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16:13-20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전에 제가 고도원 작가가 쓴 '잠깐 멈춤' 이 제목의 책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잠깐 멈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설교 이후에도 가끔씩 이 문장이 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저는 경험을 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잠깐 멈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문장을 소개했던 배경이 여호수아서 8장 이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로 갑자기 지도자 여호수아가 방향을 바꾸어서 에발산으로 갑니다.
에발산에 가서는 전투하던 모든 걸 멈추고 하나님께 재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데요.
사실이 전쟁은 사기가 중요하다고 여러번 말씀드렸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한번 패배했던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사기가 지금 막 충천하는 그런 상황이거든요.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데 왜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상황에서 밀어붙이는 일을 중단하고 갑자기 에발산으로 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했나 이게 무슨 의미를 가졌나.
효율도 중요하고 빨리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본질적인 문제를 계속 점검하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마치 대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성장을 스스로 멈추고 마디를 만드는데 온 에너지를 쓰는 것처럼, 그래서 대나무가 매듭 짓기를 잘했기 때문에 태풍이 와도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이런 견고함을 여호수아는 원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했다.
제가 이번 주 본문을 묵상하면서 계속 이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요 오늘 본문의 상황도 똑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잠시 사역을 내려 놓으시고는 그리고는 지도에 보면은 이스라엘 맨 북 끝 북단에 있습니다.
그 북단에 위치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첫 번째 질문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이겁니다, 15절.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아니 왜 예수님은 한창 열정적으로 사역하다가 잠시 그 사역 현장을 떠나서 빌립보가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까?
대나무의 매듭짓기와 똑같습니다.
바로 이런 점검이 병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이런 일들 그 의미를 부여하는 이 일이 바로 이게 대나무의 매듭 짓기와 같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우리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거 다 좋은데요 자꾸자꾸 이런 중간중간 이 점검을 해야 됩니다.
나는 왜 목사가 되었지?
목사가 되어서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잘 가고 있는 길인가?
계속 이런 질문을 저는 하면서 가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더군다나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그 도시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헤롯 대왕에게 하사한 땅이에요.
그 후에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 2세가 그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황제를 기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 지명을.
그래서 황제를 기린다는 뜻으로 가이사랴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그 지역을 가이사랴 빌립보 혹은 빌립보 가이사랴 이렇게 이름을 붙인 곳입니다.
그러니까 그 땅은요 그 도시 이름부터 시작해서 지금 그 땅은 인간 로마 황제와 헤롯 왕가를 숭배하던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가 보면 화려하고 웅장한 이방 신전, 로마 황제 신전 지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가 굉장한 관광지가 된 거거든요.
지금 예수님은 이런 화려하고 웅장한 그 신전들이 즐비한 그 우상의 땅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상 하면서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뭐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 이 시대야말로 영적으로 빌립보 가이사랴 시대예요.
하나님은 온데간데 그들 머릿속에 사라져 버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 물신이라 그러죠 물신.
얼마나 이 물질을 우리가 섬겼으며 이게 물신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이 이렇게 두 질문을 던지시는 이유 저는 이걸 베드로의 대답해서 찾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걸 해석하자면 이거예요.
주님은 그리스도, 주님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가 굉장히 강조점이 하나 있습니다.
방금 제가 그걸 빼고 읽었는데요.
원래는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근데 베드로가 거기에 그 부연해 넣는 이유가 뭘까요?
앞에서 제가 왜 예수님은 이 두 질문을 함께 던지셨을까요라고 했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로 하느냐 그랬더니 사람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합니다 더러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더이다.
지금 여기 나오는 세레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와 연관된 이름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메시아가 아니었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들은 다 죽었어요.
다 죽은 사람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는데 지금 베드로가 강조하는 건 뭡니까.
아니라는 거죠.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죠.
그리고 더 중요한게 뭐라고요.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무슨 차입니까.
아무리 어마어마한 신전을 거기다 세워 놓는다고 해도 그건 죽은 신이에요.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별화된 답을 드린게 이거거든요.
