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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예배학

예배학 #7) 예배의 다양성과 본질

 

* 개신교 예배의 다양성

 

개혁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달리한 후에 개신교는 다양한 지체들로 분리되어 교단이 형성되었다. 리거한 결과로 로마 가톨릭은 그대로 거대한 몸체를 유지하였으나 개신교는 개혁자들과 그들의 활동 무대에 따라 각각 다른 지체들을 형성하였다. 여기에서 예배는 자연적으로 통일된 예배가 아닌 다양한 예배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17세기 이후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예배의 변천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좀더 비약적인 표현을 한다면 어떤 교단의 예배를 개신교 예배라고 지칭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부터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17세기 이후 수많은 교회들이 등장하여 개신교의 일치성을 찾기 어려웠던 데다가 예배마저 그들이 갖는 교히적 특성을 다라 각각 판이한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우리는 중요한 개혁자들의 예배 현장을 찾아서 그들의 예배에 대한 주장과 내용, 그리고 그 순서를 살펴보면서 현재 개신교 예배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현대에 와서 그 종교 개혁 당시의 예배 줄기를 이은 교회에만 전통성을 부여하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모두가 이단적 성향의 교회라고 단정 짓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오늘의 개신교 예배 내용이 대단히 복접하기 때문이다. 이 일치되지 못한 예배의 현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재적인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1. 설교와 성찬성례전을 매주일의 예배에서 지키는 교회를 본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두 교회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영국 국교회로서 해외에서는 감독 교회 또는 성공회라고 불리는 교회들의 예배이다. 또 하나는 루터교이다. 이들의 교회는 모두가 매주일의 예배에서 설교와 성찬성례전을 철저히 지켜 나가는 교회로서 말씀과 성례전의 두 축의 균형을 유지한 예배를 지속하고 있다. 이들 교회는 개신교 가운데 예배의 존엄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예배하는 공동체의 본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들의 교단이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외국에서는 가장 크고 건실한 교단들로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근접한 줄기를 가지고 있는 교단은 감리교로서 영국 국교회 신부였던 웨슬리의 신학과 예배이다. 비록 매주일의 성찬성례전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감리교 역시 어느 교단보다도 예배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어야 할 교단은 한국의 성결 교회이다. 이 교회는 웨슬리의 중생의 교리를 중심으로 하여 출발한 교회이다.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는 웨슬리가 속해 있던 역국 국교회의 전통과는 무관한 예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잗ㅇ로교와 비슷한 예배의 형태를 도입하여 말슴 중심의 교회로 한국에서 발전하고 있다. 이들의 예배에서는 '중생'과 '성결'이라는 기본적인 교리의 실현을 위한 활발한 기도 생활 강조와 철저한 말씀의 사역이 전개되고 있다.


2. 말씀만을 강조한 예배를 매주일 지속하고 있는 교회를 본다

 

이 부류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 속한 교회들은 장로교와 회중 교회와 같은 계열이다. 회중 교회 예배의 경우 말씀을 봉독한 이후 바로 회중 스스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주석의 접근"이라는 흥비로운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회중은 자신이 생각한 말슴의 뜻을 발표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순서를 갖고난 후에 설교를 듣게 된다. 이러한 말슴 중심의 특수한 형태는 두세 시간 동안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로 교회 계열은 개혁 교회라는 이름으로 역시 말씀 중심의 계열에 속한다. 존 낙스 때부터 계속되어 오던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봉독하고 또 시편 교독을 계속했던 이들은 예배 가운데서 말씀에의 접근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별히 장로교의 설교는 어느 교파의 것보다 비중 있게 예배 가운데서 행해졌다. 이들의 설교는 전통적으로 주해 설교가 중심이 되었고, 말씀의 기본적인 의미 해석과 말씀이 주는 교리적인 측면의 제시, 그리고 회중의 삶에 적용되어질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을 철저히 시도했다.


