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란 무엇일까?
먼저 성경 속에서 표현된 중요한 어휘들을 살펴보면, 구약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단어는 '카할'이라는 단어였다. 이 말의 뜻은 "모인다"하는 의미를 가지고 주로 시정이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모일 때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가장 의미 있게 쓰였던 곳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모여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명령과 십계명의 계약을 받았던 그들의 모임에서였다.
이 단어는 후에 70인역에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옮겨졌다. 그 외에 또 하나의 어휘는 '에다'라는 말인데, 이 어휘는 흩어진 상태 속에 있던 무리들을 가리킨 말로서 헬라어로는 '시나고게'로 번역되엇다. 이 말은 신약에서 유대교 회중을 가리킨 말로 고정되기도 했다.
이상의 단어들 가운데 교회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서 가장 적절한 말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이다. 이 말이 신약에서 사용되어질 때는 다음의 네 가지 형태가 있었다.
그 첫째는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특수한 목적으로 모이는 경우의 형태이고, 둘째는 지역적으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계층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띤 모임의 형태였으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가장 분명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무리들의 모임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이 모임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한 응답과 사명의 다짐이 으뜸가는 것이었다.
넷째로는 종말론적인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무리들로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통한 구원의 확신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무리들을 지칭했다.
* 구체화된 교회의 의미
교회의 의미는 신약 시대, 특히 사도 시대에 와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만을 모아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란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사람들, 즉 죽음과 직결되는 죄악의 세계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무리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사실이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은 말하기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이는 무리들을 가리켜서 가시적 교회라 했고,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게 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켜 불가시적 교회라고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는 성별된 장소는 성전 또는 예배당으로 부르게 된다.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들인 니케아 신조(325년)를 비롯하여 제1 스위스 신앙고백(1536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8년) 등에 나타난 교회에 관한 설명은 모두가 한결같이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친히 제정하시고 조직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이고 하나님의 집이며 또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고, 그리스도는 그 몸된 교회의 머리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교회는 유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님을 믿고 같은 신앙을 고백한 무리들은 어느 곳에서 세례 도는 침례, 혹은 영세를 받았든지 동일한 대상을 찾고 있는 한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 교회는 세계 어디에 존재하든지 한 교회로서의 공동체이고, 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교회는 거룩한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교회'라고 불림을 받은 모든 무리들이 완전히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 거룩하신 속성을 본받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룩한 속성에 반대되는 것은 바로 죄인데, 이것이 하나님과 교제의 길을 차단시키고 수많은 생명들을 사망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거룩한 속성의 실현은 교회의 소중한 본질이며 사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거룩한 속성을 지속시켜 주고 배양시켜 나가게 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한 성례전과 말씀이다.
교회는 사도적인 전승을 이어 나가야 한다. 순수한 교회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인간에 의하여 순간적으로 만들어지고 자기 집단화가 결코 될 수는 없다. 오직 교회의 전통과 뿌리는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에게 가져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뿐이시다. 그리고 그의 사도들의 순교적인 출발이 오늘의 교회와 연결되어질 때만이 교회로서 참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로부터의 역사적인 전승을 이어가지 못하면 교회로서의 가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전승의 주요 골자는 어떤 조직이나 형태보다는 예배와 교리의 기본적인 줄기와 형태가 역사적인 전승에서 이탈되지 않아야 한다.
* 교회의 중요한 사명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과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의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이다. 교회가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회중은 거기에서 주어진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영과 육이 양육을 받을 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 의미가 계속된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와 본질은 부름 받은 무리들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교회는 섬김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 교회가 갖는 예배의 현장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예수님 자신이 섬김을 받기 위하여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또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라고 하신 말씀은 그를 따르는 교회가 그 좌표를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보이는 이웃을 섬기는 현장과 연결될 때만 그 참된 가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심판의 현장에 발생하게 될 사건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보여 주는 섬김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직결됨을 설명한 바 있다.
교회는 코이노니아(교제)를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배하는 무리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의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예배의 제단 앞에 예물을 들고 온 그 순간까지라도 형제와의 화목이 원활하지 못했을 때는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계속하도록 한 예수님의 부탁은 우리의 깊은 관심을 끌고 있다. 다툼과 분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가장 무서운 함정이므로 교회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교회의 사명 중에서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예배는 단순히 내 개인적인 종교성의 표현으로만 끝날 수 없다. 예배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은총을 입증시키며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을 알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에 대한 응답의 행위로 기쁨과 감격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배에서 경험한 감격을 외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고 온 세계의 무리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무릎을 꿇고 경배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의무의 부과가 따르는 외침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선교적 사명이라 부른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개혁 당시에 개신교 신앙의 지조를 천명하였던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교회를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그 복음에 일치되게 성례전이 거행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이토록 교회가 그 존재의 목적 자체를 예배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제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설정해야 할 까닭은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부름 받은 무리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을 깨닫고 거기에 감격적인 응답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에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드리는 예배가 '나'라는 개인보다 '우리'라는 전체성을 언제나 내포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교회가 대형화됨으로써 우선적으로 발생되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소외 또는 격리된 개체들이다. 이들은 예배의 현장에 그저 나타났다가 돌아가는 존재들인데 그 속에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너와 나 사이에 예배하는 공동체 의식을 찾아볼 길이 없다. 예배란 경건한 한 개체들의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회중의 공동체 행위인데,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함께 일어설 때 그 예배의 참된 의미는 계속된다.
* 예배의 형태에 따른 공동체 분류
예배의 형태에 따라 예배 공동체를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성찬성례전을 예배의 핵심으로 여기는 예배 공동체이다.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설교보다는 성찬성례전을 강조한 예배가 주게 되는 영향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매주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상하신 몸과 보혈을 받음으로써 참여하는 신앙 속에서 실제적인 신앙의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단순한 언어 중심의 지각적 기능보다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예배의 실제성이 크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이다. 장로교를 중심한 개혁교회, 감리교, 회중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교회는 성찬성례전을 일 년에 2회 또는 4회 정도로 거행함으로써 성례전과 말슴의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때로는 설교자의 메시지에 따라 회중의 감동이 좌우되기도 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닌 설교자와의 만남을 가져오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셋째로는 성령님을 모시고 그 역사하심에 따르는 예배 전통의 교회이다. 이 전통에 속한 많은 교회들의 예배는 전통적인 예전이나 그 예전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배의 현장에 임재하셔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가운데 각종 은사와 기사 이적의 출현을 예배의 중요한 행위로 장려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때로는 예배자들이 자기 욕구의 충족과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는 에배로 전락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예배하는 공동체는 앞에서 열거한 세가지의 요소를 모두 수용하는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이다.
예배자들이 어떤 심성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섬기는 신에 대한 불경건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존 윌리암스 같은 학자는 "예배의 핵심은 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 신앙은 근본적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새롭고 정확하게 깨달아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음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죄인 된 나라는 실존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예배에 함께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성령님의 강한 역사에 의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이 연속되는 상태이다.
이처럼 예배와 신앙은 필연적인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 없는 신앙이란 자기 수양에 불과한 것이며, 신앙이 없는 예배란 아무 의미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즉, 교회를 이룩한 그리스도인은 곧 거룩한 무리들로서 깊은 신앙의 소유자들이어야 하며, 그들은 그 신앙 때문에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이 땅 위에 존속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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