주는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을 점검하실 때 이 사실을 점검해야 돼요.
저 같은 모태 신앙은요 그리고 저같이 목회를 한 34년-35년 한 사람은요 이게 정말 헷갈립니다.
내게 믿음이 있나?
이 전부 이론으로 무장하는 거 아니냐고요.
제가 아끼는 후배가 하나 있는데요.
이분도 뭐 나이가 젊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분 어떻게 알게냐 하면은 사실 이 후배 목사님은 굉장히 부잣집 아들이에요.
아버지가 뭐 사업을 크게 하고 굉장히 부자로 살았는데 IMF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죠.
IMF 때 이 목사님이 사업이 부도 나가지고 세상 말로 집이 망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강원도 강릉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어머니가 김밥 장사를 하셨습니다.
이게 보통 분이 아니에요.
바로 며칠 전까지 큰 회사 사장님 사모님 이런 소리를 듣던 분이 갑자기 길거리로 나서서 김밥 장사하시는 거 이 보통분이 아니에요.
그렇게 가정을 다시 일으키려고 참 애를 쓰셨는데 그 당시로 이 목사님은 아직 어린 청소년이다 보니까 감당이 잘 안 됐던 거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방황을 많이 한 겁니다.
그리고 또 긴 시간 방황을 한 거 같아요.
이 목사님이 23살이 되던 해에 이제 막 견딜 수 없는 그 죽고 싶은 충동이 몰려와 가지고 차도로 뛰어든 적도 있대요.
그냥 막 죽어 버리는게 좋겠다.
그렇게 배회하고 방황했던 분인데요, 본인이 고백하기를 그렇게 긴 시간 죽고 싶었고 자살충동을 느껴 길거리로 뛰어들었던 자기를 주님께서 만나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 소망이 되어 주셨대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분이 이제 다시 마음에 용기가 또 희망이 찾아와 가지고요, 23살이 되던 해에 차도로 뛰어들어 가지고 자살하려고 했던이 목사님이 24살이 되던 해에 총신대학교의 시험에 응시를 한 겁니다.
24살에 학부 시험을 봤다는 거는 굉장히 긴 시간 방황했다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부터 이 목사님이 얼마나 의욕을 가지고 막 열심히 공부하고 그랬는지 이 목사님이 그 총신대학교 졸업할 때 과 수석으로 졸업하고 또 신학 대학원도 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예요.
그래서 장학금 받고 외국으로 유학갈 정도로 실력을 쌓은 겁니다.
근데 제가 이분을 주목하게 된 거는 뭐냐면 이분이 이제 중고등부 사역을 할 땐데요.
제가 이제 이 목사님에 대한 소문을들은 거예요.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내가 이 사람 욕심이 많은 거.
그 좋은 사람이라는데 그만둘 수가 있습니까.
연락을 해가지고 이제 분당 우리 교에서 같이 일하자 그러면서 제가 콜 했어요.
제가 참 교만한 게요, 아 내가 부르면 다 오는 거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또 좀 그럴 것 같더라고요.
그러더니 좀 기도해 보겠다 그러고 하더니 안 오겠다는 겁니다.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어 안 와?
이유를 보고 제가 이 분을 내가 다르게 본 겁니다.
왜 안 오기로 결정을 했냐 하니까요.
사실 분당 우리 교회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많고 또 그런 열망이 있지만 그때 자기가 그 중등부인지 고등부인지 하고 있는데.
뭐 막 큰 규모도 아니에요.
그 지역에 있는 그냥 보편적인 교회인데요.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 고등부 애들을 두고 네가 지금 가면 안 된다는 말씀을 자꾸 주신다는 겁니다.
기도할 때마다.
아니 뭐 그 교회를 옮기는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바로 그 순간순간 인도하심을 이분이 받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굉장히 이분 제가 새로 본 거죠.
제가 이 후배 목사님을 제가 참 나이는 어리지만 제가 늘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요.
이분에게 중요한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이분은 신앙 고백을 잘해요.
항상 그런 얘길해요.
