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ODWILL CHURCH/예배학

예배학 #6) 종교개혁과 예배

 

* 예배와 개혁의 필연성

 


종교 개혁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중세 시대의 예배의 장에서 이룩된다. 그 이유는 종교 개혁의 완성이 예배의 장을 통해서 모든 교회가 호흡을 함께 할 때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신학 논쟁을 지켜보고 거기에 동의한 발길들이 개혁의 완성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종교 개혁의 확산과 결실은 예배의 장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기적적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그 시대의 현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퇴폐의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고 "패역한 세대"로 전락된 중세의 교회와 사회의 어두움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

"무엇 때문에 중세 시대가 그토록 어두움 속에 방황하였는가?" 하는 질문의 근본적인 원인들이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어지고 있으며, 그 평가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 먼저 신학의 부재와 교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인 예배의 현장이 그 의미를 잃고 하나님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지 못한 데서 이런 결과가 파생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언어속에 진행된 미사에서 회중은 자연히 하나의 구경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맹목적인 헌신과 신비의 강조는 예배자들을 지극히 피동적인 존재들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더 나아가 미사의 집례 행위는 사제들의 독점적인 무대로 차차 변질되어 갔는데, 그 속에서 사제들의 절대권이 지나칠 정도로 숭상을 받게 되었다. 특별히 미사의 절정을 이루는 성찬의 순서에서 성물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한다고 하여 신비한 극적 장면의 연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현장과 단절된채 독백적으로 읽혀지거나 또는 생략해 버리는 잘못이 편만해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중세의 교회를 힘없는 교회로 전락시켜 갔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던 그 세계의 신앙과 윤리 질서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부재하였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무리들이 시들어져 갈 때 주의 몸된 교회가 병들고 인간의 심성이 부패해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뼈아프게 경험하게 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그 출발에 있어 신학의 개혁을 목적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개혁의 필연성이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서 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교회가 존재하는 일차적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음을 인정할 대 자연적으로 예배란 교회 기능의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바뀌어지거나 희미해질 때 언제나 교회는 문제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채찍을 받았다. 이런 차원에서 유명한 예배 신학자인 윌리암 맥스웰은 그의 명저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 개혁과 예배의 상관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16세기 초의 서방 교회에서 집례된 성찬은 하나의 연극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은 성찬으로서보다는 화체의 기적으로 절정을 이루었고 순수치 못한 미신적 경배 속에 행하여졌다. 미사는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행해져 청취를 불능케 했고..... 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되었으며 대부분의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하엿다. 성경 말씀이 봉독되어져야 할 부분은 성자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은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기에 종교 개혁은 시급하고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문제점들은 하나님ㅇ르 섬기는 교회가 그 본 궤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하나의 촉진제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지적되어야 했던 예배의 무질서는 종교 개혁의 필연적 발생을 서두르게 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혁의 불씨는 예배하는 공동체 가운데 뿌려졌고 거기서 개혁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예배와 개혁자들

 

16세기 초반의 로마 교회를 보면서 개혁의 필연성을 절감한 것은 수많은 개혁자들 및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한 신학의 정립과 교회의 구조적 개혁을 소원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루터와 칼빈을 들 수 있다. 루터는 이 땅에 복음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주장과 함께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 칼빈은 초대 교회가 살았던 그대로 성도들이 성경에 입각한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말슴 중심의 교회로의 새 출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맥락을 같이 한 개혁자들은 그 출발부터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미래의 새로운 교회를 바라보며 개혁의 전선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이 가진 예배에 대한 견해 만큼은 일치점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지난 천여 년을 지속해 온 예전의 모든 절차와 내용을 그대로 지키면서 부분적 수정을 하기 원했는가 하면, 쯔빙글리와 같은 계열의 개혁자들은 교회를 병들게 한 당시의 미사를 대폭 간소화하여 말슴과 성례에만 초점을 두었던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재세례파와 같은 개력자들은 정기적인 예배 자체마저 부정해 버린 채 개인적인 신앙 생활의 실현으로만 만족하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형태와 내용, 그리고 해석 때문에 개혁의 대열은 분열되었고 각각 노선을 달리한 교단의 출현이 뒤따르게 되었다.


