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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의 형성사

성경의 형성사 #4 성서가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성서가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교 경전으로서의 성서가 형성된 과정을 말했을 뿐, 실제로 그것이 우리 손에 도달할 때까지의 구체적 혹은 물리적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 손에 있는 성서는 우리의 한글로 번역된 것이니, 그 대본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생긴 것인가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성서가 기록되던 실제 형편과 그 원본 성서가 어떻게 사본이 되어 전해지고, 또 어떻게 번역되어 내려오다가 언제 어떻게 인쇄본 성서와 비평판 성서가 되고, 또 어떻게 현대 번역의 시대를 거쳐 한글 성서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간단히 알아보기로 한다.

 

 

옛날의 책 만드는 방법

 

15세기 중엽에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책을 내려고 하면 반드시 손으로 써서 필요한 대로 일일이 그 사본을 만드는 방식밖에는 없었다. 옛날에는 책을 쓰는 데 주로 두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다. 하나는 파피루스이고, 또 하나는 가죽 종이였다. 파피루스는 이집트의 삼각주 습지에 풍성하게 자라는 수생 식물로서, 사초과에 속하는 풀이다. 그 풀이 다 크면 줄기가 옥수수 대처럼 되는데, 그것을 베어 약 1척 길이로 토막을 낸다. 그 토막들을 펼치고 그 속에 있는 골을 꺼내어 얇은 조각으로 찢어낸다. 테이프처럼 생긴 이 조각들을 평평한 곳에 서로 잇대러 펴놓고 그 위에다가 또 한 층을 그렇게 반대방향으로 펴놓는다. 그 두 겹을 같이 누르고 두들기면 상당히 질기고 오래가는 파피루스라는 종이가 된다.

이보다 더 질기고 오래 가는 것은 가죽 종이였다. 그것은 염소, 양, 송아지, 기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동물이 어릴수록 거기서 나오는 가죽 종이의 질도 좋다고 한다. 송아지 가죽 종이가 제일 얇고 상등품이다. 때로는 아직 어미 배에서 나오기 전 동물의 가죽을 벗겨서 피지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털을 뜯고 표면을 잘 다듬은 다음 자를 대고 끝이 그리 예리하지 않은 것으로 자리를 내며 줄을 긋는다. 이렇게 그은 줄을 따라서 글을 쓰게 된다. 파피루스 종이의 경우에는 이미 그 결이 줄을 대신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 쪽은 줄을 긋지 않고도 쓸 수 있다.

옛날에는 제본의 종류가 두 가지 있었다. 두루마리 형식은 파피루스나 가죽 종이 조각들을 꿰메거나 풀로 붙여서 길게 만든 다음 양 쪽 끝에다가 나무나 뼈나 쇠붙이로 된 둥근 막대기를 붙인다. 그와 같은 두루말이의 최대 평균 길이는 32피트 정도이다. 그 이상이 되면 손으로 다루기가 매우 거추장스럽다. 글을 쓸 때는 두 치 내지 세 치 너비의 좁은 주란(Column)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롤 횡서로 쓰고 다음에 약간의 여백을 두고서 다시 그런 주란이 반복된다. 대개는 두루마리의 한 쪽만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고대에 사용되던 또 한 가지 책 형식은 코덱스(Codex)라는 것으로 가죽 종이나 파피루스를 재료로 하여 현대의 책과 비슷하게 만드는 형식이다. 종이를 몇 장이고 겹쳐 놓은 다음 그 한가운데를 접으면 되는 형식이다. 즉 요사이 우리 나라에서 잡기장을 만드는 형식과 똑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몇 개라도 꿰매면 부피가 큰 책도 될 수 있다. 두루마리와는 달리 코덱스는 매 장의 앞뒤에 모두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이점이다. 페이지의 크기와 편의에 따라서 한 페이지에 한 주란 또는 둘, 셋, 네 주란까지도 만들 수 있다. 기원후 4세기에 된 헬라어 성서 사본인 시내산 코덱스는 매 페이지에 네 주란을 가지고 있다.

코덱스 형의 책은 여러 면으로 편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루마리형의 책을 능가하게 되었다. 즉 교회는 성서 사본을 만드는데 점차로 두루마리형을 버리게 되었다. 아마도 모름지기 성서를 유대교 회당에서 사용되던 두루마리 성서와 외형적으로 다르게 해 보려는 의도에서 코덱스 형을 택했는지 모른다.

파피루스에 쓰는 잉크와 가죽 종이에 쓰는 잉크는 다른 것이었다. 파피루스에는 검댕과 나무진과 물을 섞어서 만든 잉크 곧 먹을 썼다. 그러나 가죽 종이에는 그런 먹이 잘 발리지 않기 때문에 오배자(몰식자)로 만든 다른 잉크를 사용하였다. 후에는 황산철을 섞엇고 또 여러 가지 빛깔을 내가 위하여 다른 화학물도 사용하였다.

