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의 중요성
종교 개혁 이후 성공회와 루터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예배 예전을 지금껏 잘 진행하고 있는 교회들이다. 그러나 그 외의 개신교들, 특히 장로교를 비록한 개혁 교회들은 이러한 균형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직 설교 중심의 예배만을 지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들의 세계에서 설교는 가장 중요한 사역(ministry)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기에 설교학(homiletics)은 독립된 학문으로써 깊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분야가 되었다.
개신교의 성장과 확장에 절대적인 기틀을 마련해 준 것이 설교이지만 실제로 그 본래적 의미와 역사적 발전은 예배 가운데서 이룩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예배를 통하여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별히 설교가 구교의 의식(미사)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하던 암흑기에 종교 개혁과 함께 예배자들의 언어로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새로운 생명의 양식으로서 수많은 영혼들을 일깨웠고, 계속해서 설교 중심의 교회가 활기를 찾으면서 비약적 발전을 이룩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 이러한 결과는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에게 설교만을 위한 관심과 열심을 쏟게 하여 예전에 대한 외면과 배격을 초래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올바른 방향이란 언제나 말씀과 성례전의 두 기둥을 함께 세우는 데 있다는 그 진리는, 그 균형을 바르게 유지한 교회만이 뿌리 깊은 신앙을 지탱할 수 있었던 데서 확인되었다. 특별히 이러한 말씀과 예전의 균형은 주님께서 말씀 중심의 갈릴리 사역과 예전 중심의 예루살렘 사역을 통하여 그 필요성을 보여 주신 일에서 더욱 뚜렷이 증거된다.
1) 신약 시대의 예배와 설교
신약성경에 나타난 설교는 자연스럽게 발생된 것이었는가? 또는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선을 보인 것이었던가? 여기에 대한 대답과 이해는 무엇보다도 회당 예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설교가 비록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예배의 중심 순서로서의 설교는 역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회당 예배를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을 잃어버린 채 바벨론 포로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회당(synagogue)에 모여 간단한 예전을 갖추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하여 베풀어 주셨던 위대한 은총을 기렸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내려 주신 말씀들을 다시 상고하고 반복하여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바로 이러한 형태의 예배가 설교를 수반한 기독교 예배의 시발이라고 하겠다. 말씀 중심의 회당 예배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자주 회당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기록들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펴시고 설교를 행하셨던 일이다(눅 4:16-28). 이런 형태의 예배와 말씀은 랍비들에 의해서 중요한 종교 행사로 계속되었다. 그 후 사도들은 회당에서 추방당하기 전까지 성례전과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를 회당과 개인 가정에서 가졌다(행 2:46). 이렇듯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말씀과 성찬성례전의 균형을 이상적으로 유지해가면서 기독교의 터전을 굳혀갔다.
2) 중세 교회의 예배와 설교
중세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초대 교회가 물려준 말씀과 성찬성례전의 균형 잡힌 예배를 지속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기록을 남겼다. 말씀보다는 성체성사의 지나친 신비와 미신적 신앙으로 교인들을 이끌어 갔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차단시킨 예전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들은 교회의 예배 구조를 성례전 중심으로 장식했으며, 상대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는 구조를 외면해 버렸다. 그들의 교회는 회중과의 거리를 더욱 멀리한 채 오직 장엄하고 신비한 모습의 재현에만 초점을 둔 성전 건축과 교회 구조를 고집했다. 심지어 성찬대 위치까지 동쪽을 향한 벽에 붙여 사제의 독무대로 만들었고 집례의 모든 언어는 회중이 알지 못하는 라틴어로 진행하여 말씀 없는 예전으로 전락시켰던 비극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 전달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이들의 미사에 대해 일리온 존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제는 제단을 향해 서서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정도의 크기로 말하였다. 더구나 라틴어로 예배를 진행했기 때문에 회중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음악을 포함한 예배 순서 전체가 외국어로 진행되었고, 설교는 점차 쇠퇴하다가 마침내는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예배에서 말씀이 사라진 중세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성직자들의 탈선을 가져오고 말았다. 나아가 한 시대를 암흑의 세계로 몰고 가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성직자들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새로워지고 거기서 메시지를 받아 자신의 회중에게 전해 주어야 할 막중한 사명을 저버려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역사적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곧 하나님의 교회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섬기는 의식과 함께 그 의식 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개혁자들은 교회의 참 모습을 말할 때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지는 예전이 있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 말씀의 참된 설교라고 우리는 고백하며 확신한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책이 진술하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둘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이다. 이것으로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결합되어 그의 마음에 새기게 된다."
