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찬성례전의 중요성
초대 교회로부터 성찬은 예배의 중심적 순서였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말씀으로 시작된 예전은 다락방 예배라 부르는 성찬성례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성찬성례전에 의무적이면서도 특권적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성찬성례전을 가리켜 오스카 쿨만은 "새 계약의 재다짐" 또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성례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즉시 성찬성례전의 참여를 허락받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초대 교회의 성찬성례전 이야말로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지닌 예전으로서 예배의 순서에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당시 예전의 모든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찬성례전의 현장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었으며,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만남이라는 생동적 신앙을 갖게 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이 현장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분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한 무리들은 이 예전 속에서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의 사건을 이루었고, 그리하여 이 성례전을 가리켜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예배의 역사 속에 중심적 위치를 지켜 온 이 성례전은 때때로 지나친 해석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예전으로서 그 소중한 의미는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자들 역시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바르게 선포되고 집례되어지는 곳이라는 신아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신앙적 전통으로 우리에게도 계속 전수되어 왔다.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례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 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스럽게도 여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일 년에 한두 번으로 끝나는 성찬성례전의 횟수와 또한 그 내용의 이해나 실천에서 빈약함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갖는 성찬성례전은 "나를 기념하라"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 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심각하게 느낄 수 있다. 더욱이 그 현장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조차 없는 지극히 형식적인 순서로 끝마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 교회 집례자와 참여자 모두는 성례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문제의 시급성이 요청되며,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발굴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한다.
한국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구태의연하고 형식적인 성찬성례전 의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여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깨달은 신앙으로 주님과 연결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전이 이상적으로 살아 집례되는 교회로서의 바른 출발을 위해 우리는 보다 세심한 관심과 적극성을 가지고 성찬성례전을 새롭게 인식하며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 성찬성례전의 역사적 기원
성찬성례전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7성례 중에서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성례전만을 주님의 명령으로 엄수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 전통의 기원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곧 잡히시던 밤에 그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유월절의 명절을 지켰던 저녁 식탁에서 비롯되었다. 알프레드 엘더샤임(Alfred Eldersheim)은 최초의 이 성찬성례전 사건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1) 그 장소는 마가 요한의 집으로 추측되는 큰 다락방이었다.
(2) 그 시간은 초저녁 또는 밤이었다.
(3) 그 만찬에서 유월절과 관계가 있었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언급이 있었다.
(4)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12제자에 한하였다.
(5) 그 식탁에서 사용되었던 성물은 떡과 포도주였다.
(6) 예수님은 그 만찬을 예배하는 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7)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어 받아먹게 하신 후, 다시 포도주 잔을 그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였다.
(8) 예수님은 그 떡과 잔의 의미를 설명했고, 하나의 예전으로서 주님의 재림 때까지 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9) 그들은 만찬 이후에 시편송을 함께 불렀다.
(10)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식사를 끝낸 후 모두 감람산으로 나갔고 그 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별도의 장소에서 기도를 드렸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 모두가 일치한 견해로 기록된 것을 재정리한 내용이다. 이 기록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찬성례전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 만찬이 성찬성례전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찬성례전을 비교 연구한 발표들이 나와 새로운 흥미를 끌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키디쉬(kiddush)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랍비와 제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연구이다. 이 키디쉬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선비인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이나 특별한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하여 식탁을 함께 하면서 모였던 식탁이다. 이때 이들은 간단한 식사로서 떡을 먹었으며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서로 돌려 가면서 마셨고 그 후에 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모임은 주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경건한 생활의 지속을 위하여 행해졌다.
이와 같은 키디쉬의 행사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3년간 생활 속에서도 계속 행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근거로서는 성찬성례전을 가리켜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지금껏 키디쉬를 행하여 온 것 중의 '최후'의 것이라는 데서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성찬성례전이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한 식탁으로서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반격하는 획기적인 주장이며, 새로운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한 연구 내용이다. 비록 유월절을 위한 준비의 식탁으로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그 실질적인 맥락은 키디쉬에서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몇 가지 증거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 유월절(The Passover) 만찬
(1) 언제나 가족 중심의 경축이었다.
(2) 어린 양을 잡아 사용했다.
(3) 누룩 없는 떡을 사용했다.
(4) 여러 개의 잔이 사용되었다.
(5) 출애굽의 말씀을 읽었다.
(6) 연 1회의 잔치였다.
* 키디쉬(Kiddush)
(1) 남자들만의 친구들이 모이는 식사였다.
(2) 어린 양을 잡지 않았다.
(3) 언제나 누룩 있는 떡을 사용했다.
(4) 단 하나의 잔이 사용되었다.
(5) 그러한 말씀의 봉독이 필요없었다.
(6) 매주일 가졌다.
위의 비교 결과 주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이 유월절 만찬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랍비와 제자들이 매주 가졌던 키디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특별히 제자들이 이 성찬성례전을 연중 행사로 하지 ㅇ낳고 매주 또는 모일 때마다 거행하였다는 점에서 이 주자으이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비록 이런 주장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비성경적이라는 비평을 받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나 유월절을 비롯한 식탁의 관습은 그 민족이 갖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라는 차원에서 재평가해 볼 필요가 충분히 있다.
이상과 같은 주장에 반하여 성찬성례전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성찬성례전의 기원이 유월절의 만찬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최후로 지켰던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성찬성례전으로 제정되어졌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신약의 제 부분(마 26:26-28, 막 14:22-24, 눅 22:17-20, 고전 11:23-26)을 들고 있다. 이 기록들 중 공관복음서는 모두 그 시기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으로 규정한데 비해 요한복음은 그 때가 유월절 잔치를 먹는 밤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요 18:28).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재판석에 앉아 있던 때가 바로 유월절의 예비일(요 19:14)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또한 시사해 주고 있다.
