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다 forgive
'죄를 용서한다' 라는 표현으로 성경 전체에 골고루 사용된 이 말은 대부분 죄를 '사하다' 라는 의미로 쓰여졌으며, 허물, 훼방, 불법 등과 관련하여 쓰이기도 했다(왕상8:50;마12:31;롬4:7), 이 말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무죄로 선고하신다는 것이지만 회개나 신앙을 전제로 한다.
사하라임 Shaharaim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세 아내를 거느렸는데 그들 중에 두 사람과는 헤어지고 후에 모압에서 많은 자녀를 보았다(대상8:8).
사하수마 Shahazimah
잇사갈 지파의 변방의 성읍으로서(수19:22), 다볼 산 동남동쪽에 있는 '텔 엘-무카르카쉬' 가 이곳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사함 Zaham
유다 왕 르호보암과 마할랏과의 사이에서 탄생한 여러 아들 중에 하나이다(대하 11:18-19).
사해
<보라> pooly
사해사본 Dead Sea Scrolls
1947년부터 몇년 간에 걸쳐 사해 서북쪽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 자료 모음의 통칭, 사해 사본은 대체로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1. 쿰란 텍스트들. 사해 사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47년 이후 사해 북서쪽 와디 쿰란(Wadi Qumran)과 그 주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이다. 이 동굴들에서 나온 사본 내용들은 주로 오늘날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이라 부르는 인근 복합 건물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 유대인 공동체의 도서실에 남아 있던 것이다. 이 공동체는 AD70년에 이르기까지 2세기 동안(BC 34년 경에서 BC 4년 사이에는 단절이 있긴 하지만)이 장소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의 한 분파였을 가능성이 농후한 이 공동체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BC 175-164) 시절의 박해 아래서 계약에 대한 충성심을 흠없이 유지하였던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 가운데서 발생하였다. 이들은 하스몬 왕가에게 주요한 정치군사적 권력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수여하도록 한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이라 불렀던 지도자의 영도 아래서 유다 광야로 물러나 이곳에서 공동체를 조직하여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의로운 남은 자, '주님을 위해 예비된 백성'이라 불렀다. 이들은 새 시대가 곧 도래하여 현재의 '악한 시대' 에 종말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였다. 이들은 율법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실천하여 신의 총애를 얻고 오도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속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이들은 종말의 때에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을 집행하는 자들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이들은 종말의 때에는 구약 예언에서 예고된 세인물 - 신18:15이하에서 말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 다윗적인 메시야, 아론 계열의 위대한 제사장 - 이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제사장은 새 시대의 최고영도자로 다윗적인 메시야보다 우위에 설 것으로 믿었다. 다윗적인 메시야는 전사 - 왕(warriorprince)으로서 '어둠의 아들들' 으뜸가는 어둠의 아들들은 키팀의 이방 세력으로 로마인들을 가리켰던 듯하다)을 전멸시키는 승리를 가져오도록 이스라엘의 신실한 무리들을 영도할 것으로 믿었다. 선지자는 모세가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에 했던 것처럼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것으로 믿었다. 쿰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시대'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이들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아래서 폐위되었던 사독의 정통 가문에 속하지 않았고, 또한 이들은 거룩한 직무를 맡기에는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한 인물, 하스몬 왕가의 제사장-왕, 아마도 유다 마카비의 형제로 그를 계승하였던 요나단일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의의 스승과 그를 따른 무리들에게 격렬한 적대감을 보였던 탓으로 '악한 제사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쿰란 공동체는 자체 안에 사독 계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틀을 유지하면서 새 예루살렘(천상의 도시가 아니라 새로와진 옛 예루살렘)의 정화된 성전에서 소중한 희생제사를 획복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회복의 때까지는 이 공동체가 살아 있는 성전을 이루며, 전체 구성원은 성소이며, 핵심 지도체는 지성소이며, 찬양하는 입술과 순종하는 생활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었다.