3) 예배 본질로서의 설교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dialogue)이다"라는 존 헉스터블(John Huxtable)의 말을 제 1강으로 인용한 바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드리는 일방적 행위가 아니며, 그 반대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만을 받기 위한 행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인간이 응답하는 대화적 관계 속에서 이룩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참 교회란 암흑기를 달렸던 중세 교회처럼 단순히 희생의 제물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만을 놓고 제의만을 반복할 수는 없다. 환언하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그 곳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 세상 속에 파견되는 것이 참 예배의 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드리는 예배'로서 초점을 맞추었다고 하겠고, 개신교의 예배는 드리는 행위와 함께 '말씀을 받는 예배'로서의 특유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은 단순한 인간의 사고나 경험의 전달이 아닌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좀 더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설명을 붙인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전달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인간을 찾아주신 하나님의 자기 수여(self-bestowal)라고 하겠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이런 관계를 가리켜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전달"이라는 말을 했다. 포사이드(P. T. Forsyth)는 이 말씀의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인간들에 의해서였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은 참 신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곧 살아 계신 말씀으로 선을 이룩하기 위해 오셨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과 화목케 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편을 오늘의 예배 현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사건에 두고 있다. 하나는 말씀이 선포되어진 설교이며, 또 다른 방편은 성찬성례전이다. 때문에 개혁 교회의 본성은 언제나 말씀이 없는 성찬성례전이나 성찬성례전이 없는 설교만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과 성찬성례전인 함께 살아 있는 예배를 강조해 오고 있다.
개신교 예배의 설교는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바르게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여 삶의 현장에 효율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살아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실감케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의 사역이 살아 있는 곳에서만이 회중은 언제나 신선한 양식으로 새로운 심을 얻어 나아가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예배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 설교의 기본 이해
예배의 인도자는 단순한 사제(Priest)의 역할만을 감당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인도하는 예배의 현장에서 말씀의 종, 즉 선지자(Prophet)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막중한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특별히 말씀을 강조한 개혁 교회에서는 설교자의 자기 정체성과 그 임무를 가장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설교자로서 설교자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1) 성경에서 찾아본 설교의 이해
성경에 나타난 설교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신약 시대의 설교 사역을 이해할 수 없고, 신약의 설교 내용과 그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는 기독교의 설교 세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의 기본 이해는 성경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본질을 찾아야 한다.
(1) 구약의 설교는 순수한 하나님 말씀의 운반이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서술은 매우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말씀의 종들로 부름을 받고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말씀의 사역의 기초를 두었다. 그러한 까닭에 이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자신들의 견해나 지식을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셨고 행하셨다는 메시지 전달이 구약 선지자들의 주된 임무였다.
이러한 설교의 뿌리 때문에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말이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게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하였던 설교 사역을 좀더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생각이나 말을 구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리는 것을 주임무로 삼았다.
설교자 자신의 정체성 문제 역시 그 이해가 판이하게 다른 것을 본다. 구약의 설교자들은 자신의 직책에 대하여 때때로 후회와 싫증을 느끼며 자신의 출생 그 자체를 한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전능자의 손에 붙들려 나아가는 하나의 실존임을 깨닫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들의 입을 주관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었따. 이러한 순수한 말씀 전달의 사명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말씀의 운반자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 결과 선지자들의 설교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주체였다.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존재였다. 결코 설교의 대상(object)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자지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장중에 사로잡혀 그분의 뜻대로 말씀을 전하고 행동해 가는 것이 자신들의 살아가야 할 당연한 길임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역경이나 위험 속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용기 있게 전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2) 신약의 설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신약에서 보여 준 설교 사역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실현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즉, 그 주된 내용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그 생애와 교훈,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의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현재적이고 전체적인 사건으로서 창조 때부터 재림까지를 이어주는 사건으로 외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그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동일한 말씀을 계속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지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제 삼자의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계속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이신 그분을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단순하면서도 의미 깊은 진리를 외쳤다. 그리고 사도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절로서, 또한 그분을 대신하여 간곡하게 외치는 자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구약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사도들의 생각과 그 메시지의 주체였지 결코 대상이 아니었다.
