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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예배학

예배학 #3) 예배의 역사적 발전

 

* 모세 이전 시대의 예배

 

모세 이전 시대의 예배 형태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을 띠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시대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제단을 쌓은 일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의 심성을 따라 응답하셨다. 이것은 피조물들의 본능적인 예배 행위라고 하기보다는 아담 때부터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계승했던 행위로 보게 된다.

그 후 에녹과 하나님과의 밀접성에서 예배의 계속성이 다시 보인다. 그리고 노아의 경우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대로 섬기고 순종한 뒤 스스로 제단을 쌓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드린 예배 행위를 원시인들의 자연 발생적인 미신적 예배와 동일시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독특한 성격을 부정한다. 그러나 바욱스(Roland de Vaux)의 지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들의 예배는 당시 이방 종교의 예배 내용과는 본질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원시 종교 예배는 해, 달, 별 등을 비롯한 자연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적 예배였다. 그들의 예배 대상인 신들로부터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다. 독백적인 섬김의 형태였다. 섬기는 신들의 형체를 그리거나 만들어 예배하는 우상 종교였다. 예배하는 자들의 소원 성취에 예배의 주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초기 예배는 야웨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유일신 사상의 예배였다. 성경에 나타난 제단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격적인 응답이 있었다.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형상을 남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응답하는 감사의 제사가 대부분이었다.


이와 같은 독특성을 지닌 야웨 종교의 예배 발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별된 민족의 시조로 불림을 받았던 때부터 더욱 뚜렷이 그 윤곽을 나타내어 그는 어디에서든지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제단을 쌓았다.

이러한 강한 예배 의식은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었다. 이들 대표적인 족장들이 행한 예배는 예언적이며 제사적인 요소들을 각지고 있었다. 예언적 요소란 족장들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접근을 통하여 얻은 것들인데, 거기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분 자신의 목적을 밝히셨으며 또 그들에게 통찰력을 주셨음을 볼 수 있다. 제사적인 요소에 있어서는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희생의 제물을 드리면서 인간들이 앞으로 계속해야 할 예배의 본과 제사의 필요성을 보여 주었다.

 

 

 

* 모세 시대 이후의 예배

 

구약에 나타난 모세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친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인물이다. 예배학적인 차원에서 모세를 예배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율법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예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의 예전 절차는 지금껏 이방 종교로 인해 오염되었던 예배의 형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해주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십계명이라는 새 계약을 그 백성에게 부여하셨으며 예배를 위한 성소의 내용과 규례 문제, 레위 지파를 통한 제사장 계열의 확정, 그리고 제사 제도의 제정 등을 명하셨다.


이로부터 노예 생활 속에서 무질서했던 야웨 종교의 독특한 예배 형태를 쇄신해 가는 구체적 발전 단계가 모세를 통하여 개시된다. 그러나 이때 모세는 예전의 새로운 제정만으로 단순히 이 과업을 끝내지 않았다. 그는 예언자로서 여호와를 대면하고 또한 그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말씀의 운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후기 예언자들은 모세를 최초의 예언자로 간주했으며,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예배 의식을 집례하는 책임 있는 존재로 여겼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예배 법규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존재로 끝나지 않고 광야의 40년을 통하여 철저한 예배 훈련을 시켰던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들은 거기서 바알신을 섬겼던 그 땅의 토착 종교를 접하고 수용하며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다. 바알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와 의식, 기념 축일 등을 바알에게 돌리는 심각한 과오를 범하였다.

 

이스라엘의 제 2대 왕이었던 다윗 때에 이르러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나아가 아모스, 미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패된 민족의 종교성 회복이 점차 가능해지게 되었다. 모세 시대에 제정되었던 성전 예배는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에 그 극치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들어 예배에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1) 십계명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모셨다. (2) 진설병과 황금 등대를 비롯한 기구들로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3) 찬송과 함께 수금, 나팔 같은 악기를 사용하였다. (4) 예배의 참례자들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각종 제물을 드렸다.

 

이것이 바로 성전 예배의 특수한 면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배 행위는 음악, 축송, 춤, 기도, 행렬, 단순한 설교 또는 강화, 선조들에 대한 회상, 고백 등과 함께 거록한 식사를 나누는 순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전 예배는 솔로몬 말기부터 타락하여 형식화되기 시작했고, 후기의 많은 예언자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많은 희생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으시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고 말하면서 예배의 본질을 밝힌 적도 있다.

성경에서 세속 종교의 물결 속에 침수되어 버린 야웨 종교의 내용과 의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직결된 문제였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허물어져 간 예전과 신앙의 본질을 되살려야 한다는 결의를 보이면서 개혁 운동을 한 인물들은 요시야 왕,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있다.