이들은 성찬성례전을 1년에 네 번 벙도로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최근의 미국의 장로교와 같은 경우는 매월 1회씩 성찬성례전을 거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장로교 예배는 회중이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실감할 수 있는 순서나 상징의 활용이 적극적이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로버트 웨버(R. E. Webber)교수는 이런 경우를 보고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지적을 한 바 있다.

"장로교 예배는 단순히 오직 인간의 심성에만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시각, 후각, 촉각 그리고 청각을 활용치 못한 예배가 되고 말았다."


3. 체험적인 신앙과 은사를 예배에서 강조하는 교회를 본다

 

1900년 초부터 시작된 교회들로서 이들은 주로 예배 가운데서 개인 구원과 영적 충만한 경험을 강조한다. 또한 기사 이적이나 방언 등을 통한 직접적인 신유의 은사 경험을 말슴이나 성찬성례전보다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이 교회들의 특성이다.

또한 이들은 복음성가와 같은 찬송을 대대적으로 예배 가운데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준수했던 지금까지의 전통을 벗어나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가정 기도회도 예배라고 이름하고 진행하느 소규모 예배의 형태를 활용하고 있다.

설교의 처소도 예배당 안의 강단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들판에 천막을 사용하여 누구나 다 듣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이들은 예배를 집례할 일정한 인도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성령님의 뜨거운 경험을 새롭게 체험한 사람이면 누구나 핵심적인 멤버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성을 보여 주었다.


4. 형식적인 예배보다는 내적인 말씀의 계시를 강조한 교회를 본다

 

이들은 조용하고 명상이 가득했던 초대 교회의 예배 분위기를 찾아 계승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교회들이다. 이들은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감동을 받는 것을 예배의 중요한 행위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받고 그것을 회중에게 말하는 조용한 명상의 예배를 주로 한다. 이들은 기존 교회의 예배나 활동을 거부하고 개인의 경험적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중시한다.

여기에 속한 교회들은 재세례파의 줄기를 이어받은 형제단, 메노나이트, 그리고 퀘이커 교도들이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속한 교회들의 활동이 미약하나 유럽이나 미국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초기의 침례교의 일부가 여기에 속하여 영적인 추구를 강조하면서 성령님의 인도 속에 체험과 은사 또는 예언의 활용을 중시하여 전통적 예배의 형태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침례교는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였다. 이들은 예배 안에서의 은사 추구나 활동을 금하고, 칼빈의 말씀 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어느 교단보다 성경공부와 설교 사역에 앞을 선 바 있다. 이 때부터 침례교는 급성장하게 되었고 말씀 중심의 교단으로 면모를 갖추면서 나아가고 있다.

이상과 같은 네 부류의 개신교의 특성이 실질적으로 현대 개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개신교의 맥락은 어디까지나 개혁자들의 정신이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의 예배 역시 개혁자들이 그토록 외치고 또 실천했던 바와 같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의 현장이 오늘도 지속되어야 하며, 말씀과 성찬성례전이 균형 잡힌 예배여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 많은 예배 신학자들의 공동된 의견이다. 그러므로 최우선적인 우리의 관심은 예배의 알찬 내용을 통하여 많은 예배자들이 신앙적 경혐을 가져오고 새로워지는 변화가 예배 가운데 계속 발생되는 일이다.

 

 

 

 

* 개신교 예배의 본질

 

개혁의 역사를 넘긴 오늘의 개신교 예배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예배의 정신을 잡고, 그 틀을 형성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해 부족은 오늘의 예배를 개혁 이전보다 더 무의미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며, 불교와 유교의 종교 형태를 탈바꿈시킨 탈선적 예배 행위의 연출로 그쳐 버릴 결과까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한국교회 예배 가운데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무속 종교의 실상을 오늘의 예배 현장에 그대로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마저 내리지 못한 현실은 바로 개신교 예배의 본질적 요소에 관한 무지의 소치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그러면 지금부터 예배의 인도자나 참여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필수적 명제들은 어떠한 것들인지 살펴보겠다.