(3) 사도들은 자신들이 외치는 말씀이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도들은 언제나 그들의 설교 사역은 단순히 인간적인 생각과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그리고 회중이 자신들이 전한 말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서술된 바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4) 성경의 설교자들의 입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붙잡힌 사자들로서 전 생애를 말씀을 외치는 데 바쳤다. 그리도 이들은 인간들의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이들은 하나님의 실체와 그분의 역사하심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즉,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리면서 오늘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알려 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의 미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려 주는 데 최선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말씀의 종들은 언제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러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입은 순수한 전달의 도구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명령을 받아 전하고 있을 뿐임을 밝히고 있다. 어느 경우도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자들처럼 "바랍니다", "축원합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라고 믿습니다" 등의 자기 주관적 표현은 없았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신앙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설교자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5) 이들은 자신들의 회중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에 전념하였다
구약이나 신약의 설교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어야 할 자신들의 회중이 있었다. 이 회중의 삶의 현장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임무였다. 그러므로 거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언제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진 때와 장소마다 그 정확성이 뚜렷함에서 입증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설교는 그날의 회중과 무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필요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회중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회중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정한 경배와 찬양과 봉헌을 드리는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2) 설교의 현재적 이해
(1)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옷을 입고 회중을 찾아와 주시는 사역이다
설교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거기에 회중의 시선을 모아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사건과 말씀을 지금 여기에 필요한 말씀으로 다시 들려주고 삶의 장에 적용시키는 설교가 살아 있는 설교이다. 본회퍼는 "선포된 말씀은 진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찾아오신 역사와 오늘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말씀으로서 자신의 회중 가운데를 걷고 계신다"고 갈파한 바 있다. 이러한 말은 오늘의 우리 예배 가운데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는 순수한 하나님의 도구임을 확인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은 그 도구를 통하여 예배드리는 무리들의 심장을 두드리며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신다. 유명한 설교학자 도널드 밀러(Donald Miller)는 설교자를 통한 설교의 현재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역동적인 사건(Dynamic event)의 일부분이다. 바로 이 역동적인 사건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하여 한 인간과의 생생한 만남을 갖게 되며 이 만남 속에서 구속의 역사를 집행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설교는 현재의 순간 속에 말씀이 육신이 되는 연속적 사건이다. 과거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오늘의 현장 속에서 살아 있는 사건으로 그 실제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설교란 살아 있는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지금 여기서' 증거하는 사역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에게 지금도 역사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절대적인 길이며 책임이다.
(2) 설교는 설교자의 단독의 행위가 아니다
칼빈은 설교자란 하나님의 위탁을 받고 보냄을 받은 대사(ambassador)로서 절대적인 말씀의 권위를 소유한 자들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설교자란 먼저 부름을 받지 않고서는 성경의 진리를 소개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소명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설교자가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으면 그 후부터 설교의 메시지를 마음대로 작성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설교를 언제나 설교자의 단독의 행위로 보지 않는 것이 설교학 이론의 기본 틀이다. 설교란 인간이 자신의 사상과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특수한 사역이다. 그렇기에 칼빈은 설교 사역을 가리켜 "신비로운 하나님의 행위"로 표현하면서 오직 성령님의 역사가 동반되는 곳에서만이 이 신비로운 사역이 생명의 말씀으로 넘쳐나게 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말들이 설령 감동을 준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생명력도, 권능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단언하건대, 능력이 인간의 혀에서 나오지 않고, 단순한 소리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나올 수 없으며, 오직 모든 능력은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사상은 바로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였던 리차드 박스터(Pichard Baxter)에 의하여 철저히 이어진 바 있다. 그가 고고한 함성을 발하던 시기는 영국 국교(Church of England)가 종교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감독정치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 있는 말씀의 운반이 제대로 이룩되지 않은 때였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잡다한 제도와 지식에 이용당하지 않고 온전히 성령님에 의하여 채워져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주여, 당신은 ...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믿게 하려고 나를 보내시렵니까? ... 오! 나를 벗은 채로 내보내지 마옵시고 그 사역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채 내보내지 마옵소서!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행하라고 명하실 때에는 거기에 응할 수 있도록 성령님으로 채워 주십시오."