1. 개혁자들의 공통적 쟁점들

 

이제 이토록 중요한 예배 문제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어떤 면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하여 일체감을 얻었으며, 또한 무엇에 대하여 견해를 달리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개혁자들의 일관성 있던 쟁점들이 여기에서 새로이 조명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오늘날 각각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교단들의 다양성을 우리가 이해하고 극복해 가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먼저 개혁자들이 예배에 관계된 문제들 앞에서 입장을 같이 했던 부분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찾아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로마 교회가 성찬성례전만을 고집하는 미사를 반대하는데 개혁자들은 노선을 함께 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는 '미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그 미사는 순수한 성찬성례전만을 갖는 예전이었다. 말씀이 없는 성찬성례전의 예배 현장은 그 양태가 이미 문제성을 가지고 있었다. 미사는 신비한 사건의 발생만 거듭되는 현장으로 오도되어 버렸고, 거기서 많은 성도들은 병 고침을 비롯한 마술적 결과들을 기대하는 그릇된 신앙이 발생되고 있었다.

루터는 그의 유명한 글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이러한 성찬성례전의 모습을 통탄하여 "거룩한 성찬이 박람회, 선술집, 그리고 상업의 시장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루터의 지적 앞에 어느 개혁자도 반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는 모두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인간들이라는 기본적 입장을 지닌 개혁자들의 교리는 성찬이 구원ㅇ르 매입하는 합법적 방편으로 활용된 미사의 풍토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2) 로마 교회가 주장하고 지키고 있던 성찬의 화체설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로마 교회는 미사 가운데 행해진 성찬에서 그 성물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성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성물에 자동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미사의 참여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믿음을 소홀히 하는 문제를 몰고 왔다. 오직 보이는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그 성물을 받을 때 자신의 육신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편만해 있었다. 여기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믿음이 이러한 허황된 미사의 진풍경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음에 함께 개탄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시들어져 간 믿음의 핵심을 찾는 데 뜻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3)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한 미사를 한결같이 지적하고 나섰다

그들은 초대 교회가 언제나 말씀과 성례를 동반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말슴이 없는 성례전 의식에 경종을 울려 주었다. 개혁자들은 이 같은 의식이란 단순한 마술적 연기에 불과하다고 공격하면서 말슴이 선포되어지는 예배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예배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의 삶의 방향을 이끌어 주는 사건이 되는 예배가 될 때 그것만이 참된 예배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총을 말씀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예배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가 예배마다 있어야 한다는데 개혁자들은 그 의견을 함께 하고 있었다.

 

(4) 모든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국어로 집례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중세 교회는 회중이 어떤 언어권에 속한 어족인가 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라틴어만을 사용하는 모순을 반복하고 있었다. 칼빈은 이처럼 알지 못하는 언어로 집례되는 미사를 가리켜 "마술사들의 주문만 외어지는 곳"이라고 혹평하였다.
회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집례되는 예배 예전은 회중의 동참이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감정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예배로 인식되어 결국 회중은 형식만을 구경하게 되었다. 모든 언어를 신성하게 인정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만이 성스러운 예배 언어로 인정되는 모순은 개혁자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5) 하나님과 예배자들의 중간 존재로 군림한 사제의 위치를 부정하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중세 교회에서 성직자로 활동한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고해성사와 예배 예전의 집례에서만 성직자들의 권위가 높게 행세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와 국가가 일치된 정치 구조에서 그들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섬기는 사제적 자세의 본분은 감춘 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군림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고해성사를 통하여 성도들의 죄를 청취하고 그것을 오용하는 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맹종을 반대하는 일에 모든 개혁자들은 하나같이 결속되었다. 그 결과 만인 사제론이 나왔고 이로 인해 개혁의 진전에 일단의 공헌을 하기에 이르렀다.


