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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예배학

예배학 #8) 기독교 성례전 - 세례 성례전

 

* 성례전의 이해

 

1. 성례전의 중요성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서 성례전의 의미와 그 비중은 교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현장적 측면에서도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는 성례전이 이론적 교리에서 끝나느 것이 아니고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 "주님과의 연접"이라는 가장 중요한 신아의 표현과 경험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이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 있는 "역사적 연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성례전의 중요성은 오늘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탄생하던 때로부터 종교 개혁시까지 가장 핵심적인 예배의 초점이 되어 왔다. 여태껏 예배에 있어 단 하나의 주안점으로만 여겨오던 성례전에 말씀이라는 새로운 구심점을 강조함으로써 개신교는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개의 본질적 요소를 우리의 예배 속에 지켜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쯔빙글리의 과격한 개혁 의지는 지금껏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져야 할 기독교 본래의 예배 전통에 심각한 불군형을 가져왔다. 그의 개혁은 설교가 성찬성례전을 몰아내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매주일 성례전이 없는 예배를 시도했고, 그 영향은 제네바의 의회를 움직였다. 그 결과 연 4회의 예배에서만 성례전을 집례하게 된 것이 개혁 교회의 전통처럼 되어 버린 사실은 이미 앞 장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이러한 전통의 계승자들이 100년 전 이 땅을 찾아와서 복음을 전파한 이래 한국의 교회는 그토록 소중한 성례전을 1년에 2회로 지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요소를 함께 갖추어야 했을 우리의 교회가 어느 나라의 개신교보다 성례전과의 접촉을 가장 멀리한 채 오직 말씀만을 강조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서 새롭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만을 통하여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성경), 전파된 말씀(설교),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서 그의 백성 앞에 주어지며 이 말씀이 성례전의 역사 속에 예배자들의 영혼을 소생케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교회에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되어야 하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겨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펼쳐왔다.

 


2. 성례전의 어원적 의미

 

성례전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sacramentum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sacraments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으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한 후 세례를 받고 성찬(Lord's Supper) 성례전에 참여한 그 예전을 가리켜 성례전이라 불렀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군인들이 입대할 때 철저한 맹세를 하는 의식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이 라틴어가 헬라어의 뮈스테리온(신비 또는 비밀)을 번역한 것이라는 점에서 터툴리안의 본래적 의도와 연결시키는 것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던 한 인간이 로마 황제에게 바치던 모든 충성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기로 약속하고, 그 거룩한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의 신비한 변혁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대사건들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발생을 포함하여,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일과 같은 성례전 앞에서의 많은 이적들은 성도들에게 성례전을 하나의 신비한 사건으로 인식케 하였고 많은 사제들도 그러한 입장에서 집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신비란 기적의 발생을 수반하는 이적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구원과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를 설명하는 말씀 속에서 보여지는 가시적 기적의 표적이 바로 이 성례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로부터 성례전의 어원적 의미는 더 이상 신비의 상징이나 추상적인 이름으로 이해되지 않았고, 순수한 세례와 성찬의 예전 속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하나되는 경험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엄숙한 예전으로 이해되어 왔다.

 


3. 성례전의 신학적 의미

 

종교 개혁이 있기 전까지 기독교의 성례전은 오늘의 구교에서 지켜오는 것처럼 7성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런 잡다한 교회의 행사가 모두 성례전으로 취급되어지는 것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제정한 것만 성례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으로 지킬 것을 개혁 교회의 신조들 속에 확고히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갖게 되는 제반 교회의 예전은 성도들이 필요에 따른 의식이기에 성례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고 오직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만을 순수한 성례전으로 지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성례전은 인간 주도의 예전이 아니고 주님이 주관하시는 예전으로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성례전이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세례나 성찬성례전 가운데서 보여 주시는 모든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어떠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깊은 의미가 담긴 예전이다. 이러한 의미를 정확히 표현한 포사이드(P. T. Forsyth)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도는 우리가 만든 선물이며 희생제이다. 그러나 성례쩐은 하나님이 만드신 선물이며 희생제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은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포사이드가 성례전을 "하나님이 찾아오신 예전"이라고 설명한 말은 성례전의 본래적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예배의 어느 순서보다 정중히 대할 수밖에 없으며 주님 앞에 서 있는 엄숙성을 실감해야 한다. 그리고 세례와 성찬성례전의 현장은 인간이 제정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신학의 정립이 더욱 확고해져야 한다.