(3) 설교자는 설교의 정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강단에서 혼탁해진 설교의 현장을 접할 때마다 설교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많은 설교자들은 예배 가운데서 선포해야 할 설교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 강단에서 성경을 읽고 외치면 그것이 무조건 설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예가 허다하다. 적어도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설교란 이것이다"라는 확고한 현대적 이해가 있어야만이 하나님이 그분의 도구를 통하여 원하시는 역사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설교를 간단하게 정의하기까지는 다음의 요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운반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이다. 둘째는, 그 말씀에서 주어진 메시지를 운반해야 할 선택받은 설교자이다. 셋째는, 그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할 회중이 있어야 한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브르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회중의 삶에 효과적으로 적용시키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효율적인 활용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 설교의 정의가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가슴에 언제나 살아 움직이고 있어야 바른 설교 사역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설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설교란 택함 받은 설교자가 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을 통하여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이 진리를 회중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사역은 반드시 성령의 감화하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 설교의 위기
1) 위기의 일반적 현상들
말씀이 그리워서 개신교의 예배를 찾아왔던 천주교 성도들의 모습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학도들에게 설교에 관한 훈련을 강화하고 예배를 집례한 신부들의 의무로써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명문화한 후로 구교의 예전에도 말씀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우 1970년대 후반부터 구교의 성장이 눈에 띄게 활발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개신교의 설교에 심취될 수 없는 이유와도 관계를 갖는다. 오히려 남발된 설교 때문에 "믿음이 없어지고 확신이 약해진"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틸리케(Helmut Thieliche)가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개탄할 정도로 개신교의 설교에 위기기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우리의 한국 개신교 예배 가운데서 외쳐지고 있는 설교 현장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 볼 때가 왔다. 지금껏 하나님의 종이 외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여겨왔던 설교를 향한 회중의 반응에 현저한 변화가 일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설교의 파트너인 회중은 설교에 대하여 부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지루하고 신선하지 못한 설교에 짜증을 내면서 들을 귀를 막아 버리는(switched off)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독백적인 설교에 싫증을 느끼면서 현대적 커뮤니케이션의 무지에 항의한다. 그리고 회중의 삶의 현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설교의 내용들을 그토록 애써서 경청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설교의 비극적 상황을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설교라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시키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캐나다의 교회 비평가인 피에르 베르튼(Pierre Berton)은 "오늘날의 설교는 너무나 영력이 없고, 무관하며, 지루하고, 잘못 전달되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비평들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화살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설교자의 서재나 주변에서 좀더 진지하고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설교자의 태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설교를 다시 반복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남의 설교집에 기록된 설교를 자신의 설교인 양 외치는 떳떳치 못한 설교자의 행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설교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인격, 지력, 그리고 영력에 많은 불신과 반발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 온 전통적 이해가 흔들리고 있다.
여기에 비교하여 설교자들이 오늘을 보는 눈은 어떠한가? 사나운 파도를 몰고 오는 예배적 물결이 우리 앞에서 그 파고를 더해 가는 데도 오늘의 설교자는 이 소리를 듣는지 안 듣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이제 설교는 몰락해 간다"는 무서운 지적 앞에서도 역시 설교자들의 귀는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은혜를 끼치고 있다고 믿는 착각적 자신감에 빠져 있다. "이래도 좋은가?", "이러한 상태를 어느 때까지 계속할 것인가?", "무엇이 설교의 사역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가?" 그렇기에 이제는 이러한 질문들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예배의 집례자일 뿐만 아니라 말씀의 사자이기에 받아야만 하는 심각한 충격과 도전 앞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안된다.
2) 설교자가 지닌 위기 요소
(1) 설교자의 정체성에 문제가 보인다
"나는 선택받은 설교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설교의 정의에서 이미 제기된 질문이다. 이 질문이 오늘처럼 수많은 곳에서 발생된 적이 설교 역사상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아무런 계획성 없이 대량으로 배출된 설교자들은 서로가 "말씀의 종"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오늘의 예배 현장 속에서 설교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 누가 참이요, 누가 거짓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혼미한 상태를 경험할 때가 적지 않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준엄한 분석과 책망을 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내리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이 구약의 그 시대에만 존재하고 오늘날에는 모두가 참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수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고 있지는 않을까? 솔직히 오늘의 설교 현장에서 거짓 계시와 자기 욕망에서 솟아나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떠드는 설교자들이 허다함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설교자들의 귀에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을 하라고 네게 부탁 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지 않은가?
(2) 설교자의 사역은 단순한 직종이 아니다
직업의 전문화라는 차원에서 설교자도 설교 전문인으로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의식주를 위한 직업인으로서 설교자가 될 수 없다. 만일 생계를 위한 직업적인 설교자가 된다면 그것은 가장 위험한 독소를 품고 있는 직업인이다. 특별히 그 설교의 행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현장에서 수행된다면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으로부터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다음의 말씀에서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러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의 설교자들은 스스로의 존재 인식을 재평가하도록 독촉을 받는다. 자신의 물질적 필요나 욕구를 위한 길이라면 거짓말을 지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탈선된 설교자들이 우리의 주변에 흔히 나타난다. 자신의 육적 조건의 향상이라면 어떤 것과도 서슴없이 타협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이름 밑에 "설교의 아첨"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현상이 우리의 교회 안에서 발생되고 있다는 데 스스로의 책임을 새삼 느낄 수밖에 ㅇ벗다.