돔 딕스(Dom G. Dix)는 요한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그것은 유월절 24시간 전에 있었던 종교성을 띤 식사, 곧 유대 종교의 공식적인 우정의 식사였던 카버락(Chaburak)일 가능성이 크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첫째, 그 식탁에는 주인이나 또는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 둘째, 떡을 들어 쪼개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가 있었으며, 셋째,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떼어 먹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고, 넷째, 잔을 들어 축사하고 함께 드는 관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딕스는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의 식탁이었다기보다는 스승과 제자가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가졌던 특정한 식탁의 마지막 식탁(last supper)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이 어느 한 견해로 굳이 확정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찬성례전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며, 그 식탁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단순히 식사만을 나눈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하나의 성례전으로 제정된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예전의 제정을 위한 과정을 항목별로 분류하면 일곱 단계로 세분하여 살필 수 있다.
첫째는, 주님이 먼저 떡을 취하셨다.
둘째는, 떡을 들어 하나님께 축사하셨다.
셋째는, 그것을 쪼개면서 자신의 상하게 될 몸과 일치시키셨다.
넷째는, 제자들에게 그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한 내 몸이라" 하셨다.
다섯째는, 그 후에 포도주를 담은 잔을 드셨다.
여섯째는, 그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일곱째는, 그 잔을 제자들에게 주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상과 같은 7단계의 상찬성례전 제정이 곧 기독교 성례전의 최초 모델이며 또 가장 근원적 형태이다. 따라서 이 예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행하는 것만이 신실한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임무이다.
* 성찬성례전에 대한 명칭들
성찬성례전은 예전을 지칭하는 어휘로서 우리말에는 "성찬", "성만찬" 또는 "주님의 만찬"등을 사용하고 있다. 교회의 역사 속에 성찬성례전을 위한 명칭은 그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어져 왔다. 그것은 아마 성찬성례전이 내포한 의미가 그만큼 깊다는 뜻도 되겠으나 성경 가운데 성찬성례전을 일컫는 명칭이 때에 따라서 다르게 불려졌다는 직접적인 원인이 크다고 하겠다. 물론 어떤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성찬성례전의 본질이 달라지거나 그 본래적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그 표현된 명칭들이 주는 성찬성례전의 의미는 효과적으로 수용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의미의 구현이 오늘의 성찬성례전 예배에서도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성찬성례전을 일컫는 가장 대표적 명칭들을 모아 그 명칭이 함유하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이 명칭은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성찬성례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설명하면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교회의 형태를 갖추어 성찬성례전을 매주일 갖는 과정에서 빚어진 탈선적 현장을 지적하면서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에 대한 고유한 형태와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 자신들이 손수 가져와서 먹고 마시는 음식과 주님의 성찬성례전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의 만찬은 단순한 음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가진 식탁에서 제정해 주셨던 성례전 사건을 일컫는다.
이 이름(Lord's Supper)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도들의 모임에서 떡을 뗄 때마다 계속된 듯하며 특별히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라는 전승적 표현이 이 명칭의 뜻을 더해 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만찬'이라는 이 명칭이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적절히 표현한 것으로 개신교에서 애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예배 신학자들은 성찬성례전을 단순히 기념적 행위로만 넘길 수 없다는 반론과 함께 이 명칭의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도 일고 있다. 따라서 성체성사라고 번역되어진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명칭을 대신하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2) 성체성사(Eucharist)
이 명칭은 원래 '축복' 또는 '감사'의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서 마태복음 26:26~27의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와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주후 2세기에 성찬성례전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그나티우스(Ignatius)에 이르러서 보편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 이름은 원래 희랍어에서 그 유래를 갖는 것으로서 '감사한다'는 의미를 나타냈다. 그런데 이것이 성찬성례전의 호칭이 된 이유는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뜻하기 위해서였으며, 이 때의 감사란 단순한 음식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감격적 은총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데서 발생되어진 감사의 신앙이었다. 초대 교회에서 열두 사도의 교훈서라 불렸던 '디다케'(didache)에서 성찬성례전에 관하여 언급하는 내용 중 유카리스트(감사)의 태도와 신앙을 고백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렇게 감사드리시오.
-> 우선 잔에 대해서 :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 당신의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주에 대하여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드리옵니다.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하시옵소서.
-> 그 다음 나누어진 떡에 대하여 :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 생명과 지혜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드리옵니다.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하시옵소서.
이상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은 속사도들에 의하여 성찬성례전을 유카리스트라고 부르게 한 동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저스틴의 변증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영국 장로 교회 의식서에서도 집례자가 다음의 말을 하도록 하여 유카리스트의 뜻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그가 떡을 가지고 그것을 떼시기 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의 행하신 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레이몬드 압바 역시 성찬성례전을 주님 자신이 감사의 행위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셨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 명칭은 지금도 가톨릭에서 계속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미사를 성찬성례전을 뜻하기보다는 전체 예전의 마지막 부분이 되는 '파견'의 뜻에 가깝게 해석하고 있다.
3) 성찬(Holy Communion)
이 명칭은 성찬성례전의 본질적인 면을 일컫는 것으로서, 성찬성례전을 통해 주님과 참여자들이, 그리고 참여자들 스스로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커뮤니온(Communion)이란 원래 코이노니아에서 온 말로서 한 목적 아래 참여하는 무리들이 정신적 또는 물질적으로 공동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것을 가리켰다.
이것은 영어에서 말하는 단순한 친교(Fellowship)의 개념을 넘어서서 주님과 하나가 되고, 형제자매와 하나되어 서로 생명을 함께 하면서 같이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심점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을 뜻한다. 이런 의미로 영어에서는 성찬성례전 예배를 '켜뮤니온 서비스'(Communion Service)라 부르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42에서 코이노니아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것은 식탁을 함께 한 무리들이 생활 속에서 갖추어야 할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그후 보다 구체화되어 공동체의 본질을 "떡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떡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입니다"(고전 10:17)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 속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나 단수적 개념으로 설 수 없으며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동 운명의 삶과 목표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교훈은 초대 교회의 교과서처럼 소중하게 사용되었던 '디다케'의 제9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된 개념이 계속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이 나누어진 떡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교회가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성찬성례전을 통한 공동체의 형성이 유대권을 벗어난 세계적 개념으로 확산되어 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지역, 어느 환경에서 참여한 성찬성례전일지라도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동일한 공동체로서 "한 몸 이룬 한 형제"의 실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성찬(Holy Communion)이라는 이름이 주는 깊은 뜻이라고 하겠다.