 

(2)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예배자들의 진지한 응답이 나타나는 현장이다

서례 의식이나 성찬의 참여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된 인간을 향하여 선포되어지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무릎을 꿇고 죄인됨을 고백하고 주님을 영접하겠다는 뚜렷한 응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예전에 참여하면서 죄인을 사랑하셔서 희생하신 주님 앞에 감격적인 감사의 응답을 드리게 된다. 이 때의 응답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적(sacramental) 결단의 응답이다.

 

(3)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육신으로 이 땅에 찾아와 스스로 귀하신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모두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사랑의 실혀이 단회적으로 2천 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성례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라는 말씀의 실천적 표현으로 우리의 눈이 직접 볼 수 있도록 역사하는 반복적 현장이다. 세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가 발생되는 사건이며, 성찬성례전은 오늘도 스스로 몸을 찢기고 보혈을 흘리신 희생적 사랑의 재현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결코 주님의 희생의 현장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의 실체로서 오늘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그 자신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지를 보여 주시는 예전이다.

 

(4) 성례전은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예전이다

성례전은 하나님이 찾아 주시고 인간이 응답하는 수직적인 관계 속에 이룩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개인을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 그 개인의 응답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의 발로이다. 하나님은 이 성례전 가운데서 개인의 신앙을 돌아보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언제나 대상으로 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이 성례전 가운데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가 수평적으로 확산시켜 나가기를 원하시는 깊은 뜻이 언제나 이 성례전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임스 화이트 같은 예배 신학자는 "공동체 안에서의 성례전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일으케 나가도록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의의는 초대 교회가 지하의 동굴 속에서 그 잔인한 핍박을 견딜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이 성례전을 통해 갖게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경우 말씀의 예전에서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으나 이어서 성례전을 갖게 되는 다락방 예전에서는 세례 받지 않은 무리들은 해산하도록 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세례성례전ㅇ르 통하여 생과 사를 함께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뜻이 있었고, 또 그러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만이 성찬성례전을 가지면서 새로운 위로와 용기를 발견하고 그들이 지켜야 하는 믿음, 소망, 사랑을 주님 앞에서 재다짐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수평적인 다짐과 결속은 오늘의 성례전에 함께 하는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요청되어지는 진리이다.

 

(5) 화육적 관계 형성이 성례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다짐되어야 한다

오늘의 개신교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성례전에 구교처럼 진지한 의미나 엄숙성을 부여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단순히 세례성례전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의식으로만 보는 것이나 성찬성례전을 주님의 간절한 사연이 담긴 예전 대신에 기념적 행위로 끝내려는 인식들이 문제의 발생의 요인이다. 그러나 성례전은 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그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머물도록 하는 신비한 위력을 갖고 있는 예전이다. 그러기에 이 현장을 하나님이 주도하는 예전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룩되는 현장이라 부른다. 이미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처럼 성례전의 사건이 개개인과 화육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교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상관관계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례전 속에서 받은 인치심과 말씀과 성물은 곧 참여자의 화신이 되는 전인적 변화로써 지속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성례전은 "인카네이션과 구속 사건의 연장"으로서 그 가치를 갖게 되며, 이 예전을 통하여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존전에 진정한 응답과 결실을 맺게 된다.

 

 

 

* 세례성례전

 

세례는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변함없는 전통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례전이다. 이 성례전은 종교 개혁의 숱한 논쟁 가운데서도 수정이나 반대를 받지 않고 예배 가운데 그대로 지속되어 온 특유한 순서이다. 특별히 이 세례는 우리와 같은 이방 지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더욱 깊은 의미를 실감시켜 주었으며, 세례의 가치와 그 위력을 경험적으로 깨닫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세례의 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디어진 감각 속에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세례와 함께 가졌던 자신의 결단과 감격을 또다시 되새겨야 할 세례성례전이 하나의 요식행위로 예배 가운데 등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겨우 일 년에 두 번 정독로 나타나는 의식으로써 그 의미와의 만남이 강조되고 있지 않은 채 예배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이나 참여하는 회중 모두가 세례에 대한 이해를 다시 발굴하고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한다.

 


1. 세례의 신학적 의미

 

개신교의 예배 가운데 세례가 성찬과 함께 소중한 성례전으로 지켜져 온 것은 세례 특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본래적인 세례의 의미를 강조하지 않은 채 단순한 하나의 의식으로서만 가볍게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세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부담 없이 떠나버리는 일을 비롯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들이 전혀 이행되지 않은 사례들이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례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동일한 입장을 취해왔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칼빈의 견해를 보면 그는 세례를 가리켜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하여 현대 신학자들도 거기에 큰 수정을 가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의 실례로 폴 틸리히의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는 "세례란 영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한 인간의 결단이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인간을 가리켜 '새로운 존재'라 일컫고 있다.

