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delicacy
지나치게 향락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서,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미련한 사람이 사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다(잠 19:10). 요한계시록 18:3에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바벨론의 사치를 지적하고 있다.
사탄 Satan
악의 우두머리. 히브리어 '사탄' 과 헬라어 '사타나스'는 근본적으로 대적자를 의미한다(예. 민 22:22;삼하19:22), 우리는 욥기 1, 2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선 것을 본다. 때로는 이 구절들에서 사탄이 특별하게 악으로서가 아닌 단순히 천상의 무리들 가운데 하나로서 여겨진다고들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아직 받아들이기에 완벽한 가르침이 마련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사탄의 활동들은 욥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탄에 관한 구약성경의 언급은 드물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들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활동한다. 사탄은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계수하게 했으며(대상21:1),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소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하려고 그의 우편에 섰다(슥3:1이하). 시편기자는 사탄이 누군가의 우편에 서도록 하는 것을 재앙으로 생각했다(시 109:6, 공동번역 '고발자'). 요한은 우리에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라고 말하며 그에 관한 구약성경의 언급들은 이를 입증해 준다.
신약성경에서 이 악한 원수는 여러가지 다른 이름과 묘사하는 명칭을 통하여 알려지고 있다. 그는 흔히 '헐뜯는 자' 라는 뜻의 '마귀' (헬. '디아볼로스')라고 불리운다(마4:1, 공동번역 '유혹하는 자' ;4:2;요8:44;엡6:11;계12:12, 공동 · 새번역 '악마'). 이 외에도 ‘아바돈’ 또는 '아볼루온' (계9:11),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12:10), '대적' (벧전5:8, 헬. '안티디코스'), '바알세불' (마12:24, 에그론의 신의 이름을 차용하여 사탄을 묘사한 듯하다), '벨리알' (고후6:15), ‘온 천하를 꾀는 자' (계12:9, 새번역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 '악한 자' (마13:19,38;요일2:13;5:19), '살인한 자'와 '거짓의 아비' (요8:44), '이 세상 신' (고후4:4), '공중의 권세잡은 자' (엡2:2), '시험하는 자' (살전3:5) 등이 있다.
사탄의 기원은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요8:44)의 말씀은 그가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내포한다. 한편 디모데전서 3:6은 그가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음을 지적한다(새번역 '그러면 그가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을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많은 신학자들은 이사야 14:12-14과 에스겔 28:12-15의 광범위한 예언들을 사탄에 적용시키는 것을 거절하면서 이 구절들은 엄밀히 바벨론과 두로의 왕들에게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보수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구절들이 사탄의 기원에 대하여 분명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심오한 예언들은 분명 어떠한 지상의 통치자들을 초월하며 세상 정부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 사탄의 영적인 모습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단10:13;요12:31;엡6:12), 이 구절들은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과 스스로 높아짐으로 말미암아 배반하는 것과 함께, 타락하기 이전의 화려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사탄의 열정이 극에 달한 것은 예배를 받고자 한 것이다(사14:14;마4:9;고전10:20;13:4,15). 이러한 근거 위에서, 계시록 12장은 사탄의 악한 일의 다음 단계들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타락할 때, 사탄은 천사들의 1/3을 설득하여 자신의 반역에 가담시켰다(계12:3-4). 구약시대 전체를 통하여 그는 메시야의 계보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메시야가 인간이 되었을 때, 사탄은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계12:45).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계획들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의 사역 초기에 힘든 연단의 시기를 가지실 때 마귀는 그분의 사역에 대하여 잘못된 길을 가도록 유혹했다(마4장;눅4장. 참고. 막1:13). 시험을 다 한 후에 마귀는 '얼마동안 그를 떠났다(눅4:13). 이것은 시험이 후에 다시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였다는 말에서도 분명하다(히4:15). 이러한 갈등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명백한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요일3:8. 참고. 히2:14), 신약성경 어디에서든지 한편으로 하나님이 이끄는 선의 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탄이 이끄는 악의 세력 사이의 대(大) 갈등이 있음을 본다. 이것은 한 두 저자의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배경이다.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말함으로써 사나운 대적을 강조한다. 바울은 사탄의 보다 교활한 면을 생각하며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탄의 하수인들이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별로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는 권면을 받았으며, '마귀의 올무'(딤전3:7;딤후2:26)에 대한 언급들도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그리스도인들(그리고 심지어 천사장들도, 유9절)이 혹독하고도 교활하게 수행되는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싸움에서 벗어날 상황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단순히 악은 언제나 분명하게 악으로 보일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담대함과 더불어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단호한 대적은 언제나 성공할 것이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벧전5:9) 마귀를 대적할 것을 말하며,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7)고 언급하였다. 바울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7)고 권면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써 악한 것이 행하는 모든 것을 능히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엡6:11,13).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여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탄의 책략이 풍부함과 사탄이 우리를 이길 유리한 고지를 항상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1, 공동번역 '우리는 사탄의 책략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고 덧붙였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 전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탄은 끊임없이 복음에 대적한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16:23)는 책망을 받았던 것처럼, 사탄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였다. 사탄은 베드로에게 그 이상의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셨다(눅22:31이하), 또한 사탄은 예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의 적대자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였다. 이러한 모든 말씀은 노하심의 절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다가 저지른 행동은 악한 것의 활동에 기인한다. 사탄은 유다에게 들어갔다(눅22:3;요13:27). 사탄은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요13:2), 예수께서는 십자가와 함께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예견하여 말씀하신다(14:30).