 

2. 분열을 초래한 개혁자들의 독자적 주장들

 

모든 개혁자들은 이렇듯 긴요한 문제를 발굴하고 그에 대한 개혁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투쟁하였다. 로마 교회의 막강한 힘 앞에서도 개혁을 위한 불굴의 노력을 경주하였음은 실로 기독교 역사의 자랑스러운 발자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개혁자들마다 사상적 배경과 활동 지역이 달랐기에 그들의 주장도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는 하나로 될 수 없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들이 끝내 뜻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쟁점들은 크게 두 가지 조목이었다. 그 하나는 예배의 형태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성찬성례전의 해석 문제였다.

 

(1) 독자적 형태를 취한 예배 형태

개혁의 기치를 드는 데는 모두가 대열을 함께 하였으나 막상 개혁의 성공과 더불어 이어져야 할 예배의 현장에서는 서로가 다른 예배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각각 다른 국가와 교회, 그리고 신학적 배경이 그들의 예배 내용과 형태를 동일하게 묶을 수 없게 하였다. 여기서부터 개혁자들은 한 길을 갈 수 없는 처지에 처하였고, 결국 서로가 개혁이라는 동일한 지붕 밑에 각각 다른 살림을 꾸려야 했다. 그 내용을 좀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계와 성공회 계열이 펼친 예배
이들은 지금껏 전래해 온 예전의 지속을 고수하면서 부분적 수정만을 행하기 원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용 중이던 미사의 형태나 내용에 대한 큰 변화를 원치 않았으며, 단지 미사 속에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씀을 선ㄴ포하고 겅례전을 집례함으로써 일차적 만족을 얻으려 했다. 이러한 사실은 루터의 계열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가 한때 미사에 대한 전면 부정을 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을 적에 그의 계열이었던 멜랑히톤이 153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찰스 5세에게 그들의 입장을 천명키 위하여 작성했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그 대표적인 실증이다. 그 내용의 일부에서 자신들은 더욱 진지하게 미사를 드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의식에 변동을 가져온 것도 극소의 부분이라는 것을 누누이 밝혀 말하고 있다. 이렇듯 미사에 대해 보수적 태도를 취한 루터계의 개혁은 예배 예전의 전통성 계승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함께 취했던 계열이 바로 영국의 성공회였다. 그들은 헨리 8세에 의하여 비록 로마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취하였으나 예배만은 결코 특별한 변화를 주려 하지 않았다. 물론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강력히 이어받은 에드워드 6세의 통치에 이르러서는 미사라는 어휘의 삭제를 비롯하여 성직자 의상의 폐지, 성찬 제단의 위치 변경 등 부분적 수정이 있었지만 오늘의 겨혁 교회 예배의 안목으로 볼 때는 가톨릭 미사의 보존이라는 인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 그대로이다.

 

둘째, 스위스의 취리히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예배의 개혁을 주도했던 쯔빙글리와 그 계열이 펼친 예배

이들은 루터계와 전폭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측으로서 미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본 정신을 갖고 개신교의 새로운 예배를 주창했다. 그는 루터처럼 경험적 신앙에서 출발을 했다기보다는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고 인문주의 학문으로 기초를 닦은 지극히 합리주의적인 개혁자였다. 그는 개혁의 출발 과정에서는 대단한 조심성을 가지고 신학과 설교를 진행시켰으나 개혁의 중반기부터는 루터보다 훨씬 강렬하고 직선적인 결단을 발휘하고 종교 개혁을 추진했던 과감한 인물이었다.