여기에 대해 세례란 수세자의 결단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인가에 대한 논쟁이 신학적 견해차를 빚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례가 한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불편을 느낄 때 쉽게 포기할 수도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례란 하나님이 그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취하신 절대 주권의 표시이며 인치심이라는 신주도적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신학적 해석을 토대로 존 맥콰리 같은 학자는 세례를 구원론의 단계에 속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면서 죄의 인정과 회개, 칭의, 성화, 그리고 선택의 순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세례를 현재적 삶의 현장과 연관시켜 살피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의미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1) 세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공적으로 시인하고 그분과의 연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성례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의 출발이 다짐되고 공표되는 예전으로서의 세례는 수레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방편이요 인침이다. 이때 한 생명의 새로운 존재 의미가 다시 별견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지체의 일부임을 언제나 자각케 함으로써 타락된 육적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잇게 한다. 이러한 사상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로의 소속을 확인하는 세례는 포사이드(P. T. Forsyth)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향한 발길은 끝이 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예전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침의 예전 가운데 선 인간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회개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죄릐 회개를 수반하지 않은 세례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례라고 인정할 수 없다. 초대 교회 당시 수세자에게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수세 전 며칠간 금식하면서 준비하는 명령을 할 정도로 회개가 강조되고 우선되었다.

이러한 죄의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은 자비의 손길을 펴서 용서의 인을 쳐주심과 동시에 더 나아가 "전에 지었던 죄를 간과하심으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시는"(롬 3:25-26)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이것을 가리켜 보이는 은총의 실현이라고 한다. 이 은총의 현장에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은 단순히 물에 의한 세례가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방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 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해야 하고 그 보혈에 의하여 죌 씻음을 받는다는 신앙의 고백이 우선되어야 한다.

 

(3) 세례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을 의미해야 한다

세례는 이미 언급한 대로 새로운 출발이다. 이 새로운 삶의 출발이란 예수님 밖에서 살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새로운 삶은 단순히 물로 받은 세례의 의식보다는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변화된 새로운 생의 출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례란 "성령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칼빈은 동일한 입장을 취하면서 세례를 "새 생명으로 인간을 재형성시키는 성령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례는 죄의 세계로부터 의의 세계로, 속박에서 자유로, 율법 아래의 죽음으로부터 성령님 안에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과정임에 틀림이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골 2:11-12)라고 일찍이 말한 바 있다.

 

(4)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초대 기독교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 속에 함께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드리는 예전을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으로 굽누하여 말씀의 예전에는 누구나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다락방 예전에는 세례 받지 않은 무리들을 해산시킨 후 수세자들만 참여시켰다. 이러한 예전의 현장 속에서 그들이 얼마만큼 공동체 의식과 존엄성을 준수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기독교 공동체의 특유한 성격은 지금도 물론 기독교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공식적 기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입장 허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구체적 예는 세례의 현장에서 목사가 모든 교인들을 증인으로 하여 수세자에게 약속을 받은 질문과 대답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목사가 수세자에게 교회의 신실한 일원이 되고 헌신과 복종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 나갈 것을 약속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엄격한 과정으로서의 세례는 결코 어느 집단의 세력 확장의 수단으로 이해될 수 없다. 또한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사람들의 일원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의 삶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세례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는 말씀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세례의 의미는 다음의 구약과 유대 민족의 원시적 세례 의식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 활동을 통해 오늘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세례의 신학적 출발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2. 기독교 세례의 기원

 

오늘의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세례가 예수님의 발상에 의하여 제자들에게 갑작스러이 명령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베풀었던 세례도 그의 순간적인 종교심이나 선지자로서 새로운 선포의 방법을 찾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세례의 사상이나 사역은 일찍이 구약의 유대 민족의 종교 생활 가운데 이미 존재하였는데, 물을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보이고 제단을 쌓거나 하나님을 향하여 나오는 무리들이 물로 씻는 의식을 거친 후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종교적 행사를 치루었다. 이와 같은 유대 민족의 원시적 세례 형태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나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의식은 단순히 인간이 깨끗함을 보이고자 하는 자의적 행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 하에 이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예를 들면 아론이 제사장으로서 제단을 쌓고 지성소에 들어갈 때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번제와 희생제를 드리게 했던 것(레 16:24)과 일반 백성들로 부정한 몸을 반드시 물로 씻었던 것(레 15:5-12)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든 부정한 요소들로부터 정결케 하는 방편으로 물로 씻는 의식이었다.

