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47:1-12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가 쓴 '잃은 것과 얻은 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시를 읽어 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내 이제껏 잃은 것과 얻은 것 놓친 것과 이룬 것 저울질 해보니 자랑할게 별로 없구나
나는 알고 있다 긴 긴세월 헛되이 보내고 좋은 의도는 화살처럼 과녁에 못 닿거나 빗나갔음을
하지만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손익을 따지겠는가
실패는 알고 보면 승리의 다른 얼굴일지 모르고
썰물이 나가면 분명 밀물이 오듯이"
제가 이 시가 참 좋아서 읽고 묵상하고 그러다가 검색을 해보니까요.
이 시가 세상 만사라고 하는 옛날에 나온 유행과 가사와 오버랩이 된다 그런 내용의 글을 쓴 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세상 만사라는 오래된 유행가 가사 일부를 또 제가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되다가도 안 되는 것
슬퍼하다 웃다가 하늘 보면 둥근 해
이 한 세상 산다는 거 생각하기 달렸는데 뭘 그리 안타깝게 고개 숙여 앉아 있소
세상 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그런대로 한 세상 이러구러 살아가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어릴 때는 어른들이 좀 아프고 힘들고 낙심하고 그러면 위로해 주시는 말 중에 "힘내라 세상 만사 마음 먹기에 달렸다"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가 종종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이 시도 읽고 또 유행가 가사도 들여다보고 옛날 어른들의 그런 격려의 말씀도 떠올려 보니까요.
이것들에는 똑같은 전제가 하나 있더라고요.
그 전제가 뭐냐 하니까 마음 먹은 대로 잘 안 풀려 가지고 참 힘들고 어려운게 이게 인생이다 이런 전제가 있더라는 거예요.
공통된 전제가.
맨 먼저 소개해드린 롱펠로우의 시도 전제가 바로 이겁니다.
나는 알고 있다 긴긴 세월 헛되이 보내고 좋은 의도는 화살처럼 과녁에 못 닿거나 빗 나갔음을.
이게 바로 참 이 세상 마음 먹은 대로 안 되네 그 얘기 아닙니까.
이 시의 바닥에는 이런 실패감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런 실패감 있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실패는 알고 보면 승리의 다른 얼굴일지 모르고 썰물이 나가면 분명 밀물이 밀려온다.
이런 시를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 위로가 된다고요? 마음 먹은 대로 잘 안 되는게 인생이라는 전제가 이런 시를 명시로 만드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 만사라는 그 유행가 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유행가에 보면 이 가사에 보면은요 세상 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이게 이 가사의 전제에요.
뜻대로 안되는게 인생이라는거죠.
옛날 어른들이 위로해 주시던 그 말씀도 언제 그런 위로를 한다고요.
그 세상 만사 그 마음먹기에 달렸다 힘내라 이게 잘 안 되는 일들을 겪기 때문에 이런 어른들의 격려가 기억에 남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이제 한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뭐 모두가 그러셨을 거예요.
뭔가를 위하여 열심히 달렸습니다.
열심히 달리고 또 달리고 그렇게하고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한해였는데 여러분 중에 혹시 야 그래서 나는 뭐 유감 없다 이제.
나는 목표 다 이루었다 올 한에 나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심히 달리긴 했지만 세상 만사 뜻대로 안 되는 거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제가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이제 시편 147편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걸 설교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거는 바로 이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그 롱펠로우 시에 나오는 시구 다시 읽어 드릴까요.
나는 알고 있다 긴긴 세월 헛되이 보내고 좋은 의도는 화살처럼 과녁에 못 닿거나 빗나갔음을.
이런 아픈 고백을 해야 되는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예수 믿는 우리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에 이것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는가?
제가 이제 이 시편 147편 말씀을 가지고 이런 주제를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오늘 본문 시편 147편 보면은 그 전제 그 배경이 굉장히 어두운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 2절과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지금 이런 말씀이 왜 나왔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은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신다 전제가 뭡니까? 무너져 있다는 거죠.
지금 그들의 상태는 상심한 상태예요.
상처를 싸매신다는 거는 자기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처 속에 있다는 것이 이게 전제거든요.