쯔빙글리는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던 일체의 신조나 예전을 부정해 버리는 극단적 개혁의 주도자로 등장했다. 1525년 그의 무리들이 드린 예배에서 그들은 음악을 모두 배제하고 시편의 교송으로 대체했으며, 봉헌의 기도나 중보의 기도마저 사용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하여 매주일 가졌던 성찬성례전을 폐지하고 이를 1년에 4번 집례토록 했으며, 그 의미도 기념적 성찬으로 제한시키는 예배의 내용을 주장하여 그의 교회에서 직접 실행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1523년 '미사의 법규에 대한 공격'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자신의 예배관을 피력했고, 그후 1525년 '주님의 만찬의 실제 활동'이라는 책을 통하여 지금껏 지속되었던 성찬성례전의 존엄성을 격하시키는 새로운 이론을 폈다. 이 책은 그의 주장을 따르는 개혁 교회의 지침서가 되었으며, 기독교가 본래 가졌던 성찬성례전과 예전의 변혁을 기하는 데 큰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개혁 방향은 눈에 보이는 예전의 형식이나 경건의 태도를 경시하고 오직 성령님을 통한 믿음의 성장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안의 십자가를 포함한 모든 상징물들을 철거하면서 교회의 상징마저 거부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의 흔적은 지금도 그가 목회하였던 취리히의 교회에서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개혁 행동을 가리켜 맥스웰을 비롯한 예배 신학자들은 그의 예배를 가장 미흡한 개혁 교회 예배 내용이었으며, 가장 슬픈 영향을 후대에 남겼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셋째, 예전이 없이 말씀만을 추구했던 제세례파의 예배

이들은 개혁파들 중에 가장 급진적인 자세로 예전에 대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 계열이었다. 이들의 초기 지도자는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을 비롯하여 후기의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 1498-1525)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에배에서 일체의 의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공중 예배의 필요성마저 인정하지 않는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 생활이란 그날그날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과 수난의 길을 걷는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최우선적인 강조점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상고하고 말씀에 따라 교훈을 명상토록 하는 습관을 형성시켜 주었다. 이들은 개혁자들의 예배가 초대 교회의 순결성을 상실했다고 규정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의존한 예배를 강조하였다.

또한 지극히 비공식적인 주님의 만찬이 예배의 전부였다. 즉, 그들은 매우 비예전적인 신앙 생활을 즐겼던 부류였다. 이 재세례파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했으며, 마침내 국가와 유관한 교회의 출석을 거부하고 완전한 주유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로 기치를 들고 나갔다. 대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모이면서 초대 교회의 은사를 사모하는 집회를 생성시켜 놓았다.


넷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부처, 칼빈, 낙스의 예배

루터와 쯔빙글리, 재세례파의 교회들이 보인 예배의 양극적 주장에 대해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나섰던 개혁자들이 있었다. 이 계열의 주인공들은 스트라스부르크를 중심한 마틴 부처(Martin Bucer), 존 칼빈(John Calvin),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와 같은 개혁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가톨릭 미사를 대부분 계승한 루터교의 문제점과 지나친 개혁을 주장한 쯔빙글리와 재세례파의 입장 차이라를 최대한 좁힌 예배 예전을 개신교의 예배 속에 이행함으로써 사실상 개혁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부처와 칼빈은 성찬성례전과 말씀을 예배의 구심저믕로 하고 회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춤으로써 초대 교회의 복음적 예배 의식에 접근했으며, 교회의 전통적 감각을 살리는 예배 예전을 마련하였다.

