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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Gospel

약 1:19-27 설교 - 초대교회의 거룩성

 

 

1. 서론

 

우리는 교회에서 거룩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고 또 우리에게도 거룩하라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의 뜻은 구별되었다라는 뜻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뭔가 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뭔가 좋은 의미로 세상과 구별되어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거룩하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의식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로마의 카톨릭 교회가 점점 타락해가고 있을 때에 그들은 성찬에서의 화체설을 주장하였습니다. , 성찬식을 진행할 때에 사제가 성경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떡과 포도주가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은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에 매우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단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고 나면 이후에는 함부로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하고 남은 것들은 버리지 않고 성직자들이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성만찬을 집행하다가 떡과 포도주가 땅에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떡은 떨어져도 다시 주우면 되지만 포도주는 다시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예수님의 피로 변해버린 포도주를 수건으로 닦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로마 카톨릭은 포도주는 빼고 떡만 나눠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 속에 피가 있는 것처럼 떡 속에 포도주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카톨릭의 화체설이 아니라 칼빈이 주장한 영적 임재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에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며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한 일을 경험하지만 그 떡과 포도주 자체가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셔서 그런 연합을 이루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특별하고 신비한 종교적인 의식이 있을 때에 뭔가 좀 다르고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초대교회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거룩성은 특정한 종교적 의식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삶 가운데 드러나는 뭔가 다른 일상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성이 나타났습니다.

로버트 뱅크스라는 사람이 쓴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초대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렸는지를 역사적인 자료들을 기초로 짧고 간단하게 요약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푸블리오라는 사람인데 원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 교회의 모임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임이 다른 종교적 모임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보통 어떤 종교적인 모임에는 제사나 특별한 의식이 있기 마련인데 교회의 모임에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종교적 의식이 너무 평범한 것이 특별한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의식은 매우 평범했지만 그 모임 자체는 매우 특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성별을 초월하고 나이를 초월하고 신분을 초월해서 사람들이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이는 모임은 흔하지 않았는데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푸블리오에게는 기독교가 매우 구별되고 거룩하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거룩성을 나타낼 때에 어떤 특별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구별된 삶,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삶을 통해 거룩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2. 본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초대교회에서는 어떤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는지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여기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해라입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잘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말을 해야 하는데 말하기는 더디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내기도 더디해야 합니다. 신중하게 판단하고 말하라는 뜻입니다. 잘 듣고 빨리 듣고 경청을 하되, 말할 때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귀를 두 개 주시고 입을 하나 주신 이유는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내는 것은 말하기, 듣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듣기를 하지 않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수용하지 않거나 들어주지 않으면 성을 잘 냅니다. ,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성을 잘 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뜻대로 일이 안된다고 해서 함부로 성을 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0절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하기와 성내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2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의 마음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할 때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지혜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추구했던 첫 번째 거룩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이고 내 말과 성내기는 신중히, 더디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추구했던 두 번째 거룩성은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22-2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들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도 많고 인터넷이나 TV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듣는 만큼 성장하고 성숙하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그 안에서 성장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는데 어떤 사람은 성장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세미나를 듣는다고 해도 그 말씀을 그냥 흘려버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그냥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우리가 그만큼 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정말 좋습니다. 운동하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우리가 TV를 보면 의사 선생님이 나와서 운동을 많이 하고 음식도 잘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면 우리가 건강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건강해지려면 한 번을 들어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 우리의 몸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기타를 고등학교 때에 교회 형에게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몇 개의 코드를 배워서 열심히 교회에서 찬양하면서 쳤습니다. 그러다보니 재미도 있고 계속 치다보니 실력도 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코드를 잡고 기타를 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하고 곧잘 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제가 신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인터넷에서 기타를 치는데 손이 안 보일 정도로 화려하게 기타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너무 그렇게 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그 분과 같이 기타를 치고 싶어서 오늘도 그 분이 기타를 치는 영상을 보고, 내일도 보고 모래도 보고 1년 보고 10년을 본다면 제가 그 분처럼 기타를 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 분과 같이 치려면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분의 영상을 보며 기타를 어떻게 치는지 연구를 하고 내 기타를 손에 잡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연습을 하다보면 조금씩 실력이 늘어서 그 분과 비슷한 소리가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타 연주곡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인터넷 까페가 있습니다. 자기가 연습한 영상을 카페에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고 잘했다든지, 어디가 부족하다든지 충고를 해줍니다. 그런데 유독 다른 사람의 연주를 많이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도 그 연주곡을 잘 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보통 자신이 연습한 영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도 기타 연주를 연습하지 않으면서 원곡을 듣기만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귀만 높아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원곡에 비교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만 합니다. 하지만 같이 그 곡을 연습한 사람들은 오히려 격려를 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은 그 곡을 듣기만 들었지 사실 그 곡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곡을 연습해 본 적도 없고 쳐 본 적도 없고 진짜 그 곡에 대한 실력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들은 만큼 내 신앙은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아직까지 우리는 신앙의 초보입니다. 귀는 높아지고 아는 건 많을지 몰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2절의 말씀과 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내가 많이 들었다고, 많이 안다고 해서 내 신앙의 수준이 높을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추구했던 두 번째 거룩성, 말씀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초대교회가 추구했던 거룩성은 경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무엇일까요? 26-27절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이란 자기의 혀를 조심하는 것이고 자기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의 말씀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이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2장에 보시면 그 대표적인 예가 나오는데 바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 안에서도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교회 안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저기 구석에 앉으라고 하면서 차별을 하는데, 너희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세속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이나 그 사람의 외모 때문에 그 사람의 진정한 존재를 보지 못한 채 그 사람을 판단하고 대우하는 것은 세속적인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손수 디자인을 하셨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 중에 그리고 사람들 중에 똑같이 생긴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쌍둥이도 처음에는 비슷했다가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똑같은 모양을 가지도록 창조를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외모나 성격이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는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함부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 사람이 가진 것이나 그 사람의 배경 때문에 그 사람의 가치를 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주머니에서 5만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혹시 가져가실 분이 있으시면 가져가라고 말씀을 드리면 가져가실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5만원짜리 지폐를 밟고 구겨서 좀 지저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똑같이 가져가실 분은 가져가실 것입니다. 왜요? 더러워지고 구겨졌지만 그 가치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더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환경이 변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고 망가지고 좌절하고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가치가 변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소중하고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속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을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가 추구한 거룩성 세 번째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세속적 가치관과 삶을 멀리하는 경건입니다.

 

3.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처음부터 특정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삶으로 거룩성을 나타냈고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왔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살았던 것처럼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며, 둘째로 말씀을 듣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며, 마지막 셋째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아감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모든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