옛날에 사본을 만드는 데 흔히 사용되던 방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개인이 어떤 대본을 놓고 한 자 한 자 옮겨 써서 만드는 법이다. 여기서 그 본문에 우발적으로 변화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새로 된 사본의 정확성은 서사인이 그 언어와 그 글의 내용에 얼마나 익숙하냐 하는 것과, 그가 얼마나 주의해서 일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알파벳에는 유사한 글자들이 여럿 있어서 아주 성실한 사서일지라도 종종 혼동을 일으켜서 잘못 옮겨 쓰는 일이 생기곤 하였다. 더구나 옛날에는 원어 성서에서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할 때 여러 가지 종류의 과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사서실에서 책을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어떤 대본을 큰 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명료하게 읽는 사람이 하나 있고, 여러 서사들이 그 사람을 둘러앉아 그것을 받아서 쓴다. 그러니까 서사의 수만큼 단번에 여러 개의 사본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받아쓰기 방식에 의한 사본은 더 많은 종류의 과오가 본문에 생기게 된다. 서사들이 부주의하거나 그 문서 내용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자연히 잘못 듣고 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경우 등에는 많은 착오가 생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후대 헬라어에서는 '우리'라는 말과 '너희'라는 말의 발음이 거의 구별할 수 없으리만큼 같았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서신들에서 사본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래 어떤 인칭이 사용되었는지 결정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유대인의 경우에는 구약성서를 사서할 때 정확하게 옮겨 쓰기 위해서 굉장한 주의를 기울였고, 따라서 받아쓰기 방식의 사서를 별로 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리스도교회는 그 발전과 확장이 빠르고 따라서 사본에 대한 요구가 많았으므로 때로는 많은 사본을 급히 만들어 내야 할 경우가 생겼다. 그런 때에는 아주 세부까지 정확하게 하는 것보다, 전문가가 아닌 서사를 동원해서라도 많은 수의 사본을 빨리 만들어 내는 것을 더 중요시했던 것이다.

같은 본문이 사본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사인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을 뿐 아니라 때로는 고의적으로 생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 의식이 좀더 고등하게 발전하거나 수도원 사회에서 금욕적 풍속이 발전했을 때 종전에 전래되어 오던 것을 수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컨대 마태복음의 가장 오랜 사본에는 주기도문(마 6:6-13)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후대 사본에는 그 끝에 의식에 사용하기 알맞은 송영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두 마디 송영이었지만, 후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세 마디 송영이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 의식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약간의 고의적 첨삭이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

 

때로는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서 사본이 변하는 경우도 생겼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9:29에 본래는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되었던 것이 후에 금욕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기도하고 금식하지 않고는..."으로 변하였으며, 사도행전 10:30과 고린도 전서 7:5 등도 그러한 예다. 또 때로는 필사자가 다른 책에 있는 병행 구절들과 조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충 삽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골로새서 1:14은 "우리는 그의 아들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후대의 어떤 사본에는 에베소서 1장 7절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의 피로'라는 말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실수로, 또는 고의로 사본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차이가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대부분은 단어의 철자가 바뀌든가 도읭어로 대치되든가 하는 경우가 제일 많고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원문 비평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하여 오늘 우리는 성서 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구약 고대 사본

 

성서가 문서화되었지만 그 재료들은 파피루스나 가죽종이여서 그 원본들이 오래 보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사본들을 만들어 보관하고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성서의 원본이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사본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47년까지는 구약성서 사본 중 제일 낡은 것이 기원후 9세기 말에 필사된 것이다. 이것은 기원후 5세기와 6세기에 맛소라(Massora) 학자라고 하는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편찬된 것으로 그때까지 띄어쓰기도 없고 모음이나 억양 기호나 구두점도 없음으로써 일어나던 혼란과 불확실성을 없애려고 비상한 노력에 의하여 고정된 띄어쓰기를 적용하고, 모음, 억양, 구두점 등을 붙여서 소위 맛소라 원문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1947년 이래 이스라엘의 사해 서북 연안의 쿰란이란 고셍 있는 동굴들 속에서 고대의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하였다. 거기서 구약의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의 사본들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파손된 것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두루마리와 그 조각들은 그리스도교 발생 전후 100-200년 어간에 이루어진 것들로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지금가지 알려진 9세기 사본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하계에 커다란 경이와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낡은 사본들과 맛소라 원문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약 사본의 경우 지난 세기(19c) 동안에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859년에 독일 학자 티센도르프(C. von Tischendorf)가 시내산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유명한 시내산 사본(Codex)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4세기의 것으로 훌륭한 양피에 기록된 헬라어 성서 사본이다. 그것이 지금 대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906년에 프리어(C. L. Freer)가 이집트 카이로의 고물상인에게서 산 4복음서 사본은 4세기 말 내기 5세기 초에 필사된 것으로 지금은 미국 워싱턴 프리어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워싱턴 사본이라 부른다.

1930년경에 영국의 골동품 수집가 비이티(A. Chester Beatty)가 얻은 고대 사본들 중에 중요한 헬라어 성서 사본이 세 개 들어 있는데 3세기의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1935년에 고문서 학자 로버츠(C. H. Roberts)가 발견한 작은 사본 조각은 신약 사본 중 가장 낡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세기 전반기에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한복음 18장의 내용 중 약 30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작은 조각 두 개이다.

근자에 또 스위스 사람 보드머(Martin Bodmer)가 입수한 헬라어 고대 사본들 중에 신약성서 사본들이 끼어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1956년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처음 14장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 연대를 기원후 200년경으로 잡고 있다.

이상에서 신약성서 사본 중 몇 개만을 예로 들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신약 사본을 분류하고 통계를 내어보면 아래와 같다(1993년 Nestle-Aland 27판).