이처럼 율법 속에 나타난 물로 씻는 의식은 곧 유대 민족의 종교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후에는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어 보이는 의식으로써 강조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에스겔의 예언에서 더욱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허 너희로 정결케 할 것"(겔 36:25)이라는 말씀의 선포에서 "물"과 "정결"의 관계를 뚜렷이 해주고 있다. 그리고 후기의 선지자 말라기에 와서는 이러한 정결 의식이 메시야의 도래 전에 한 예비자(세례 요한)에 의하여 계속될 것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예언해 주고 있다(말 3:1). 정결을 위해 몸을 사용한 구약의 기록을 가리켜 비슬리 머레이 같은 학자는 새로운 시대에 이어질 세례의 모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쿰란 공동체에서 가졌던 세례 의식을 들 수 있다

쿰란 공동체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는 없으나 1947년 사해 사본의 발견과 함께 그것은 이스라엘의 엣세네파에 속한 한 종교적 그룹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주전 2세기경에 사해의 서북쪽에 위치한 쿰란이라는 곳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진실된 제사장 직분과 부패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본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철저한 신앙공동체로서 성경 읽기와 노동, 예배, 기도, 공동식사 등을 통한 이상적 신앙을 추구하였다.

이들 공동체가 갖는 특성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속 내려왔던 '정결을 위한 물의 사용'이라는 차원을 넘어 그 공동체의 가입ㅇ르 위해 세례를 정식으로 의식 속에서 거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때의 세례는 먼저 죄의 회개를 촉구했으며, 다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무리로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상징했다. 이들의 세례는 곧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며 베풀었던 세례의 줄기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례의 분명한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주었던 세례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특수한 모습은 언제나 이방인들에게 두려운 존재들로 보였으며, 동시에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로 개종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때 유대교가 이들에게 어떠한 조건을 요구했고 그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이나 초대 교부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개종 의시만을 가지고 온 이방인에게 개종을 허락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많은 학자들의 꾸준한 연구에 의해 개종자들에게 주었던 세례가 주후 1세기 전반까지 유대교 내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점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때의 세례는 쿰란 공동체에서 가졌던 투철한 신앙의 강조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개종자들을 물로 깨끗케 하는 정결 예식에서 끝나지 않고 수세자 자신의 영과 육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는 성례전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교의 세례 의식은 주후 50년 경, 즉 예수님의 공생애 이후까지도 활발히 진행된 사실이 연구 결과 밝혀짐으로써 예수님께서 명령했던 세례의 기본 뜻이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전파와 확장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는 세계적 차원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명령했던 예수님의 근본 의도를 이해할 때 유대교에서 행한 개종자의 세례의 도입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공동체 형성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 앞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이방인들에게 좀더 철저한 회개와 신앙의 표현, 그리고 자신들의 헌신을 다짐하는 세례 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앞에 하나의 사명적 존재로서 인침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출발과 그 과정에 부합되었다. 그래서 머레이는 "기독교 세례의 신학과 형태는 유대교의 개종자 세례의 형태와 신학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4)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하여 기독교 세례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 속에 묘사된 세례 요한은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회개와 세례를 외치는 특수한 선지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세례 사역은 앞에서 이미 살핀 대로 유대교에 있었던 개종의 세례를 단순한 의식으로부터 보다 적극적인 회개 운동으로 펼쳐 나가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서 그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용서받은 확신을 심어 주며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생생한 경험으로서의 세례를 베풀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라는 메시지의 선포는 단순한 유대교의 의식적 차원을 넘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길의 안내가 되었다. 이러한 요한의 세례는 지금까지 있어 온 유대교 세례의 형태를 도입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여했다. 이 세례는 곧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의 기점이 되었으며, 그후 기독교 공동체의 특수한 의식으로 집례되어 온 소중한 성례전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구약에서의 정결 의식, 쿰란 공동체의 세례 의식, 유대교 개종자의 세례, 그리고 세례 요한의 회개와 세례 운동 등은 모두 후에 이어질 기독교 세례의 근원적 줄기로서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세례 가운데 나타난 공통점은 모두가 불결한 죄로부터의 정ㄹ결함을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의 일치이다. 그리고 이런 신학의 표현이 모두 물을 사용하는 상징적 의식을 통하여 확인됐다는 데 우리의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다.

 

 

3. 예수님과 사도들의 세례

 

기독교 세례의 직접적인 출발이며 기초가 된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인식과 가르침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이 세례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그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죄인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쳤던 세례 요한의 세례 현장에 왜 예수님은 나가야 했고, 그 세례를 받아야만 했던가에 대하여 많은 신학적 논쟁이 계속되어 왔던바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 요한을 통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고 부른 것은 곧 예수님의 실체와 그 사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세례 속에서 세상의 모든 죄와 수난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없으신 몸이 그것을 짊어지는 수난의 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멍에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자신의 세례가 십자가의 수난ㅇ르 의미함을 그의 사역의 후기에 말해 주고 있다(막 10:38).