이 예배의 형태를 가리켜 맥스웰은 "정신적으로는 복음적이며 형식적으로는 가톨릭적인 이 예배는 개혁 교회의 프로테스탄트 예배와 로마 교회의 중세적 의식 중심의 예배에 가교적 성격을 띤 예배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내 많은 개혁자들이 이 예배의 예전을 공감하고 그들의 예배 현장에서 직접 사용하였다. 특별히 존 낙스는 이 예배에 극히 부분적인 수정만을 가한 채 스코틀랜드 장로교 예배의 예전으로 사용한 바 있다. 이 예배 순서는 지금도 오늘의 개혁 교회들이 사용하는 예배 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2) 성찬성례전의 교리와 마르부르크 회담의 결렬

다음으로 개혁자들을 함께 묶을 수 없었던 중요한 제 2의 쟁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찬성례전의 논쟁이다. 교회의 개혁이 아무리 세차게 이룩되는 현장이라고 할지라도 성찬성례전에 대한 자신들의 신학적 해석까지 바꾸어 가며 공동 보조를 취하고자 한 개혁자는 없었다. 보다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성찬성례전 해석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극렬히 고집하고 있었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결렬의 아픔을 겪었던 쓰라린 사건 하나가 다음의 경우었다.

1517년 종교 개혁이 시작된 이래 성찬성례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개혁자들의 관심과 논쟁의 극치는 역시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당시 개혁의 두 주류였던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성례전 논쟁이 역사적으로 너무나 치열했으며, 종교 개혁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성찬성례전 논쟁은 개혁자들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파열시켜 버렸고, "자기 교회의 형성"이라는 분열의 슬픈 기록을 가져오게 했다. 이들이 가진 역사적 논쟁의 현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개혁자들이 성찬성례전에 대하여 갖고 있던 관심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게 될 것이다.

 

1529년 10월 초, 종교 개혁의 막후 공헌자였던 헤스의 필립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연방 체제를 확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개혁파의 중요한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에 소집했다. 거기에는 독일 계통의 로터와 멜랑히톤, 그리고 스위스 계통의 쯔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를 중심으로 60여 명이 모여들게 되었다. 개혁 교회의 공통된 교리 형성을 위한 이들의 기탄 없는 의견은 한때 교착 상태에 빠져드는 듯도 했으나 필립 공의 요청에 의하여 루터가 준비한 15개 항 중에 14개 항을 무난히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마지막 항목 "그리스도는 어떻게 성찬성례전에 임하시는가?"라는 문제가 결정적으로 이 역사적인 회담의 결렬을 안겨 주는 주제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실질적으로 성찬성례전에 임재하신다"는 루터파의 주장과 "성찬성례전은 사람의 살과 피의 신비한 상징이며 이것은 계속적인 기념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라는 쯔빙글리의 주장은 서로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기어이 동행의 역사를 외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우리는 현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육체 그대로 빵과 잔에 임재하시는지에 관하여 의견을 함께 하지 못하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 마는 어두운 결렬의 장을 열고 말았다.

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맹렬한 여파를 몰고 오게 하였다. 그 회의를 주관하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루터계의 브렌즈는 이 회담의 결렬이 굳어지자 다음과 같은 분열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쯔빙글리의 무리들은 우리들의 친구(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에)로 여겨질 수 있으나 결코 교회의 형제나 멤버는 될 수 없다."

 

이 선언은 일종의 출교적 선언이었다. 그 후 1536년 비텐베르크 콘코드에서 또 한 번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끝내 일치점을 발견치 못한 채 쯔빙글리를 향한 루터의 공격은 더욱 심화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더 충실해야 한다는 공통된 개혁의 이념을 가지고도 개혁자들이 서로 동행할 수 없도록 그 길을 갈라놓은 장벽은 바로 이 성찬성례전의 이해가 노무도 상이했기 때문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이처럼 개혁자들이 결별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성찬성례전에 대한 자기 주장들을 끝내 굽히지 ㅇ낳은 사실을 그들이 성찬성례전에 대한 자기 주장들을 끝내 굽히지 않은 사실은 그들이 성찬성례전론에 대하여 그만큼 관심이 깊었고, 또 그 사실 자체가 너무도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개혁자들의 예배 형태와 그 순서들

 