 

파피루스 98개

가죽 종이에 기록된 코덱스 형 사본

   대문자 사본(Uncial Scrpit)   301개

   소문자 사본(Minuscule Script)   2,829개

   일과서(Lectionaries)   2,211개

 

9세기까지는 대개 대문자로 쓰던 것을 그 후부터 소문자로 자체를 바꾸었다. 그것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근 5,500개나 되는 신약 사본이 남게 되었는데, 다른 고대 세속 문헌들은 그 사본을 불과 두 세 개밖에 남기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세속 문헌들은 그 사본이 대개 중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원문과 사본의 시간적 간격이 1000년이나 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성서는 최소 한 세대(30년 내외)로부터 100년 이내의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고대 역본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이나 헬라어를 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가 되고 필요한 환경이 될 때에 필연적으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3,4세기에 이르러 특히 팔레스틴 이외의 지방에서는 히브리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원전 28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해서 구약의 5경이 먼저 헬라어로 번역되었고 뒤이어 나머지 부분들도 번역되었다. 그것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70명이 70일 동안에 번역했다는 전설에서 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 번역 성서는 히브리어 성서보다 널리 퍼지고 읽혀졌으며, 대개의 신약 기자들은 히브리어 원문 성서보다도 이 번역 성서를 인용하는 예가 더 많았다.

예수가 탄생하기 전 시대의 팔레스틴 주민들은 히브리어보다 아람어에 더 익숙했다. 따라서 회당에서 예배할 때 히브리어 성서를 읽고는 반드시 아람어로 번역해 주는 것이 통례였다. 이렇게 아람어로 번역하는 것이 구두로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후대에는 그것이 고정되어 성문화하게 되었고, 마침내 탈굼(Targum)이란 책이 형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어 성서의 아람어 번역 내지 해석(paraphrase)이 탈굼이 되었다는 말이다.

 

신약성서에 속하는 책들은 예외 없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헬라어 특히 코이네라는 헬라어로 성서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는 헬라 문명이 지중해 연안 일대를 좌우하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이 세도를 쓰던 때이지만 알렉산더 대왕 이래(기원전 330년경부터) 누구나 헬라어를 말하며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통속적이고 평범한 헬라어로서 그때의 하류 사회에서까지 사용되던 말이 코이네였다. 그러므로 만민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이 당시의 세계어였던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렇게 신속히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간 원인 중의 하나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외국어는 아무리 해도 외국어일 수밖에 없다. 헬라어가 세계어이기에 선교자에게 편리한 도구이기는 하였지만 본토인은 아무래도 본토 말을 더 좋아하고 거기에 더 친숙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틴을 넘어서 이방 사회로 나갈 때 복음의 메시지가 그들의 본토 말로 번역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2세기에는 신약성서의 일부분이 수리아 말과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3세기에는 콥틱어(Coptic)로 번역되었다. 기원후 200년경에 복음서들이 따로 따로 수리아 말로 번역된 일이 있었고 마침내 4세기에 신약성서 전체가 번역되었다. 그것을 페쉬타(Peshitta)라고 한다. 물론 이 번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신약의 22권만을 가진 것이었으며, 6세기에 또 다른 수리아 번역이 나타나면서 27권 전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번역된 콥틱(Coptic)역은 번역된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그 종류가 여럿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나일 상류(Upper Egypt)에서 된 사하딕(Sahidic)과 하류(Lower Egypt)에서 된 보해릭(Boharic)이 대표적으로 중요한 번역이다.

4세기에 신약성서와 대부분의 구약성서가 고틱(Gothic)말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고트인의 첫 감독인 울필라스(Ulfilas)에 의해서 된 번역이다. 그리스도교가 4세기, 5세기에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 지방에 전파되자 거기서도 번역이 이루어졌고, 에디오피아, 누비아(Nubia), 속디아나(Sogdiana), 아라비아(Arabia), 불가리아(Bulgaria) 등지에서도 성서의 전부 내지 일부분이 앞을 다투어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날이 갈수록 헬라 문명은 쇠퇴하고 따라서 헬라어의 세력도 감퇴되어 갔다. 반면에 로마의 세력이 팽창하며 라틴어가 군림하게 되면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 다반사로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누구든지 헬라어 사본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헬라어와 라틴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저마다 그것을 번역한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러고 보니 성서 번역의 통일성이 있을 수 없고, 잘못된 번역들이 수없이 나돌아 혼란을 빚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4세기 말에 다마수스(Damasus)라는 로마 감독이 당시의 유명한 성서학자 제롬에게 부탁하여 표준적인 번역을 만들게 하였다. 이것을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라고 하며,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식 성서로 정해졌다.