공동체 도서실(이 도서실의 약 500개 가량의 문서가 확인되었으며, 이중 대부분은 매우 단편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에는 성경 문헌과 비성경 문헌을 갖추고 있었다. 약 100개 가량의 두루마리들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책들이다. 여기에는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 책들이 들어 있다(개중에는 여러번 중복되는 것도 있다). 에스더서가 제외된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이 성경 사본들은 BC 마지막 몇 세기와 AD 1세기 초반의 것이다. 이 사본들은 적어도 히브리 성경의 세 가지로 구분되는 문서 유형을 보여 준다. 원(原) 맛소라 유형(바벨론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인정받는 히브리 문서가 유래하였다), 70인역 성경의 기저를 이룬 문서, 사마리아 오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문서(팔레스타인에서 기원한 듯한)가 그것이다. 일부 사본은 혼합된 문서 유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동굴 4에서 나온 민수기의 한 사본의 문서는 사마리아 유형과 70인역 성경의 유형 중간 쯤에 속한다. 같은 동굴에서 나온 사무엘서의 한 사본은 특별히 주목된다. 이 사본은 70인역 성경의 기저를 이룬 문서에 가까우면서도 맛소라 본문 이상으로 역대기 기자에 의해 사용된 사무엘서 문서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이런 성경 사본들은 이때까지 알려졌던 히브리 구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구약 성경의 문서 역사를 연구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쿰란 동굴들에서는 또한 일부 70인역 성경 단편들과 탈굽 문헌(특히 동굴 11에서 나온 아람어로 된 욥기 탈굼)도 발견되었다. 토비트(아람어와 히브리어로 된), 집회서(히브리어로 된), 예레미야의 편지(헬라어로 된), 에녹 1서(아람어로 된), 요빌의 책(히브리어로 된)을 포함한 일부 외경들도 확인되었다.
성경이 아닌 두루마리들은 키르벳 쿰란 및 서쪽 3km 떨어진 아인 페쉬카(Ain Feshkha) 근처의 한 보조 건물의 발굴로 드러난 증거와 함께 이 공동체의 신념과 의식들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동체의 도서실에 있던 모든 책이 이 공동체의 관념과 행동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렇더라도 쿰란의 많은 문헌은 쿰란의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믿어도 좋을 만한 일관된 상황을 제시해 주고 있다.
쿰란 공동체는 엄격한 자체 규율을 실시하였다. 공동체 가입에는 신입자를 시험하는 절차를 비롯한 엄격한 조건들이 따랐다. 이들의 율법 해석은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의 해석보다도 한층 더 엄격하였다. 실상 쿰란 문헌에서 '부드러운 것을 좇는 자'(참조, 사30:10)로 언급된 대상은 바리새인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쿰란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의식적 목욕제계를 하였고, 참여가 엄격히 규정된 공동식사를 하였으며, 요벨의 책에 규정된 것과 유사한 달력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희망을 묵시문학적으로 해석하며 이 희망의 실현에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예언적 성경이 자신들의 시대 및 가까운 장래의 인물과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런 해석은 이들의 성경 주석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쿰란 주석자들에 의하면 선지자들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이 종말에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으나 종말이 어느 때 올 것인가는 알지 못하였다. 이 추가적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 의의 스승에게 주어졌으며, 의의 스승은 이를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예언적 신탁들의 의미를 통찰할 안목을 가졌으며, 이들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그 성취의 때와 방식의 비밀들을 전수해 줌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은총을 받았음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의 이런 기대들은 이들이 찾았던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는 AD 66-73년의 로마와의 전쟁 기간에 본부를포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책들이 주변 여려동굴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던 것도 아마 이때였을것으로 여겨진다. 