실제로 시편 147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그 비참한 역사, 그러다가 이제 겨우 귀환한 상태를 배경으로 한 시거든요.
그래서 이 시의 배경에 대하여 구약 학자입니다, 김정우 교수님이 한 설명을 제가 읽어드릴텐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 시의 배경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예루살렘은 돌무덤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세상에 흩어졌으며 그들의 마음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조상들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 간 것을 보았다.
어디를 돌아봐도 옛 평화와 영광을 회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예루살렘의 재건은 요원에 보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시인은 그의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 교수님의 이런 배경 설명의 결론이 이거예요.
이 시는 인생과 역사의 겨울,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에요.
이 시는 인생과 역사의 겨울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른 노래이다.
그런 설명을 제가 읽으면서 이 시가 필요한 건 특별히 오늘 예배드리는 가운데 한해를 정리하면서 유난히 마음이 쓰라리고 유난히 실패감이 크시고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참 세상 만사 마음 먹은 대로 이게 잘 안 되는 거구나 이런 아픔을 겪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말씀이 더 그분들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그렇게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이제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세상 만사 마음 먹은 대로 잘 안 되고 그래서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받고 아프고 쓰라리고 이런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이 인생길 가운데 치료해 주시고 싸매어 주시는 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사모해야 된다는 거죠.
신앙생활은 그 어디 붙이고 다니는 악세사리가 아니에요.
그 십자가 목걸이 하나 걸고 다니면 그게 크리스천이 되는게 아니고요 신앙생활은 악세사리 같은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을 경험하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싸매어 주시는구나, 실제적으로 쓰라린 내 마음을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는구나.
무너져 버렸는데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이렇게 잡아봤습니다.
모두가 다 자격 없는 저희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건 공통점이지만요 자기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건 천차만별이에요.
하나님이 뭐 이 땅에서도 일하신데? 전혀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너무나 생생하게 싸매어 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 제목 그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럼 우리는 뭘해야 되느냐?
구원을 받는 데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 은혜를 많이 누리는 데는 우리가 해야 될 일들이 좀 있습니다.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일하심, 성령의 역사하심 기대하기가 어려운 거랑 같은 이치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세 가지 실천 사항 이것들을 좀 나누고 싶은데요.
첫 번째로는 뭘 우리가 기억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일하심을 맛보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찬양과 감사라는 기둥을 세우셔야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첫 번째 소제목을 이렇게 잡을 수 있었냐면 바로 오늘 살펴보고 있는 시편 147편 구조가 그렇습니다.
이 시편 147편의 구조를 보면 이 시는 세가지 기둥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는데요.
그 세 가지 기둥이 바로 찬양과 감사라는 기둥입니다.
자 첫 번째 기둥은 1절 인데요, 첫 번째 기둥을 보십시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그렇게 첫 번째 기둥을 세우고는 그렇게 찬양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6절까지 쭉 설명하는 형식이고요.
그리고는 이제 두 번째 기둥은 7절입니다.
두 번째 기둥도 똑같은 찬양과 감사입니다. 7절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그리고는 그래야 되는 이유를 또 쭉 설명을 하고요.
그리고 맨 마지막에 세 번째 기둥은 마지막 12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그리고 제가 시간이 없어서 이 모든 걸 다 설교할 수가 없어서 12절로 잘랐는데요 사실은 이 12절의 기둥 이후에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들에 대하여 쭉 열거가 되고 있는게 시편 147편의 구조거든요.
여러분 우리 내면이 그 포로 귀한 이후로 참 낙심해 있던 그들을 싸매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 시편에서 열거를 하고 있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제 하나님의 일하심, 그래서 저를 회복시켜 주시고 저를 싸매어 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시고 이거를 맛보고 싶으시다면 우리 인생에도 이 감사와 찬양의 기둥을 세우셔야 된다는 거죠.
근데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건요 제가 본문을 유심히 보니까 이 기둥 세 가지가 찬양과 감사를 선포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셋 다 명령이에요.
저절로 주어진게 하나도 없습니다.
자 첫 번째 기둥 다시 보십시오.
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하며" 그다음 보세요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이거 선택 아니야 알았니 이건 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런 거 아니라고.
