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의 수가 가감될 수 없을 만큼 확정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기원후 90년경 현재의 얍파(Jaffa)에서 멀지 않은 해안 도시 얌니아(Jamnia)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권위 있는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것과 똑같은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때 이래 여기저기서 한두 학자가 구약 책 중 어떤 것들에 대하여, 특히 성문서에 속하는 몇 책에 대해서 의심을 표시한 일이 있었지만, 구약성서의 내용에 대해서 정말로 문제를 삼거나 논란한 일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구약성서는 근 천 년의 긴 역사를 거쳐서 한 권의 거룩한 총서로, 그리고 정경으로 채택되고 낙착되었다.
부분적으로나마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을 열거해 본다면 우선 잠언을 들 수 있다. 잠언에는 확실히 모순적인 요소가 있고, 난해한 윤리사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참고 : 잠 26:4,5; 7:7-20). 에스더서는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 에스더서가 부림절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는데 모세의 율법에 그것이 승인되거나 그 정당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 밖에 논란이 있었던 책으로는 전도서와 솔로몬의 아가, 에스겔서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서에 속하는 책들이 성서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 어떤 회의나 교회의 어떤 위원회의 결정이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은 그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역사와 경험이 명백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증명해 주었기 때문에 성서로 채택된 것이다. 얌니아 회의나 그 밖의 어떤 회의가 어떠어떠한 책이 구약성서에 들 수 있는 책이라고 결정할 때에는 이미 경험이 증명해 놓은 것을 단순히 반복하고 확인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러한 회의가 이 책들을 성서가 되게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그것들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시인하고 수락한 것뿐이었다. 구약성서의 책들이 성서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람들이 그 책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책들 속에서 말씀하시니, 사람이 어찌 감히 그것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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