4) 최후의 만찬(Last Supper)
성찬성례전을 가리켜 '최후의 만찬'이라 할 경우 앞에서 언급한 명칭들과 많은 차이를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최후의 만찬이란 유월절 만찬(Passover Supper 또는 Passover Meal)과 같은 의미로서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가지셨던 만찬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성례전적 의미가 축소된 단순한 만찬의 사건 자체를 말하며, 주님이 그 특수한 시간에 성례전을 제정하셨다고 말할 때 이 명칭을 사용한다. 즉,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칭은 성례전의 예배 가운데서보다 역사적 차원의 성찬성례전을 언급할 때 많이 사용되는 이름이다. 이 명칭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있었던 유일회적인 것으로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함께 했던 그 마지막 만찬을 가리킨다.
5) 희생의 봉헌(Offering of Sacrifice)
희생의 제사로서 성찬성례전을 보는 입장은 성찬성례전의 신학적 초점을 예수님의 희생에다 맞추는 데서 비롯되었다. 즉,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사 53:6)께서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사건의 예시로 성찬성례전을 보는 경우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앞두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흘리게 됨을 알리는 행위로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드신 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은 희생 제사의 음식으로써 그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주님 자신이 제단의 양과 같이 직접 제물로 바쳐졌다는 점에서 희생의 봉헌 또는 제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주님의 그 희생의 봉헌이 구약에 나타난 희생 제물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단순한 제물로서의 봉헌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역사적인 거대한 과업을 이루기 위한 구속의 핵심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오늘의 성찬성례전 식탁 위에 놓인 성물은 단순한 떡이나 잔이 아니라, 참여자 자신들을 위하여 찢기시고 흘리신 주님의 살과 피의 재현으로써 성례전을 경험케 된다.
희생의 제사로서 성찬성례전 개념이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은 초대 교회의 성물을 바치는 예배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무리들의 준비와 자세가 늘 강조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 성물은 곧 예배자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순결한 감사와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 요청되었다. 초대 교회의 교회 생활에 절대적 지침서가 되었던 '디다케'에서도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주일의 특정한 예전을 위하여 그 참여자들이 죄를 고백하고 형제와 화목하여 깨끗한 제사가 되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깨끗한 제사(a pure sacrifice)를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 성찬성례전의 신학적 의미
1) 초기 성찬성례전론
초대 교회부터 성찬성례전은 단순한 기념의 연속으로만 계속해온 것이 아니었다. 비록 성찬성례전이 유대 민족의 관습과 유사한 형태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찬성례전은 분명히 새로운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신학적 의미의 기본적 쟁점은 먼저 성물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둘째로는 성찬성례전의 성례를 기념적 차원보다 더 깊은 신비적 예전으로 보는 의미였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에 와서 더욱 굳게 터전을 잡았으며 종교 개혁 이후에는 새로운 해석과 함께 기독교 예배의 소중한 부분으로 남게 되었다.
예수님 이후의 성찬성례전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도들과 그 추종자들이 함께 할 때마다 가졌던 의식이었다. 이 성례전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이름으로 애찬(Agape Meal)을 겸하는 형태를 취한 바 있다. 이때 그들은 또한 감사의 의미를 나타내면서 '성체성사'(Eucharist) 또는 '성찬'(Holy dinner)이라는 어휘를 즐겨 썼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는 주님이 잡히기 전에 주셨던 마지막 분부를 다시 되새기는 특별한 기념적 의미로써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성천성례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역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동일한 경험과 그러한 삶을 다짐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공동체 성례전이었다.
이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가 성찬성례전 중심의 예배로서 지속되어 오는 동안 성물(Elements)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그 위력의 필연성을 강조해 나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성물이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이것을 받아먹는 성도들에게는 강렬한 신앙의 발로가 되기도 하였다.
곧 그러한 사람에게는 사탄의 권세가 침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성(the nature of sin)의 추방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누리게 됨을 믿게 되는 미신적 신앙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러한 신앙의 현상은 성찬성례전을 행할 경우 기사와 이적까지도 발생된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어거스틴은 그의 "하나님의 도성"(De Cinitate Dei)에서 밝혀주고 있다.
성찬성례전은 이런 미신적인 관념의 성례전으로 퇴색하고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케 되었으며, 이 문제는 초대 기독교에 박해가 심해질 때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즉, 성례전은 마치 박해받은 성도들의 피난처와 같은 대상으로까지 여겨졌다. 그 후 이러한 상태는 핍박이 중단되고 콘스탄틴 대제의 즉위와 함께 교회 지도자들이 예번의 신실성과 성례전의 의미 회복을 주장하게 됨에 따라 교회의 예전은 무질서로부터 차츰 질서 있는 틀을 갖추게 되어 예배의 의식이 새롭게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성찬성례전의 성례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그 신학적 의미는 후대의 성례전 신학에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신학적 이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찬성례전의 테이블 위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재현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견해이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에 나타난 희생 제사와 연속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약의 희생 제단을 연관시켰다. 이것은 순교자 저스틴에게서 볼 수 있는 사상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실적 임재가 성례전의 현장에 임하신다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사도 중심의 초대 교회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믿었던 것에 근거하여 동방 교회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글에서는 성찬성례전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수난받으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육체"(The Flesh of our Saviour Jesus Christ)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에서 성찬성례전의 참여를 불허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견해는 로마 가톨릭의 성찬성례전에 대한 신학을 형성하는 데 그 근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셋째는, 초대 교회의 성례전에 특기할 것은 성찬성례전에 신비적 요소를 부여한 점이다. 기독교가 동방의 세계로 확장해 가면서 그곳 토착 종교들의 신비적 종교성을 발견하면서부터 기독교는 새로운 어휘와 사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들은 성찬성례전에 대해 신비적 사상이 깃든 Sacrament라는 어휘를 주로 사용하였고, 예수님을 통한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비의 사건으로 설명하였고, 그 구체적인 상징을 바로 성찬성례전과 세례에 두었다. 그리고 이 신비적 예전에 참여한 무리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묶여진 공동체가 되었고 그 예전을 행할 때마다 성찬성례전의 역동적인 의미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초대 교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성찬성례전에 대한 다양한 신학은 그후 로마 교황청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됨에 따라 이그나티우스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 서방 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화체설은 종교 개혁의 태동으로 인해 지금껏 믿어 온 실제적 임재와 화체의 성찬성례전을 개혁자들이 단순한 상징으로 보려 하자, 이 개혁자들의 신학적 견해에 제동을 걸기 위해 다시 트렌트 공의회에서 확인 공표되기도 하였다.