설교자란 칼빈의 말대로 말씀의 전달을 위탁받은 대사(ambassador)이다. 소중한 임무를 맡은 사자로서 보내신 분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달하는 것이 그 임무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란 "선택받은 존재"라고 바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신학자들이 말을 하고 있다.
다니엘 바우만(Daniel Baumann)은 "설교자라는 직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직업들 가운데 단순히 선택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3) 소명에 따른 책임이 막중하다
사실상 설교자란 그 표준이 고상하고 특별한 요구 사항을 지켜야 하는 가장 이상적인 소임의 수행자들이다. 때로는 이것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 말씀이 단순한 인간 차원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언제나 현실적이며, 그 말씀의 전달자가 오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원이라는 역사를 그 말씀이 이끌어 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란 성별된 삶의 요소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설교자가 되는 것이 결코 우발적인 선택이 되어서는 안되고 또한 직업의 선택으로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구별된 은사를 오늘의 말씀의 종들에게 주었고, 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다는 소명 의식을 깨닫고 나아가기를 촉구하시고 계신다. 여기에 대하여 제임스 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설교자를 부르심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함이다. 그 메시지는 한 개인 개인에게까지 가장 숭고한 체험을 가져와야 한다. 이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들에게 계시된다."
여기서 바로 설교자는 부름 받은 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부름(calling)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부름은 자신을 예언자의 용기와 남들이 알지 못하는 확고 부동한 책임감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 현장에 있는 설교자는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오늘을 사는 존재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강단에 서는 도구로서 존재하고 외칠 뿐이다.
(4) 높은 수준의 인격과 삶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엄숙한 예배의 장에 서 있는 설교자가 깨닫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의 인격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의 한국 교회는 어느 나라보다 깊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마다 자신들을 이끌고 가는 사제의 높은 도덕률을 요구한다. 이러한 문화적인 환경 가운데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야 할 성직자는 언어와 행동과 마음가짐 등의 인격의 완전성(integrity)을 보여 주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생각하면 한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 앞에서 인격의 표준인으로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인격의 신실성은 곧 외쳐야 할 말ㅆ므의 사실적 증거라고 볼 때 더욱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설교자들에 대한 불신도 바로 이 문제의 실천이 미흡한 데서 발생된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맑은 양심의 실천을 지적하고 외친 설교자가 오히려 자신은 오염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설교의 위치를 멍들게 하는 큰 원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5) 영적 생활과 학문적 생활이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개신교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서 진행된 설교는 단순한 인간의 말이 아님을 늘 강조해 오고 있다. 이 말씀은 설교자의 입을 도구로 사용하여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차원이 다른 사역의 수행에는 설교자의 단순한 지적인 기능만 가지고 이룩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설교자의 맑은 영성과 풍부한 지성이 겸비되어야 한다.
언제나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뜨거운 관계를 갖지 못하는 설교자의 메시지는 회중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한다. 화려한 언어의 수가는 요란하나 깊은 감동을 안겨주지 못한다. 드와이트 스티븐슨(Dwight Stevenson)이 "설교가 자신이 외치고자 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는 아무에게도 그 말씀을 외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설교자의 영적 생활이 살아 있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이 영성은 충성스러운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과 마음의 교류를 이어가는 기도와 명상과 함께 말씀의 경청과 묵상에서 지속되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설교자의 학문적 생활의 지속이다. 칼빈의 말대로 설교자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잘 알려진 교훈이다. 현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고 그 말씀을 삶의 자리에 적용시켜 주어야 할 설교자가 신학, 역사, 철학을 비롯하여 현장에 대한 정보의 수준이 너무 낮을 때 발생하는 잡다한 문제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현대 교회는 과거와는 달리 자신들의 교육 수준을 생각하면서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설교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대의 한국교회는 매우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회중 앞에 서게 되는 설교자는 언어와 표현의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말씀의 적용 형태와 자료 등에도 풍부한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설교자가 낮은 수준을 가지고 일방적인 외침을 고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기대한 것만큼 결실을 거둘 수 없다.
