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의 특징
역사적으로 종교는 언제나 시대의 부산물이 아니라 문화의 본질로서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의 바른 선택이란 한 민족의 역사와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가장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기독교는 타종교에서 들을 수 없는 '구원의 종교'이다. '구원'이란 죽음의 현장에서 아우성치는 사람, 또는 죽어 버린 사람을 구출하여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죄의 대가로 죽어 가거나 삶을 포기해 버린 실존들을 창조주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성육하여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와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구원시킨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이다.
기독교가 갖는 인간과의 현실적이고 생동적인 관계성을 윌리암 템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은 인간의 양심을 각성시키며, 그의 진리는 인간의 지성을 기르고, 그 아름다우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맑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충만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열도록 하시기에 그의 목적대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바치게 된다."
이 말은 참으로 소중한 표현이다. 오늘의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고 찾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의 은총이 이토록 크기에 인간은 예배를 통하여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의 행위를 찾게 된다. 타종교에서 말하고 행해지는 예배가 하나의 의식을 위하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절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예배는 전인적인 감격 속에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총의 주인 앞에 나아와 감사와 보답의 표현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예배의 정의
예배라는 말의 우리말 뜻은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이러한 우리말의 뜻은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예배의 대표적인 어휘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아바드"라는 히브리어이다. 이 말은 "봉사" 또는 "섬김"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어에서 예배를 "service"라고 표현하는 경우 바로 이 '아바드'라는 어휘에서 그 유래를 찾아야 한다.
두 번째의 중요한 어휘는 "샤하아"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굴복하는 것" 또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예배에 대한 두 대표적인 어휘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뜻을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졌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어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존경의 표시로 "절하다" 또는 "굽어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지상의 통치자들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라트레이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인시키는 말로 예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 외에 예배의 의미로 사용되는 "레이투르기아"는 일반적으로 예전의 의식(ritual)과 관련된 단어이다. 본래의 뜻은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라는 뜻으로 소국가였던 아테네를 위하여 수행되어졌던 일반적인 임무에 사용된 단어이지만 그 후 이 말은 기독교의 예전, 특히 성례전 의식이나 그 외 특수한 의식을 집례할 때 활용되었다.
영어에서 표현하는 "worship"은 앵글로색슨어인 'weorthscipe'에서 나온 것으로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이 말의 뜻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이다. 이 말을 좀 더 구체화시킨다면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Him supreme worth)"이라는 뜻이 된다.
로버트 레이번(Robert G. Rayburn)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성경에 나타난 예배 용어들의 뜻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였다.
"첫째로 기독교 예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존엄성을 인식하고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굽어 엎드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께 경외와 찬양과 감사와 존귀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둘째로, 예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었던 대로 순종하는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도 물리치고 십자가의 희생을 감수하시는 자세가 본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이다."
왜 기독교의 예배는 이처럼 예배자들이 희생적 존재로 예배의 현장에 임해야 하고 그 하나님을 이토록 경배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때문이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드릴 수 있게 된다.
헉스터블(John Huxtable)이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은총과 응답이라는 대화적 관계는 기독교만이 가지는 생동력 있는 예배의 내용이다.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이 예배 가운데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배자들의 가슴속 깊이 임재하신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이룩하고, 그 응답을 예배자들이 마음과 행동을 통하여 기꺼이 행한다는 것은 어느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개신교 예배의 특성이다.
* 예배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이해
성숙한 예배자들은 몇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첫째,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둘째, 오늘도 우리가 간격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배의 현장에 설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이다.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 속에서만 새로운 차원의 눈을 뜰 수 있다. 구약의 예배의 개념과 내용은 단순히 율법적인 규율과 제한성 속에서 드리는 예배였으나,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막힘 없는 예배라는 점에서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의 예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속죄의 기쁨을, 그리고 부활의 사건 앞에서는 희생과 승리의 잔치와 같은 분위기를 갖는다.
셋째, 오늘의 예배를 역동적으로 움직여 가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시고 그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신 성령님의 기능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주님의 재림까지는 성령님을 통하여 완성시키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시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활동을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인간의 심층으로 파고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와 바른 삶으로서의 인도는 모두가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이룩된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예전의 모든 형태나 내용은 근본적으로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형성되었다. 성령님은 예전에 있어서 하나의 질서를 형성시켜주는 동시에 예배 안에서 자유로이 마음의 문을 열고 합당한 시간에 응답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넷째, 예배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이해의 요구는 예배자들의 가족적인 개념의 설정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가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실체를 이루는 것이 가장 합당한 자세이다. 따라서 예배 공동체는 언제나 단수적인 개념(I) 보다는 복수적인 개념(We)의 모임으로서 예전의 내용과 구성을 생각해야 되며 전체적인 영적 성장과 발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즉, 예배란 '내가'드리는 단독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드리는 공동체의 행위여야 합당한 예배가 된다.
다섯째, 예배에는 연속성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예배드리는 무리들은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고 있으며 그 일을 위하여 앞장을 서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예배란 단순히 매주일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생활 가운데서도 계속하여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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