2) 개혁자들의 성찬성례론
이제 개혁자들의 성찬성례전 신학은 어떠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성찬성례전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개혁자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개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성찬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내용은 초대 교회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개혁의 주역들은 성찬성례전론을 자신들의 특유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재조명하면서 이를 최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로 삼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 있는 역사적 연접(historical link)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결과는 오늘까지도 교단의 계열에 따라 그 신학적 이해를 달리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체설
화체설은 개혁 교회의 교리는 아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들의 성찬성례전 교리가 파생되었던 모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금껏 지켜온 이 해석의 내용은 집례자인 사제가 성물을 앞에 놓고 축사하는 순간에 그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이다. 로마 교회는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실적 임재를 믿게 되었고 변할 수 없는 교리로서 오랫동안 지속시켜 왔기에 지금도 동-서방 교회에 정착되어 있다. 앞에서 본 대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수난 받으신 육체가 실제적으로 그 현장의 성물 속에서 성변화되어 성도들에게 전달됨을 강조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 그리고 성찬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 교리는 중세 회의 가운데 가장 큰 회의였던 제4차 라테란 공회에서 확고한 교리로 확정되었다. 특별히 이 회의는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성지를 회복하여 전체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소집했던 것이기에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교리로서 뿌리를 내리는데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당시에 결정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 교리 중 성찬성례전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도들의 교회는 세계적으로 하나의 교회이다. 이 교회 밖에서는 누구도 구원이 없다. 이 교회 안에서는 사제와 희생물이 그리스도 그 자신과 동일하며, 그의 몸된 피가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의 성례 안에 실제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능력에 의해 그 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이 성변화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의 연합의 신비는 이룩되며 그가 인간에게서 받으셨던 그 몸을 우리가 받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그의 계승자들에게 주신 교회의 열쇠의 대권에 일치한 안수받은 사제들 외에는 아무도 이 성체성사의 효력을 낼 수 없다.
(2) 성체 공존론(Consubstantiation)
루터교는 개혁 댕시부터 구교가 지켜온 예전에 대한 급격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부분적 수정만을 가한 채 가급적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성례전론에 있어서도 화체설과 별로 큰 차이가 없으나 화체설에서 주장하는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본질이 변화된다는 견해만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성찬성례전 제단 위의 성물은 단순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은총의 음식일 뿐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눈에 보이는 그 성물 안에, 그리고 그 성물과 함께 한다고 해석하였다. 루터교의 초기 신앙고백이었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주님의 만찬 예식에서 포도주의 형태 아래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과 피가 임재한 채 배찬되어 받아들여짐을 우리는 가르친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희생제(sacrifice)의 반복으로 성찬성례전을 이해하여 우상 숭배를 유발시킨 화체설을 거부하였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수난을 십자가 위에서 이룩된 단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사제들에 의해서만 참여되었던 성찬성례전에 모든 교인들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루터에 의해 주장된 공존설이 단순히 기념적 개념으로 발전될 수 있는 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소요리문답서에서는 성찬성례전에 대하여 화체설의 성변화에 아주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인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마시도록 주신 떡과 잔 아래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이다."
그러면서 죄의 용서와 생명과 구원이 이 성례전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서 관심 있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성물을 먹고 마시는 행위에서 용서가 이룩된 것이 아니고 그와 동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죄의 용서가 이룩된다는 점이다.
(3) 기념설
성찬성례전을 하나의 기념으로 단순화시키는 교리는 쯔빙글리의 학설로서 개혁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신비한 성례전으로서 사제들에 의해서만 있어 온 성찬성례전을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개선과 함께 신비한 요소들을 제거해 버리는 이 교리는 대다수의 성도들에게 부담 없는 성례전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이 기념설은 성찬성례전의 해석을 고린도전서 11장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서의 의미 부여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쯔빙글리는 그의 최종적인 신학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그의 신앙고백서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로 성찬성례전은 죄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며, 둘째로 성도들의 구속 신앙을 견고케 하고, 셋째로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케 하며, 끝으로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지금껏 개혁자들의 지대한 관심이었던 성찬성례전 현장의 성물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지에 대한 문제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성찬성례전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만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성찬성례전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였다.
예수님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면서 사용한 '아남네시스'라는 말은 단순한 기념보다는 '재현'(representation) 또는 '회상'의 의미가 뚜렷한 데도 이러한 뜻은 거의 활용이 되지 못한 채 오직 기념의 뜻만을 강조하면서 그의 개혁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그는 루터가 말씀의 예배와 성찬성례전 예배가 언제나 예배 가운데 병존하도록 했던 개혁에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개혁은 예배의 두 축을 보완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껏 예배의 핵심으로 지속해 온 성찬성례전을 1년에 4회로 제한시켰고 설교를 그 자리에 있게 하는 불완전한 예배의 개혁을 가져왔다. 이러한 개혁은 초대 교회 예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개혁이 아닌 새로운 예배의 형태를 출현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보완되지 못한 예배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 교회 예배의 전통이 되어 버린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4)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
이는 칼빈이 자신보다 앞서서 개혁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쯔빙글리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찬성례전 이해에 좀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학적 견해를 나타내 준 학설이다. 그는 성찬성례전의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 사실을 경험하는 예전으로써 성찬성례전을 말하고 있다.