이게 첫 번째의 강력한 메시지예요.
두 번째 기둥을 보시겠습니까 7절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명령합니다 "찬양할지어다"
세 번째 기둥도 똑같습니다 12절.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너의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명령이에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감사라는 거 찬양이라는 거 그거 감정이에요.
감정은 물 흐르듯 흐르는 거예요 그냥.
기분 좋으면 찬양이 나오고요 뭐 우울하고 어두우면 찬양 안 부르게 되잖아요.
막 뜨겁게 옆에서 찬양을 예배 시간에 불러도 마음이 우울하고 어두우면 못 불러요.
겨우 이제 막 시늉이라도 하자는 분들을 보면은 한 두 옥타브 깔아 가지고 "예루살렘아"
저게 찬양인 무슨 신음 소린지 그게 정상입니다 그게.
그런데 지금 여기 보니까요 찬양에 대하여 감사에 대하여 그렇게 방치하지 말라는 거예요.
강제로 그걸 선포하라는 겁니다.
명령한다는 거예요.
너 지금 우울한 것 알겠는데 네 우울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면제해 주는 거 아니다 힘내라.
우리는요 이런 권면을 자꾸 딴 사람한테 해요.
자기 배우자한테 하고 자녀들한테 하고 뭐 다락방 가서 또 순원들한테 하고 그러는데요 이 말씀을 가장 우리가 유념해야 되는 건 놀랍게도 찬양과 감사에 대한 선포와 명령은 우리 자신에게 해야 돼요.
저는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우울하고 어둡고 가라앉으면 막 저를 꾸짖어요 정신 차리라고.
뭐 그까짓 걸 가지고 그렇게 힘이 빠져 있느냐고.
그 뭐 누가 봤으면 뭐 엄청난 일을 당한 거 같겠다.
답답하냐고? 그럼 나가! 공원이라도 걷다가 와!
막 저를 그냥 그렇게 다그쳐 가지고 문 열고 나가면서 찬양하는 거예요.
입으로 안 나오면은 듣는 거예요 찬양을.
그렇게 한 만보 걷고 나면은요 몸만 상쾌해진게 아니에요.
영혼도 회복이 돼요.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그게 우리 신체의 원리라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여러분 어두울수록 우울할수록 답답할수록 찬양의 기둥을 세우셔야 돼요.
감사의 기둥을 세우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찬양과 감사로 기둥을 세우고 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어가 지금 맨앞에 "여호와께서"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우리가 우리 상처를 싸매 지던가요? 내 우울한 마음을 내가 애써서 회복이 안 되는 거거든요.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그분께서 우리를 세우시고 모으시고 고치시고 싸매어 주시는 거 이거 선포해 선포.
제가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가 불쑥 떠올려졌는데요.
열왕기상 18장의 상황은 지금 민족적으로 극심한 가뭄이에요.
안 그래도 건조한 그 나라가 지금 3년 6개월 가뭄입니다.
뭐 말로 다할 수 없이 드라이해진 상태거든요.
그런데 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상 18장 41절에 보면은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이상한 소리를 해요.
뭐라고 얘기하는가 보니까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눈을 씻고 봐도요 이 41장 상황에서 비 소리는 고사하고 손바닥만한 구름도 나중에 나와요.
그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에요.
근데 지금 엘리야는 거짓말하고 있는 겁니까.
과장하는 겁니까.
왜 하나님의 종이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가 왜 큰 비 소리가 들린다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까 그 내용이 지금 열왕기상 18장 41절이라 그랬는데요.
이 열왕기상 18장 1절 말씀의 스타트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18장 1절
"많은 날이 지나고 제 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열왕기상 18장 말씀이요 이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을 해요.
엘리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구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만약에 엘리야가 아합에게 "아 큰 비가 옵니다" 이건 거짓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비 소리가 들린다는 거예요.
누구에게? 자기에게.
이해가 되세요?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말입니다.
이 해가 바뀌면 새해라 그래요.
그리고 꼭 새해를 설명할 때는 새해가 밝았다 그래요.
그 새해가 밝아옵니다 왜 그렇게 표현합니까?