 

요시야왕은 주전 640년에서 609년가지 유다의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발견된 율법책에 명령된 모든 사항을 준수하도록 하는 대대적 개혁을 시도했다. 법전을 따라 이방신 바알과 관련된 모든 지방 성소와 제단들을 파괴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생활과 인도주의를 겸손히 서약하면서 성전의 재건과 예전의 회복을 이루었다.

예레미야는 율법책이 성전에서 발견되기 전부터 활동을 했던 선지자이다. 그의 집중적인 관심은 외형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직업화되어 갔던 제사장들의 종교성을 비판하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영적인 종교로서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있었다. 그는 제도적인 개혁보다도 인간의 책임성과 그들 심령의 변화가 시급함을 주장하며 내재적 종교로서의 개혁을 외롭게 부르짖었던 선지자었다.

에스겔도 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는 내면적인 일이며, 하나님의 영은 모든 신실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영적 정화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처럼 성전의 예전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성소의 예배와 영적 정화를 병행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 바벨론 포로, 귀환 공동체의 예배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마지막 귀환을 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더불어 제사법전의 발견과 함께 예언의 전승과 제사 예식을 새롭게 다듬어 거룩한 공동체의 출발을 주도해 나갔다. 지금껏 포로지에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채 임시적으로 드렸던 회당 예배는 새로운 정비가 불가피했으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제사장의 임무도 율법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성실한 이행이 요구되었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은 단순한 국가라기보다는 종교적 공동체, 소위 거룩한 공동체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형태의 지속을 위하여 노력했다.

 

포로기간중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당에 모여 나라를 잃은 슬픔을 함께 하며 성전 예배를 대체한 "회당 예배"를 갖게 되었다. 이 예배의 강조점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었다. 말씀 전에 모두가 일어서서 축원 또는 기도를 했고 말씀이 봉독되는 시간도 역시 일어서서 하나님께 지극한 경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예배에서는 동물을 제단에 바치는 의식이 점차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집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의 참여 속에 경청되어 이해를 가져오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그뿐 아니라 성전의 제사 대신 이들에게는 새벽, 아침, 정오에 드리는 기도가 성행하게 되었으며 가정가지도 예배드리는 성소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

 

회당예배가 가졌던 특성을 요약해보면

(1) 제사장이 주관하였던 성전 예배 대신 랍비들이 주관한 예배였다. (2) 예배의 내용은 희생 제물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이어졌다. (3) 엄격했던 성전 예배의 분위기가 아니라 자유로운 장소와 모습들의 예배였다. (4) 성전 예배를 회복코자 하는 다짐과 함께 한이 어린 예배의 분위기였다. (5) 나라를 잃은 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새롭게 정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면모의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요람적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오늘의 개혁 교회가 갖는 말씀 중심 예배의 전승근원이 되고 있다. 이런 회당 예배는 신약 시대에 와서 매우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교회의 확장 속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절대적 영향을 남겼다.

또한 구약의 시대에는 시편을 많이 남겼는데 이들은 개개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노래들이며,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 예배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 목소리로 불렀던 찬송이며 또한 기도이다. 그렇기에 시편은 기독교 예배에 남아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 신약시대의 예배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어떤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는 회개 운동을 전개했다.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성전의 예배를 부정하거나 회당의 예배를 거부했던 일은 없었다. 오히려 성전 예배를 부패시키는 무리들을 향하여 채찍을 든 사건(요 2:12~25)을 비롯해서 성전 예배의 여러 절기를 지키는 일들(요 5장, 7장, 8장), 그리고 그의 생애의 절정이었던 수난의 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신 기록 등은 예수님의 성전 예배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당시에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회당을 규칙적으로 둘러보시며 말씀을 가르친 일이 복음서에 자주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자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제였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언약된 계명으로 예배 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성례전을 제정하셨다.

 

예수님 이후 사도들도 역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배 행위를 계속했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모이기를 힘썼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와 기도를 하면서 성전을 그들의 교회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밖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언제나 손쉽게 모일 수 있는 회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이를 예배의 처소로 계속 사용했으며 유대인들과의 접촉 장소로 이용했다. 그러나 사도들의 예배 활동이 유대교의 핍박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예배 예전의 정립이 그 당시에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때의 예배의 성격이란 구속주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행위로서의 예배보다는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흔히 병행되는 비예전적 예배 형태의 지속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의 전통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셨고 예배의 측면에서 그분은 유대교의 제반 예전 활동의 종식을 선언하셨다. 뿐만 아니라 성전과 회당 예배의 모든 뿌리를 자신의 사건에 근거하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분이 제정한 성찬성례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분의 활동은 이러한 기본적인 사상을 심어 주는 것으로 끝났지 결코 예배의 정확한 형태나 내용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예배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그들의 생명을 결속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졌던 성찬 속에서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았다는 점이다.