이러한 "영적인 바퀴와 학문적인 바퀴를 오늘의 설교자들은 얼마만큼의 균형 속에 굴러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설교자의 주변에서 듣게 되는 물음이다. 최근에 이르러 매주일 말씀을 전하는 자기네 설교자에게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말이 들린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거나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 자기네 설교자는 수 없는 책을 읽고 최고의 지식을 소유한 반면, 기도하는 모습이나 기도의 시간이 보이질 않는다는 한탄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설교자의 삶은 곧 자명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는 설교자가 된다든지, 아니면 해박한 지식은 있으나 신령함이 없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균형 잡히지 않은 설교자의 양면성은 시간에 쫓긴 현대의 목회 현장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균형 잡히지 않은 두 바퀴를 끌고 오늘의 설교 사역을 계속 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이 발생하게 된다.
3) 회중이 지닌 위기 요소
설교의 궁극적 책임은 설교자에게 있다고 할 때 아무도 그 말에 항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제까지 설교는 목사의 주된 임무였고 그 준비부터 전달까지 전체가 설교자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설교를 듣는 회중은 채권자와 같은 자세로 "은혜 있는 설교의 생산"만을 강조할 뿐 "은혜 있는 설교를 위한 자신의 책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질문이 제기된다. 성경에서 그 수많은 선지자들의 증언이 모두 외면당해 버린 것은 선지자들의 외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 눈물로 하나님의 진노와 조국의 멸망을 외쳐도 그 외침을 독백으로 끝맺게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의 사역은 그 선포자의 부족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앞에 조롱과 멸시의 눈길을 던진 채 돌을 든 그 무리들의 책임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 진정한 설교는 양방관계에서 이룩된다.
예배의 현장은 하나님과 회중이 서로 소통하는 현장이다. 하나님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바로 예배이다. 특별히 설교자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로서 말씀을 회중에게 운반해 주는 현장이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지금껏 설교의 성패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전적으로 질것인가에 대한 문제의 대답을 회중에게는 전혀 묻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이 연구 발전됨에 따라 듣는 회중의 책임이 설교의 사역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이론이 설교학에서는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있다.
그 동안 회중은 예배 시간에 자신들이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은 설교자가 외치고 있는 메시지가 들을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든가 또는 전달의 방법이 회중을 붙잡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날카로운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필자는 설교학 교수로서 그 일차적인 수긍과 책임을 절감한다. 그러나 다음의 현상을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하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즉, A라는 설교자가 B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C라는 채널을 통하여 D라는 회중에게 선포했을 때는 지극히 거부적인 반응과 함께 의미의 만남(은혜)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동일한 설교자가 동일한 메시지와 채널을 가지고 E라는 회중에게 선포했을 때에 의미의 만남이 발생하고 감격적인 응답들이 회중 가운데서 일어났다면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이런 사례의 경우도 그 성패를 설교자의 책임으로 모두를 미루어 버려도 좋은 것인지 우리는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에 의하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sender), 그 메시지의 내용, 그것을 전달하는 채널(매체), 그리고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receiver)들이 설교의 현장에서 동일한 비중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클라이드 리드는 그의 책 '설교의 위기'에서 다음과 같은 솔직한 고백을 하고 있다.
"설교에는 근본적으로 잘못이 없다. 그러나 회중이 진심으로 경청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그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사실화될 때 그 복음을 들으려 가슴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 생활에 바른 지침을 주는 따가운 말씀은 아예 외면한다."
이상의 말은 자신의 의미와 메시지의 의미가 만나는 지점을 향하여 노력하는 회중이 있는 곳에서는 감격적 은혜가 발생되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강단을 향하여 매서운 비판적 눈만을 뜨고 있는 회중에게는 그 소중한 메시지와의 만남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말해주고 있다.