새해가 밝아 온다는 건 뭘 전제로 하는 겁니까? 지금이 안 밝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어둡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우울하고 힘드니까 서로 용기를 주느라 덕담을 하느라 이제 새해가 밝아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 나이까지 살아봐도 달력 뜯고 교체한다고 밝아지지 않던데요.
새해가 뭐가 밝아지느냐고요.
더군다나 지금 많은 전문가들이 내년은 더 이제 힘들다 경제적으로 특히 이제 이게 뭐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그런 전망들을 많이 내려놓고 있거든요.
그야말로 3년 6개월 지금 비가 오지 않은 가뭄의 상태 영적으로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요.
예배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 소망의 말씀이 내게 임할 수만 있다면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엘리야와 같이 참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 그분들에게 "비 소리가 들려요"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 임했고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있고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비 소리가 들려요 우리가 이걸 전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거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 이 불안한 시기에 여러분에게는 어떤 소리가 들리세요?
여러분 어떤 소리가 들리세요?
하나님 앞에 새해를 우리가 준비하면서 하나님 어떤 상황이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찬양의 기둥, 감사의 기둥을 세워 나갈 때 하나님은 이 어두운 시대 이 드라이한 이 정말 영적으로 고갈된 이런 시대에 참 비 소리가 들립니다! 엘리야와 같은 이런 아름다운 복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기둥인 7절도 마찬가지예요.
7절 보니까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여기도 보니까 미리 이제 7절에서 감사와 찬양을 선포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왜 감사해야 되는가 왜 찬양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8절.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이게 참 이게 참 묘해요 이게.
지금 하나님이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고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해 주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게 아니에요.
가만히 보니까요 산의 풀을 위해서예요.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9구절에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한 거예요.
9절에 나와 있는 들짐승 이거는 이제 땅에서 이제 뛰어다니는 짐승이라고 한다면 여기 그다음 나오는 까마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짐승 아닙니까.
게다가 까마귀 새끼 이렇게 묘사해요.
우는 까마귀 새끼예요.
우리나라도 까마귀를 썩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요 이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미천한게 까마귀에요. 그런데 그게 새끼예요.
근데 그 까마귀 새끼가 또 울고 있네요.
처참한 상태예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 어린 까마귀 새끼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그건 신약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여러분 다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하나님이 구름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데 그게 왜 우는 까마귀 새끼를 먹이는 거라고 묘사했겠냐구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가 감사할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억지로라도 순종해서 감사의 기둥을 찬양의 기둥을 세우면 이 말씀이 들리기 시작을 해요.
지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뭐 힘들다 어렵다 뭐 그냥 막 힘들어 죽겠다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은 두 번째 하나님 일하심을 믿는 우리가 두 번째 해야 되는 실천이 뭐냐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입니다.
자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여기 나오는 말의 힘이라는 거는 전쟁에 사용되던 군마 군마의 힘이에요.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군사력을 말하겠죠.
강력한 군사력.
이걸 가진 것을 하나님은 별로 뭐 그거 뭐 뭐 그래서 뭐 그렇게 신경 별로 안 쓰세요.
그다음에 나오는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이 표현은 아 내 힘으로 나 이룰 수 있어 이런 교만을 상징하는 표현이라 그럽니다.
그리고 흥미로운건요 그 앞에 나오는 달리는 말 그리고 강한 사람의 다리 이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지금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대조가 출애굽기 20장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나타나셔서 십계명을 주시는데 이제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어떤 말씀을 주시느냐 이 굉장히 의미 있는 말씀을 주십니다.
자 출애굽기 20장 20절이 바로 그런 상황에서 주신 말입니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해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시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앞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도 영어로 말하면 "fear"라는 단어 아니겠습니까.
영어 성경을 보면은 뒤에 나오는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할 때 이 경외도 영어 성경으로 "fear", "Fear of God"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거예요.
이 모세의 말씀의 포인트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만 하지 말고,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만 하지 말고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죄짓지 않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거예요.
이쯤 한국교회가 왜 이 모양이 됐는지 다 고백해야 될 때가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여러분 하나님 두려워하세요?
여러분 정말 두려워하세요?