나는 길거리로 뛰어들어 가지고 나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이런 나 같은 걸 건져 주시고 인도해 주신 분이 내 주님이시다.
그리고 또 그걸 막 입에만, 우리 목사들이 자칫 잘못하면 저는 우리 교역자들에게 종종 이야기 합니다, 자칫하면 우리 약장사 되기 쉽다, 참 막 입에 그걸 달고 다니는 거 습관적으로.
이분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지금도 만나면 그 얘기해요.
참 분당 우리 교회 가고 싶었는데.
그때 내가 갔으면 나한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근데 하나님께서 자기가 가르치는 고등부 아이인지 중등부 아이인지 이 아이들을 두고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요.
이게 나한데 유익한가? 손해인가? 그 계산밖에 없는게 아니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늘 거기다가 떠올리거든요.
이게 지금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거든요.
제가 분당 우리 교회를 만 40살에 개척을 했거든요.
아 그때는 제가 진짜 다 성숙하고 막 막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근데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그리고 또 후배들 중에 40살이 된 교역자를 보면은 야 내가 참 어렸었구나.
그리고 초창기 성도님들, 여기도 지금 많이 계시는데요.
저 진짜 존경해요.
얼마나 제가 철이 없고 좌충우돌이고 막 설교도 그냥 막 내용은 별로 없고 소리만 꽥꽥 지르고 막 그랬는데 야단도 막 엄청 많이 치고 막 그랬거든요.
근데도 그때가 좋았다는 거예요.
목사님 야단치고 하실 때가 너무 좋았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때 새가족 등록을 제가 직접 받았는데요.
그 어떻게 우리 교회에 등록하시게 됐습니까 물으면 꽤 많은 분들이 젊은 목사님이 야단 쳐 주셔서 그거 좋아서 등록합니다 그런 분들이 꽤 계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게 다 혼미한 상태 같아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니고 이게 말이 되느냐고요.
참 어설프고 서툴고 또 좌충우돌하고 그랬지만요 그러나 지금보다도 그때가 더 진짜 하나님을 향한 열망은 제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개척을 하고 한 3-4년쯤 지났을까요.
그 책을 읽다가 갑자기 막 피가 이렇게 막 그 저 같은 좀 다혈질이 한 번씩 그런 경험하거든요.
이게 확 올라올때가 있는데요.
그 니체가 한 말이 있잖아요 신은 죽었다.
그 후일담에 대한 내용이 그 책에 나와 있는데 아 지금 생각해 보면 아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검증도 안 된 건데 왜 그렇게 내가 열이 확 올랐을까.
그 후일담이 이래요.
니체가 이제 선포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그랬더니 그 당시에 뭐 독일 교회가 얼마나 또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파워가 셀 때 였겠습니까 가만히 있었겠냐구요.
그래서 이제 교회들이 막 벌 때처럼 항변했대요.
니체가 신성모독을 했다고.
신이 죽었다니, 사과 하라고.
막 그렇게 교회들이 독일 교회가 들고 일어나니까요, 아 이 니체가 하는 말이 '내가 뭐 근거도 없이 그런 얘기 하겠나. 나는 신이 죽었다는 그 증거를 내가 갖고 있다' 그러면서 무슨 얘기를 했냐 하니까, '내가 증거를 댈 수 있다, 신은 죽었다. 저 무기력한 독일 교회를 봐라 저 독일 교회는 저 무기한 독일 교회는 신의 무덤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40대 초반 중반 그 나이에 있던 제가 그 글을 읽으면서 확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그 다음 주에 그 제 기억으로 특새였던 것 같기도 해요.
전 성도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주중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니체가 그 무기력한 독일 교회를 보면서 신은 죽었다! 저 무기력한 독일 교회의 모습이 그게 신이 죽었다는 증거다! 그래서 저 독일 교회는 신의 무덤이다! 이렇게 선포했다고.
그래 제가 분당 우리교회 성도님, 오늘부터 저는 선포합니다.
이제 분당 우리교회가 무기력해서 신의 무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제 분당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무대가 분당 우리 교회일 것을 선포합니다! 그랬어요.