루엘 하우(Reuel L. Howe)의 "절박감을 느끼면서 듣는 사람이 절박감을 느끼는 설교자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은 바로 회중의 역할이 설교의 사역에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2) 한국 교회 회중은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국교회의 설교 현장을 좀더 중시해 볼 때, 우리는 심각한 문제들을 수없이 발견하게 된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 전파될 때의 메시지와 오늘의 메시지가 얼마나 심각하리만큼 거리감이 있는지를 뜻 있는 성도들은 잘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총 앞에 어떻게 감사하고 주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를 현재적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조명하고 실현해야 할 것인가를 외치던 메시지가 오늘의 강단에서는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설교자들의 변질 때문이라고 설교자들에게만 그 책임을 전부 돌릴 수는 없다. 우리는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도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로써 우리는 가슴을 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예언적 설교의 현장에는 교인들이 모이지 않고 "축복의 성회", "신유의 성회", "은사의 성회"라는 간판이 달린 곳에는 성도들의 발길이 무수히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실례로 들 수 있따. 오늘의 성도들이 내게 주신 은총 앞에 무엇을 보답하며 그 영광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에 대한 관심보다 무슨 복을 더 받아 어떻게 더 잘 사느냐에 더 많은 정력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보다는 축복의 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단만을 찾는 성도들이 이곳저곳으로 밀려다닌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없이 들어왔고 또 목격해 왔다. 바로 이런 사연들이 오늘의 설교를 어둡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중의 기복 위주의 취향에 따라주지 않는 설교자는 외면당하고 떠나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회중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설교 현장을 위기로 만들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교훈적인 설교는 너무도 딱딱하여 듣기를 거부하는 양상을 나타내는가 하면 죄를 지적하면서 바른 길을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가 앞에는 나타나지조차 않는 매정스러운 인상을 본다.
설교에 대한 신학적 훈련을 받고서 강단에 서 있는 말씀의 종을 자기 고용인처럼 비판하면서 오히려 설교의 선생 역할을 서슴없이 감당해 가는 오늘의 회중을 비롯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삶의 현장을 더욱 삭막하게 살아가는 무책임한 성도들을 볼 때마다 실로 가슴 아픔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된 회중의 방향을 끝내 외면해야 하는가? 눈에 벗어난 설교자가 되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바른 길을 제시하는 목자가 하나님의 뜻을 펴는 데 중요한 사역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입을 열어 회중의 도움과 챰여를 외쳐야 한다.
(3) 회중이 맡아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것들인가?
* 먼저 능동적인 참여 의식의 발로이다
설교의 현장에는 두 형태의 회중이 앉아 있다. 먼저 자신에게 설교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회중의 형태이다. 설교자의 남다른 내용과 화술과 전달이 자신을 움직여 주기를 기대하는 수동형의 회중이다. 다른 하나의 형태는 스스로 설교자와 함께하면서 선포하고 있는 말씀 속에 스며들고 거기서 자신이 필요한 양식을 추구하는 능동형의 회중이다.
설교의 장에서 요구되는 것은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5)라는 말씀을 소화하고 구하는 자세이다. 언제든지 "설교를 들어주는 존재"로서 앉아 있는 방관자의 자세 속에서는 결코 말씀과 자신과의 만남을 이룩할 수 없기에 이상과 같은 능동적인 자세는 필수적이다.
* 이러한 능동적인 참여는 단순한 기다림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예배 가운데서 말씀과의 진정한 만남은 단순한 자신의 의지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이다. 즉, 자신의 의지를 초월하는 힘, 즉 성령님의 도움에 의지할 때 더욱 효과적인 말씀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회중은 말씀과의 만남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와 함께 자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신에게 말씀을 들려줄 설교자를 도구로 삼으시사 자신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들려 달라는 기도와 함께 출발할 때 거기서 능동적인 참여의 출발이 있게 된다.
* 회중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준비하고 제공해야 한다
예배에 임한 회중이 얼마나 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따라 은혜의 척도가 달라진다. 모든 삶의 장은 인간들의 마음을 헝클어지게 하고 있다. 한곳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과 육신의 세계에 좀처럼 공간을 주지 않는다. 회중의 심리 상태와 육신의 상태를 점검해 볼 때 절대수가 설교를 듣는 데 방해가 되는 선점적 사건들(preoccupied affairs)에 의하여 점유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현실로부터 설교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 해방시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잡다한 사연들이 점유하고 있는 마음속에 말씀이 뿌리내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설교자를 향한 격려의 자세가 필요하다
거의 모든 회중은 설교자가 완벽한 메시지를 성공저긍로 자신에게 전달해 주기를 기대한다. 만일 설교자에게서 준비의 부족이나 미약한 전달이 보이면 실망의 눈길을 쉽게 보이는 것이 설교 세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실망과 경멸의 감정이 발생되는 현장에서는 메시지와의 만남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록 설교자가 복음의 선포에 미숙한 면이 많더라도 경멸하는 태도보다는 격려의 손길을 펴야 한다.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면서 성장하는 설교자가 되도록 친절한 격려가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설교자를 아끼는 정성이 있게 되고 애정이 가게 된다. 이러한 관계 형성이 이룩된다면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큰 힘을 부여하게 된다.
