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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특별 설교

기독교인의 술과 담배 언제부터 금기였을까? 술 담배 믿음 기독교 | 옥성득 교수 | 미국 UCLA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 | 강의 설교 요약 정리 설명

한국 교회의 선교적 배경

한국 교회는 19세기 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개신교가 먼저 중국을 거쳐 일본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19세기 말,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는 아편 문제였으며, 일본은 이를 이용해 한국을 침략하고자 했습니다. 아편을 사용하지 않는 어린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일본의 아편 유입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의 금주 및 금연 운동

처음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의 술 문화와 고주망태 상태는 큰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주 운동을 시작했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세례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895년, 장로교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를 요구하였고, 1897년에는 감리교가 이를 강화하여 '술잔을 입에 대지 말라'는 규정을 추가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민족 운동과 교회의 역할

교회가 금주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기독교 윤리 때문만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의 필요성도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술과 담배의 소비가 민족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었고, 교회는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나섰습니다. 울산 장려 운동과 같은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운동에서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의 술과 담배 수입을 막는 운동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와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친일파와 교회의 대조적인 입장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중양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부를 쌓았습니다. 그는 맥주를 과도하게 소비하고 이를 자랑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교회는 반대 운동을 지속하며 금주와 금연 운동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가 민족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방식과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친일파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총독부의 술과 담배 정책

1910년대, 일본은 총독부를 통해 술과 담배의 소비를 촉진하며, 청년들의 정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정부가 술과 담배의 독점적 판매를 시작하고, 기생집과 술집도 급증했습니다. 교회는 이에 반대하며 민족적인 절제 운동과 금주, 금연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였고, 이는 단순한 기독교 윤리 운동을 넘어 민족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민족적 책임과 구국 운동

1920년대에 교회는 술과 담배의 소비를 제한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 자본을 활용하는 운동에도 나섰습니다. 울산 장려 운동을 통해 일본산 술과 담배의 소비를 막고, 한국 제품을 소비하자는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민족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구국을 위한 중요한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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