이제 분당 우리 교회는 신의 무덤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운동장이 될 것을 선포합니다 그랬어요.
그때는 성도 숫자도 이렇게 많지도 않았는데요 그때 아멘이 이거에 한 100배쯤 컸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아멘 화답을 하고요 그리고 나서 그 이후로 지난 20년 동안 분당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얼마나 놀랍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의 시무 장로님의 아들이 그 즈음에 제 기억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때 기억이 생생해요.
치료할 수가 없다고.
그 장로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목사님 저 지금 인천공항 가는 중입니다 아들한테 가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수의를 챙겨갑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 아버지의 심정을 여러분 그 어떻겠냐고요.
그 어린애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수의를 챙겨서 지금 아버지가 그 아이를 보러 간다는 거예요.
그랬는데 여러분 전 성도들이 매달려 같이 기도하고 그때는 숫자가 많지 않으니까 뭐 이런 일 있으면 집중해서 기도 많이 했거든요.
그 아이가 중간에 다 생략하고요 멀쩡히 살아나 그래서 분당 우리 교회가 하던 그 한마음 복지관의 복지사로 그렇게 일을 하면서 저는 한 번씩 그때가 떠올려져요.
'목사님 제가 아들 수의를 챙겨서 지금 공항으로 갑니다' 그 일을 누가 하셨냐고요.
얼마나 위기를 만난 많은 가정들이 우리 교회에서 치유가 되고 회복이 일어났냐고요.
얼마나 많은 예수님을 모르던 수많은 넌크리스천들이 분당 우리 교회를 와서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는 일이 일어났냐고요.
이 어설프고 그냥 어리버리한 제가 게다가 막 그냥 좌충우돌하는 저 같은 사람이 설교하는 그 설교에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덧붙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가 22년 동안 이 자리를 설교하는 자로 지킬 수 있었겠냐고요.
그 모든 것들이 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그 한마디에요.
주는 메시아에요 그분은 그리스도에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거죠.
오래 예수 믿은 분들이요 자기도 모르게 그 '살아계신'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냥 맹숭맹숭 예배를 드리고.
제가 항상 말씀드리잖아요.
여러분 교회 지각하는 거 그 굉장히 나쁜겁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저희는 문을 닫아 버리기를 원해요.
정성이 하나도 없는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냐구요.
그런데 여러분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만 예배 지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아무 기대감 없이 오는 거예요.
아니 후배 목사들이 저 이찬수 목사 좀 만나보고 싶다 시간도 잘 못내서 어쩌다가 한번씩 만나면요 저같은 몇 살 더 많은 목회 경험 조금 더 많은 선배 만나러 오는데도 막 잔뜩 써 가지고 막 온 기대감을 가지고 막 무슨 뿌리를 뽑을 것처럼 그렇게 저에게 달려드는게 그게 기대감을 갖고 오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그 로마 황제 같은 그런 인간 지도자입니까.
오늘 우리가 진짜 마음으로 회개하고 각성해야 되는 건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여러분 입술에서 '살아계신'이 지금 너무 약해져 가는 거죠.
살아계신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
그 죽은 청소년 아이를 멀쩡하게 살려주실 수 있는 하나님.
오늘도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아까 내 후배 목사 그렇잖아요, 인간적으로 계산해 보면 자기 생각에 뭐 지역에 조그만한 교회보다 그래도 대형 교회라고 하는 분당 우리교회 가는게 더 나을 것 같고 뭐 이런 것 따지고 저런 거 따져도 분명히 자기는 이제 그 코흘리게 같은 애들 상대하는 것보다 분당 우리 교회로 가는게 분명히 머릿속으로 더 많고 본인도 그런 얘기했어요 진짜 가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 목사님이 그것을 끝끝내 주저앉힐 수 있었던 것은, 이분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니까 그렇게 거부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자기 의도하고 생각하고 다른 결정을 하게 되는 거거든요.