앞에서 서술한 대로 예배의 제반 문제점들은 종교 개혁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원인임에 틀림이 없다. 이 사실을 앞에 두고 개혁자들은 몇 가지 핵심적 개혁 부분에서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전환의 대역사를 감당했다. 그러나 개혁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며 그 해석을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 견해차는 계속 남아 있어 예배의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토록 각각 확연히 다른 입장들을 취하게 된 개혁자들은 자신들의 활동 지역과 계열을 중심으로 하여 독자적인 예배 노선을 구축하였고, 거기에 따라 회중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양상을 나타냈다. 이것은 마침내 독자적 교단의 형성이라는 뜻하지 않던 결과를 후대에 남기게 되었다.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예배 형태의 결과가 오는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새로운 예배 형식만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그것이 후계자들에 의하여 얼마나 심각하게 고수되어질 것이며, 도한 그것이 곧 전통과 훈련과 실천이라는 하나의 경전적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리온 존스 교수의 말처럼 개혁자들ㅇ느 회중이 무엇ㅇ르 원하는가에 초점을 두었지 결코 어떻게 예배 형태를 짜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관해서는 그 심각성을 크게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부터는 여기에 수록한 개혁자들의 예배의 형태와 그 순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루터와 그의 계열

 

루터는 개혁자들 중에 예배의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오는 것을 가장 주저했던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주장했던 예배의 순서들이 그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 더 많다는 견해를 우리는 종종 대할 수 있다.

그 과정이야 어떠했든지 1523년에 들어 그가 '예식서'(formulamissae)를 출간하여 새로운 예배의 형태와 내용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새 예전의 출현을 기대했으나, 그 결과는 장황한 가톨릭 미사의 순서를 요약한 정도에 불과했으며 부분적으로 라틴어 사용 허용의 특성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3년 후에 급진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그의 추종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 미사'라는 예식서를 발간하였다.

이 예식서에서 보여 준 그의 예배 내용은 성경 봉독과 그 말씀에 의한 설교를 분명하게 제시한 것과 성찬성례전에 신약적 형태와 진행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표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배 진행에 있어서 모국어 사용을 뚜렷이 했고 새로운 영가들도 모국어로 부르도록 함으로써 찬송가의 작사, 작곡을 독려하는 공헌을 하였다. 도한 그 예전 순서에서는 성찬성례전을 매주일 이행할 것이 강조되었다.

좀더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서 이 예식서는 특별한 예배를 위해서는 라틴어 예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성직자의 복장이나 촛불, 제단, 성상들, 십자가, 종의 사용 등가지도 그대로 지켜 나가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의 '독일 미사'에 실려진 예전의 형태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입당송 또는 독일어 찬송
자비를 구하는 기도
인사와 집도문
서신서
독일 찬송
복음서
사도신경(이때 성찬성례전이 준비된다)
설교

 

성찬성례전 예전(일명 다락방 예전)

 

주님의 기도의 풀이
교훈의 말씀
성경 말씀 봉독
분병 분잔
성찬 성례전 참여(주로 삼성창이 계속됨)
성찬성례전 후 기도문
아론의 축도


 

2. 쯔빙글리와 그의 계열

 

쯔빙글리가 행한 급진적 예배 변혁의 시도가 종교 개혁의 파문을 확산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예배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재현이나 성상의 사용 등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루터 계역과는 예배의 형태나 내용을 완전히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장 극단적인 개혁은 예배 가운데 오르간을 비록한 제반 악기의 사용이라든지 시편 교독을 대신하는 회중의 찬송들을 모두 삭제한 점이다.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성경 봉독과 기도와 죄의 고백, 그리고 설교만을 강조한 형식을 내세웠다. 성찬성례전을 갖지 않는 경우의 예배는 사실상 예배로서의 형태나 의식을 갖추지 않는 지극히 비예전적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일 년에 네 번씩 갖기로 된 성례전을 겸한 예배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사용하였다.