이 공동체의 생존자들에게 어떤일이 일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소한 이들중의 일부는 예루살렘 피난 교회 (refugee churchof Jerusalem)와 뜻을 같이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종말론, 남은 자 의식, 성서 주석 및종교의식 면에서 쿰란 공동체와 초기 교회 간의 유사성이 맞설 만한 중요한 차이점들도 많이 있다.쿰란 공동체의 의식적 목욕제계와 공동식사는 기독교의 세례와 성만찬이 갖는 성례전적 의미를 갖지못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동료들과 자유롭게 섞여 살았으며 쿰란공동체처럼 광야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지는않았다. 신약은 예수님을 그의 한 인격에서 예언자와 제사장과 다윗 가문의 왕의 성격을 다 구비하신것으로 제시한다. 이에 반해 쿰란의 종말론에서는이 직무들을 세 다른 인물들에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독특성을 부여하는 것은예수님이다. 쿰란 공동체의 의의 스승은 한 위대한영도자이고 스승이기는 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눈에도 메시야나 구세주는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쿰란 공동체의 의의 스승과같은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메시야요 구세주였으며 주의 종이요 인자였다. 의의 스승이 죽었을 때 그를 따른 무리들은 종말 때의 일반 부활이있기 전에 먼저 의의 스승이 부활할 것으로 기대하였을 수도 있다(이는 매우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의의 스승이 이같이 부활했다고 주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동굴 3에서 나온 동전 두루마리(copper scroll)는 쿰란 공동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동전 두루마리는 AD 66-73년의 전쟁 기간 쿰란에 근거지를 가졌던 한 열심당 무리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동전 두루마리는 예루살렘과 그 동쪽 및 서쪽 지역의 61개 은닉처에 분산 은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바-코흐바 전쟁의 문서들. 1952년 경 쿰란남쪽 약 18㎞ 지점의 와디 무라밧(Wade Murabba'at)에서 다량의 사본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 사본자료의 대부분은 이 동굴들이 로마에 저항하는 두번째 유대 반란(AD132-5년)을 이끌었던 바-코흐바(Bar-Kokhba) 군대의 전초 부대에 의해 점유되었을 시기의 것이었다. 이 문서들 중에는 바-코흐바에게 보낸 편지들과 바-코흐바가 쓴 두 개의 편지도들어 있었다. 바-코흐바는 그의 편지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왕 코세바의 아들 시므온' (SimeonBen-Kosebah, prince of Israel)이라 칭하고 있다(별의 아들'을 뜻하는 Bar-Kokhba라는 칭호는 랍비아키바가 그를 민24:17 이 말하는 별, 곧 다윗적인메시야로 찬양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 시기의 많은 단편적인 성경 사본이 동굴들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사본은 모두 '원 맛소라’유형의 문서를 보여준다.
무라밧 동굴들이 발굴되던 거의 같은 때에 바-코흐바 시기에 속한 다른 사본들이 엔게디 남쪽 나할헤버(Nahal Hever)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본들 가운데는 히브리 성경 단편들, 헬라어역 소선지서의단편적 복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일 지역의 다른세 와디(사막 지방의 개울, 비오는 철 외에는 말라있음)에서 연이어 비슷한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바-코흐바 게릴라 군대의 파견대들에 의해사령부로 사용되던 동굴들이 있었다. 여기서 발견된 문서들 속에는 출13:1-16이 새겨진 두 개의 두루마리 단편들과 시15편의 7행의 부분들을 담은 조그만 단편이 들어 있었다.
3. 키르벳 미르드(Khirbet Mird). 기드론 골짜기 북쪽 히르벳 미르드의 폐허 (이전에 기독교의 한 수도원 자리에서 1950년 경 타미르의 베두인부족(최초의 쿰란의 발견들도 이 베드인 부족에 의해 이루어졌다)에 의해 매우 흥미 있는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이 사본들은 쿰란과 무라밧에서 발견된사본들보다 훨씬 후대에 속하였다. 이 사본들가운데는 7-8세기에 아랍어로 씌어진 개인 편지들의 파피루스 단편들, 한 기독교 수도자가 파피루스에 수리아어로 쓴 편지, 에우리피데스(헬라의 비극시인)의 안드로마케(Andromache) 단편, 그리고 헬라어와 팔레스타인 수리아어로 된 많은 성경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헬라어 성경 문서들 속에는 5세기와 8세기 사이에 속하는 지혜서,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의 단편들이 들어 있었으며, 팔레스타인 수리아어로 된 성경 문서들 속에는 여호수아,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골로새서의 단편들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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