지난주에 제가 사례로 들었던 우리 교회 청년부 자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26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가지고 미국에서 학위받고 놀랍게도 미국의 명문대학교에 교수로 섬기게 되었다 이걸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어요.
우리 목사 하여튼 미국의 명문대학 좋아해, 명문대학 갔더니 저런 거 막 예를 들어 이렇게 들으셨습니까.
오해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이 자매가 명문대 교수가 됐기 때문에 소개한게 아니고요.
이 자매의 유학을 가는 그 이전서부터 우리교회 청년부 대학부 시절에 그가 어떤 간증을 했고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 자매가 구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게 뭔지를 추구하면서 걸어간 길이었기에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 자매가 명문대 교수가 안 됐다고 초라해지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누가 인도하고 계세요.
여러분은 저분과 결혼하기로 결정할 때 누구의 인도로 결정했습니까?
자기가 한 거 같죠.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세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자꾸 되돌아보고 되돌아보면 막 전율이 느껴지는 거죠.
제가 그런 경험을 굉장히 많이 하는 사람이거든요.
이제 올해 여러분 분당 우리 교회 한번 영적으로 일어나기 원합니다.
이제 뭐 다시 우리 교회가 부흥을 꿈꾼다고 숫자적으로 부흥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큰일날 소리예요.
다시 이제 1만 성도 파송 운동하기 전에 2만 몇 천 명으로 우리 만듭시다 이건 설교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꿈꾸는 부흥은 우리 각자각자 심령의 부흥이에요.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실력으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제 그분을 어떻게 해야 돼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더 중요한 거 입술로 고백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 복음의 언어가 서툴다, 예수 믿는 우리가 복음의 언어가 서툴다, 그래서 이제 다락방이 오픈하면 다락방 안에서 복음의 언어가 풍성해지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보다 더 선행할게 있습니다.
복음의 언어가 더 풍성해지기를 원하면요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거예요.
지금 인간 황제를 숭배하고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웅장한 이방 신전이 즐비한 그곳에서 주님이 물으세요, 사람들은 나를 뭐라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고백이 먼저 일어나는 거죠.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고.
주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여러분 이 고백에서 능력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게 있는데요.
제가 먼저 살펴본 거는 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로 살펴보고 싶은 건 이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세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응수하시는가 하니까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런데 여러분 여기 나와 있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이 반석에 대한 해석이요 이게 카톨릭과 기독교를 가르는 분기점이 됐습니다.
여기 나오는 반석이 두 갈래로 해석이 되는데요 첫 번째 해석이 뭐냐.
여기 나오는 반석을 베드로라는 존재 혹은 베드로라는 인격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 카톨릭이 그 경우예요.
그래서 이 베드로라는 존재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베드로를 교회의 기초로 보고 가톨릭에서는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생각합니다.
왜? 베드로를 반석으로 해서 교회가 세워졌으니까.
그래서 이제 그 이후로 후계자들인 교황들이 교회의 기초가 돼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교황들의 말은 거의 이 성경의 권위에 같은 수준에 권위가 주어져 있어요.
왜? 베드로의 존재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반석을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반석을 다르게 해석하는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반석은 베드로라는 존재나 그의 인격이 아니고 여기에 나오는 반석은 베드로가 말한 신앙 고백이다.
이게 우리 개신교가 주장하는 해석입니다.
왜 무슨 근거로 이렇게 해석하느냐 하면은 먼저 원어로 보면은요 여기 나와 있는 반석은 여성 명사입니다 여성 명사.
베드로는 남성이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베드로가 이런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한 직후에 바로 미숙한 짓을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21절에서 내가 이제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부활할 것이다 이걸 예고 했더니 베드로가 하는 행동을 보면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 나온 항변하다 이건요 우리말 성경이 이렇게 좀 점잖게 번역을 해서 그런데요 원어로는 이게 정확하지 않아요.
베드로가 항변한게 아니고요 베드로가 격하게 예수님을 꾸짖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바다로 가셔서 그 파도를 그 풍랑을 잠잠케 하시면서 꾸짖으시잖아요, 그 풍랑을 꾸짖으신다 할 때 그 단어가 베드로가 예수님께 쓴 이 단어예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막 격하게 예수님을 몰아세우는 거예요.