잊혀질 만하면 무슨 시사 프로그램에 나오고 잊혀질 만하면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조롱하는 이런 짓거리를 했다고 또 무슨 프로그램에 나오고 또 프로그램에 나오고 이게 어떤 현상입니다?
안수 받는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거 아닙니까?
장로가 됐다고 권사가 되면 모태 신앙인이면 저절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 두려워하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 목사 아들인데요 참 사춘기 중고등학교 시절, 뭐 심지어 대학교 가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뭐 성경 뭐 이게 뭐 말도 안 되는 거 뭐 이게 이런 기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고 뭐 이런 생각이 나고 거만하게 팔장끼고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성경에 이렇게 나타난다면 우리 집을 어떻게 좀 해주지 왜.
계속 이런 불평을 하고 푸념을 해댈 때는 내 인생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두려워하세요?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세요?
내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이 너무 경외, 경외라는 건 두려워하는 마음이에요.
목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순간에 그의 목회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내년에 분당 우리 교회는 진짜 한번 이제 제2의 하나님 앞에서 부흥을 꿈꾸고 있는데 그 모든 부흥을 꿈꾸는 첫 번째 단추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지금 외도, 성적인 문제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회 안에 말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두려워하시면 그거 계속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두려워하시면 그 하나님이 노여워 하실 일들을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다 청산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실천할게 하나 더 있는데요 하나님이 일하심을 기대하는 겁니다 기대하는 거.
자 본문 10절 11절 다시 읽어 드릴게요.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지난주에 저희 어머니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어머니는 미국에 계셨기 때문에 뭐 임종도 제가 지킬 수가 없었고요.
그리고 이제 화요일 저녁에 어머니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순간에 성령님이 제 마음에 이 순간에 네 엄마가 뭘 제일 기뻐할 것 같으냐? 막 하던 일 다 내려놓고 막 내일 비행기표 끊어 가지고 바로 그냥 시카고로 달려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어머니가 그걸 더 기뻐할 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부탁을 했어요.
저희 어머니 소천 소식을 주일날 성탄 예배 그리고 25일 성탄 축하 예배가 끝나는 그다음부터 알려주면 좋겠다 비밀로 해달라 그랬어요.
그리고 제가 성탄 예배 드리고 24일 예배 주일 예배 드리고 성탄 예배 드린 후에 그날 오후에 가려고 우리 형제들도 다 양해를 해 줘서 그렇게 이제 장례 절차를 다 준비를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제가 주일날 특별히 이번 성탄 축하 예배는 기쁨이 이게 이번 예배의 포인트였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설교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괜히 성도들을 내가 괴롭히는 결과가 될 거 같아서 그래서 제가 이제 주중에 금요일 날 시카고로 가서 또 또 장례 일정 과정을 또 다 이제 제대로 다 치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제가 감사했는데요.
우리 교역자들에게 제가 지난주 우리 곽 목사님이 그 편지를 그 소개해 주는 걸 제가 듣고 막 마음이 너무 뜨거워졌어요.
저는 우리 젊은 목사님들한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다.
우린 종이다.
우리의 스케줄대로 사는 거 아니다.
장례가 잘 이제 치러졌는데요.
저희 5남매는 뭐 다 이렇게 흩어져 살아 가지고 이번에 거의 진짜 수년만에 처음으로 다 모였는데요.
많은 걸 제가 새로 알게 됐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딱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저는 승복이라는 단어로 요약이 된다 생각했거든요.
아버지가 금식 기도하다가 돌아가셨는데 뭔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시느냐고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기 때문에 내가 승복하겠다고, 그래서 어머니 하면 저는 승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 이번에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저희 어머니는 77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기 때문에 뭐 수십년 신앙생활한 많은 어른들이 계세요.
그분들이 단 한 명도 예외없이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저희 어머니에 대한 설명이 승복이 아닌 거예요.
저희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감사, 감사의 어른이었다고.
그래서 이거 처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승복으로 설명되는건데 그보다 더 큰 개념이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할 수 있지?
그런가 하면은 우리 오남매가 이번에 모여 가지고 막 서로서로가 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공통적으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말하는가 하니까 우리 여기 다섯 명은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 인격 못 따라간다, 우리는 뭐라고 해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 영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모두가 동의하고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고 그랬거든요.