 

이것이 1000년이나 내려오면서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때로는 수정되고 첨가되면서 복잡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3세기에 파리 대학의 학자들이 성서를 쉽게 인용하고, 또 표준적인 성서를 인용하기 바라고 있었을 때 스테판 랑튼(Stephan Langton)이라는 사람이 이 라틴 번역에다 장을 구분해 놓았고 많은 교정을 붙였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때의 장 구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 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 회의에서 그 라틴 성서를 거절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포하였고 다시 공식 라틴 번역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그것은 1592년에 완성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어 성서는 그 사본이 약 8,000개나 된다고 하며, 그것들을 모두 대조하여 제롬의 원 벌게이트 성서를 찾아내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초기의 인쇄본 성서

 

15세기 중엽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부터 사본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성서가 처음으로 인쇄본으로 나온 것은 1456년 마인츠(Mainz)의 요한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에 의해서 출판된 라틴 벌게이트였다.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처음으로 출판된 것은 1488년 롬바르디(Lombardy)에 있는 송키노(Soncino) 출판사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헬라어 신약성서가 출판된 것은 16세기 초의 일이었다. 즉 16세기 초에 스페인에 있는 알칼라(Alcala) 곧 콤풀툼(Compultum)의 지메네스(Ximenes)라는 추기경이 굉장한 폴리글롯 성서(여러 나라말로 대조시킨 성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여섯 권으로 된 채긍로 구약은 매 페이지에 세 개의 주란(Column)을 두는데, 가운데에는 히브리어 원문, 한편에는 라틴어, 또 한편에는 칠십인역을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약 부분은 두 개의 주란으로 만드는데, 헬라어와 라틴어를 대조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이 신약 부분을 담은 책을 1514년에 먼저 출판하였지만, 1520년에 다른 구약 부분과 함께 교황의 승인을 받기까지는 세상에 내놓지 못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스위스 바젤에 살던 프로벤(Froben)이라는 인쇄업자가 지메네스가 폴리글롯 성서를 출판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틈에 헬라어 신약성서를 출판하면 타산이 맞으리라는 생각을 한 끝에 1515년 4월 유명한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도움을 얻어 헬라어 신약성서를 편집하게 되었다. 콤풀툼의 폴리글롯 성서보다 먼저 출판하려는 급한 마음에서, 당시 얻을 수 있었던 헬라어 사본을 마구 주워모아 거기에 의거하여 편집하였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가 주로 사용한 사본은 열등한 바젤 사본 두 개였다. 그것들은 14세기 혹은 15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들로서 하나의 복음서 사본과 행전과 서신으로 된 또 하나의 사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한 책을 편찬할 때 2-3개의 다른 사본들도 참고했지만 그 사본들 중에는 10세기 이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계시록을 위해서는 12세기 사본 하나만을 사용하였고, 마지막 장이 없어진 사본이었던 까닭에 거기에 있어야 할 여섯 절은 라틴 벌게이트에서 거꾸로 헬라어로 번역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이리해서 마침내 1516년 3월 1일에 헬라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이것은 너무도 서둘러서 출판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후대의 열등한 사본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성서의 소위 공인 원문의 조상이 되기에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에라스무스 자신이 자백하였다. 사실 그는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절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벌게이트를 기초로 해서 헬라어 본문을 고쳐 놓은 것이다.

이 에라스무스 성서는 그 후에 여러 차례 교정판이 나왔지만 결국 별로 변함없이 19세기까지 내려오면서 모든 현대 번역 성서의 대본이 되었다.

 

 

 

 

현대 비평판 성서와 한글 성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 성서는 어떻게 번역된 것인가? 1910년에 번역, 출판된 구역 성서까지는 주로 영어 번역과 한문 성서를 대본으로 하였다. 가령 원어 성서를 참고했다 하더라도 그 원어 성서는 현대 비평판 성서가 아니라 공인 원문(Textus Receptus)이었을 것이므로,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 성서(1937)나 새번역 성서(1967), 뒤에 나온 여러 번역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즉 개역 성서와 새번역 성서 등은 최근의 비평판 성서들을 대본으로 하고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말 구역 성서의 대본이었던 제임스 왕 역(KJV)은 1611년에 번역된 것으로, 공인 원문을 대본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그 내용에 아무래도 많은 잘못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이래 많은 성서 사본들이 발견되고 성서 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여 원문에 접근하는 데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라흐만(Charles Lachmann)이 1831년에 출판한 헬라어 신약성서를 필두로 계속해서 많은 비평판 신약 원어 성서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 웨스트코트(Westcott)와 호르트(Hort)의 공저인 1881년 판 성서, 조덴(Hermann von Soden)의 것(1902-1913), 수터(A. Souter, 1910), 포겔즈(H. J. Vogels, 1920), 네슬(E. Nestle, 1898, 초판), 그리고 1966년부터 나온 알란드 외 4인(Aland, Black, Metzger, Martini, Wikgren)의 공동 편집 성서들이다. 그리고 구약성서로는 긴스버그(Ginsburg, 1894, 1908, 1926), 키텔(Kittel, 1906, 1912)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키텔은 제3판(1937) 이래 많은 각주를 붙였으며 특히 1947년에 사해사본이 발견된 이래 더 많은 각주와 비평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에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가 나와 가장 권위 있는 구약 원문 성서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한글 개역 성서가 구약 성서와 다르고 또 새번역 신약성서와 그 후의 번역 성서들이 개역 성서와 달라진 것은 번역 과정이나, 기술이나, 방법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 그 대본들이 달라서 달라진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1937년에 나온 현행 개역 성서는 특히 신약성서 웨스트코트-호르트나 네슬판 헬라어 성서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옛날 공인 원문을 대본으로 한 영어 성서에서 번역된 구역 한글 성서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번역 성서들은 더욱 더 최신 비평판 성서를 대본으로 했기 때문에 어느 것보다도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르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많은 학자들의 정성스러운 노고의 결과로서 성서 원본에 거의 가가운 본문ㅇ르 가졌고, 또 그것을 양심적으로 그리고 최대의 성실성을 가지고 번역하려는 성서 번역자들의 손을 거쳐 오늘 이 시간 이곳의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글로 번역된 성서를 가지고 있다. 수천 년 전부터 말씀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의도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충성된 종들을 통해서 오늘도 계속 모든 사람에게 그 말씀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의 말씀은 생명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현대어와 통용 언어로 쉽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서 번역의 기본 원칙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랗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으리만큼 쉬운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시고 우리들의 손에 와 계신다.