말씀의 예전

 

봉헌(성물의 준비와 배열)
기원
기도문
서신서
영광송
복음서
사도신경


다락방 예전

 

권면
성찬단 성별
주님의 기도
입례 기도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집례자 영성체
배찬 및 성찬 참여
시편 교송
성찬 후 기도
폐회

 

 

3. 부처와 스트라스부르크 교회

 

스트라스부르크는 본래 루터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1530년 부처가 그 지역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독자적인 개혁 노선을 걷는 도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때 부처는 지금껏 루터계의 바탕 위에 있던 예배 속에 쯔빙글리의 사상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사용된 독일어 미사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적 성격을 띠게 되는 양상을 가져왔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예전의 형태는 1524년 성로렌스 교회의 성 요한 채플에서 디볼트 슈바르츠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이 예배는 과격한 변혁을 시도한 면이 없었을 뿐 아니라 루터계의 것보다 훨씬 창조적인 면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예배자들의 영적인 표현을 담을 수 있는 부분들도 상당히 많았던 우수한 예전이었다.

이 예배 가운데 나타난 특징으로는 먼저 "미사"라는 어휘 대신 "주님의 만찬" 또는 "성찬"이라는 이름을 개발한 것과 사제라는 표현 대신 목사라는 칭호를 예전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등이다. 그리고 성찬 제단의 위치도 지금까지 벽에 봍여 놓았던 것을 변화시켜 목사가 벽과 제단 사이에서 회중을 향해 서도록 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였다. 그 동안 쯔빙글리에 의하여 없어졌던 시편이나 찬송이 이 예배 가운데 복귀되는 한편, 성서일과가 사라지고 목사가 마음대로 본문을 선택하도록 하는 방법을 출발시켰다. 성자축일 등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성찬성례전을 위한 성직자의 특별한 복장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일이면 언제나 검정 가운을 입도록 했다.

예배 가운데서의 성찬성례전은 매주일 갖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대성당에서만 지켜졌을 뿐 월 1회로 바뀌는 변혁이 이 때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예전이 예배의 발전에 끼친 가장 중추적인 공헌은 예전의 진행 모두를 회중이 볼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는 점이다. 지금껏 회중을 등 뒤로 하고 드리던 예배에서 회중과 목사가 함께 마주보며 드리는 예배로 전환한 것에 대하여 많은 개혁자들과 그 후대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부처를 중심으로 한 개혁자들이 드렸던 이 예배는 훗날 칼빈의 예배 순서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들이 가졌던 예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
용서의 확신
시편송
키리에 또는 영광송
성령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
운율 시편송
성경 봉독
설교

 

성찬성례전 예전

 

구제를 위한 헌금
성물 준비(사도신경 노래)
중보 기도와 성찬 기도
주기도문
권면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분병 분잔
성찬 참여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 선언(축도)
폐회


 

4. 칼빈과 그의 교회

 

칼빈이 예배 형태에 대하여 보인 직접적인 관심은, 그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하여 프랑스계 회중을 대상으로 목회하던 시절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두 중심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두고 새로운 예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간편한 예배 순서 속에서 초기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살리는 예배를 마련하기 원하였으며, 이 일을 위하여 진력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독자적인 새로운 예배의 형태를 개발하지 않고, 부처가 사용해던 예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채 예배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예배로 부름, 용서를 위한 기도, 설교, 중보의 기도 등을 보완하고 대신 자비의 연도나 영광송 등을 생략한 것을 제외하고는 부처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다시 말하면 부처가 이미 루터와 쯔빙글리의 예배 의식을 종합해 놓은 것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가미한 정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찬성례전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매주일 거행할 것을 주장한 점은 그의 신학에 근거한 특성이기도 했다. 이미 쯔빙글리의 개혁 사상에 의하여 제네바 의회가 매주일의 성찬성례전 거행에 관한 그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남긴 말은 의미심장한 면을 느끼게 된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두 번 성찬성례전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가 1542년에 펴낸 바 있는 '초대 교회의 예전의 내용을 연구한 예식서'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와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예배의 말씀
죄의 고백
속죄를 위한 기도
운율을 사용한 시편송
성려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 봉독
설교