 

둘째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 순간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통하여 만인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깊은 의미의 확인은 오늘의 세례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갈 3:26).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공적으로 들려주었던 그 세례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했으며,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밝혀 주었다.

 

셋째로, 예수님께 임했던 성령님에 관한 이해의 문제이다. 세례 이전에 인성만을 보였던 예수님의 존재가 성령님의 임재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소유한 메시야로서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예전으로 세례를 인식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 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사역이 출발됨을 알리게 되었으며, 그 후의 사역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과 함께 계속 전개되었다. 즉,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 속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공생애의 사역을 발견하게 된다.

끝으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예수님께서 세례에 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졌으며 무엇을 말씀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대답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이해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최종적 명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이다.

 

먼저,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이해 문제를 살펴볼 때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세례를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분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은 과거적 사겆보다 새롭게 전개될 자신의 미래적 사건을 가리키면서 세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그분의 십자가 수난이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바등셔야 할 세례 행위임을 시사하고 있다. 오스카 쿨만의 말대로 예수님은 여기서 메시야와 수난의 종으로서 그 자신이 행동적으로 받을 세례를 예언하셨다.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새롭고 깊은 내용의 이해는 그후 바울에 의하여 계승되어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곧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다(롬 6:3).

 

둘째로, 세례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언급은 마태복음 28:19~20에 나타난 말씀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의 전파와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 최종적인 명령을 하신 사건이다. 이 명령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져야 된다는 사실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람으로 인치는 예전으로서 지켜 나가야 할 의무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지키고 있는 이 세례성례전은 주님의 명령에 의한 예전이며 위탁받은 무리들의 최우선적인 사명의 현장이라고 말하게 된다. 오늘의 세례 예전 역시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예전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의하여 집례되는 엄숙한 예전이며, 이 예전의 의미로 기독교 세례의 권위가 재인식된다. 그리고 이 예전을 통하여 모든 인간은 죄인되었던 몸에서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게 된다.


(2)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세례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 의미의 중점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의 활동 기록은 사도행전이 가장 자세하게 알려 주고 있다. 사도행전의 기사 중 세례에 관한 최초의 내용을 대할 수 있는 곳은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현장이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는 베드로의 응답에서 그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베드로의 지시적 명령은 3천 명이 넘는 무리들에게 즉시 이행되었고, 그들이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이 사건은 단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열두 사도들에 의하여 급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교회의 공동체 형성을 가능케 했다.

 

사도들의 계속된 세례의 사역은 어떤 의미를 부여했으며, 또 무엇을 강조했었는지에 대하여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먼저, 이들은 예수님께서 제정해 준 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점이다(행 8:16).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사도들이 단지 세례라는 의식 자체를 집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세자들이 먼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그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것이 확인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사도들의 세례는 수세자의 회개와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용서의 선언이 함께 했다(행 22:16). 그들은 수세자의 회개가 분명히 선결되어야 세례를 주었고, 그 세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이는 은총으로서의 용서가 선언됨으로써 수세자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결의 예전으로서 이러한 의미는 유대교의 세례를 경험한 무리들에게 훨씬 더 깊게 실감되었다. 환희에 가까운 이 감격은 사도들과의 거듭된 접촉 속에서 성령님의 체험을 갖게 하는 제2의 신앙적 경지로 그들을 인도하였다(행 2:38, 8:15-17).

 

셋째로, 이 때의 세례는 새로운 기쁨을 소유하고 삶의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무리들은 공동의 신앙 생활과 의식주를 함께 하는 교회의 가족이 되었고,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공동체의 세례에서 참 기쁨을 향유하며 살게 되었다. 이러한 기쁨은 인간 주도의 것이라기보다는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발생되고 진행된 사건이었다.

끝으로, 사도들을 통하여 받은 세례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의미로 주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바치고 복음 전파를 비롯한 교회의 봉사자로서 그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무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고 생명의 위험 속에서라도 구원의 감격을 부르짖는 강렬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상과 같이 사도들과 수세자들이 가졌던 세례의 의미는 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으로 확립되었으며, 이 의미를 새롭게 다짐하는 세례성례전이 베풀어지는 곳마다 기독교의 생명력 있는 발길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특별히 초대 교회를 비롯하여 회교권의 이방 지대에서는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순교적 결단 속에서 세례 의식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계속됨은 매우 감동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4. 세례의 집례

 

세례란 일반적인 예배 가운데서 진행될 수 있는 평범한 순서가 아니다. 예배의 순서에 따라 모두가 움직이는 예배의 형태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 세례성례전이다. 여기에는 먼저 집례자나 수세자의 준비가 있어야 하고, 집례자의 질문과 수세자의 대답이 따른다. 그 다음 회중 앞에 최종적으로 약속이 확인되어야 하는 특별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유아세례를 받고 견신례(입교 문답)를 받는 사람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이 집례의 과정이 단순한 의식으로서 세례를 베풀거나 견신례를 갖는 요식 행위가 아니라는 데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한다. 이 예전은 수세자나 견신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결단과 정직한 서약을 하도록 해야 하며 그들을 한 지체로 받아들이는 교우들에게도 책임과 새로운 결단을 갖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다음은 이토록 중요한 예전을 좀더 의미 깊게 진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들을 열거해 보았다.