 

 

 

 

한국 성서의 번역사 - 해방 이전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을 어느 때부터라 할는지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때에 천주교 신부가 일본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건너왔다고 한다면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이 땅을 처음으로 밟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된다면 직접 간접으로 서서와의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천주교가 한국에 포교되기 시작하고 상당한 교세를 가지게 될 때까지도 성서에 대한 작업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1795-1800년 어간에 이가환, 정약종 두 사람이 천주교 성서를 번역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4복음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무래도 성서를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성서를 더 사랑하고 관심을 두고 그 사업에 주력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 성서가 소개된 것은 1832년에 화란 선교사 구츨라프 목사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왕에게 성서를 봉정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는데 언제고 후회할 것이다. 그의 신하 중에는 성서를 받은 이들이 있다.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한국에 설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가 홍주 고대도에 얼마 동안 머무르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다고 하니, 그것이 한글 성서 번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1865) 토마스(R. J. Thomas) 목사가 황해도 해안에 와서 한문 성서를 전파하였고 대동강을 따라 항해하여 평양 근처에서 순교하는 순간까지 성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한문 성서를 중국에서 가져다가 전해 주는 데 불과하였다.

 

성서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일은 1873년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회 선교사 로스(John Ross)가 만주에서 여러 한국인을 만나는 일에서 시작된다. 한국 선교에 착안하게 된 로스 목사는 물론 한국이 극도의 쇄국 정책을 쓰기 때문에 한국 내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계속 만주에 머무르면서 성서 번역을 통한 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만주 삼양을 근거로 전도 사업을 시작한 로스 목사는 마침내 서상륜이라는 한국 청년을 만났다. 이것이 1875년 봄이었다. 그때부터 서상륜은 로스 목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쳤고 동시에 한문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때에 서상륜 이외에 이응찬, 백홍준 두 사람이 이 사업에 협력하였다. 1882년 말에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 누가복음이었다고 한다.

 

번역을 했지만 그것을 인쇄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글 자모자를 써서 일본으로 보내어 거기서 활자를 만들어다가 1883년에 비로소 누가복음 3,000부를 출판하는데 성공하였다. 1883년 중에 요한복음이 번역되고 계속 인쇄, 출판되었다. 이 두 복음은 압록강을 건너가지는 못하였고, 다만 만주에 와서 사는 많은 정치 망명객들과 기타 거류민들에게 전파되었다.

그 후 로스 목사는 같은 계통에서 파송된 매킨타이어(John Mcintire)와 합작하여 신약성서 전부를 번역하는 일을 서둘렀다.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의 번역이 지방 사투리로 됐다는 것을 서울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되자, 그들은 새로 번역도 하고 개역도 하면서 1887년에 신약성서 전부를 번역 완료하였다. 그리고 그 책에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는 한문으로 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이두로 토를 달아 미국 성서공회가 3,000부를 인쇄하였다. 이 때 토를 다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 한국 관비 유학생 이수정이었다. 그는 같은 해에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1885년에 언더우드 목사, 아펜젤러 목사가 한글 성서를 가지고 개신교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한글 성서 번역 사업이 국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 선교 사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기 전에 이미 성서가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서 번역되었고 선교사들이 그 성서를 손에 들고 선교를 시작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1882년 한국 문호가 개방되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유로 입국 할 수 있게 되자 처음으로 입국한 선교사는 의사 알렌이였고(1884),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도착하였다. 이렇게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은 성서 사업이 시급함을 느끼고 1887년에는 이미 한국 성서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893년에는 공선 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초대 번역 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트롤롭(M. N. Trollop, 성공회 주교), 게일(J. S. Gale), 레이놀즈(W. D. Reynolds)등이었다. 이렇게 번역 위원회가 조직되기 전부터 성서 위원들은 앞을 다투어 개별적으로 번역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887년에는 아펜젤러 역 마가복음이 간행되었고, 1890년에는 언더우드 역 누가복음과 스크랜튼 역 로마서가 출판되었으며, 1892년에는 최초의 번역 위원회 역 마태복음이 나왔다. 즉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3인의 공역이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 해부터 시작하여 1897년까지 '성서직역'이라는 책(9권)을 내었다. 그것은 4복음서 번역과 거기에 붙는 주석이었다. 1894년에 펜윅(Fenwick)이라는 선교사가 요한복음 사역을 내었고, 1895년에는 위원회 역으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번역되고 그것을 합본하여 '신약전서'라고 하였다. 1897년에는 골로새서와 베드로 전후서, 다음 해에는 계시록을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서 전부가 번역되고 1900년 5월에 신약 전서가 완역되어 9월 9일 오후 3시 30분에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서 축하 예배를 드렸다. 그보다 2년 전 1898년에 피터스(A. A. Pieters) 목사가 기편 중 중요한 것들을 뽑아서 번역하여 '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구약성서 번역의 효시였다.