왜? 자기 생각에 자기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면 안 되는데 자기 생각으로 꽉 차가지고 '예수님 그렇게 약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제발 아 도대체 예수님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 하시느냐고' 막 꾸짖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23절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이 꾸지람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렇게 거칠게 항변하니까 23절에서 예수님이 자 보십시요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 나오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게 헬라어로 보면은 스칸달론이라는 단어인데요 이거 우리말로 그대로 직역하면 걸림돌이라는 뜻이에요.
너는 내게 걸림돌이다 이 이야기예요.
이 스칸달론이에요.
왜 주님이 이 단어를 썼을까요.
조금 전에 반석, 이 돌이잖아요.
이 반석 이게 페트라에요, 거기서 베드로가 나왔고요.
조금 전에 그는 반석이였어요.
그는 주님 앞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바로 돌아서서 그의 행동이 걸림돌이 돼버렸어요.
만약에요 교회가 이 베드로라는 이런 불완전한 인간을 터전으로 세워졌다면 오늘 이 교회는 그야말로 페트라와 스칸달론, 반석과 걸림돌, 온탕과 냉탕, 교회가 막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 실제적으로 교회를 한번 보세요.
입으로만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막 떠들어 제끼고 제멋대로 교회를 그냥 갖고 노는 이런 이 병든 교회를 보면은 이게 뭐 딱 이게 온탕과 냉탕 그거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항상 교회를 생각할 때 교회의 주권자는 그리스도가 되셔야 돼요.
인간 그 누구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 18절에 보십시오.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그다음 보세요 '내가' 누가 그것을 명하시느냐고요.
'내가' 그리스도가 명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거예요.
교회의 주권자는 그리스도세요.
그리고 구성원인 인간들을 보니까 두 종류예요.
두 종류의 구성원이 있는데 '페트라'와 '스칸달론', 디딤돌과 걸림돌.
교회는 이렇게 구성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랑 관련해서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돼요.
교회가 뭐 이래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진짜 그거는 무식한 소리예요.
교회는 디딤돌과 걸림돌이 뒤섞여 있는게 교회예요.
그 교회는 이상한 사람이 보이면 참 저 사람 때문에 교회가 구성이 저렇게 되는구나 알게 되는 거죠.
더 중요한게 하나 있습니다.
교회는요 이 페트라와 스칸달론 디딤돌과 걸림돌로 돼 있는데요 중요한게 뭔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서 교회는 여기 계시는 분은 걸림돌이고 여기 계시는 분은 디딤돌이고 이런게 아니고요.
A집사는 디딤돌이고 B집사는 걸림돌이 아니고요 놀랍게도 본문의 원리를 보세요.
이 걸림돌과 디딤돌이 내 안에 다 있다는 거예요.
이게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 원리를 모르신다니까요.
여러분이 누구를 보시잖아요.
어 저 집사 저거 저 제정신이야 저거.
어 저게 지금 교회의 걸림돌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때 먼저 자기를 두려워해야돼요.
왜? 나는 지금 저런 양상을 띠지 않지만 언제 내가 저렇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대방을 보고 그걸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숙한 성도는 누구를 보고 비판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경고로 받아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거 베드로가 주님을 너무 뜨겁게 사랑했잖아요.
주님을 너무너무 인정을 해 드렸잖아요.
그래서 주님을 꾸짖는 실수를 했다니까요.
베드로가 주님을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과정에서 다른 제자들은 전부 다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 버렸는데 베드로는 그럴 수 없었어요.
왜? 주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멀찍이라도 주님을 따라갔어야 됐습니다.
그 눈물나는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닭 울기 전 세번 부인하는 가슴 아픈 자리로 몰고 갔다니까요.
이게 인간이에요.
잘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저는 항상 그 생각을 해요.