 

(1)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할 후보자들의 선정 문제이다

복음이 정착되지 않은 피선교지에서 원하는 대로 세례를 주게 된다면 세례를 소홀히 취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수세자 자신도 세례의 존귀성이나 가치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후보자의 숫자만을 생각하고 신앙에 따른 수세의 자격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이 수세 후보자의 선별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목사는 직접 또는 부교역자를 통하여 이 기간 중에 충분한 접촉을 하면서 세례 후보자로서의 적격 여부를 판단해야 하며, 특히 그들의 신앙과 행위가 세례를 받아도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지의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추천 또는 권면해야 한다.

 

(2) 세례성례전을 갖기 위하여 교회는 주보나 기타 광고를 통하여 최소한 한 주일 또는 두 주일 전에 교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세자나 견신례를 받아야 할 후보들에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세례의 예전을 집례할 경우 반드시 성찬성례전을 겸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므로 예배 가운데서 세례만을 독자적으로 집례할 수 있다. 물론 교회의 규모에 따라 조절할 수 있으나 세례 후보자가 많은 교회, 또는 유아세례의 경우는 세례의 예전만을 한 주일 앞서 행하고 그 다음 주에 성찬성례전을 갖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분위기적으로 오히려 효과적이라 하겠다.

 

(3) 세례의 의미는 수세자나 견신례의 후보자들이 준비하는 공부 과정에서도 충분히 전달되어야 하지만 세례성례전의 전 주일부터 설교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이 좋다

세례의 현장에서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세례의 온전한 의미가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는 것은 하나의 무리이다. 한 주일 전의 설교에서부터 세례에 대한 깊은 의미가 설명되어짐으로써 자신이 받을 세례에 대하여 보다 더 준비를 하게 하고, 이미 세례 받은 교인들은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수세 후보자들은 적어도 일주일 동안 교단이 가지고 있는 신조들이나, 또는 세례 문답을 위한 공부를 철저히 함이 좋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습득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또한 소유해야 하는 의무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

 

(4) 유아세례만을 갖게 되는 경우는 설교 전에 행함이 좋다

예배 중에 어린이들과의 동석은 엄숙한 예배의 진행에 방해를 받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세례를 준 후 유아실로 가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의 예배 참석을 거부하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엄숙성과 그 질서를 위한 일로 지켜져야 한다.

 

(5) 집례자가 집례 시 수세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길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실수이다

그러므로 어린이, 어른을 막론하고 가슴에 이름표를 부착토록하여 실수가 없도록 준비해야 한다. 엄숙한 세례 순간에 이름과 사람이 바뀌는 사건들이 종종 발생되어 예전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때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당회 서기 또는 부교역자들은 정성을 기울여 이러한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 집례자를 도와야 한다.

 

(6) 유아세례의 경우는 어린이가 낯을 가리기 전에 세례를 받도록 함이 좋다

유아가 얼굴을 가릴 정도가 되었을 때는 세례를 주는 동안 드려워하거나 목사의 접촉을 싫어한다. 심지어는 울기까지 하여 예배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생후 3개월 전에 유아세례를 받도록 많이 권장한다.

또한 유아세례 시 목사는 조심스럽게 유아를 안아서 세례를 주고 입을 얼굴에 맞춤으로써 따뜻한 목사의 애정을 표시한 후 부모에게 안겨 주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어린이를 건네주고 받을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함을 목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

 

(7) 목사가 집례할 때 손에 책을 들고 거기에 너무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목사는 자유롭게 서로를 쳐다보면서 친근감 있는 집례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별히 신앙에 대한 질문을 할 때 책을 들어 읽는 자세보다는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묻고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면 훨씬 더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대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다.