 

 

 

 

* 로마시대의 예배

 

기독교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 사건은 로마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이다. 그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으로 나오게 되었고 이들을 위해 대형 예배당들을 건축하고 교회의 형태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천된 예배의 조건들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더나아가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작용이 싹트기 시작했다.

예배의 현장에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가 발생하였고 수많은 인위적 기도문을 비롯하여 교독과 교창을 양산하게 되었다. 특히 주님의 만찬은 미사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그릇 이해되는 결과를 가져와 구약의 제사 제도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갖게 하였다. 더욱이 마리아 숭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자 및 유물 숭배 사상이 나타나 더욱 교회가 타락되었다.

 

1054년 동방과 서방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절대 권위 아래 있던 서방 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하며 미신과 섞여 버렸고 라틴어로 성경 기록 및 예배 집례를 하는 등 회중을 예배의 방관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결국 면죄부 판매와 같은 모순을 범하였다.

이 때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의 기수들은 지금껏 전래되어 온 예배의 의식을 좀처럼 개혁하지 않으려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세력이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라틴어 미사에서 독일어 사용과 함께 독일어 찬송을 부르는 의식의 변화를 단순히 원했다. 따라서 지금도 루터 교회나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의 예전 의식과 큰 거리감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쯔빙글리, 칼빈,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은 예배를 대폭적으로 수정하기 원했다. 쯔빙글리의 경우 지금껏 말씀과 성례가 함께 있던 예배에서 설교 중심의 예배로 매주 그리게 했고, 성찬성례전만을 위한 예배는 연 4회로 국한시켰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 성찬성례전도 매주일 갖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주장이 적용된 교회들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죄의 고백 등을 갖추고 있으며, 오늘의 개혁 교회 예배와 같은 형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급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던 재침례파를 비롯하여 퀘이커 교도들의 모임 같은 자유 교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와 연관된 교회의 개혁을 부정하였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강조하여 전통적인 예전 등은 외면하게 되었고 성경공부에 집중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다. 예배는 설교 위주로 진행되었고 성직의 구별된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명상과 함께 말씀의 은사를 받으면 그를 세워 말씀의 지도자로 삼기도 했다.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온몸을 적시는 침례를 주장하였다.

 

 

 

 

* 종교개혁 이후의 예배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며 그들의 줄기에서 본격적인 예배의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들은 종교 개혁자들에 비해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새 역사를 펼쳐가게 되어 교회와 국가를 철저히 분리하며 교회의 자유로운 형태와 예배 의식의 개혁을 인도해 나갔다.

 

특별히 1800년경부터 발생했던 대각성 부흥 운동으로 말미암아 복음주의적 신학의 태동과 함께 탈의식의 예배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에 대한 특별한 변동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들은 청교도들의 정신을 그대로 지속시키면서 탈의식적이면서도 오직 말씀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에 정착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미국의 제2차 대각성 부흥 운동과 서부개척기의 집회 중심의 예배는 전통적인 개혁 교회의 예배마저 상실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듯 예배에 대한 가벼운 이해와 무관심은 새로운 선교지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을 비롯한 피선교 지역의 교회에 예전이 없는 순수한 집회 중심의 예배를 이식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배의 역사나 전통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교육이 완전히 부재한 현상을 가져왔으며 오직 설교만이 예배의 전부라는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한 세기를 지냈다. 예배 의식의 존엄성이 경시되었고 예배의 토착화라는 이름 하에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가미되거나 혼합 되기도 하는 위험한 결과도 초래되었다.

피선교국들의 교회들이 19세기 후반에 크게 팽창했던 선교열에 의하여 복음을 수용하고 그들이 전해 준 대로 예배 의식을 받고 있는 동안, 미국 내의 교회에는 예배에 대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55년 찰스 베어드가 '장로교의 예배 의식'이라는 책을 발간했고 1857년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예배 의식을 담은 예식서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예배 회복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와 1858년 독일 개혁 교회에서 예배 의식을 회복하였다. 이렇게 새롭게 일어난 예배에의 관심은 예배 회복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어 각 교회마다 예배 의식을 돌아보게 되었고 예배당 안의 구조,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주시하게 되었다.


예배당 안의 설교대와 제단의 위치가 변화를 가져오면서 성찬상을 설치하고 십자가를 단 위에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신앙의 상징들도 새로 만들어 교회 안에 부착시키는 일들이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성찬의 집례에서도 더욱 진지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으며 그 횟수도 늘려가게 되었다. 예배 의식에 있어서도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예배로 부름, 죄의 고백, 용서의 선언과 같은 순서를 넣어 훨씬 다양한 의식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수반하여 목사의 역할도 예배 의식의 집례자로서의 기능을 중요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장까지도 개혁 당시처럼 성직자 셔츠를 입기도 하였고 강잔에서의 가운 또는 교회력에 따른 스톨의 착용 등이 활발하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