1. 기독교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예배자들이 마음속에 확신해야 한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있기 전가지 무료 1,500년 동안을 지켜온 기독교의 예전을 개혁자들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던 가장 큰 이유는 영적인 하나님을 그만 성전 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격하시켜 놓은 데 있었다. 동-서방 교회가 그들의 성전 안에 화려한 상징과 장식을 통하여, 그리고 지극히 가시적인 의식의 형태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섬기려 들었다.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을 조각한 형상 속에 머물게 했고, 결국 그 예전은 신비의 발상지 정도로나 여겨질 만큼 변색되고 말았다.

예배자들은 우선 섬기는 신의 존재가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어느 경우든지 섬기는 대상을 우상의 형태로 만들어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이치이다. 따라서 외적인 형태로 신을 섬기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예배란 한 인간의 깊은 심층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의 표현이기에 예수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37)는 부탁을 하셨고, "예배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말씀을 인간들에게 주셨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곧 영적인 존재는 영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주장을 그릇 해석한 나머지 예배의 처소나 시간 등의 정규적인 교회의 규약을 부정하는 사례가 말생하는 문제이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여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주장은 오늘의 교회를 무질서한 세계로 끌고 가는 위험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인간들의 방종된 사고의 유발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찍이 자신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내용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으며, 주님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영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몸소 보여 주셨다. 문제는 신령함이 표현되는 예전의 형태 속에서 영적인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지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2. 모든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계속되어져야 한다

 

중세의 교회가 사제 중심으로 예배를 했으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교황의 존재를 예배 속에 느끼게 하였고, 또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수많은 성자들을 예배의 구심점으로 만들었던 일이 개혁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예배 현장의 주역이나 역사 속의 어떤 인물일지라도 결코 예배의 구심점이 될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길만 있을 뿐이다.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수난의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헐어버렸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스스로 복된 소식이 되셨음을 빋고, 그분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 주신 구원을 확증해야 한다. 그러한 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그에게 경외와 감격과 찬양을 돌릴 때만이 예배로서의 가치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배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이 늘 반복되어져야 하고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와야 한다. 그럴 때만이 예배하는 공동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항상 참된 예배와 생활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3. 개신교의 예배 가운데 최대의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예배의 형태와 내용과 메시지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을 떠난 여하의 신앙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개혁 교회가 지켜 온 살아 있는 정신이다. 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은 성경 가운데 우리에게 그 자신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주신다"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전체적 규범이 성경 외에서는 발견될 수 없음을 역설한 바 있다. 그는 그 이유로 "성경 그 자체가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성경이 없이는 탈선할 수밖에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오늘의 우리 예배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 중심의 예배 정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그 필연성이 뚜렷해진다. 수많은 예배 인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경험적인 사건에만 예배의 초점을 맞추어 버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예배의 근거로 삼고, 회중을 자신과 동일한 세계로 끌고 가려 하는 오늘의 예배 현실은 실로 위험한 궤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자들, 특히 칼빈을 중심한 개혁자들은 예배의 제반 정신과 내용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기본적 주장을 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현지 우리 예배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아무리 충만한 목사나 평신도라 할지라도 결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고, 말씀을 떠난 구수한 인간 냬기로 예배자들을 현혹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모두가 유의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회중의 흥취를 돋우기 위하여 대중음악과 구별지을 수 없는 곡에 가사를 붙여 부르고 율동으로 움직이는 찬양을 시도하는 등등의 모습은 위험한 경지고 들어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직 성경에 근거하고 그 가르침 속에 머무믄 예배 공동체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다.

개신교에서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은 실로 중요한 과정이다. 생각나는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찬송을 부르고, 아우성치는 기도를 드리는 무질서한 예배는 영적인 하나님의 현존을 위한 제단이라기보다 인간의 인위적 경험에 의한 감정의 정화를 갖는 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예배의 현장으로 오게 해주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구속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배의 핵심을 잃어버린 채 의미 없는 시간을 소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전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 중에 불가능한 일로써 오늘의 기독교에서 결코 허용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 속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으로 예배의 방향을 잡아 나갈 때만이 개혁자들의 주장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