 

(8) 목사는 수세자들에게 자신이 창작한 질문을 하는 것보다는 교단의 예식서나 예배모범에 규정된 질문을 하도록 함이 좋다

그 이유는 교단마다 가지고 있는 교리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외국 교회의 예배모범에 나타난 질문들은 주로 유아세례를 위하여 그 부모들에게 묻는 질문들이 많다. 유럽이나 북미의 경우 우리와는 반대로 어른 세례보다는 어린이 세례가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세례 시의 질문들도 우리의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들의 교회에서 행사는 견신례(입교 문답)의 질문 내용들은 우리의 세례 문답과 비교가 된다. 미국의 장로교에서 행하는 견신례의 문답을 참고로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목사는 "여기 우리 주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하면서 다음의 말씀을 들려준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요 15:16).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라"(마 10:32).

이상과 같은 성경 말씀을 선포한 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친구여, 주 예수님께서 그대를 선택하셨고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연합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대를 부르시사 그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했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대를 여기에 서게 하사 뭇 증인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의 신실한 제자로 나아가 그를 섬기도록 하십니다."


이어서 목사와 견신례 후보자는 다음의 질문과 대답을 한다.

 

문 : ---씨, 그대의 주님과 구세주는 누구십니까?
답 :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나의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십니다.
문 : 그분을 굳게 믿고 신뢰하십니까?
답 : 예! 신뢰합니다.
문 : 그대는 그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십니까?
답 : 예! 작정합니다.
문 : 그대는 이 교회의 신실한 교인이 되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대 자신을 바치며 어디서나 교회의 형제애를 그대 자신에게서 보이시겠습니까?
답 : 예! 그렇게 보이겠습니다.


이러한 문답이 끝나면 목사는 그들의 무릎을 꿇게 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그대에게 그 사랑 안에서 살면서 그분을 섬겨 나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명령적 부탁을 한다.

"감사로 가득 채워진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그대 가운데 충만히 머물도록 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말이나 행동 전체가 주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후 모든 회중이 함께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한 주님, 한 신앙을 갖게 된 교회로서의 일치성을 확인한다. 이어서 교회의 대표로 장로가 나와서 가족을 주심을 감사하고 이 식구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짤막한 기도를 마친 후 견신례를 받은 성도를 일어나게 하여 모든 장로와 환영의 악수를 나누게 한 다음 회중이 앉아 있는 자리로 안내해 간다.

이상에서 소개한 견신례의 질문 내용들과 그 절차는 장년 세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하면 소속 교단이 발행한 예식서에 나타난 질문들을 활용함이 좋다. 그러나 어떤 교단의 예식서를 사용하든지 서약을 위한 기본적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해 주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지의 여부, 둘째로 예수님 밖에서 살던 과거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제자로서의 신실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셋째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한 공동체가 되는 약속과 거기에 속한 일원으로서 모든 책임과 의무를 준수할 것인지에 관하여 질문하고 확실한 대답을 받아야 한다.

 

(9) 목사는 수세자나 입교자(견신례를 받은 사람)와의 문답이 끝나고 세례를 준 후에 또 하나의 질문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회중에게 묻는 질문으로서, 교인들이 세례 받은 어린이 또는 장년을 동일한 식구로 반갑게 맞아들이는지,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계속 성장하도록 보살펴 주고 그리스도의 살아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본을 부일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거기에 대한 확실한 약속의 대답을 받아야 한다. 이는 공동체로서의 새 식구를 맞아들이는데 더욱 큰 의미를 준다. 이 회중과의 약속은 중세 교회나 현재의 구교에서 수세자의 신앙을 책임적으로 보살피도록 하는 대부모 제도를 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 약속들이 끝난 다음에 목사는 수세자가 본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한다.

 

(10) 물세례를 주는 방법의 문제는 한 가지가 아니고 다양함을 알아야 한다

세례 시 물을 어떻게 사용하여 세례를 주어야 바른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많이 제기되어 왔다. 침례교에서는 온몸을 물에 적시는 침례만이 참다운 침례라고 주장하면서 영세나 세례는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이론적 반론을 제기하는 것보다는 초대 교회의 목회 지침서로서 '열두 사도의 교훈서'라고도 일컫는 '디다케'에서 어떻게 세례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서 정답을 얻을 필요가 있다. '디다케' 제 7장에 서술되어 있는 세례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세례의 지침을 주고 있다.

"세례에 있어서 여러분은 이렇게 세례를 주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흐르는 물에서 세례를 주시오. 찬 물에서 할 수 없으면 따뜻한 물에서 하시오. 만일 둘 다 없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머리 위에 물을 부으시오. 그리고 세례성례전이 있기 전에 세례자나 수세자, 그 외 다른 사람들도 미리 금식하시오. 특별히 세례 받을 사람에게는 하루나 이틀 전에 단식하기를 명하시오."