만찬의 예전

 

구제를 위한 헌금
중보의 기도
주님의 기도(해설을 첨가한)
성물의 준비
사도신경(노래로)
성찬 제정사
권면
성찬 기도
성체 분할
분병 분잔
성찬 참여(시편이나 성구 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 선언(축도)

 

 

5.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 교회

 

영국의 교회가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개한 종교 개혁은 오랫동안 대단한 혼미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장로 교회의 뿌리를 형성시켜 준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은 어느 지역보다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었으며, 복음의 바른 이해와 개혁의 참 정신을 뚜렷이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존 낙스이다. 그는 개혁의 과정에서 특히 영국 국교회 예식서의 사용에 관한 그의 반대 주장 때문에 제네바로 추방당했다. 계속된 두 번째의 제네바 망명길(1556)에서 존 낙스는 그 곳에 망명해 있던 영어를 사용하는 회중을 위한 목회자로서 그의 시간을 바친 바가 있다. 바로 이때 그는 이 회중을 위한 예배의 형태에 칼빈의 예배 순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그가 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영어로 출판된 칼빈의 예식서를 그 땅에 소개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고 그것을 가장 좋은 예식서로서 활용토록 했다.

이 예식서는 칼빈의 예배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으나 다만 칼빈이 사용했던 예배의 말씀 대신 죄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한 점과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경외와 감사를 더 첨가하도록 한 것등 약간의 변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가운데서 세례 때의 대부모 제도, 외경으로부터의 성서일과 사용, 병자에게 베푸는 성찬성례전, 교회 밖에서의 개별적 세례, 그리고 결혼 반지의 사용 등을 금하는 분명한 조항들을 밝히고 있다. 이 예식서는 80년간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배 속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국왕은 영국 국교회와 별개의 노선을 걸어가는 이들의 예배 행위에 불만을 느끼고 자신의 교회와 일치된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하기에 이르렀으며, 찰스 1세 때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심한 반발과 함께 새로운 분쟁의 불씨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결국 낙스의 예식을 고수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개혁 교인들은 계약군을 형성하여 무장봉기를 하였고, 그리하여 이들은 크롬웰(O. Cromwell)의 의회군과 연합하여 찰스 왕의 무력을 제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승리의 대가로 대영제국의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성 총회를 소집하였고, 거기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독자적 신앙과 예배의 형태와 내용을 인정하는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비롯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등을 만들게 되었다. 동시에 장로 교회 정치와 예배모범이 나오게 됨으로 164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는 니를 정식으로 받아들였고, 오늘날 전 세계 장로교의 소중한 예배모범 및 교리의 줄기로서 그 역할을 담당할 근간을 마련케 되었다.

이 때의 예배모범도 역시 새로운 내용을 담은 창작적 예배 순서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칼빈의 예식서에 나타난 예배 의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예배의 내용을 좀더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다듬은 것이라든지 발전적인 모습의 형태를 취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말씀의 예배

 

예배로 부름
예배 기도(경외, 찬양, 성령님의 임재를 기원하는)
구약의 말씀(한 장을 읽음)
신약의 말씀(한 장을 읽음)
운율을 사용한 시편송(구, 신약 중간에도 사용했음)
고백과 중보의 기도
설교
기도
주님의 기도


성찬 예배

 

봉헌(성물)
성찬 초대사
성물의 배열
성찬 제정사
권면
성찬 기도
      - 입례 기도
      - 창조와 섭리에 대한 감사 기도
      - 구속에 대한 감사 기도
      - 회상
      - 축성 기도
성체 분할
분병 분잔
성찬 참여(집례자가 먼저 받음)
권면
성찬 후 기도
운율 시편 찬송
강복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