 

1900년에 신약성서를 완역하였지만 미흡한 점이 많이 발견되어 계속 개역할 것을 작정하고 작업에 착수하였다. 성서 번역 사업은 순탄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레이놀즈 목사가 주재하는 위원회가 목포에서 모이게 되어, 아펜젤러 목사와 그의 어학 선생 조한규씨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밤 안개 때문에 다른 배와 충돌하여 파선하면서 이 두 사람이 마침내 희생되고 말았다. 이 둘은 한국 성서 번역 사상 최초의 순교자들이었다. 아펜젤러 목사 서거 후에 존스(G. H. Jones)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04년에 신약 전서가 개역, 완료되었고, 1906년에는 그것을 재수정하여 결정본으로, 그리고 공인역으로 출판하였으니, 1937년에 다시 개역 성서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사용된 성서이다. 같은 해 크램(W. G. Cram)목사와 피터스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한국인으로서는 이승두, 김정삼 두 사람이 임명되었다.

구약성서는 1910년 4월 2일 오후 2시에 완역되어 1911년에 신약성서와 같이 '성경 전서'로 간행되었다. 이리해서 신구약성서 전부가 한글로 번역된 셈이다. 이때까지는 물론 영어 성서나 한문 성서를 주로 대본으로 삼았고, 원어 성서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현대 비평판이 아닌 것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서 번역을 완료한 직후부터 다시 개역의 필요성을 느껴 1912년에 개역 위원회를 조직하였다(특히 구약의 개역이 시급히 요구되어 그것을 먼저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중요한 이유는 한국 언어의 변천이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또 하나는 현대 비평판 원어 성서의 출현과 또 성서학의 급속한 발달 때문이었다. 즉 구약 성서의 대본이었던 원어 성서나 영어 성서는 원문 비평학적으로 보아 원본 성서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번역 위원의 수가 대폭 증가되었다. 이미 언급된 위원 외의 신임 위원을 들어본다면 케이블, 스톡스, 엥겔, 어드만, 하디, 베어드, 클락, 남궁혁, 김인준, 김관식, 이원모 등이다. 1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일을 하니 자연히 그만큼 비능률적이었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사실 그렇다. 여럿이 같이 모이는 것도 어렵고, 의견을 종합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37년에 개역이 나타나기까지 무려 2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개역 성서가 나타나기 전에 1919년 펜윅 목사가 신약 전서를 사역으로 출판한 일이 있고 1923년에 게일(Gale)박사와 이원모씨가 합작하여 신구약 전서 사역을 간행한 일이 있다. 그 서론에 의하면 신구약 성서는 물론 칠십인역을 참고하였으며 현대 역본으로는 제임스 왕 역, 1881년 영어 개역 성서, 모펫 역, 루터의 독일어 역 등을 참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37년에 드디어 성서 개역이 완성되었는데 평양, 서울, 지리산 등 여러 곳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어려운 작업을 끝마쳤다. 그동안 보강된 번역 위원은 윈, 커닝햄, 로스, 크레인, 밀러 등이었다. 이 개역 성서가 일제 말기를 지나 8.15 해방을 거쳐 오늘까지 한국 교회의 공인 성서로 사용되고 있다.

 

 

 

 

□ 해방 이후

 