그는 "성찬성례전은 외형적인 표시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의 입증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성찬성례전 신학의 특유성은 성물의 신비성과 거기에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사건을 단순히 집례에서 찾으려 하지 않은 점이다. 그는 여기서 성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시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므로 그 약속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시켜 주는 말씀의 증거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때 이 성물과 거기에 대한 말씀을 경청한 무리들은 성령님의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동시적으로 이룩하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1548년 55개의 성일로 나누어 매주일 저녁마다 가르쳤던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는 여기서 앞에 설명한 대로 성례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징표로서 우리에게 영적인 모든 일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부적 증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약속을 우리 마음에 한층 더 강하게 각인하여 우리가 그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떡과 포도주라는 성물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세우신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당연성의 표이며, 둘째로 "우리는 육체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이고 천상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상징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된 언약에 대한 선 이해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런 선 이해가 없이 성물을 받는다는 것은 의미 없는 참여이며 형식화되기 쉬운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선 이해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며, 비로소 거기에서 말씀의 수용이 가능하게 되고 성령님의 역사 속에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가운데서는 성찬성례전을 쯔빙글리가 주장한 것처럼 기념적 예전으로 본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칼빈은 매주일의 진정한 예배는 설교와 성찬성례전이 병존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매주일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악마의 농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3) 현대 교회와 성찬성례전의 의미
이상에서 본 개혁자들의 성찬성례전 신학은 개혁이라는 공통 분모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예배의 실제에 있어서만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상이점은 현대 교회에까지 파급되었고, 아직도 교파간에 서로의 이해를 좁히지 못한 체 현상을 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가 공동으로 고백해야 할 성찬성례전의 신학적 견해들을 좁히려는 움직임이 새롭게 일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 예로 다음의 두 신학자 모임을 들 수 있다.
(1) 미 장로교 계통과 루터파 계통의 신학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1962년과 1966년 프린스턴에 모여 마르부르크의 재방문이라는 기치 아래 1529년 마르부르크의 회담 주제였던 성찬성례전 논쟁을 다시 공동으로 연구한 바 있다. 마침내 이 연구의 주역들은 "이제는 더 이상 마르부르크의 이슈들이 우리 상호간의 이해와 우정에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2) 신구교 학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영어권의 신-구교 대표 신학자 40명이 1975년 '공동교리서'를 펴낸 의미 깊은 모임이다. 이들은 성찬성례전의 해석과 집례 때문에 신-구교가 서로의 반목을 계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비록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족할 만한 합치점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동일한 공동체의 확인과 미래의 일치를 위하여 '공동 교리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일은 다음에 이어질 리마 예전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다.
(3) 'BEM 문서'와 '리마 예전'의 출현이다
위에서 본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 그리고 신-구교의 신학자들의 모임은 예배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82년 기독교 2천년의 예배 역사에 새로운 변화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세례, 성찬성례전, 그리고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이라는 세계 교회가 일치한 문헌을 내놓은 일이었다. 여기서 모든 교회는 성찬성례전의 신학적 의미를 공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성례전의 의미를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헌은 바로 1983년 캐나다의 뱅쿠버의 제6차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모든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설교와 성찬성례전이 함께 한 예배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예배의 역사와 전통뿐만 아니라 성찬성례전의 신학 때문에 서로가 갈라서 있던 교회가 하나의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하게 되었다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찾게 되었다. 다음은 위와 같은 정신 아래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성례전에 대한 공통적 신앙의 발로와 그 의미의 이해가 필요함을 느끼면서 BEM(Baptism, Eucharist, Ministry) 문서에서 새롭게 정리한 내용이다. 이 내용의 특색은 각 교회의 성찬성례전 신학을 최대한 살리면서 누구나 수용할 수 있도록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다음은 BEM 문서의 성찬 신학이다.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이다
성찬성례전은 어떤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에 대한 뜨거운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성찬성례전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 왔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물을 드리는 봉헌에서부터 이런 신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2세기 중반의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죄로 물들었던 자신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 주신 은총 앞에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에 와서도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이 이룩되어야 한다는 점은 오늘의 신학자들에게도 최우선적으로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찬성례전을 감사의 예전, 즉 유카리스트(Eucharist)로 해석한 것을 오늘의 모든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말로 다시 정리한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 어떠한 거부감도 느낄 만한 요소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2]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이다
세례를 포함한 성례전 전체는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이다. 이러한 신학은 칼빈에게 아주 중요한 교리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seal)을 치고 계약을 확인해 가는 성례전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런 신학 사상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이러한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또한 이러한 설명은 공존론을 주장한 루터 교회의 성례전 신학을 수용하는 좋은 서술이다.
[3] 기념 또는 회상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이다
이것은 개신교에 의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단순한 기념설로서의 성찬성례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고 그 부활의 승리와 귀하신 교훈을 되새기는 성례전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을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의 형을 대신지시고 희생하신 주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 의미를 지닌다. 맥 더리안(M. Thurian)에 의하면 이 회상은 유대 민족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를 재경험하는 유월절 식탁(Paschal Meal)과 같은 성격의 성찬성례전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회상이란 원래 히브리 민족의 사상에서 단순한 기념적 의미만을 갖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를 현재 속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뜻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볼 때 오늘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찬성례전 거행이란 좀더 진지하고 섬세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기념설을 신봉하는 개혁 교회들의 성례전 신학을 새롭게 정리하여 주고 더욱 가깝게 성찬성례전을 대할 수 있는 해석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4] 그리스도의 희생제(sacrifiec)로서의 성찬성례전이다
주님께서 성찬성례전 제정 시에 하나의 떡을 쪼개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는 말씀과 잔을 부어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희생 제물이 되셨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예전으로서 성찬성례전을 지켜 왔다. 여기서 참여자는 더 이상의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그 대신 자신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찬성례전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희생 제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찬성례전은 주님의 희생을 직접 보고 그 살을 받으며 그 피를 마시는 엄숙한 예전으로서 기독교 역사에 계속 유지되어 왔다. 스롤리(J. H. Srawley)와 같은 학자도 초대 교회에서의 성찬성례전은 무엇보다도 이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재현하는 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으 ㅣ희생과 죽으심을 선포하는 예전의 극치로서의 성찬성례전은 오늘도 계속 이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산 제사의 의미를 이 예전에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5]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찬성례전이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라는 찬송은 성찬성례전을 통하여 이룩된 공동체의 성격과 내용을 정확히 표현해 준다. 성찬성례전의 본질 중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진다는 것이 바로 성찬성례전의 독특한 면이라 하겠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 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찬성례전의 거행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의 실현이 가져온 결과적 현상이다. 여기서 부언할 것은 성찬성례전의 예전이 개 교회를 중심으로한 개체적 행사로써 그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서나 성찬성례전을 거행하는 무리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임을 진지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또한 성찬성례전을 통하여 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는 위대한 역사가 진행되어야 하며, 모인 무리들은 모두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지체임을 계속적으로 다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찬성례전의 신학적 의미는 그 외에도 중보자로서 주님의 희생을 좀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참여자의 영적 양식으로서의 의미와 참여자의 순종에 관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대하는 무리들이 빠뜨릴 수 없는 우선적 문제들만을 중심으로 다루게 되었다.