그래도 내가 만 28살 때 내가 목사가 돼야 되겠다고 신학교를 갔고 모든 짐을 다 정리해 갖고 혼자서 역이민을 해서 삼십 몇 년을 살았는데 그런데 주님을 사랑해서 결정한 목회자가 되기로 한 이 결정이 항상 주님 앞에 내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제게 있는 거죠.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지금 분당 우리 교회에 디딤돌 같습니까 걸림돌 같습니까.
입장 곤란하신 표정이네요.
어느쪽이든 괜찮아요.
왜? 다 있으니까요.
성도님들이 너무 좋은 성품을 가져가지고 아 우리 이찬수 목사는 우리 담임 목사는 분당 우리 교회에 디딤 돌이야 디딤 돌이야 디딤 돌이야 노래를 불러도 저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아요.
왜? 항상 그다음에 베드로가 주님을 꾸짖는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타인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서 긍휼,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 참 믿음 좋다고 하던 그 저 집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렇게 구성되는게 교회예요.
결론을 오늘 저는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최근에 저는 저의 삶을 돌아보다가 가슴이 뭉클 뭉클해지는 걸 경험합니다.
처음에 저는 이제 신학교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뭐 여러분 다 아시지만 저희 아버지는 장로교 고신교단의 목사님이셨거든요.
아들인 제가 당연히 저도 고신 신학 대학원으로 가야 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20대 중반인 어린 나이인데 굉장한 말씀을 주셨어요. 제게.
그래서 두 가지 지침을 제가 가졌거든요.
고신은 안 간다. 왜? 고신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성향 때문에.
나는 뼛속 깊이 고신에서 자라가지고 고신 정신을 갖고 있는데 내가 신학대학원을 고신으로 가면 교단에 매여 가지고 내 성향상 고신 고신 그러면서 살 것 같은 두려움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저에게 .
그래서 제가 두 가지 지침, 고신은 안 간다, 그리고 내가 자란 배경이 고신이니까 고신 교단하고 색깔이 가장 비슷한 데를 간다, 그랬더니 수소문을 했더니 그게 바로 그 총신 신학 대학원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눈물을 머금고 총신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저의 신학교 3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고독이였어요.
너무너무 외로웠습니다.
교단 배경 다르죠.
제가 고신 갔으면 저희 아버지 후배 교수님도 여럿 되시고요.
제가 같이 SFC 활동하던 친구 동기 여러명 그 학교를 다녔고요.
근데 남의 교단에 와가지고 정말 뼈저리게 뼈 속깊이 외롭더라고요.
난 왜 남의 교단에 와가지고 이 고생을 하느냐고.
그리고는 제가 이제 합동교단 목사가 됐는데요.
최근에 저의 인생을 돌아보다가 울컥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고신으로 인도하지 않고 총신으로 인도하셨지?
왜 그랬을 것 같으세요?
그래야 제 스승 되시는 옥한흠 목사님을 만날 수 있잖아요.
제가 총신을 안 가고 무슨 수로 제가 옥한흠 목사님을 만나냐고요.
결정적으로 내 인생의 영적인 아버지 되시는 옥한흠 목사님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저는 그런 깊은 생각으로 한 거 아니잖아요.
저는 그냥 단순한 생각으로 그렇게 결정했는데 그 배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가이드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분당 우리 교회의 개척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고등부 10년하고 있는 중에 목사님이 개척하라 그랬는데 처음에는 제가 이게 무슨 말인지 그랬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렇게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만 40살 되던 그때부터 어리버리하고 어리고 좌충우돌하고 했기 때문에 더 강한 하나님의 견인해 주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좌충우돌 이런 건 했지만 교회가 단 한 번도 저 때문에 흔들린 적이 없잖아요.
어떻게 가능했다고요?
이 교회는 이찬수는 사람의 인격을 바탕으로 세운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반석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평생 이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여러분 여러분을 의지하는 인생 살아 보셨잖아요.
그래서 우리 자꾸 이거 고백해야 돼요.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그리고 살아계신,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이 은혜가 풍성하게, 가이드 되신 하나님 은혜가 임하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분당 우리교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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