해방을 맞은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해방 전에는 일본의 탄압 아래서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하는 모든 교회가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로는 자유를 누리게 됨으로써 저마다 제 길을 가면서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고, 차분히 안정을 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아 확립을 위한 시간을 얼마 동안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지 3,4년이 지난 다음부터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일이 많아지고 막혀 앴던 외국의 문물이 국내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급속도로 한국의 언어와 사고와 풍습이 변화하게 되었고 외국 유학생들이 귀국하게 된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완연히 모든 면에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바람이 불게 되었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신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성서의 사역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문서로 발표된 첫 사역은 1957년 8월 '기독교계'라는 잡지 창간호에 실린 필자의 에베소서 사역이었다고 본다. 그 후에 에베소서 외에도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사역까지 실은 기억이 있다. 그 제 4호에는 김정준 박사의 시편 사역이 몇 편 실렸다. 이보다 몇 달 앞서 동년 5월부터 재경 중견 학자들로 구성된 '복음 동지회' 회원 몇 명이 성서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우선 마태복음서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 위원은 박대선, 김정준, 이여진, 전경연, 문익환, 김철손, 김용옥, 장하구, 지동식, 윤성범, 김찬국, 박창환 등이었고 배후에서 유관우, 전택부 제씨가 여러 모로 후원을 하였다. 사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후반기에는 위원회를 축소하였고 문익환, 김철손, 장하구, 박창환 4인이 1960년 여름까지 1독회를 마쳤다. 동년 9월부터 김철손, 박창환 두 사람이 성서공회 번역 사업에 흡수되면서 복음 동지회는 문익환, 김용옥, 장하구 씨 등에게 잔무를 일임하였다. 마태복음 한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 무려 116회라는 회합을 가진 후 마침내 1961년 1월 25일에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다. 순전히 한국 학자들만이 모여 공동 노력으로 번역한 첫 사례로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번역 사업이 진행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한성서공회에서는 기선을 빼앗겼다는 감도 가졌을 것이지만, 어쨌든 그 사업을 성서공회가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여러 차례 국내 학자들과 선교사들을 불러놓고 그 시도를 해 보았다. 이렇게 준비 작업을 거친 후 성서공회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착수하기로 작정하고 번역자들을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약성서를 먼저 번역하기로 정하고 필자에게 그 전체 초역자로 교섭이 왔으므로 이를 승낙하였고, 그 밖의 번역 위원으로 전경연, 김철손, 이상호, 박상증 씨를 선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TAEM 선교회에서는 청년 찬송가를 편집 판매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을 계기로 신약성서를 통속어로 번역하면 또 하나의 히트작이 되리라고 생각한 끝에 역시 필자에게 그 번역 책임을 맡아달라는 청탁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성서공회의 번역 책임을 맡기로 한 때라 그 제안을 거절하고, 1960년 9월부터 새 번역 사업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번역을 내야 할 필요성은 우선 새 세대가 낡은 번역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중학고 이상 정도의 사람은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최신 비평판 헬라어 성서들을 대본으로 하고, 또 모든 현대어 번역들을 참고로 하여 번역을 진행하였다. 번역 위원들의 작업만도 만 4년 반이 걸렸고 그 밖에 원문 대조 위원, 문장 위원들의 막대한 노고를 거쳐 마침내 1967년 12월 15일에 새번역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한글 고문으로 한갑수 선생이 얼마 동안 수고하였고 문장 위원으로는 전영택, 안신영, 임한영, 박영준, 석용원, 김재준 제씨가, 원문 대조 위원으로는 지원용, 윤성범, 곽안전 제씨가 수고하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기로서 정용섭 목사가 같이 힘썼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처음 되는 일인지라,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고 상당한 파란도 겪었다. 이것이 많은 교회의 공동 사용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한다는 일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번역 위원들의 시안이 그대로 통과되지 않은 점이 많았고 누구에게나 다 만족할 만한 것으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숨김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이 번역이 나옴으로써 한국 성서 번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고 미비하지만 어린이들까지도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서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성서가 존재하는 목적은 인간이면 남녀노소, 식불식을 막론하고 다 읽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생명을 얻게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이해하기 어려운 글로 되어 있어서 무식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 될 때 성서의 본연의 목적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저속하거나 상스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쉬운 말이 다 저속하거나 상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고상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운 말을 가지고 표현해 보려고 한 것이 이 새번역 신약성서의 특색이며 특히 문장 위원들이 유의한 점이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특색은 번역의 원칙이 옛날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성서 번역이라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직역을 해야 하는 줄 알았고 그것을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성서는 일점 일획이라도 변할 수 없다는 이상한 신앙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요사이에 와서 번역 전문가들의 의견은 전과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직역은 참 번역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내세운다. 한국어의 언어 구조와 헬라어의 구조가 전혀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데, 헬라어 원문을 자구적으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우리말이 될 리가 없고, 비슷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우리말의 정당한 표현은 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의역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번 새번역에서 거의 의역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이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줄 안다.

이 새번역이 나오기 전인 1965년 연세대학교 창립 80주년 기념 논문집에 고병려 교수의 로마서 사역이 게재된 일이 있었고, 그보다 앞서 천주교회에서는 1959년 6월 10일에 한 바오로 신부의 번역으로 '복음성서'를 출판하였다. 이것은 4복음서만을 번역한 것으로 1970년대까지 천주교회에서 사용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아직 구약성서를 완역해서 출판한 일이 없었으며,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간행으로 여러 책으로 나누어 10여 권이 번역 출판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미 번역 위원회가 구성되어 특히 신약성서를 번역하던 중, 그 위원의 한 사람으로 있던 김창수씨가 그 위원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신약성서 전권을 사역으로 출판하였다. 그것이 1968년 1월 30일이었고 복음 편과 서간 편 두 권으로 나누어 많은 각주를 붙여 내놓았다. 그 번역은 헬라어 원문을 대본으로 한 번역은 아니다.

새번역 신약성서 출판을 끝낸 성서공회는 곧 구약성서 번역에 착안하고 재빨리 그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은 신구교가 합작한다는 새롭고 의미심장한 기틀 속에서 출범하게 되었다. 1968년 2월 15일 신구교 성서번역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4월 1일부터 4일까지 다시 모여 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여싿. 위원장에 김정준 박사, 서기 정용섭 복사, 위원에 배제민, 문익환, 선종완(신부), 최의원(최 박사는 사정상 사퇴하였다) 제씨이다. 이리하여 구약성서 번역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과거의 신약성서 번역의 경험이 이 사업의 좋은 전감이 되었다. 구약은 그 양이 많으므로 초역을 여럿이 분담하기로 한 점이 신약 번역과 다르다.
성서공회가 구약 공동번역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각한 것은, 이미 완료된 신약 새번역은 개신교를 위한 것이니까, 그것도 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신구교가 공동으로 쓰기에 적당한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백민관, 허창덕, 김창렬, 세 신부가 나오고, 개신교에서는 성공회의 김진만 교수(영문학), 감리교의 이근섭 교수(영문학), 그리고 필자와 성서공회 직원 정용섭 목사(기록 담당)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69년 1월 2일부터 일이 시작됐다. 신약 새번역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해서 약 2년 동안의 작업 끝에, 신약 공동번역을 완료하고 1971년 봄에 출간했다. 약 3년 간 여론을 수렴하고, 문장을 다듬었지만, 그런 작엄 중에, 원 뜻에서 멀어진 것이 너무도 많아, 1974년부터 2년 간 필자에게 맡겨 다시 원문의 뜻에 맞도록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약 부분과 함께 1977년에 신구약 합본으로 출간하게 된 것이다.