끝으로 첨가할 것은 성찬성례전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으로 끝나는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성례전 현장에 임재하신 그리스도를 뵙는 신앙적 경험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성례전이란 "주님이 제정하신 희생의 제사요 은총이기에 우리는 기도 가운데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은 성례전 속에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나다니엘 미클렘의 말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 성찬성례전의 집례
초대 기독교부터 예전의 극치를 이루어 왔던 것은 성례전이다. 그 중에서도 성찬성례전은 매주일 거행된 성례전으로서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자신들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연접시키는 살아 있는 신앙의 경험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전통은 성찬성례전이 오놀의 교회가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오히려 더욱 진지한 예전으로서의 성찬성례전이 집례되어져야 함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의 개신교는 성찬성례전에 관한 신학적 의미의 전달은 물론 그 깊은 뜻이 표현되어진 의식마저 결여되었음을 느낀다. 오직 설교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현상이 개신교에 고착되어 버렸다. 다행히 최근에 이르러 월 1회 또는 연 6회씩 성찬성례전을 행하는 교회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절대수의 한국교회는 성찬성례전을 연중 2회 또는 3회의 기념적 예전으로 끝내면서 그 이상의 뜻을 발굴하려는 노력마저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불완전한 성찬성례전이 우리의 교회안에 난무하고 있다. 포사이드(Forsyth)는 주님의 만찬의 중요한 부분은 성물 자체보다도 그것을 말씀과 함께 떼어 먹는 의식 전체가 더욱 긴요함을 말하면서 "곧 떡 자체보다 그것을 떼는 일이며, 포도주 자체보다 그것을 붓는 일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실질적으로 성례전의 참된 의미는 성찬성례전을 제정하신 주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이것을 무슨 뜻으로 어떻게 주셨는지를 깨닫는데 있다.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를 통해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맏았으며 훗날 이것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오늘의 집례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는 결코 의식적 표준 없이 마음대로 성찬성례전을 집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의미 있는 성찬성례전을 위하여 최소한 다음 몇 가지의 기본적인 집례 원칙만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봉헌(Offertory or Oblation)
봉헌이란 말씀의 예전이 끝난 후 성찬성례전을 거행할 떡과 포도주, 그리고 사람들이 준비한 예물이 식탁 위에 드려지는 순서를 말했다. 이런 순서는 지금도 동방 교회에서 대입당(Great Entrance)이라 하여 준비된 성물을 장엄하게 가지고 들어와 정중히 성탁(Holy Table) 위에 올려놓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이 봉헌을 위하여 성물의 준비부터 예전의 시작으로 여기는 정중한 과정을 가지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이 성물 준비 시간을 예배 시작 전에 떡과 포도주를 미리 성탁에 차려 놓는 간단한 행위로 축소시켜 버렸지만 다시금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떡과 포도주가 성도들의 대표에 의하여 봉헌으로 성탁 위에 바쳐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 교회에서도 목사와 장로들이 성물을 주님의 식탁에 옮기고 있으며 그 동안 봉헌의 노래나 시송, 또는 찬송을 부른다. 이러한 봉헌의 순서는 제네바 예전의 관례로부터 유래되어서 영국의 청교도들 중에서 장로교가 이와 동일한 예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독립교파나 침례교에서는 영국 성공회 의식을 수정한 웨슬리의 관례에 따라 떡과 포도주를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상 위에 차려 놓고 흰 보를 덮어놓은 채 설교를 행했다. 그리고 성찬성례전이 시작될 때 흰 보를 벗기고 집례하는 감리교의 형태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오늘의 한국 장로교가 본래적인 장로교의 성찬성례전 관례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찬성례전에서 갖추어야 할 집례의 첫 번째 단계는 그 교단적 관례가 어떠하든지 봉헌의 순서를 갖는 것이 타당하다. 이 때는 목사와 장로가 떡과 포도주를, 기타 봉헌 위원들이 봉헌의 헌금을 바침으로 주님의 식탁을 만들어 정중한 성찬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이 바른 과정이라 하겠다.
2) 감사와 성별의 기도와 에피클레시스
성물이 주님의 식탁에 바쳐진 후에 집례자가 생략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감사와 성별의 기도(The Prayer of Thanksgiving and Consecration)이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성찬성례전의 제정 시에 하셨던 대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봉헌되어진 떡과 포도주에 복을 내리사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연합되도록 성령님께 간구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들이 바친 봉헌의 예물과 함께 자신들을 주님께 드렸음을 기도하고 이어서 중보(Intercession)의 기도를 통하여 이웃을 비롯하여 남을 위한 기도를 행하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특별히 이 예전에서의 에피클레시스는 성령님의 임재를 청원하는 기도로서 성물이 단순한 떡과 잔이 아니라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주님의 살과 보혈의 의미를 수찬자들에게 심어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도로, 이 엄숙한 예전의 참 의미를 지속하게 하는 데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 속에서 제단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희생된 몸과 참여자들이 함께 연합되어지는 신비한 성례전의 경험을 갖게 되며,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랑을 간구하는 특별한 의미가 이 기도 내용을 형성한다.
3) 성례전 말씀
성례전의 말씀(the Word of Institution)은 주님이 성례전을 제정하시면서 남겨 놓으신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고 때로는 해석과 적용을 해주는 부분이다. 이 말씀은 복음서마다 다 기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린도전서 11:23~26의 말씀을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집례자는 이 제정의 말씀을 성체 분할 전에 선포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리를 강조하거나 타교리를 배격하는 일은 이 예전에 도움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없다. 가급적 성찬성례전이 내포하는 신학적 의미 전체를 수용하여 살아 있는 성례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기 직전의 엄숙한 순간에 자신이 이해하는 신학적 의미를 참여자들에게 주지시키려는 노력은 삼가야 한다. 단순한 말씀의 선포와 짤막한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감사하면서 거리낌이 되지 않는 삶을 지속할 것을 부탁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맺는 것이 효과적이다.