* 구수한 대화에는 고개를 들고 말씀의 전개에는 고개를 숙이는 태도는 삼가야 한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고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시작 될 때는 교육 수준이 매우 낮은 때였다. 설교자들은 이러한 회중에게 어떻게 하든지 흥미를 북돋우면서 설교를 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 방법은 자연적으로 흥미 있는 예화의 활용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은 설교란 재미있는 예화를 많이 사용해야 성공한다는 의외의 공식을 형성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자연적으로 회중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에는 머리를 들고 순수한 말씀의 전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모순된 설교의 경청 자세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참된 설교와의 만남을 이룩하는 데 매우 불행한 현상이다. 한국교회 회중은 어서 속히 이러한 부끄러운 자세를 벗어나야 한다. 설교를 듣는 회중의 바른 자세는 자신의 시선을 설교가 끝날 때까지 설교자에게 고정시키고 자신에게 흥미가 있는 부분이나 없는 부분이나 끝까지 경청하는 일이다.
* 설교의 현장에서 회중은 진지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예배보다는 집회의 성격을 가지고 한 세기를 지속해 왔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그 동안 설교는 부흥회와 같은 집회를 통하여 구령 운동과 회개 운동을 일으켜 한국교회의 부흥에 큰 몫을 감당한 바 있다. 이러한 집회에서는 회중의 감정이 흥분될 수 있고 통회의 기도와 함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예배의 현장에서는 기쁨과 감사의 감정을 좀더 진지하게 지속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설교를 통하여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지나친 흥분과 같은 감정의 표출은 말씀을 진지하게 음미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설교자가 설교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실로 고단한 설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외국 교회와는 달리 설교자에게 요구하는 일들이 많다. 심방을 비롯하여 각종 행사를 위해 시간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목사의 본래 사명인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 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는 목회 환경이다. 거기에 더하여 매주 감당해야 하는 설교의 횟수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 정도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설교자들은 설교 준비의 부족을 느끼게 되고 때로는 심한 갈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설교자의 사정을 이해하는 회중은 설교자가 설교 준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설교자는 더욱 성실한 준비와 책임 의식을 갖게 된다.
* 설교자의 설교 횟수를 줄여 주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 앞에 자랑할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각종 예배와 기도회를 위한 모임의 열의는 어느 나라의 교회도 따를 수 없는 부분이다. 문제는 모임마다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문제이다. 설교학에서는 정상적인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소요해야 할 시간은 최소한 20시간이라고 규정하고 그 만큼의 준비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설교 횟수는 한 주에 한 편의 설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목회자가 최소한 한 주에 3편 이상의 설교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설교자에게 계속적으로 신선한 말씀을 전달할 만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자료가 무한정 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의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설교의 신선미는 감소된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자료 빈곤은 피할 길이 없다. 이러한 설교자의 고뇌를 이해하는 회중은 설교자에게 설교의 주문을 줄이고 알찬 설교를 위한 준비의 시간을 갖도록 해줌이 당연한 상식이다.
* 습관적인 아멘의 응답은 삼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설교 현장에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설교자가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바랍니다", "원합니다"와 같은 종결어미를 사용하면 회중은 무조건 "아멘"의 함성을 지르는 현상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설교자들에 의하여 요구되어진 데서 출발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도 어떤 설교자들은 큰소리로 아멘을 해달라는 요구를 한다.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결코 비성경적이거나 탈선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적으로 설교자의 설교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라면 이것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의 경우는 주어가 하나님이시기에 이 때의 아멘은 하나님을 향한 아멘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종결어미의 실례들은 모두가 그 주어를 설교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회중의 "아멘"은 설교자의 말에 동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기분을 고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회중은 습관적으로 아멘을 유발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면서 아멘을 해야 한다.
루터는 "설교란 설교자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에 의하여 이룩된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의 회중의 능동적이고 협조적인 참여는 언제나 훌륭한 설교의 전달을 받게 된다.
한국 교회의 강단에 새로운 장을 펼쳐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설교 사역은 이제 회중의 태도를 진지하게 진단해야 될 시점에 이르렀다. 설교의 성패가 설교자에게만 책임지어졌던 지난날의 의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말씀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는 길은 회중의 도움과 참여 속에서 완성된다. 말씀과의 참된 만남을 위하여 능동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회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력 있는 말씀이 다가와 결실을 맺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설교자를 선택하여 도구로 삼으시고 말씀을 받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회중을 예배 때마다 찾으신다. 예배 가운데서 설교를 통하여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은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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