구약성서 번역의 원칙은 키텔(Kittel)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라는 히브리어 성서를 대본으로 한다는 것과,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도 쓸 수 있는 번역을 만들되 한국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번역을 만들 것이며, 신약 번역에서처럼 자구적인 직역이 아니라 의역을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대개 5년간을 예상하고 추진하였다.
구약 번역 사업은, 중도에 번역 위원이 선종완, 문익환, 곽노순 세 사람으로 축소되었고, 수가 적으므로, 일은 오히려 더 빨리 진척되었다. 번역이 다 끝나기 전에 선종완 신부가 작고하셨고, 문익환 목사가 옥고를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1977년에 번역이 완료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 출판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세계 성서 번역 역사상 공동번역을 낸 것은 한국이 처음이었다. 한국 천주교가 그때까지 성서전서의 번역이 없었고, 그만큼 성서를 기초로 하는 신앙이 아니었는데, 이 공동번역이 나옴으로 인해서, 천주교회에 활력소를 준 셈이다. 최근에 한국 천주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공동번역 출간이라고 생각된다. 공동번역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물론 에스드라 1,2서와 므낫세의 기도라는 책이 번역되니 않은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머지 12책만이라도 번역되어, 뜻 있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공동번역이 완료되자, 천주교회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모두가 앞을 다투어 그것을 사용했지만, 개신교에서는 고유명사가 많이 달라졌다든가, 특히 '하나님'이 '하느님'으로 바뀌었다든가, 과격한 표현이 있다든가, 과도한 의역이라는 등의 이유로 그것을 교단적으로 수락하는 교파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약 새번역에 걸맞는 구약 새번역을, 개신교를 위하여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다. 그래서 성서공회에서는 1980년부터 구약 새번역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신약 새번역이 나온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신약도 다시 번역하기로 작정했다. 번역자들을 택하여 훈련하는 등, 충분한 준비 끝에 16명이나 되는 유수한 학자들을 동원하여, 드디어 번역을 시작했다. 민영진 박사의 지휘하에 번역이 잘 진행되었고, 드디어 1993년에 '표준새번역'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는 경사를 맞이하였다. 구약성서는 Biblia Hebraica Styttartensia(1967/77)를 대본으로 했고, 신약성서는 Nestle-Aland 26,27판과 연합성서공회(USB)가 낸 Greek New Tesrment 4판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했다. 한국 최고의 학자들을 거의 총망라하여 이룬 금자탑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번역도 만점을 받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다음 세대가 더 좋은 번역을 내야 한다.

표준새번역이 나오기 전에 다른 여러 가지 번역들이 나왔다. 그 이름들만 몇가지 소개하기로 한다. "젊은이여 참 삶을"(로마서, 1970), 현대인의 성경(1985), 어린이 성경(1962)등.
성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귀중한 보배와 같은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번역되는 동시에 정확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런데 번역하는 사람은 모두 불완전해서 완전한 것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기에 번역은 여러 종류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다 참고함으로써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다. 공인된 성서 하나만을 가지려는 생각은 온당한 것이 못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시대를 따라 달라지는 문화를 가지고 산다. 과거의 말이 오늘의 말과 다르고 장래의 말이 또 오늘의 말과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성서는 시대를 따라서 그리고 그 독자의 종류에 따라서 번역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몇 년 후에는 또 다른 번역이 나올 것이고 또 나와야만 한다. 지금도 청년을 위한 번역, 소년을 위한 번역, 대학생을 위한 번역들이 각각 다르게 나올 수 있다면 유익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두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 결론

 

성서가 정경으로 낙착되기까지는 파란곡절이 많았고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성서 형성의 과정을 더듬어 보고 나서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성서에 대한 개념이 어딘가 비뚤어진 데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사실과는 다르게 이상한 이미지를 성서에 붙여서 생각했다는 말이다. 물론 악의에서가 아니지만 과도한 선의와 존경심 때문에 성서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싶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과거의 한국 교회는 성서의 신적인 면만을 고조하고 생각하면서, 인간적 요소를 거의 무시하였기 때문에 성서를 신성하기만 한 책으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신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디까지나 인간적은 책이다.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때, 어떤 곳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책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성서가 성서로서의 특이성을 가지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불가사의를 예수님의 사건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글로써 표시된 사건 곧 성서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들이 그 시대의 언어와 사상과 풍속과 우주관을 가지고 기록했고 따라서 비과학적인 사실과 표현이 많은 인간의 책이지만,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책을 당신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니 참으로 기이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성서는 이렇게 사람의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책인 동시에 또한 반드시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책이다. 사람에게 반드시 주셔야만 할 말씀이라고 해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뜨려 주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알 수 있는 역사적 방법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음미하고 시험하고 사용해 보도록 한 끝에 마침내 정경으로 삼게 하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감격스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교훈과 그의 뜻을 받들어야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