요즈음 많은 교회들은 설교 가운데서 언급되어진 주님의 희생과 성찬성례전의 의미를 다시 반복하지 않고 있으며 제정의 말씀만 엄숙하게 읽고 진행하는 경향을 취하고 있다.
4) 성체 분할과 분병 분잔
먼저, 성체 분할과 분병 분잔에 대한 이론과 그 실제를 본다.
성체 분할이란 떡을 떼는 것과 잔들 드는 성례전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주님께서 '떡을 떼시고', '잔을 들고' 제정의 말씀을 하신 것을 그대로 집례자가 따라 행한다. 성체 분할은 기독교의 성찬성례전에 오랫동안 지속해 온 부분으로서 가장 극적이고 존엄한 순서로 지켜오고 있었다. 심지어 성체 분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까지 명시된 중요한 의식의 형태였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자유 교회들에 의하여 이 순서는 지나친 의식주의라고 배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미클렘 같은 학자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의식적 행위를 백안시하게 하는 청교도주의의 기묘한 월권과 같다"고 맹렬한 공격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성체 분할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목사가 단순히 제정의 말씀만을 반복하고 장로들을 시켜 떡과 잔을 나누어 준다면 이는 주님의 극적인 상징성을 올바르게 표현되지 못하게 한다. 떡을 취하여 수찬자들이 보는 앞에서 떼며 그와 같이 잔을 들어 그것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주는 것이 목사의 임무이다."
이러한 성체 분할의 중요성을 최근에 이르러 대부분의 목사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찬성례전에서 주님의 살이 찢기시고 보혈이 흘려지는 '극적인 상징성'의 재현이 나타나고 있다. 이때 집례자는 질긴 보리빵 큰 것을 들어 축사하고 뗄 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진행함이 타당하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때에 떡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하고 찢긴 내 몸이다. 받으라, 먹으라." 이제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의 살을 받겠습니다."
이러한 떡을 떼는 의식(성체 분할)을 진행한 다음에 집례자는 분병 위원들을 앞에 나오게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참여 순서이다. 역사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몸이 이 예전을 거행하게 되는 절차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집례자 자신이 먼저 떡을 들고 다음에 분병 위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들이 모두 받아 먹은 다음에 집례자는 떡 그릇을 분명 위원들에게 주어 회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한다.
그 다음에 분잔을 위한 의식은 더욱 진지함을 갖게 된다. 이때 집례자는 포도주가 담긴 큰 잔을 높이 들어 축사하는 장면을 엄숙하게 보인다. 그리고 떡을 뗄 때와 같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주님은 식후에 잔을 들어 축사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잔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내 피다. 너와 나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피다. 받으라, 마시라." 이제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의 잔을 받겠습니다."
이때 역시 분잔 위원들을 앞에 나오게 하고 그 앞에서 집례자가 먼저 잔을 든다. 그리고 위원들 개인에게 집례자가 잔을 둔다. 그들이 다 받아 마신 후에 그들에게 잔을 주어 회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한다.
분병과 분잔을 위해서는 크게 네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세례교인들을 모두 제자리에 일어서게 해서 성물을 받고 명상을 계속하게 하는 형태이다. 또 하나는 한 사람씩 앞에 나와서 집례자로부터 직접 받게 하는 형태이다. 셋째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12명의 제자들처럼 도열을 한 후에 집례자로부터 받는 형태이다. 넷째는, 한국교회가 그 동안 해온 것처럼 분병, 분잔 위원들이 앉아 있는 회중에게 가져다주는 형태이다. 이 모두는 교회마다 예배당의 구조나 인원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찾아 진행하면 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분병, 분잔의 형태가 한 가지로만 고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늘 다양한 형태 속에서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의 형태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5) 일반적인 준비
앞에서 제시된 기본적인 집례의 요소들 외에 성찬성례전 집례에 있어서 관심을 갖고 유의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작은 문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예전이기에 다음의 몇 가지를 덧붙여 제시하고자 한다.
(1) 집례자인 목사의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집례자로서 목사는 성례전을 앞두고 몸과 마음의 준비뿐만 아니라 성물과 성찬기들을 준비하고 모든 배열과 순서를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집례자는 엄숙한 예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가장 기초적인 임무 중의 하나이다.
(2) 분병, 분잔 위원들의 준비와 자세가 진지해야 한다
대형 교회의 성례전에는 장로 또는 안수받은 집사들의 보조가 있어야 한다. 분병, 분잔을 도와야 할 위원들이 먼저 성찬성례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준비가 진지하게 진행되지 못한다면 또한 이것은 중요한 실수에 속한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이들과 함께 성례전의 중요성과 그 내용 및 진행을 사전에 함께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이 타당하다.
(3) 성물의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성찬성례전이 유월절 전야의 음식이었다면 누룩 없는 떡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혁 교회, 특히 장로 교회에서는 누룩의 사용 여부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자체가 주님의 찢기신 몸임을 상징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때의 떡은 맛이 없고 양이 적으며 떡이 입에서 녹을 수 있는 병이 좋다. 성공회나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것은 준비 과정이나 그 병 자체가 매우 적당하다.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는 반드시 물을 섞어서 사용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갈보리 산에서 주님께서 흘리신 것은 단순한 피만이 아니라 심장 속의 물까지도 흘리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 때에 포도주를 쓸 것인가 포도즙을 쓸 것인가의 문제가 등장된다. 한국은 미국의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금주 운동가들의 강력한 주장의 영향을 받아 각 교회가 포도주 대신 포도즙을 사용하는 새로운 관습을 가져왔다. 사실 알콜이 담긴 포도주를 쓰는 것은 알콜 중독을 겨우 피하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쓰는 경우에는 알콜을 모두 증발시킨 것을 사용함이 좋다.