여기서 우리는 온몸을 적시는 침례만이 교회가 고수해야 할 전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초기 교부들의 기록 가운데서도 대단한 권위를 갖고 있는 이 '디다케'의 내용은 세례 요한 때처럼 강물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온몸을 반드시 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문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에 잠기게 하거나 물에 적시게 하는 형식을 통하여 세례를 주고받는데 그 강조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11) 세례를 주는 시기가 언제 어느 주일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다

세례 받지 않은 채 교회 생활을 하다가 생명의 위독을 느끼면서 세례 받기를 원하느 ㄴ경우 목사는 교회를 대표하는 당회원들과 함께 가서 세례를 집례할 수 있다. 또한 어느 주일 낮이나 저녁 예배에서도 세례는 가능하다. 대체로 많은 교인들이 부활절 예배 현장에서 새로운 삶의 소생을 의미하는 세례를 받고자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세자는 어느 날이 되었든지 목사의 지시에 따라 철저한 준비와 함께 수세일을 자신의 생애에 중요한 날로 알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여 단정한 의복과 함께 엄숙한 예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5. 유아세례와 견신례

 

유아세례란 부모의 신앙에 따라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하는 의식이며, 견신례란 유아기에 부모의 신앙에 의해 받은 세례에 대하여 장성한 다음 자신의 의식과 신앙으로 직접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과 동시에 여타의 신앙적 내용을 고백하는 예전을 말한다.

유아세례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 속에 존속하는 예전으로서 초대 기독교 시대부터 있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의 기록을 참고할 때 사도행전의 온 가족이 함께 세례 받은 내요을 근거로 하여 많은 학자들은 그 가정의 부모에게만 주던 세례가 아니라 그 가족에 속한 어린이들까지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부모를 가진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는 세례ㅡ 곧 하나님의 은혜가 경험되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구너속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러한 이론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유아세례의 관습은 사도적 전통으로 초대 교부도 유아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도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토록 기독교의 일반적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유아세례는 종교 개혁에 이르러 심각한 반론에 부딪히게 되었다. 즉, 재세례파와 같은 급진주의 개혁자들은 세례란 장성한 인간이 자신의 신앙에 의하여 받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의 침례교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영향을 끼쳐 유아세례를 거부하기에 이르고 있다. 지글러(Franklin M. Segler)와 같은 침례고 계통의 예배 신학자는 "구원이란 개인적인 신앙 경험 위에 기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세례란 기독교 신학에 설 자리가 없다"라는 극단적 표현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에밀 브루너와 같은 학자도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구교와 개신교의 대부분은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적극 고수하면서 변할 수 없는 교리적 차원의 신앙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칼빈은 유아세례를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던 어린이의 할례와 연관시키면서 "신비적 해석의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주님의 생명으로서 인쳐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현대 신학자들도 비록 어린 생명으로서 성례전의 의미와 내용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것은 깊은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성장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친 몸으로 스스로를 깨달아 가게 하는 것은 실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적이고 긍정적인 유아세례에 관한 주장은 침례교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파가 오늘날까지 계속 지켜온 세례의 예전에 중요한 부분이다.

 

이상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아세례의 집례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신앙과 그들의 책임 있는 서약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목사는 세례 받은 유아의 부모와 계속된 교육적 대화를 통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앞으로의 상장기간 동안 신앙 안에서 자녀를 키워야 할 책임과 그 어린이 앞에서 보여 주어야 할 자신들의 신앙적 자세에 관한 의무적 행위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교회에게도 부모와 같은 동일한 책임을 이행해 줄 것을 서약하는 것도 집례 가운데 있어야 한다.

 

견신례는 수세자가 대개 만 15세에 이를 때 장년세례와 동일하게 문답을 하게 된다. 입교 문답이라고도 하는 이 견신례는 부모의 신앙에 의해 받은 세례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장년 세례자와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되고 서약을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새로운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겠다는 스스로의 확인을 한 번 더 고백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를 가리켜 로렌스 스투키(Laurence Hall Stookey) 교수는 '계약의 새로운 갱신'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 견신례는 단순한 본인의 희망으로 집례되는 것보다는 성경과 교리에 대한 철저한 과정을 밟게 한 후에 갖도록 함이 올바른 방법이라 하겠다.

 

끝으로, 세례성례전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목사에 의하여 집례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다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예배의 행위에 중간 존재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도 이 성례전의 집례에서만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합법적으로 안수받은 복음의 목사가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규정해 놓았다. 특별히 유의하고 상기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마지막 부탁을 갈릴리의 뭇 대중이 아니라 선택받고 훈련받은 열한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과 전통에 의하여 세례의 집례는 안수받은 목사에 의하여 집례되도록 대부분의 개신교의 교회들이 결정하여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