저는 목사잖아요. 저희 아버지도 목사님이셨잖아요.
똑같은 목회자인데 나는 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인격을 영성을 왜 발 벗고도 못 따라가는 그런 인간인가? 나는 왜 그런가? 묵상을 했죠.
답을 찾았습니다.
본문에 답이 있더라고요.
본문 10절 11절 다시 읽어 드릴게요.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새번역으로 11절.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저희 아버지는 말씀을 전해야 되는 목사 설교자인데요 말을 더듬으셨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죠.
조금 더듬으신게 아니라 말을 심하게 더듬으셨어요.
그래서 주일 11시 예배를 인도하시려면 새벽부터 기도하셔야 돼요.
그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하나님 의지하고 그래야 이제 말을 안 더듬으시는게 아니라 덜 더듬으세요.
한 9시 10시 중간에 어떤 집사님이 툭 마음을 긁어 놓으면 그날은 이제 말 심하게 더듬으시고 설교가 잘 안 되시는 거죠.
그러니까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말의 힘이 센 분이 아니에요.
사람의 다리가 억센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평생에 하나님 의지하는 기도의 삶을 살지 않으면 이게 생존의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떠올리는 아버지는 등을 바닥에 누이고 주무실 때가 많지 않다는 거예요.
뭐 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어요.
기도하시면서 엎드려서 주무시고.
그리고 40일 금식기도, 저희 아버지 어머니에게 이건 선택이 아니에요.
그러다 돌아가셨어요.
저희 어머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사님 사모님으로 이제 우리 남편이 40일 금식 기도하고 불 받아서 막 엄청난 불의 종이 되고 교회는 그때부터 부흥을 하고 대부분의 간증이 다 이런 거 아닙니까.
저희 어머니는 간증이 한 줄이 안 나와요.
그렇게 실패하셨어요 인간적으로.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에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시는 과정에서 겪으셨던 가난과 고난, 제가 참 눈물이 났던게요 저희 어머니 친구 여전도사님이 계세요.
전화드렸더니 이런 말씀 하시대요.
어느날 어머니가 그러시대요. "자식들은 다 몰라요. 내가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
제가 감사한건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 말에 힘이 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분도 아니고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분도 아닌데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그런 연약함을 열등감으로 몰고 가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셨잖아요.
기도하시는 분으로.
어머니 소천 소식을 들으시고 어떤 장로님이 오셨어요.
그리고는 이제 농담하면서 이런 말씀하셨어요.
목사님이 이제 고아시네요. 다 웃었어요 저도 웃고.
근데 여러분 비행기 타고 미국 가는 동안 또 장례를 치르는 그 과정 과정 동안 그 말이 저에게 계속 맴돌았습니다.
저 고아예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도 안 계세요.
그러나 여러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정신을 물려 주셨어요.
제가 그래서 장례를 치르는게 너무 영적으로 의지하던 어머니셨기 때문에 너무 슬픔도 크고 아픔도 컸지만 그 장례 기간동안 하나님이 엄청난 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돌아오는 그 시간부터 피곤하지가 않아요.
바로 밤에 도착하고 수요일 밤에 도착하고 목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힘을 주시는지 아십니까.
이제 어머니 저 위해 기도하시는 분 안 계십니다만 그러나 하나님 이 원리를 내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교회 좀 커졌다고 으시대면 그거는 말의 힘을 의지하는 거예요.
뭐 설교 조회수가 좀 많아요 이걸 자꾸 의식하는건 이거는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고 하는 태도예요.
저의 교만을 하나님이 다 꺾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완전히 다 꺾어 주시고 철저하게 주님은 오직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이제 내년에 분당 우리 교회는 한번 은혜를 향하여 달려가기 원합니다.
오늘 저녁에 9시에 송구 영신예배 때 출정식을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9시에 분당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면 가능해질 수 있다면 딱 한가지에요.
말의 힘을 자랑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는 걸 자랑하지 않는 겁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새해에 하나님 주실 힘, 일하실 하나님 그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달려가는 새로운 한해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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