사탄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시험한다(고전7:5). 우리는 사탄이 믿음을 고백한 자인 아나니아('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와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대적한 자인 엘루마 '마귀의 자식이요, 행 13:10)에게도 역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원칙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것이라고 요한일서 3:8에 언급되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결과적으로 사탄에게 속할 수도 있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들' (요일3:10)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의 회' (계2:9:3:9, 새번역 '사탄의 무리',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 (계2:13, 새번역 '너희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곳')이라고 기록된 것을 본다. 사탄은 선교사업을 방해한다(살전 2:18).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진 좋은 씨(말씀)를 빼앗으며(막4:15), 세상이라는 밭에 '악한 자의 아들' 을 뿌린다(마13:38이하). 그의 활동은 육체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눅13:16). 그는 언제나 책략이 풍부하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한계와 패배를 확신한다. 그의 권세는 넘겨받은 것이다(눅4:6).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욥1:12;2:6;고전10:13;계20:2,7). 심지어 올바른 목적(cause)을 위해서는 이용될 수도 있다(고전5:5. 참고, 고후 12:7). 예수께서는 칠십 인의 전도를 통하여 일종의 예비적 승리를 보셨다(눅10:18). 우리 주님께서는 '영영한 불'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으로 생각하셨으며(마25:41), 요한은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계20:10). 우리는 이미 사탄과의 싸움이 절정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쫓겨나고'(요12:31), ‘심판을 받은 것' (요16:11)으로 말씀하셨다. 승리는 히2:14; 요일3:8에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선포자가 할 일은 사람들을 돌이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하는 것이다(행26:18).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사탄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심판을 받았지만(요13:31-33. 참고. 16:11), 여전히 싸움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때로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사탄의 운명은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반역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의 최후 패배는 신약성경에 예견되어 있다(눅10:18;요12:31;계12:9;20:10),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사탄의 최후 패배의 기초가 된다(히2:1418;벧전3:18,22). 이 사건은 계속해서 사탄에 승리하셨던(마4:1-11;눅4:1-13) 예수의 죄 없으신 삶의 최고의 절정이었다. 최후의 승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사탄이 불못 속으로 던져질 때에 올 것이다(계20:1-15).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기 위한 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얻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인의 승리는 사탄의 유혹들에 저항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엡4:25-27;벧전5:8-9), 하나님께서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를 도우시려고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계12:11),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기도(히7:25), 성령의 인도(갈5:16), 그리고 영적 전쟁을 위한 여러 가지 무기들(엡6:13-18)을 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사탄과 같은 대적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그의 존재와 활동은 악과 고난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필요하다. 성경은 사탄은 존재하며 그의 주된 일은 인간사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리 심(rule)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탄, 즉 이 거대한 악의 실체를 당신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게 하셨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직 없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악과 잘못(wrong-doing)은 인간이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는 궁극적인 의미의 삶에 대한 열쇠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닐까?
사태난 산 high place
문자적으로는 비로 인하여 산비탈이 무너져 내린 산을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어떤 특정한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발람이 발락의 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언을 받으러간 곳이다(민23:3), 원어상 이 말은 '높은 곳' 또는 '거칠고 메마른 땅' 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고대의 술사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높은 곳이나 민둥산을 찾는 습관이 있었다. 공동번역은 '꼭대기' 로, 새번역은 '오솔길'로 번역하였다.
사통 take
부부가 아닌 남녀가 몰래 정을 통하는 것.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웃의 큰 나라들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들을 지아비를 두고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 비유하고 있다(겔16:32 새번역 '간통').
사특 froward
'마음이 악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시 106:6;잠11:3), '사투' 혹은 '사악'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에는 '벨리이야알'이 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악귀나 적그리스도에게 붙여진 말로서 후에 의인화하여 ‘벨리알'로 사용되었다(고후6:15). 이 말은 사무엘상 2:12에서는 ‘불량자'로 번역되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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