(4) 성찬성례전 예배의 순서이다
이 성례전 순서 가운데 가급적이면 신앙고백과 십계명을 수찬자들과 함께 읽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한 수찬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기 전에 모두가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순서를 갖는 것이 수찬자들에게 더욱 깊은 의미를 심어 줄 수 있다. 그리고 분병, 분잔이 진행되는 동안 찬양대나 반주자의 음악에 의존하는 것보다 개혁자들이 했던 대로 분병과 분잔을 위한 성구를 엄숙하게 봉독함으로써 주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도록 함이 주님과의 만남을 더욱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성례전이 기독교 예배 예전의 극치를 이루는 부분이라고 볼 때에 그 예전의 집례란 실로 소중한 것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위에서 제시된 중요한 부분들을 최대한 유의하여 경건하게 집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새로워지고 성도들의 신앙은 계속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하여 오늘날 연 2회 행하는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찬성례전을 벗어나 최소한 매월 1회 이상의 성찬성례전을 갖추어, 예배하는 교회로서의 재출발이 있어야 한다.
6) 말씀의 예전과 성찬성례전이 함께 한 예배 순서
기독교의 예배가 바른 예전의 형태를 갖춘다는 말은 말씀의 예전과 성찬성례전이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배가 주일 예배에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러한 현실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다음의 순서는 1996년 9월에 한국의 5대 장로교가 희년을 맞아 소망교회에서 함께 드렸던 예배 순서이다. 이 뜻 깊은 예배의 순서를 작성하도록 부탁받은 필자는 세계의 유수한 예배 신학자들과 함께 이 순서를 작성하여 뜻 깊은 예배를 장로교가 함께 드리게 된 바 있다. 이 순서는 집례자의 편의를 위하여 필요한 설명을 괄호 안에 넣었다. 회중을 위한 순서로 사용할 때는 이 부분을 삭제하고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예 배 순 서
예배를 위하여 나아감
전주 -------------- 반주자
예배선언 ---------- 인도자
(오늘 우리는 한국의 장로교가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매우 뜻 깊은 주님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오늘의 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찬양대의 응답
(이때 모든 회중은 엄숙히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에 임한다.)
예배로 부름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 16:8-10).
예배의 기원 ------- 집례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들은 하나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옵니다. 여기에 임재하셔서 아직도 부끄러운 사연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막혀 있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온전한 정신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우러러 한 목소리로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뵙는 감격이 솟아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찬양과 고백
*경배의 찬송 ----- "다 찬양하여라"(21장) ------ 다같이
*언약의 확인 ---------------------------------- 다같이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마음을 가다듬어 한 목소리로 교독하십시다.)
집례자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회중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집례자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회중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집례자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회중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집례자 : 살인하지 말지니라.
회중 : 간음하지 말지니라.
집례자 :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회중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집례자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함께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참회의 기도 ---------------------------------- 다같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 자신들이 죄인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다같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운 심정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외면하고 살아온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언제나 죄스러운 모습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서로가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면서 분열과 상처만을 남기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이익과 고집만을 앞세웠습니다. 이 민족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비방을 하면서 이 민족 앞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하난미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주님께 십자가의 수난을 더해 드리는 사연들이었습니다. 용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용서 안에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장로교가 새롭게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 땅에 가득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용서의 확신 ---------------------------------- 집례자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중 누가 정죄의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뿐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제 여러분의 죄는 용서되었고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생활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요 11:8, 고후 5:17). 아멘.
*영광송 ----- "찬양 성부 성자 성령"(6장) ------ 다같이
중보의 시간
기도 ----------------------------- 다같이
장로교 일치를 위하여
민족 통일을 위하여
세계 선교를 위하여
주기도 --------------------------- 다같이
말씀의 선포
구약의 말씀 ----- [ ] ------
신약의 말씀 ----- [ ] ------
찬양 ------------ [ ] ------ 찬양대
말씀의 선포 ----- [ ] ------
설교 후 기도 ---------------------- 설교자
감사의 응답송 --------------------- 찬양대
성찬성례전
*성찬 찬송 ----- "아무 흠도 없고"(281장) ----- 다같이
봉헌 ----------------------------------------- 다같이
봉헌 기도 ------------------------------------
*신앙 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이제 주님의 성찬에 임하면서 우리 모두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주님의 교회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시겠습니다.)
성찬의 초대 ---------------------------------- 집례자
형제자매들이여! 오늘의 성찬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거룩한 잔치입니다. 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성스러운 자리입니다. 분열의 상처와 아픔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명령을 겸허히 기다리는 잔치입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이제 오셔서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주님 주신 성찬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제정의 말씀 -------- 고전 11:23-29 ----------- 집례자
성령임재기원 --------------------------------- 집례자
십자가 위에서 모진 수난을 당하셨던 주님! 이제 주님의 부르심으로 허물 많은 우리들이 오늘 이 거룩한 성찬에 나아옵니다. 주신 은총에 감격하면서도 두렵고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주님! 이 자리에 오셔서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우리의 손목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님의 살이 우리의 살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주님의 피가 우리의 혈관에 머물게 하여 주셔서 이제 주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의 강하고 뜨거운 역사하심이 이 거룩한 성례전에 임하셔서 깊은 감동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분병 ----------------------------------------- 집례자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때에 떡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하고 찢긴 내 몸이다. 받으라, 먹으라. 우리 주님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명령대로 주의 떡(살)을 함께 받겠습니다.)
참례 선언 ------------------------------------ 집례자
(이제 주님의 떡을 받으시고 우리 위하여 상하신 주님의 살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와 함께 먹으십시오.)
성찬 참여 ------------------------------------ 다같이
분잔 ----------------------------------------- 집례자
(우리 주님은 식후에 잔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다. 너와 나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피다. 받으라, 마시라,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이 잔을 받겠습니다.)
참례 선언 ------------------------------------ 집례자
(이제 주님의 잔을 받으시고 우리 위하여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려 주신 주님의 보혈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와 함께 잔을 받으십시오.)
성찬 참여 ------------------------------------ 다같이
*감사의 기도 --------------------------------- 다같이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자비하신 은총으로 우리들을 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시고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동일한 지체임을 확인하게 하시오니 감사하빈다. 서로가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길을 걷게 하시오니 감사합니다. 주의 살과 피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게 하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증거하는 이 민족의 등불이 되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우리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감사의 찬송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493장) --- 다같이
축도 ----------------------------------------- 집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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